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서준은 위화 그룹 건물 입구에 서서 손목시계를 한번 힐끗 봤다.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 상태였다.막 전화를 걸어 재촉하려던 찰나 택시 한 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남설아가 차에서 내리는 것이었다.배서준 얼굴에 스친 짜증 섞인 표정은 남설아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그녀는 시계만 한번 확인했을 뿐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늦지 않았고 정확히 제시간이었다.“대표님, 이제 들어가시죠.”남설아는 다가오며 단호하게 공적인 말투로 말했다.배서준은 고개만 끄덕이더니 남설아를 지나쳐 곧장 그녀 뒤편에 멈춰 선 차량으로 다가갔다. 차 문을 열자 서유라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남설아는 뱃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역겨움을 느꼈다. 그녀는 그 둘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어차피 오늘은 배서준과 다정한 부부 흉내 따윈 낼 필요도 없었고 중요한 건 기술 협업이었다.남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표정이 잠시 굳어졌지만 배서준은 곧 서유라의 손을 다정히 잡았다.“몸이 이런데 굳이 따라올 필요까진 없었잖아.”“이 프로젝트가 배건 그룹한테도, 너한테도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어. 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어.”서유라는 순한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말에 배서준의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서유라의 코끝을 살며시 집으며 웃었다.“넌 늘 이렇게 속 깊고 착하지. 자, 우리도 들어가자.”조성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남설아를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말을 꺼냈다.“혹시... 혹시 과학기술대 다니던 남설아 씨 아니에요? 남천재?”“에이, 전 그냥 남설아예요, 무슨 천재까지야.”남설아는 멋쩍게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대학 시절 별명이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니 예상도 못 한 일이었다.바로 다음 순간 조성우는 마치 팬을 만난 듯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안녕하세요, 전 설아 씨랑 같은 기수였던 학생이에요. 조성우라고 합니다. 조 교수님이 우리 엄마시거든요.”‘뭐? 이 잘생긴 남자
남설아는 거의 반사적으로 배서준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았고 오히려 서유라의 얼굴빛만 살짝 달라져 있었다.“남 팀장, 무슨 일 있어?”서유라는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순진한 얼굴로 남설아를 바라봤다.역시, 맞았다.‘아침에 들어온 그 객실 청소 아주머니, 아마 이쪽에서 심어놓은 사람이었겠지.’남설아는 조용히 손을 거두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제 USB가 사라졌네요.”“남설아!”참다못한 배서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마에 주름이 깊이 패이고 눈빛은 매섭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금 이게 얼마나 초보적인 실수인지 알기나 해? 너 같은 사람이 기술직이라니 말도 안 돼!”배서준이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걸 보니 이 프로젝트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남설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컴퓨터 쪽으로 다가가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곧이어 그녀는 자신의 이메일을 열었다.“요즘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저는 기술자다 보니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도 믿어요.”“모든 자료는 이미 클라우드에 백업해둔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말이 끝나자 화면에 모든 자료가 대형 스크린에 공유되었다.남설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유라를 바라보다가 이내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이번 프로젝트는 20대 여성의 실질적인 니즈를 기반으로 기획됐어요. 그래서 이 앱의 핵심 기능은...”조성우는 비록 젊지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사람이었다.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고 서유라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알 수 없는 경멸이 스쳤다.이내 그는 남설아의 설명에 깊이 빠져들었다.한참이 지나 설명이 끝나자 조성우는 눈썹을 바짝 찌푸렸다.“지금 이 아이디어대로 진행하면 초기 작업량이 엄청날 텐데요? 기술적으로도 전례 없이 까다로울 거고요. 일부러 이렇게 힘들게 가는 이유가 뭐예요?”“지금 이 바닥이 얼마나 치열한데요. 노력 안 하면 굶어 죽는
