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아는 머리를 살짝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고 탕비실로 들어가 시원한 물을 두 컵이나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마음이 진정되었다.그 남자가 도대체 왜 저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남설아는 퇴근 후 결국 문자에 적힌 주소로 향했다. 바로 예전에 한 번 배서준과 함께 다녀온 적이 있는 개인 요리 전문점이었다.그때 남설아는 이곳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꼭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집은 규칙이 까다로워서 멤버십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자신은 배서준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회원 카드조차 없었고 배서준은 그 멤버십을 공유할 생각도 없었다.다시 이곳에 오자 남설아는 마음이 조금 씁쓸해졌다. 그때 이 음식을 먹고 너무 맛있다고 생각해 집에 돌아가 나은에게도 말했다. 나중에 꼭 아빠와 함께 가서 먹자고 했다.그 후로 나은은 매일같이 기대에 부풀어 엄마 아빠랑 함께 이 식당에 올 날만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 그날은 오지 않았고 아이는 세상을 떠났다.그 생각이 떠오르자 남설아의 가슴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고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졌다.직원에게 안내받아 예약된 방으로 들어섰을 때 문을 여는 순간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그 방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배서준이 아니라... 서도현이었다.“남설아, 오랜만이네.”서도현은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웃음엔 뚜렷한 적의가 서려 있었고 마치 악마 같았다.“네가 왜 여기 있어?”남설아는 본능적으로 가방 안에 넣어둔 호신용 스프레이를 움켜쥐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서도현은 다가오지 않았고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남설아, 요즘 아주 잘나가더라? 내가 여기 있는 건 이상하지 않은데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게 놀랍네. 누가 오라고 한 거야? 응?”그는 한마디도 배서준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말 하나하나가 그를 겨냥하고 있었다.남설아는 마치 벼락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내가 너무 순진했어. 또다시 배서준을
“아! 이 미친년이 감히 나한테 이런 짓을 해?!”매운 고추물이 눈에 들어가자마자 그대로 전투력을 상실한 서도현은 두 손으로 눈을 감싸 쥐고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남설아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도망쳤다.바깥은 길게 이어진 복도였고 저기만 빠져나가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너무 아름다운 상상이었다.서도현은 금세 따라붙었고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채며 뒤로 힘껏 당겼다.“이 싸가지 없는 년이, 오냐오냐 봐주니까 기어오르네. 오늘 제대로 안 당하면 계속 나 무시할 거지?!”“내 말 잘 들으라고. 내가 원하는 거 당장 내놓지 않으면 넌 진짜 끝장이야!”서도현은 말로만으로는 화가 안 풀리는지 남설아의 뺨을 거세게 두 번이나 후려쳤다.눈앞이 하얘진 남설아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콩밥 더 먹고 싶어서 환장했구나?”“네가 오늘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도현은 갑자기 낄낄 웃기 시작했다.원래 남설아는 이번 일도 배서준이 자신을 겁주려고 일부러 벌인 일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남자의 눈빛을 보니 정말 자신을 죽일 기세였다.‘좋아.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배서준, 서도현. 이제는 사람을 끌어들여 죽이는 법까지 배운 모양이지?’남설아는 생명의 위협을 뼛속 깊이 느끼며 바로 표정을 바꿨다.살짝 미소를 지으며 서도현을 바라본 것이다.“나 죽인다고 무슨 이득 될 거 있어? 네가 필요한 건 돈 아니야? 260억? 그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 나 지금 배서준이랑 아직 혼인관계인 거 몰라? 내가 죽으면 그 주식이랑 재산은 전부 배서준 거야. 하지만 내가 살아 있으면? 그걸 너한테 줄 수도 있어, 어때?”서도현은 그런 말 따윈 믿을 생각도 없는지 바로 또 한 대 뺨을 갈기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또 말장난하면 진짜 확 죽여버린다?”“진짜야.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만 지금 내 목숨이 네 손에 달려 있는데 내가 감히 거짓말을 하겠어?”남설아는 필사적으로 그
