고씨 집안이 큰 재난을 당하던 그때, 서남 천산!세계에서 일곱 대 산맥 중 하나로 꼽히는 천산은 유라시아 대륙을 2,000km 이상 가로지른다.천산은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으로, 해발이 너무 높아 연중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어 ‘설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지금 이 순간, 천산의 한 매우 가파른 봉우리 위로 한 대의 개인 헬리콥터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거대한 로터가 수만 척의 눈과 얼음을 날렸다.헬리콥터 안에서 두툼한 패딩을 입은 몇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가장 가파른 봉우리인 ‘표설봉'으로 향하고 있었다.봉우리 정상은 수십 척의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거대한 빙산은 얼음과 눈의 세계에서 마치 거대한 괴물처럼 서 있는 듯했다.“형, 저기가 할아버지가 폐관 수련 중인 곳이야?”헬리콥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말하는 이는 남릉 고씨 집안의 둘째 아들, 고해식이었다.옆에 있는 사람은 고씨 집안의 장남, 고해진이었다.“맞아, 저기야.” 고해진은 이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산봉우리를 가리켰다.“그럼 빨리 가서 할아버지를 모셔야겠어!” 고해식은 헬리콥터 조종사에게 표설봉으로 가라고 지시했다.거대한 표설봉에는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조류와 짐승조차 얼어 죽을 만큼 험한 절정에는 눈과 얼음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헬리콥터가 천천히 착륙하자, 고씨 집안 형제는 세 명의 무도 고수와 함께 헬리콥터에서 내려왔다.휘몰아치는 찬바람 속에서, 고씨 집안의 대가는 보이지 않았다.“형, 할아버지는 어디 계셔?” 고해식이 묻자, 고해진도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저었다.그도 할아버지가 어디서 폐관 수련 중인지 알지 못했다.모두가 고씨 집안의 대가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거대한 진동 소리가 빙산 전체에서 울려 퍼졌다.얼음층이 중앙에서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다.고해식은 놀라 외쳤다. “형, 얼음층이 무너지고 있어! 빨리 피해!”“안 돼! 오늘 할아버지를 뵙지 못하면 난 떠날 수 없어!” 고해진
남릉.한때 번화했던 고씨 집안 대문이 지금은 매우 황량하게 보였다. 중앙에는 거대한 칼자국이 고씨 집안 저택의 절반을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그 자국의 길이는 십 장에 달했고, 대문에서부터 고씨 집안 내원까지 이어졌다. 이 칼자국은 당연히 윤구주의 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씨 집안 내원의 절반은 이미 무너지고 파손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것은 바로 윤구주와 고씨 집안의 대결이었다. 지금 이 순간, 고씨 집안 중앙 대전 바깥에 거대한 인물이 서 있었는데 무표정한 얼굴에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그는 바로 윤구주의 옆에서 항상 함께하는 시괴 거인, 동산이었다.고씨 집안과의 대결에서 윤구주는 동산을 데리고 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고씨 집안을 완전히 장악한 윤구주는 동산을 자신의 문지기로 삼았다. 동산이 지키는 내전 안에서 윤구주는 차를 마시며 손에 든 봉안보리구슬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 봉안 보리 구슬은 이전에 고시연의 몸에서 떼어낸 것이다. 옆에는 고시연이 하인처럼 서서 윤구주에게 차를 따르고 있었다. “네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온다고 했지?” 갑자기 윤구주가 물었다.고시연은 이 질문에 몸을 떨며 두려워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늘이나 내일쯤 돌아오실 겁니다.”이를 들은 윤구주는 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좋아, 빨리 돌아오기를 바래.” 그렇게 말하며 윤구주는 찻잔을 내려놓고 옆에 서 있는 고시연을 바라보았다.“고씨 집안을 파괴하고 너를 노예로 삼았는데, 내가 밉지 않아?” 윤구주가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던지자, 고시연은 당황하며 입을 떼었다. “저는...”“두려워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고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미워합니다. 하지만 또 미워하지 않아요.”윤구주는 고개를 돌려 왜냐고 물었다.고시연은 다시 한번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윤구주를 마주 보았다. “당신이 사람이라기보다는 악마 같았기 때문이에요. 만약 오늘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을 알았다면, 차라리 죽는 게