배서준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조성우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말했다.“죄송합니다. 상황이 급해서 내부적으로 충분한 논의가 없었습니다.”“배 대표님은 자신의 핵심 기술 인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으시는 건가요?”조성우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배서준을 바라봤다. 이 세 사람 사이엔 뭔가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배서준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저희 팀과는 충분히 호흡이 잘 맞습니다.”사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팀과는 정말 잘 맞았지만 단지 남설아와는 팀워크가 없을 뿐이었다.남설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쓴웃음을 지었다.“그렇다면 배 대표님은 먼저 돌아가셔서 내부적으로 비용을 정리하신 후, 정확한 견적서를 제출해 주세요.”“프로젝트와 이 소프트웨어는 매우 만족스럽습니다.”조성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의 반응은 진심에서 우러난 만족이었다.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배서준은 어리둥절했다. 이렇게 빨리 계약이 성사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옆에 있던 서유라는 이게 기뻐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도 혼란스러웠다.배서준은 남설아 쪽으로 다가가 물었다.“같이 나갈래?”“아직 기술적인 디테일 중에 상의할 부분이 있어서요. 걱정 마세요. 논의 끝나면 안전하게 모셔다드릴게요.”조성우는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 그 속뜻은 분명했다. 나가달라, 즉 자리를 정리하라는 뜻이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서유라는 조성우 앞으로 다가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조 대표님, 위화 그룹이 대단한 건 알겠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희는 충분한 성의를 가지고 왔습니다. 지금 이건 무슨 태도죠?”“제 말뜻이 이해하기 부족했나요?”조성우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서유라를 바라봤다.“왜요? 배 대표님도, 사모님도 가만히 있는데 한낱 비서 주제에 나서서 뭐 어쩌겠다고요? 그쪽이 말 꺼낼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요?”이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심지어 배서준의 얼굴
조성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지만 남설아를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조금 전까지의 존경심은 사라지고 대신 어딘가 의아함이 묻어났다.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여자가 왜 저런 남자에게 묶여 있는 건지 말이다.정말 이해 불가였다.게다가 오랜 시간 남설아만 바라본 한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더더욱 어이없고 안타깝다는 생각뿐이었다. 도무지 그럴 만한 가치가 없었다.건물 밖으로 나오자 남설아는 그대로 배서준의 손을 뿌리치고 날을 세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진짜 대체 머리가 나쁜 거예요, 아님 어디가 고장 난 거예요? 첫인상 완전히 말아먹었어요.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워요?”“그 사람이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배서준은 고개를 떨군 채 스스로도 후회되는지 입술을 깨물었다.처음으로 자신에게 뭔가 진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남설아는 그대로 눈을 굴렸다.“그렇게 큰 기업이 사전 조사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랑 당신 소꿉친구가 아무 흔적도 안 남겼다고 믿었냐고요. 서준 씨, 이 프로젝트는 내 전부예요. 그러니까 제발 방해 좀 하지 마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섰다.지금 이 사람을 1초라도 더 보면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그런 남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서준은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한편, 차 안에 앉아 있던 서유라는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전부 지켜봤다.배서준의 표정을 보며 얼굴빛이 조금 바뀌었지만 이내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서준아, 미안해. 혹시 나 때문에 일이 더 복잡해진 건 아닐까?”“아냐. 타.”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며 차로 향했다.오늘 좀 실수한 건 맞지만 배서준은 결코 책임을 여자에게 떠넘기는 성격이 아니었다.게다가 서유라는 그가 아끼는 사람이었다.그리고 무엇보다 상업적인 감각이 뛰어난 그는 조성우가 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사업이라는 건 결국 이익이 핵심이다. 이익만 충분하다면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것