‘정말 철저하게 계획한 거였네.’남설아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나 진짜 얌전히 있을게. 말 잘 들을게.”말은 순하게 했지만 머릿속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복도만 벗어나면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이 건물 자체를 벗어나야 진짜 살아나갈 수 있었다.서도현은 수표와 열쇠를 챙기고 나서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남설아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그러고는 복도 한가운데서 갑자기 그녀의 옷을 거칠게 찢기 시작했다.“뭐 하는 거야?!”남설아는 공포에 질려 몸부림치며 소리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도현을 쳐다봤다. ‘제정신인 건가?’서도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한번 뺨을 세게 갈겼다.“이 미친년아, 진짜 내가 멍청한 줄 알았냐?”“너 같은 년한테 속을 줄 알아? 오늘은 일단 실컷 즐길 거니까 다 끝나고 나서 공증이든 뭐든 하러 가자!”서도현은 한 손으로 남설아의 두 손목을 움켜잡았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띠를 풀며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벌이려는 기세였다.이성적인 접근이 통하지 않자 남설아는 완전히 미친 듯 발악하며 격렬하게 몸부림쳤다.뒤이어 그녀는 타이밍을 재더니 무릎을 치켜들어 힘껏 찼다.“으아악!!”“남설아! 이 미친년! 감히 날 걷어차?!”서도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삶은 새우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몸을 웅크렸고 그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끙끙댔다.남설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몸을 굴리며 일어선 뒤 그대로 기어가다시피 문 쪽으로 달렸다.이번이 유일한 기회였다. 다시 잡히면 그땐 정말 끝이었다.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으로만 내달렸다. 숨이 막혀도, 다리가 후들거려도 멈출 수 없었다.“거기 서! 남설아, 이 미친년아! 감히 도망쳐?! 잡기만 하면 바로 죽여버릴 거야!”서도현이 뒤에서 악을 썼지만 조금 전 당한 타격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체력 차는 너무 컸다.남설아가 거의 문에 도달해 탈
‘우민 씨’라는 이 한마디에 송우민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뭔가 다정하게 들리네. 죽다 살아나는 순간에도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이 여자, 정말 보통이 아니네.’송우민은 말없이 남설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서도현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데려가.”“네!”곁에 있던 전기태가 곧장 앞으로 나서더니 서도현의 뒷덜미를 낚아채 그대로 차에 실어버렸다.그제야 서도현도 자신이 건드린 상대가 어떤 사람들인지 깨달은 듯 얼굴이 확 굳어지더니 다급하게 외쳤다.“안, 안 돼! 나한테 손대지 마! 내 매형이 배서준이야!”“네 매형이 배서준이면 뭐? 그래서 넌 더 죽어야지.”전기태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주먹을 날렸다.송우민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배서준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큰 원수이자 송우민이 모든 걸 잃게 만든 장본인이었다.병원, 병실.다시 눈을 떴을 때 남설아는 온몸이 쑤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목덜미를 더듬어 확인했다. 살아있는 느낌이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혼잣말처럼 웃었다.“휴, 다행이다. 아직 살아 있네.”“그래도 멘탈은 괜찮은가 보네?”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있던 송우민은 남설아가 깨어난 뒤의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남설아는 처음의 두려움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놓였다.그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곧 남설아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강연찬이 허둥지둥 뛰어 들어와 그녀의 양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들여다봤다.“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어디가 아파?”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남설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대답했다.“괜찮아... 나 정말 괜찮아.”강연찬의 다급한 모습에 송우민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알 수 없는 짜증이 피어오르며 콧소리가 절로 나왔다.“여기 나도 있는데?”그 한마디에 강연찬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남설아 앞에