고시연은 봉안보리구슬을 내놓는다면 윤구주가 고씨 일가를 용서해 줄 거란 걸 알게 되자 곧바로 내원으로 가서 아빠와 고씨 일가 사람들과 의논하려고 했다.윤구주와 싸웠을 때 고준형은 죽을 뻔했었다.만약 고시연이 사정하지 않았더라면 고준형의 시체는 이미 차게 식었을 것이다.이때 내원에서는 고준형이 침대에 누워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고시연이 안으로 들어오자 고씨 일가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고시연에게로 집중되었다.“시연아, 괜찮아? 그 빌어먹을 자식... 널 괴롭히지는 않았어?”한 고씨 일가의 중년 남성이 고시연이 안으로 들어오자 곧바로 물었다.고시연이 외모가 아름답고 몸매가 좋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일이었다.윤구주가 대놓고 그녀를 잡아갔고 심지어 그녀를 종으로 부려 먹겠다고 했으니 고씨 일가는 당연히 그런 쪽으로 생각했다.그들은 윤구주가 틀림없이 고시연을 농락했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고시연은 이렇게 말했다.“삼촌,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진짜야? 그런 빌어먹을 놈이 왜 너한테 잘해주는 거래?”고씨 일가 남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정말이에요. 그는 제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주위에 있던 고씨 일가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그러나 고시연은 그 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고준형의 곁으로 다가갔다.“아빠, 어떠세요? 몸은 좀 나아졌어요?”침대에 누워있는 고준형은 안색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지만 그래도 조금 나아진 듯 보였다.“난 괜찮아...”“아빠랑 상의할 게 있는데 얘기해도 되나요?”고시연은 잠깐 고민한 뒤 말했다.“무슨 일인데? 얘기해 봐.”“전... 할아버지께서 고씨 일가의 봉안보리구슬로 만들어진 팔찌를 윤구주 씨에게 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저희 집안은 괜찮을 거예요.”고시연은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얘기했다.그 말에 고준형의 안색이 달라졌다. 심지어 옆에 있던 고씨 일가 사람들 안색도 달라졌다.“시연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 봉안보리구슬은 우리
“그러니까!”다들 그렇게 말하자 고준형이 말했다.“시연아, 무서운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네 할아버지 곧 돌아오실 거야. 네 할아버지가 돌아오시면 그 자식은 틀림없이 죽을 거야!”그 말에 고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그리고 얘기하는 걸 잊었네. 난 이미 서울의 화진 4대 고대 무술 가문 중 하나인 남궁 가문에 연락했어.”‘뭐라고?’“남궁 가문에 연락했다고요?”그 말에 고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맞아. 우리 고씨 일가와 남궁 일가는 곧 사돈이 될 사이잖아. 게다가 남궁혁이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당연히 이 일을 걔한테 얘기해야지! 남궁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면 그 자식이 아무리 강해도 틀림없이 죽을 거야!”그 말을 할 때 고준형은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남궁 가문!화진 4대 고대 무술 사문 중 하나인 남궁 일가는 문씨 일가, 두씨 일가, 반씨 일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래된 가문이었다.4대 가문에 대한 소문은 차고 넘쳤다.그러나 아무도 4대 가문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지 못했다.누군가는 화진 4대 가문에 적어도 수십 명의 신급 강자가 숨겨졌다고 하고, 누군가는 4대 가문이 모습을 드러낼 때는 드물지만 사실은 화진의 명맥을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하지만 진실은 대체 어떠할지 아무도 몰랐다.그리고 고시연과 남궁 일가의 결혼 약속도 사실은 고씨 일가가 남궁 일가의 덕을 보려고 한 선택이었다.자신의 약혼자가 있는 남궁 가문 얘기가 나오자 고시연은 쓴웃음을 지었다.“됐어, 시연아.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넌 그냥 이것만 기억해. 이 서남에서 우리 고씨 일가는 다른 사람을 괴롭혀도 다른 사람들은 절대 우리를 괴롭힐 수 없어! 두고 봐. 할아버지가 돌아오면, 그리고 서울의 남궁 일가 사람들이 오면 그 자식은 분명 죽을 거야!”고준형이 마지막에 말했다.고시연은 아버지와 대화를 마친 뒤 홀로 쓸쓸히 윤구주에게로 돌아갔다.현재 그녀는 윤구주의 종이었다.그래서 자유가 없었다.대전으로 들어가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윤구주