남설아는 일부러 조성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 말을 꺼냈다.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조성우의 얼굴에서는 긴장이나 놀람 같은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걸 보니 둘이 미리 짠 게 틀림없었다.‘하나같이 다 못돼먹은 인간들이란 말이지.’하지만 그런 사실을 깨닫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강연찬이 혼자서는 버겁지 않을까 걱정됐는데 이렇게 강력한 동료가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안심이 된 것이다.조성우는 곧장 남설아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게 다름 아닌 식당이라는 사실에 남설아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조성우를 바라봤다.“여긴 왜 온 거예요?”“그 믿을 수 없는 남편이 밥도 안 챙겨줄 것 같아서 내가 사주려는 거예요.”조성우는 전혀 머뭇거림 없이 내뱉었다. 둘은 원래부터 대학 동문이었기 때문에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었다.가게 안으로 들어선 뒤, 남설아도 마찬가지로 아무 거리낌 없이 메뉴판을 펼치고는 가장 비싼 요리를 골랐다.그리고 메뉴판을 내려놓은 뒤, 살짝 찡그린 얼굴로 조성우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불러낸 거 진짜 그냥 밥 사주려고 그런 거예요? 다른 얘기 있는 거 아니고요?”“다른 건 없고 그냥 어떤 사람 덕분에 밥 한 끼 사는 거예요.”조성우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어떤 사람’이 바로 다가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남설아 옆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웃으며 말했다.“원래 저래, 입이 좀 싸거든. 너무 신경 쓰지 마. 진짜 화내면 안 돼.”강연찬이 갑자기 곁에 나타나자 남설아는 잠깐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강연찬의 뺨을 꼬집어봤고 진짜라는 감각이 전해지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물었다.“회사에서 회의 중 아니었어? 어떻게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거야?”“혹시라도 너 혼자서 곤란한 일 겪을까 봐 힘 좀 실어주려고
남설아는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하여 입에 머금고 있던 와인을 뿜을 뻔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조성우를 바라봤다.“너무 대놓고 말하는 거 아니에요?”“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돌려 말해요? 설아 씨도 배건 그룹이 쫄딱 망하길 바라고 있잖아요. 우린 그 뒤에 나눠 가질 생각이고요.”조성우는 눈빛에 흥분이 서린 채 웃으면서 말했다.그 모습에 남설아는 거의 반사적으로 강연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빛엔 의문이 가득했다.그걸 본 강연찬은 괜히 민망해져서 조성우를 한 대 딱 때리며 투덜거렸다.“말 좀 조심해서 해요, 네?”“내 말이 틀렸어요?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건 초대형 케이크라고요.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잖아요?”사무실에 있을 때만 해도 조성우가 이렇게 직설적인 성격인 줄은 정말 몰랐다.남설아는 피식 웃고는 이마를 살짝 두드리듯 하며 말했다.“맞는 말이긴 하네요. 배건 그룹은 지금 확실히 군침 도는 먹잇감이긴 해요. 근데 아시죠? 사업이라는 건 전쟁이에요. 우리가 탐내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노리고 있다는 뜻이죠?”이 말을 듣고 조성우는 상황을 곧장 이해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보니까 우리가 설아 씨를 너무 얕잡아봤던 것 같은데요?”“그쵸. 그렇게 쉽게 다 들키면 재미없잖아요.”이렇게 말하며 남설아는 가방에서 주식 양도 계약서를 꺼냈다.“난 지금 배건 그룹 지분 51% 가지고 있어요. 아직은 이 회사 좀 값어치가 있죠. 내가 두 사람한테 각각 15%씩 넘길게요. 대신 현금으로 주세요. 어때요?”강연찬은 그 주식 계약서를 보는 순간 멍해지더니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갑자기 왜 현금화하려는 거야? 무슨 일 있어?”“아무 일도 없어. 그냥 돈이 필요해서.”“지금은 배건 그룹이 값어치가 있으니까 이 주식도 돈이 되지만 나중에 회사가 무너지면 이 종이 쪼가리들도 다 쓸모없어지는 거잖아. 그렇게 되면 그때 가
어두운 곳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는 이 모든 장면을 빠짐없이 찍어냈고 곧 서유라는 해당 영상을 전달받았다. 영상은 매우 선명했고 편집이 가해진 티가 분명했다.서유라는 그 영상을 바로 배서준에게 가져갔다.“서준아, 봐. 설아 씨가 배건 그룹 지분을 팔아넘기려고 하고 있어!”영상은 교묘하게 앞뒤 내용이 잘려 있었다.서유라는 알고 있었다. 앞부분 내용 따윈 배서준이 신경 쓰지 않을 거란 걸.하지만 ‘배건 그룹’이라는 단어만큼은 그의 심장을 건드릴 것이 분명했다.배서준은 영상을 본 순간 눈빛이 확 바뀌었고 두 손을 꼭 쥔 채 핏대가 설 정도로 분노를 억누르다 못해 결국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힘껏 던져버렸다. 깨진 조각이 바닥으로 튀었다.그는 이를 악물고 돌아서며 그 자리를 떠났다.서유라는 그런 배서준의 뒷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산산조각 난 핸드폰을 흘끗 보고는 냉소를 흘렸다.애정 같은 건 그저 흐릿한 감정에 불과하다. 이 남자에게 진짜 치명적인 건 ‘이익’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이번엔 남설아가 제대로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었다.남설아는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아침에 자기 방을 청소했던 객실 청소 아주머니를 신고했고 바로 증거 영상까지 함께 제출했다. 그녀가 호텔에서 해고되자마자 남설아는 그 여자가 훔쳐 갔던 USB를 되찾았다.