“동문이야.”강연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남설아를 바라봤다.원래는 이런저런 경고와 당부를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설아야, 어디 아프진 않아?”그는 애틋하게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어쩔 수 없이, 또 한 번 마음이 무너졌다.“배씨 가문은 너한텐 너무 위험해. 제발 이혼해. 네가 원하면 뭐든지 내가 도와줄게.지금 난 그저 네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야, 알겠지?”“싫어.”남설아는 망설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고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수표 효력을 취소하고 금고 열쇠 분실 신고까지 해버린 것이다.그건 겨우겨우 손에 넣은 중요한 것들이었기에 절대 그런 쓰레기한테 넘겨줄 수는 없었다.그땐 시간만 벌려고 그랬을 뿐 지금은 몸을 추스르고 정신도 돌아왔으니 더는 잃을 이유가 없었다.남설아의 이런 대처를 보며 강연찬은 자기가 너무 성급했다고 느꼈다.그리고 확실히 깨달았다.남설아의 마음속에는 이제 배서준이라는 존재는 완전히 지워졌다는 것을.그녀가 지금 마음속으로 바라는 건 오직 ‘되찾는 것’뿐이라는 것을.“선배,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직접 되찾을 거야. 다른 사람 손 빌릴 필요 없어.”“걱정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내 힘으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사람이야. 난 나를 지킬 수 있어.”남설아는 전화를 끊고 진지한 눈빛으로 강연찬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녀는 배서준의 집에서 5년 동안 ‘새장 속의 새’로 살았다.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삶은 이제 지긋지긋했다.다시는 누구에게도 휘둘리고 싶지 않았고 심지어 누군가의 호의에도 기대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난 그냥 널 돕고 싶었을 뿐이야.”남설아의 말에 강연찬은 적잖이 상처를 받았다.자신의 도움이 그녀에겐 오히려 짐처럼 느껴졌다는 사실이 씁쓸했다.그의 그런 표정을 보며 남설아는 괜히 미안해졌고 마음 한켠이 아릿해졌다.하여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선배, 날
지금 배서준은 비록 서유라 곁에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원래는 전날 밤 남설아를 따로 불러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서유라가 또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어쩔 수 없이 밤새 곁을 지켜야만 했다.남설아가 얼마나 기다렸을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이전 같았으면 배서준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넘겼겠지만 이번만큼은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괜히 미안하고 뭔가 잘못한 기분까지 들었다.“서준아, 오늘 회사 가지 마. 나 혼자 집에 있으면 너무 무서워...”서유라는 눈물까지 머금고 배서준의 소매를 붙잡았다.그녀는 아주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지금 배서준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남설아라는 걸.이런 현실이 그녀의 마음을 더더욱 뒤틀리게 만들었다.오랜 시간 공들여 겨우 붙잡은 배서준인데 고작 며칠 만에 다른 여자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절대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조용히 일어나더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투는 최대한 부드럽게 유지했다.“지금 전환 프로젝트가 중요한 시기야. 빠질 수 없어. 몸 안 좋으면 집에서 좀 쉬어.퇴근하고 바로 올게. 알았지?”“싫어. 서준아, 나도 같이 갈래. 나 혼자 있긴 무서워...”서유라는 다시 한번 그의 소매를 꼭 붙들었다.예전의 배서준이라면 그녀의 이런 의존이 귀엽게 느껴졌겠지만 오늘따라 그녀가 무척 유치하게 느껴졌다.불편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배서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데리고 회사로 향했다.“남설아 보고 프로젝트 경과 보고하라고 해.”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배서준이 단호하게 지시했다.천기준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며 서 있었고 얼굴에는 난감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안 들려?”배서준은 그가 미동도 하지 않자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착각인진 모르겠으나 요즘 들어 배건 그룹 안에서조차 자신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듯한 기분