남궁 가문이라는 말에 윤구주는 눈을 빛냈다.그는 눈앞의 고시연을 덤덤히 바라보며 말했다.“계속 말해.”고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아름다운 눈으로 윤구주를 직시했다.“화진의 4대 고대 무술 세가라고 들어봤어요?”윤구주는 피식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고시연은 윤구주가 모른다고 생각해 말을 이어갔다.“4대 가문은 화진에서 가장 유명한 4대 가문이에요. 각각 문씨 일가, 반씨 일가, 남궁 일가, 두씨 일가죠. 4대 가문은 천 년의 역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저력이 대단해서 아주 독보적이에요. 현재 우리 화진의 새로운 왕 이황왕 알죠? 엄청난 무술 실력과 뛰어난 외모를 갖춘 이황왕이 바로 화진 4대 가문 중 하나인 문씨 일가예요. 그리고 제... 약혼자는 문씨 일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남궁 일가고요.”고시연은 4대 가문에 관한 일을 한꺼번에 다 얘기했다.윤구주는 그 말을 듣더니 고갤르 들어 아름다운 고시연을 보며 말했다.“그래. 남궁 일가에 시집가는 거군.”“맞아요. 이건 사실 정략혼과 다름없어요. 저도 할아버지 뜻을 이해해요. 우리 남궁 일가가 4대 가문 같은 천 년 가문이 되길 바라시는 거겠죠. 그래서 제가 남궁 가문에 시집가기를 바라는 걸 거예요.”고시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음? 그렇다면 사실은 남궁 일가에 시집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거야?”윤구주가 고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고시연은 쓴웃음을 지었다.“저에겐 선택권이 없어요. 하지만 고씨 일가를 위해서, 할아버지를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해요. 상대방이 절름발이라고 해도 말이죠.”고시연이 다시 말했다.절름발이라는 말에 윤구주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고시연이 절름발이에게 시집을 간다니. 남궁 가문에 절름발이가 있었나?’윤구주는 그렇게 생각했다.고시연은 자신의 약혼자에 대한 걸 더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시선을 들어 윤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의 실력이 아주 뛰어난 건 알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봉안보리구슬로 여자를 구하려 한다는 것
그가 다른 이들을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고시연은 윤구주의 정체를 전혀 알지 못했다.그녀가 말했다.“윤구주 씨, 너무 거만하네요.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당신 마음대로 될 것 같나요? 당신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을 것 같아요?”“그래. 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윤구주는 오만하게 말했다.“당... 당신...”고시연은 윤구주처럼 건방진 사람은 난생처음 보았다.혼자서 800년 된 고씨 일가를 점령하고, 심지어 지금은 남궁 가문도, 이 세상도 그의 안중에 없다고 한다.고시연은 너무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그녀는 윤구주가 죽지 않기를 바랐기에 그를 설득해 빨리 고씨 일가를 떠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윤구주는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고시연이 씩씩대고 있을 때 윤구주가 말했다.“당신처럼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여자가 내 걱정을 해줄 줄은 몰랐어. 설마 날 좋아하는 거야?”“뭐라고요? 당신을 좋아하냐고요?”고시연은 그 말을 듣자 얼굴을 붉혔다.윤구주가 말했다.“아니야?”“당... 당신... 헛소리하지 말아요! 제가 왜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은 우리 고씨 일가의 원수예요. 전... 전... 당신을 미워하기도 바쁜데 왜 당신을 좋아하겠어요?”고시연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그렇다면 왜 내 걱정을 하면서 나더러 고씨 일가를 떠나라는 거야?”윤구주가 물었다.“그건... 그건...”고시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렇다.그녀가 정말로 윤구주를 미워했다면 이 모든 것을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그저 서울에서 남궁 가문이나 할아버지가 돌아와서 윤구주를 죽이기를 기다리면 됐다.고시연 본인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지금 그녀는 심장이 두근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얼굴이 빨개진 고시연을 본 윤구주가 갑자기 말했다.