우는 아주머니를 마주하고서도 남설아의 눈빛엔 단 1도 흔들림이 없었다.그녀는 감정에 휘둘리는 성인군자 따위가 아니었다. 누구든 어떤 행동을 했다면 그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USB를 손에 든 채 방으로 들어서자 문을 열자마자 무거운 기류가 밀려왔다. 소파에 앉아 있는 배서준을 보자 남설아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들어왔어요?”“남설아, 이 나쁜년!”배서준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듯이 다가와 남설아의 목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현관문에 내리찍듯 밀쳤다.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말 그대로 이를 갈고 있었다.숨이 턱 막히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설아야’라는 말 한마디에 남설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닭살이 다 돋을 정도였다. 믿기 힘든 눈빛으로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어떻게 저토록 혐오스러운 말이 저 입에서 나올 수가 있지?’남설아는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싸늘하게 말했다.“내 딸은 죽었어요. 그런데도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그냥 치기 어린 짓이라고 생각해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죠? 배서준 씨, 그렇게 돈이 많으면 거울부터 좀 사서 보세요.”“알아. 그 아이 일은 네가 마음속에 못 놓는 매듭이란 것도. 근데 아이를 좋아한다면 우리 다시 낳으면 되잖아.”배서준은 애써 침착한 척 말했지만 지금은 이미 남설아의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에 어떻게든 곁에 붙잡아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당연하다는 듯 굴고 있는 배서준을 보며 남설아는 그저 우스워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사실 그녀는 배서준을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하는 건 오히려 과거의 자신이었다.예전에는 배서준이 마치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결국 그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녀의 ‘사랑’이 그에게 후광을 씌운 것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사랑이 사라졌고 후광도 함께 꺼졌다. 남은 건 그저 허세만 가득한 한 명의 인간이었다.“서준 씨, 지금 당장 나랑 이혼해요. 줘야 할 거 주고 우리 깔끔하게 끝내요.”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난 남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배서준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부어오른 눈 때문에 그녀의 얼굴조차 흐릿하게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배서준은 그녀의 눈빛 속에 담긴 뿌리 깊은 혐오감만큼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이혼 못 해.”배서준은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스스로도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이 여자를 어떻게든 떼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고 오히려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요즘의 남설아는 정말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으니까.배씨 가문의 아내로 이런 여자가 있다는 건 어디 내놔
그는 줄곧 자신과 남설아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 생각해왔지만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강연찬이 회복되자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특히 남설아는 그동안 불안했던 마음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한편, 멀리 리조트에 머무르고 있던 서유라는 무척 불안하고 초조했다.서도현은 자신이 보낸 사람들이 전부 체포되어 한 명도 빠짐없이 구속되었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했다. 남설아가 다치지 않은 것도 모자라 다친 사람마저 회복되었으니 그동안 벌인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되고 만 것이다.“뭐라고? 강연찬이 회복했다고?”서유라의 목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웠다.“그 사람들이 엄청 대단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여자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남설아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잖아. 그런데도 그 여자 하나 못 건드려서 이 지경이 된 거야? 돈을 그렇게 많이 받고는 뭐 하겠다는 거야? 적은 돈이 아니었잖아.”서도현은 배서준의 감시를 피해 몰래 리조트 안으로 숨어들어와 서유라와 만났다.그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누나, 나도 최선을 다했어. 그놈들이 이런 일 하나도 제대로 못 할 만큼 이렇게 쓸모없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래도 다행인 건 그놈들이 입이 무지하게 무겁다는 거야. 지금껏 한마디도 안 했어. 나도 계속 지켜볼 거니까 우리한테 불똥이 튀게 두진 않을 거야.”“쓸모없는 놈들! 전부 다 쓸모없어!”서유라는 온몸을 떨며 분노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어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이제 어떡해? 강연찬이 회복됐다고? 혹시 이 일을 남설아한테 말하면 어쩌려고? 남설아가 알게 되면, 나는...”“누나, 진정해봐.”서도현은 급히 달래며 말했다.“강연찬이 회복됐다고 해도 우리가 한 짓이라는 증거는 없어. 게다가 그 킬러들은 내가 따로 구한 사람들이라서 우리랑 직접적인 연결 고리는 없어.”“그래도...”서유라는 여전히 불안했다.“남설아 그 여자는 워낙 교묘해서 무슨 단서라도 찾아내게 되면 우리는 순식간에