한원준이 사무실에서 나올 때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기술팀 자리로 돌아온 그는 물 한 모금을 힘없이 마시더니 푸념하듯 말했다.“대표님 오늘 도대체 왜 그러신 거야? 이 기획안, 전에는 엄청 잘됐다고 하시더니 오늘은 아주 쓰레기 취급이야. 한 시간 넘게 혼나고 나왔어. 내가 무슨 천벌 받을 짓 했나?”“오늘 팀장님이 안 와서 다행이죠. 안 그랬으면 그 화살 전부 팀장님한테 꽂혔을걸요?”따뜻이 다가온 오민지가 견과류 한 봉지를 건네며 싱긋 웃었다.그 말을 들은 한원준은 당장 기분이 묘해졌다. 오민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민지 씨, 진짜 사람 맞아? 방금 입에서 나온 말, 스스로 돌이켜는 봤어? 팀장님 목숨은 소중하고 내 목숨은 안 귀해?”“근데 우리 팀장님 요즘 왜 자꾸 결근하시는 걸까요? 오늘도 또 휴가래요. 혹시 대표님한테 맞아서 침대에서 못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오민지의 소리에 한원준은 하마터면 견과류를 뿜을 뻔했다. 그는 당장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민지 씨, 입에 자물쇠 하나 달아 좀!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말을 해? 우리야 그냥 회사원일 뿐인데 대표님이랑 사모님의 애증 관계를 우리가 함부로 입에 올려도 되는 줄 알아? 죽고 싶어?”“일해, 일!”한원준은 주변의 수군거리는 시선을 손으로 내쫓듯 휘젓고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한편 남설아는 다쳤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고통을 꾹 참고 다시 코딩을 이어가고 있었다.송우민이 도착했을 때, 남설아는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그를 묘하게 자극했고 또 부럽게 만들었다.그도 원래는 남설아처럼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며 빛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모든 걸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여기서 이렇게 여유롭게 일이나 하고 있고 좋겠다?”송우민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남설아를 바라봤다.비꼬는 말투지만 남설아는 그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를 보자마자
“서도현?”그 이름만 들어도 분노가 치밀었다. 남설아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이를 갈듯 말했다.“그 망할 자식만 생각하면 열이 확 받아. 그놈 때문에 지금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죽을 만큼 아픈 거 아니야. 민아, 네가 꼭 누나 복수해줘야 해, 알겠지?”“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송우민은 이를 악문 그녀의 표정을 보며 왠지 모르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남설아는 당장이라도 그 자식 목을 쳐버리고 싶었지만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가서 아주 그냥 피떡 될 때까지 두들겨 패. 피범벅 되게. 그리고 해변가 별장 문 앞에 던져놔.”“패기만 하면 돼?”송우민은 의외라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의외로 착하네?”남설아는 그 말투가 자기를 놀리는 거라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말투 왜 이렇게 여자 같냐? 철딱서니 없이. 먼저 물어본 건 너잖아. 내가 답하니까 또 태도 바꾸냐?”“이 정도로 큰일 도와주는데 뭘로 보답할 건데?”송우민은 더 이상 장난 섞인 태도는 보이지 않고 진지하게 물었다.‘이 인간, 역시 쉽게는 안 넘어가네. 그냥 도와줄 리가 없지.’남설아는 이를 갈며 송우민을 노려봤다.“말해. 뭘 원해?”“배건 그룹 최근 5년간 핵심 사업 자료 전부.”그는 망설임 없이 조건을 내걸었다.대단한 요구인 줄 알았는데 그 정도면 오히려 다행이었다.“지금 당장은 없지만 몸만 회복되면 바로 넘겨줄게. 어때?”남설아는 웃는 얼굴로 단번에 받아들였다.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송우민은 얼굴 표정이 확 바뀌더니 성큼 다가와 그녀의 턱을 움켜잡고 비웃듯 말했다.“내가 서도현인 줄 알아? 시간 끌기 같은 거, 감히 나한테 써?”‘이 사람 혹시 여우가 사람으로 변한 거 아닐까? 눈썹 진하고 인상 좋아 보였는데... 은근히 뒤끝 있다니까!’남설아는 속으로 분통이 터졌다.“근데 진짜 지금은 가진 게 없단 말이야.”“3년 전 인터넷 경진대회. 그쪽이 우승자였지?”송우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다 알아.