“됐어, 장난은 그만 칠게. 피곤하니까 와서 내 어깨 좀 주물러 봐!”고시연은 어이가 없었다.또 어깨를 주무르라니, 정말 그녀를 종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윤구주가 눈을 감으라고 하자 고시연은 긴장됐다.윤구주는 뭘 하려는 걸까?설마 그녀에게... 그런 짓을 하려는 걸까?그녀는 지금까지 순결을 지켰는데 어떻게 감히 그런단 말인가?고시연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심지어 몸이 살짝 뜨거워지기 시작했다.비록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의 기다란 눈매는 윤구주의 명령에 따라 감겼다.고시연은 호흡이 빨라졌다.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고시연은 두려웠다. 혹시라도 윤구주가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면 어찌한단 말인가?그렇게 고시연이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윤구주가 갑자기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미간을 톡 쳤다.빛 한 줄기가 고시연의 미간을 뚫고 들어갔고, 곧 고시연의 몸은 감전된 것처럼 심하게 떨렸다.이루 형언할 수 없는 무한한 현기가 그녀의 기경팔맥 속으로 들어갔고 곧 그녀의 미간에 언뜻언뜻 보였던 화련금안 낙인이 서서히 흐릿해지기 시작했다.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녀의 미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됐어. 이제 눈을 떠도 돼.”윤구주는 일을 마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시연은 흠칫하며 눈을 떴다.그녀는 윤구주가 자신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그러나 윤구주는 그녀의 미간을 살짝 건드렸을 뿐이다.그리고 몸에서 느껴지던 작열감이 갑자기 사라지기까지 했다.고시연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윤구주가 말했다.“난 이미 너의 화련금안술을 풀어줬어. 넌 이제 자유야.”‘뭐라고?’“제게 걸었던 화련금안술을 풀었다고요?”고시연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래.”고시연은 화련금안 낙인이 있었던 미간을 만지작거렸다. 몸속의 작열감도 사라진 걸 발견한 고시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왜... 왜 제게 자유를 돌려준 거예요? 절 통제해서 우리 고씨 일가를 위협하여 봉안보리구슬을 내놓게 할 생각 아니었나요?”윤구주는 피식 웃었다.“난 내가 원하는 걸 남을 위협해서 얻어내지 않아. 넌 인제 그만 가봐도 돼.”윤구주의 말을 들은
“지휘사님, 부성국 놈들이 실토했습니다. 부성국의 스파이들이 맞다고 합니다.”한 암부 구성원이 부성국 사람들을 추궁한 뒤 뚱뚱한 남자에게 보고했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암부의 둘째 정태웅이었다.그의 통통한 손에는 이쑤시개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는 이를 쑤시면서 말했다.“알아냈으면 됐어.”“그, 그러면 저놈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암부 구성원이 계속해 물었다.“제기랄, 당연히 저 자식들 전부 죽여야지! 이렇게 당연한 일을 나한테 묻는 거야?”정태웅은 욕하면서 말했다.정태웅의 부하들은 정태웅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고 대답한 뒤 스파이들을 처리하러 갔다.정태웅은 부성국의 스파이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몸을 돌린 뒤 밀실 밖으로 향했다.밖으로 나온 정태웅은 크게 기지개를 켠 뒤 자신의 사무실로 차를 마시러 갔다.이때 암부 구성원이 갑자기 건물 안에서 달려 나왔다.“정 지휘사님, 조금 전에 누군가 정태웅 지휘사님을 찾는다고 사무실로 연락이 왔습니다.”그 말을 들은 정태웅은 바로 말했다.“날 찾는다고? 내가 무슨 시간이 있다고.”“알겠습니다. 그러면 전화 끊겠습니다.”부하는 곧바로 말을 마친 뒤 전화를 끊으러 가려고 했다.“잠깐...”정태웅이 그를 갑자기 불러 세웠다.“지휘사님, 왜 그러십니까?”부하가 멈춰 섰다.“그 사람 왜 날 찾는대?”부하가 대답했다.“이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휘사님을 찾는다고만 하셨어요. 그리고 자기 성이 윤씨라고...”‘뭐라고?’윤씨라는 말에 정태웅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세상에, 설마 저하인가?”말을 마친 뒤 그는 곧바로 부하의 팔을 잡았다.“전화는? 끊었어?”“아뇨... 사무실에 있어요.”부하가 말을 끝맺자마자 정태웅은 쏜살같이 자신의 사무실로 달려갔다.널따란 사무실 안, 정태웅은 안으로 들어간 뒤 아직 끊기지 않은 전화를 보고 빠르게 달려가서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저하! 저하 맞으세요?”“바보 같긴, 나 아니면 누구겠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