“알겠어.” 송우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희가 그렇게 말한다면 따를게.”“우민아, 고마워.” 남설아가 말했다.“네가 얼마나 복수를 원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우리는 냉정해야 해. 감정에 휘둘리면 안 돼.”“응, 알아.” 송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너희 계획에 최선을 다해 도울게.”“좋아.”남설아가 미소 지었다.“우린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야.”세 사람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더 논의한 후, 각자 맡은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연회가 끝난 후, 남설아는 사무실로 돌아와 밀린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때 강연찬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설아야, 우유 좀 마시고 일찍 쉬어.”강연찬이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요즘 너무 무리하고 있어. 몸을 챙겨야지.”“응, 고마워, 오빠.”남설아가 우유를 받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오빠도 일찍 쉬어.”“난 안 피곤해.” 강연찬이 말했다.“너 일 마칠 때까지 같이 있어 줄게.”“괜찮아, 오빠. 몸도 아직 완벽히 회복된 건 아니잖아. 푹 쉬는 게 좋아.”남설아가 말했다.“이 서류들은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어.”“그래도 옆에 있어 줄게.”강연찬이 말했다.“너도 너무 늦지 않게 마무리하고 쉬어.”“응, 알겠어.”강연찬이 나간 뒤에도 남설아는 계속해서 일을 처리했다.그녀는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더 강해져야만 배서준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나은이를 위해 복수할 수 있었다.깊은 밤이 되어서야 남설아는 마침내 모든 서류를 정리했다.그녀는 기지개를 켜면서 창가로 가서 불빛이 번쩍이는 도시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나은아, 보고 있어?”남설아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엄마가 반드시 복수할 거야. 기다려줘.”다음 날, 남설아는 이른 아침부터 회사에 출근했다.그녀는 회사의 핵심 팀을 소집해 다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여러분, 우리 그동안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남설아가 말했다.“배건 그룹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지만
“선배...”남설아는 강연찬을 바라보며 가슴 깊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송우민은 두 사람 사이의 다정한 분위기에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기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연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던 중, 남설아가 잔을 들어 모두와 함께 축하의 건배를 하려는 찰나 강연찬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았다.“설아야, 요즘 너무 무리했잖아. 술은 좀 줄여.”강연찬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남설아는 그의 따뜻한 눈빛을 마주하며 마음이 포근해졌다.하여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대신 주스를 들었다.“알겠어. 선배 말 들을게.”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광경을 본 송우민은 잔을 들고 조용히 다가왔다.“남설아, 내가 한 잔 올릴게.”송우민은 잔을 들며 말했다.“이번 성공, 정말 축하해.”남설아는 주스를 들고 잔을 맞댔다.“고마워, 우민아.”남설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네 도움이 없었으면 이렇게 빠르게 결과를 얻진 못했을 거야.”“우린 친구잖아. 서로 도와야지.”송우민은 웃으며 말했다.“근데 정말 대단하다. 네가 이렇게 멋진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우민아, 너무 띄우지 마.”남설아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웃었다.“운이 좋았을 뿐이야.”“그건 아니지.”송우민은 단호히 말했다.“너의 실력, 결단력, 배짱, 모두 내가 본 사람들 중 최고야.”“그 얘기는 그만하고...”남설아는 말을 돌리며 미소 지었다.“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해보자.”“좋아.”송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남설아, 내 생각엔 지금이 기회야. 우리가 배건 그룹을 한 방에 무너뜨리고 배서준한테 확실하게 복수해야 해!”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집념이 가득했다.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배서준을 단죄하고 싶은 듯했다.그러나 강연찬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왜?”송우민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배건 그룹은 거의 끝장난 상태잖아. 이