“유라 씨였군요.”차혜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투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다.“서준 씨도 같이 왔네요.”“사모님, 안녕하세요.”배서준도 서유라 뒤를 따라 인사를 건넸다.“유라 씨,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졌나요?”차혜미는 의례적인 말투로 물었다.“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서유라는 웃으며 대답했고 그 얼굴에는 자신감이 엿보였다.이번 기회에 차혜미 앞에서 이미지를 조금 회복해보려는 속셈이었다.그녀는 차혜미가 들고 있던 가방을 보며 곧장 칭찬을 시작했다.“사모님, 정말 안목이 좋으세요. 저 가방은 이번 시즌 신상인데 저도 얼마 전에 소개 영상 봤거든요.”서유라는 자연스럽게 자신도 그 가방에 관심이 있다는 듯 말하며 호감을 얻어보려 했다.하지만 차혜미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려 남설아를 향해 말했다.“설아 씨, 이 가방은 설아 씨가 추천해준 거잖아요. 어때요, 괜찮죠?”“네, 사모님께 정말 잘 어울리실 거예요.”남설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그렇죠, 나도 마음에 들어요.”차혜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이걸로 하죠.”그녀는 점원에게 말했다. “이 가방 포장해주세요.”“네, 사모님.”점원은 공손하게 대답했다.서유라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그녀를 무시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사람들이 많은 매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그녀는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욕감과 질투심이 동시에 끓어올랐다.서유라는 남설아를 향해 노골적으로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지금이라도 당장 남설아를 물어뜯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배서준 역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남설아를 편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자신들과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그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서유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차혜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여전히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유라 씨, 아직 몸도 다 회복 안 됐을 텐데 무리하지 마세요.
식탁 위에서 남설아는 정신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식사 예절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서둘러 먹는 모습이었다.마치 무언가 급하게 가야 할 일이 있는 듯했다.강연찬은 그녀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설아야, 좀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그는 말하며 조심스럽게 물 한 잔을 따라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오빠, 괜찮아.”남설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하며 계속해서 음식을 입에 넣었다.“서강 그룹 사모님이랑 쇼핑 약속이 있어서 빨리 먹고 가야 해.”“쇼핑?”강연찬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눈치였다.“너랑 사모님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어?”“회사 일 때문이지.”남설아는 밥을 삼킨 뒤 설명했다.“서강 그룹이 우리 쪽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여. 이런 기회는 꼭 붙잡아야 하잖아.”“그렇구나.”강연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마음에 덧붙였다.“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안전도 챙기고.”“응, 알겠어.”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 음식을 다 삼킨 후 그녀는 먼저 제안했다.“쇼핑 끝나면 오빠가 데리러 와줄래?”“응, 당연하지.”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강연찬은 기분이 좋아졌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오빠는 천천히 먹어. 과일 좀 준비해올게.”남설아는 차혜미와 시내 중심에 있는 대형 쇼핑몰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그녀는 쇼핑몰 입구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췄다.차 문이 열리고 차혜미가 차에서 내렸다.“사모님, 오셨어요.”남설아는 서둘러 다가가며 밝고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설아 씨, 오래 기다리셨죠?”차혜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아니에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남설아가 대답했다.“그럼 들어가 볼까요?”“네.”두 사람은 웃으며 함께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고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었다.차혜미는 비록 연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전혀 거들먹거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남설아는 기쁨에 겨워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이 좋은 소식을 곧바로 강연찬에게 알렸다.“오빠, 서강 그룹이 우리랑 협력하기로 했어!”남설아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해냈어!”“정말이야?”강연찬도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정말 잘 됐다. 