“서준아, 나 너무 힘들어...”서유라는 침대에 누운 채 핏기없는 얼굴로 힘없이 중얼거렸다.“유라야, 어디 아파?”깜짝 놀란 배서준은 침대로 다가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온몸이 다 불편하고 아파...”서유라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의사 부를게!”배서준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나가려 했다.“안 돼...”하지만 서유라가 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의사 부르지 마. 나 병원 가기 싫어...”“근데 지금 상태가... 그냥 둘 수 없잖아.”배서준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정말 괜찮아. 그냥... 네가 곁에 있어 주면 돼...”서유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어, 옆에 있을게.”그렇게 배서준은 서유라의 손을 살며시 잡고 말했다.“아무 데도 안 갈게. 여기서 널 지킬 거야.”“응...”서유라는 그의 품에 기대며 살짝 웃었고 그 입가엔 희미하지만 분명한 만족감이 스쳐 지나갔다.배서준은 서유라의 달콤한 말과 애정 어린 행동에 완전히 빠져 있었고 그녀의 진짜 속내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었다.한편, 남설아의 세심한 간호 아래 강연찬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그는 점차 회사 일에도 다시 참여하기 시작했고 남설아와 함께 나란히 전선에 서며 경영에 힘을 보탰다.그 사이 남설아는 잇따라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따내며 사업적으로 완전한 전성기를 맞이했다.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성과가 이어졌고 배건 그룹은 연일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이러한 성과를 기념하고 고생한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남설아는 대규모의 축하 연회를 열기로 했다.연회는 고급 호텔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고 현장은 화려하게 꾸며졌으며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직원들은 모두 정장을 차려입고 참석했고 모두의 얼굴엔 성취와 기쁨이 가득했다.그들은 서로 잔을 부딪치며 축하했고 성공의 기쁨을 나누었다.남설아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한가운데에 서서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기준은 조용히 배서준의 현재 상황과 결정을 남설아에게 전했다.“대표님, 이제 배 대표님은 완전히 사방에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천기준의 말투에는 깊은 체념과 실망이 묻어났다.“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그 여자 곁에 붙어 있으려 하네요.”“후, 그야말로 자업자득이죠.”남설아는 비웃듯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자기가 아직도 예전처럼 뭐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착각하나 본데 지금의 배서준은 그냥 여자한테 정신 팔린 멍청이일 뿐이에요.”“대표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천기준이 물었다.“지금처럼 그 사람이 회사에 없는 틈이야말로 우리가 움직일 절호의 기회입니다.”“당연히 병들었을 때는 끝장내는 게 기본이죠.”남설아의 눈빛엔 싸늘한 결의가 번뜩였다.“이젠 그 인간도 잃는 게 뭔지 뼈저리게 느껴봐야 해요.”“역시 대표님답습니다.”천기준이 말했다.“지시하신 대로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좋아요.”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듯 말했다.“기억해요. 이번엔 반드시 속전속결로, 숨 돌릴 틈도 주지 마요.”“네, 대표님!”남설아와 송우민이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배건 그룹의 위기는 한층 더 깊어졌다.남설아의 회사는 굶주린 늑대처럼 배건 그룹의 시장을 빠르게 잠식했고 원래 배건 그룹 쪽에서 따냈던 주요 프로젝트들마저 차지해버렸다.그 결과, 배건 그룹의 주가는 폭락했고 시가총액은 대폭 줄어들었으며 고객사들은 잇따라 이탈했고 사내 분위기는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 찼다.주주들의 손실은 상상을 초월했고 배서준에 대한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배서준, 진짜 쓸모없네!”“회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어떻게 대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지?”“당장 끌어내려야 해!”“그래! 더는 회사 말아먹게 놔두면 안 돼!”분노한 주주들의 외침은 마치 화산처럼 폭발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천기준은 그 상황을 남설아에게 보고했고 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내렸다.“계속 감시해요. 그 둘이 무슨 짓을