난 처음부터 네가 잘 해낼 거라 믿었어.”“이건 다 오빠 덕분이야.”남설아는 진심으로 말했다.“오빠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렇게 순조롭진 않았을 거야.”“나한테 그럴 필요 없어.”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이건 우리 둘이 함께 이뤄낸 성과잖아.”“응!”남설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서강 그룹이라는 큰 파트너를 얻었으니 오늘은 제대로 축하해야겠어.”“좋아.”강연찬이 말했다.“어떻게 축하하고 싶어?”“오빠가 정해줘.”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난 오빠를 믿어.”“그럼 내가 준비할게.”강연찬이 말했다.“분명 마음에 들 거야.”“응, 기다릴게.”남설아가 환하게 웃었다.그날 저녁, 강연찬은 직접 요리를 해 한 상 가득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또한, ‘협력 성사 축하’라는 문구가 적힌 케이크도 샀다.“와 너무 푸짐하다.”남설아는 차려진 음식을 보고 감탄했다.“오빠, 진짜 대단해.”“맛있게만 먹어주면 돼.”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얼른 먹어봐.”“응.”남설아는 젓가락을 들고 한입 먹어보았다.“맛있어. 오빠, 요리 실력 엄청나게 늘었네.”“맛있다니 다행이다.”강연찬이 말했다.“앞으로 자주 해줄게.”“좋아.”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는 매일 맛있는 거 먹겠네.”두 사람은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분위기는 무척 따뜻하고 편안했다.“이번 일도 오빠가 곁에서 도와준 덕분이야.”남설아는 기쁜 얼굴로 잔을 들며 말했다.“오빠가 함께해줘서 나도 버틸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오빠.”남설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오빠가 있어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설아야, 넌 원래부터 훌륭한 사람이야. 난 단지 옆에서 조금 도왔을 뿐이야
서유라는 병원에서 며칠 더 머물렀고 그 며칠 동안 배서준은 거의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 곁을 지켰다.그 모습에 서유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역시 이 계략은 언제 써도 효과 만점이다.하지만 그녀도 단순히 아픈 척만 해서는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배서준이 완전히 자기에게 빠지도록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이날도 배서준은 평소처럼 병상 옆에 앉아 사과를 정성스레 깎고 있었다.서유라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서준아, 나 계속 민폐만 끼치는 거 같아. 회사 일은 괜찮아?”“괜찮아, 신경 쓰지 마.”배서준은 깎은 사과를 서유라에게 건네며 말했다.“회사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넌 몸이나 잘 추슬러.”“하지만...”서유라는 말을 맺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왜? 무슨 일 있어?”배서준은 다정하게 물었다.“그냥 내가 이렇게 아프기만 해서 너한테 짐이 되는 건 아닐까 해서.”서유라는 눈을 내리깔며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 널 짐처럼 느낄 리가 있겠어?”“그래도...”서유라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회사 상황이 안 좋다는 말도 들리고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그런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회사의 일은 나 혼자 감당 못 해서 그런 거야.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날 위로하려는 거라면 그런 말 안 해도 돼.”서유라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알아. 결국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까지...”“유라야, 그건 진짜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회사 일은 내가 잘 정리할 테니까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응.”서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뻐했다.역시나 배서준은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에 가장 약했다.불쌍한 척, 약한 척, 조금만 애교를 부리면 뭐든 들어줄 것이다.“난 처리할 일
“설아는 잘못한 게 없어요. 배 대표님이 뭔데 이렇게 몰아붙이는 거죠?”강연찬이 단호하게 말했다.“이건 나랑 남설아 사이의 일이에요. 강 대표님이 끼어들 일은 아닙니다.”배서준은 냉랭하게 응수했다.“지금 설아는 내 파트너이자 내 친구입니다.”강연찬의 말투는 확고했다.“배 대표님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설아를 몰아붙이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몰아붙인다고요?”배서준은 비웃으며 말했다.“내가 언제 남설아를 몰아붙였다는 겁니까?”“아닌가요?”강연찬이 되물었다.“됐어, 오빠. 그만해.”남설아가 나섰다.“나는 괜찮아. 이런 사람들과는 굳이 말 섞을 필요 없어.”남설아의 말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그래도 나 지켜줘서 고마워, 오빠.”“우리가 그런 말 할 사이야?”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너만 괜찮으면 됐어.”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송우민은 조용히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그는 배서준이 아직 남설아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눈치챘고 그 점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배서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그런 그가 남설아에게 밀린다는 사실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만약 남설아가 아직도 배서준을 좋아한다고 믿게 만든다면 그는 분명 어떻게든 다시 붙잡으려고 할 것이다.