천기준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다.소파에 앉은 배서준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민에 잠겨 있었고 서유라는 그의 곁에 꼭 붙어 앉아 힘없이 기대어 있었다.“대표님, 이대로는 안 됩니다!”천기준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지금 회사 상황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더 늦기 전에 돌아가셔서 직접 수습하셔야 합니다. 이러다 진짜 배건 그룹이 무너집니다!”“근데 유라가 지금 몸이 안 좋아. 어떻게 이럴 때 내가 유라를 혼자 두고 가겠어.”배서준의 말투에는 깊은 피로와 한숨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대표님...”천기준이 설득을 이어가려던 순간, 서유라가 조용히 말을 가로막았다.“서준아, 천 비서님 탓하지 마.”서유라의 목소리는 마치 곧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나약했다.“회사 일이 중요한 건 나도 알아. 그냥 돌아가. 난 괜찮아.”“유라야, 무슨 소리야.”배서준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제일 중요한 건 네 건강이야. 내가 어떻게 널 놔두고 가.”“그래도...”서유라의 눈가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내가 네 일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미안해.”“바보야, 너 하나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배서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회사 일은 내가 방법을 찾을게.”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천기준은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정말 기가 막히네. 내가 본 배 대표님 중에 제일 한심한 버전이야. 예전엔 그렇게 단호하고 냉정했던 사람이 이젠 여자가 곁에만 있으면 정신줄을 놓고 있잖아.’“대표님, 진짜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천기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주주들은 이미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어요. 계속 이렇게 계시면 정말로 해임당합니다!”“알아, 나도 알아.”배서준은 초조한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그렇지만 유라가...”“서준아, 돌아가.”서유라가 조용히 말했다.“나 혼자서도 괜찮아.”“유라야, 너 지금...”배서준은 놀란 눈으로 서유라를 바라봤다.“정말
“네.”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명심해요. 이 일은 최대한 시끄럽게 만들어요. 배서준이 모두의 표적이 되도록 말이에요.”“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천기준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남설아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싸늘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배서준, 당신이 의리를 저버렸으니 나도 더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야.’곧이어 배서준이 리조트에서 서유라와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소문이 각종 언론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여론은 순식간에 들끓었고 배서준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무능하다’, ‘책임감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배서준, 진짜 너무하네!”“회사는 지금 무너지고 있는데 밖에서 여자나 만나고 앉았어?”“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표 자리에 앉혔는지 이해가 안 가.”“저 사람한테 회사를 맡긴 게 큰 실수였지.”“이참에 그냥 물러나게 해야 돼!”결국 회사는 긴급 주주총회를 소집했다.얼마 전, 배서준이 자신의 자금을 담보로 위기를 넘기겠다고 한 뒤 감쪽같이 사라졌고,오히려 남설아가 한발 물러나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간신히 버텨온 상황이었다.하지만 정작 의사결정을 할 실권자는 자리에 없고 남은 이사들은 완전한 권한도 없는 상태라 회사 운영은 갈수록 마비되어가고 있었다.거기에 이번 스캔들까지 터지자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이게 지금 어느 땐데 여자를 챙겨?! 본인 위치도 잊었나?!”“천 비서님, 배 대표님 떠나기 전에 천 비서님한텐 아무 말도 안 하고 갔어요?”천기준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사실 함께 일한 지 오래됐지만 배서준이 모든 걸 공유하진 않았다.“지금 당장 리조트로 가서 배 대표님 데려와요!”한 이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든 끌고 와야 해요. 회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네, 이사님.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천기준은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정신적으로 남 대표님한테 매일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두 사람을 만나러 내가 가야 한다고? 이게 대체 무
“서준아, 제발 이번만은 내 말 들어줘, 응? 그냥 나를 위해서 우리 미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잠깐이라도 푹 쉬면 안 돼?”서유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배서준을 올려다봤다.그 애처로운 눈빛에 배서준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렸다.“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결국 배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서유라는 곧장 환하게 웃으며 배서준을 꼭 껴안았다.“역시 나를 제일 아껴주는 사람은 서준이 너야.”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안아주었지만 눈빛은 복잡하기만 했다.회사의 상황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남설아와 송우민의 공격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고 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 중이었다.시장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고 내부는 불안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대로라면 배건 그룹은 정말 그의 손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서유라의 모습을 보면 차마 그녀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배서준의 가슴속은 끝없는 갈등과 번민으로 뒤엉켰고 도대체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그때, 그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엔 천기준이었다.배서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천기준의 목소리엔 조급함과 절박함이 가득 묻어났다.“지금 회사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에요. 주주들도 다 대표님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나, 나도 지금...”배서준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서유라가 손을 뻗어 전화기를 낚아챘다.한편, 천기준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통화 종료’ 소리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그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리찍을 듯 내려놓으며 이를 악물었다.“이 서유라란 여자는 정말 재앙이라니까!”천기준은 이를 갈듯 말했다.“배 대표님도 왜 저 여자 말만 듣는 건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르나?”곁에 있던 다른 비서도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천 비서님,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요? 주주들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하죠?”“설명할 방법이 어딨어요...”천기준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
“네, 송 대표님!”모두가 힘찬 목소리로 외쳤고 회의실 안은 결의에 찬 열기로 가득 찼다.송우민의 지휘 아래 남설아의 회사는 굶주린 늑대처럼 배건 그룹의 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들어갔다.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했고 시가총액은 크게 줄어들며 내부 분위기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흩어진 조직력에 동요하는 임직원들 사이로 불만이 번졌고 결국 주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배서준에게 줄줄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한 주주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이 완전히 개판이에요! 더 늦으면 정말 끝장납니다!”“맞아요, 대표님! 이대로 가다간 정말 회복 불가능합니다!”또 다른 주주도 강하게 덧붙였다.“지금 당장 돌아와서 진두지휘하셔야 합니다!”끊임없이 쏟아지는 전화에 배서준은 머리를 싸매고 이마를 짚었다.그 역시 당장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문제는 서유라였다.그녀는 절대 그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서준아, 가지 마...”서유라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배서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나 너무 힘들어. 옆에 있어 줘야 버틸 수 있어.”“유라야, 네가 힘든 거 알아. 하지만 회사도 지금...”배서준은 난처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몰라! 나한테 중요한 건 네가 곁에 있어 주는 거야! 너 없이 나는 단 하루도 못 버텨!”서유라는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그런 말 하지 마.”배서준은 가슴 아프다는 듯 그녀를 껴안았다.“널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지. 하지만 회사 쪽 상황도 정말 더는 미룰 수가 없어.”“결국 날 버릴 거지? 날 두고 가겠다는 거잖아!”서유라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말했다.“내 몸은 누가 챙겨? 나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해... 넌 가면 안 돼!”“유라야, 그러지 마.”결국 배서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좋아, 당분간은 여기 있을게. 회사 일은 전화랑 화상회의로 처리할 테니까 괜찮지?”“진짜지?”서유라는 눈물로 젖은 눈을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