그러면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연회가 끝난 후, 배서준과 서유라는 차로 돌아왔다.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서준아, 나 너무 쓸모없는 사람이지?”서유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계속 너한테 민폐만 끼치고, 나 너한테는 짐 같은 존재지?”“바보야, 그런 말 하지 마.”배서준이 다정하게 달랬다.“넌 짐이 아니라 내 소중한 사람이야.”“하지만 난 자꾸 널 힘들게 하고 화나게 하잖아.”서유라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나 진짜 무능한 사람 같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울지 마, 유라야. 울지 마.”배서준은 그녀를 안으며 애틋하게 말
배서준은 고개를 홱 돌려 남설아를 노려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거기서 뭐 해? 빨리 의사부터 부르러 가야 할 거 아냐!”남설아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서유라의 연기는 참으로 어설펐다.이렇게 진부한 수법으로 배서준을 속이려 들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굳이 그녀를 들춰내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배서준은 이미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믿고 있었고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밖에 안 들릴 것이다.“알겠어요, 의사 부를게요.”남설아는 담담히 대답하고 돌아섰다.그녀는 한쪽 구석으로 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끊은 뒤, 입가에는 비웃는 듯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서유라, 이번에는 네가 망가질 차례야. 기다려 봐.’연회장 안은 서유라의 모습으로 인해 술렁이기 시작했다.여러 사람이 몰려와 그녀의 상태를 걱정하며 물었다.“유라 씨, 괜찮아요?”“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배 대표님, 유라 씨 빨리 병원으로 모셔야겠어요.”사람들이 각자 떠들어대며 현장은 점점 어수선해졌다.배서준은 서유라를 품에 안고 초조함에 휩싸였다.그는 서유라가 왜 갑자기 아픈 건지 몰랐지만 속으로는 분명 남설아가 무슨 말을 해서 그녀를 자극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그렇게 생각하자 남설아에 대한 미움은 더욱 깊어졌다.“비켜주세요. 다들 좀 비켜줘요.”배서준은 크게 외쳤고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실려 있었다.“유라가 쉬어야 하니까 제발 좀 그만들 하세요.”사람들은 그의 기세에 눌려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길을 비켜주었다.배서준은 서유라를 안은 채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그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내내 그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 있었고 운전대를 쥔 손에는 핏줄이 불쑥불쑥 솟아 있었다.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조수석에 기댄 서유라는 슬며시 배서준의 표정을 살폈다.그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는 의기양양했다.예상대로였다. 자신이 아픈 척
서유라는 싸움에서 진 사람처럼 기가 죽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배서준의 이미지도 사람들 눈에 한순간에 추락했고 그는 무척이나 난처하고 부끄러웠다.그는 점점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만약 그때 남설아와 이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초라해지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연회가 끝난 뒤 배서준과 서유라는 함께 차에 올랐다.“서준아, 미안해.”서유라는 고개를 숙인 채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오늘 내가 괜히 설아 씨한테 차를 우리라고 제안했어. 설아 씨가 그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너 잘못 아니야.”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남설아가 괜히 잘난 척을 한 거지.”그는 서유라가 마음 아파하는 게 안쓰러워 모든 잘못을 남설아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그래도 난 아직도 미안해.”서유라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내가 너를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게 했잖아.”“바보야, 네 탓이라고 한 적 없어.”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응.”서유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배서준의 품에 안겼다.하지만 배서준의 마음은 딴 데로 향하고 있었다.그는 과거의 남설아를 떠올리고 있었다.한때 그녀는 단지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매일 자신과 아이만 바라보며 살아가던 그녀가 도대체 언제 다도를 배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다도 실력이 이 정도라니, 서 회장 부부가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지금 저 여자가 내가 알던 남설아가 맞는 건가?’그는 마음속 깊이 혼란스러웠다.남설아는 분명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이 쉽게 이해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서유라는 배서준의 시선이 자꾸만 허공으로 향하는 걸 느끼고는 그가 또다시 남설아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그녀의 마음속에 위험 신호가 울렸다. 그녀는 반드시 이 둘의 접촉을 막아야만 했다.‘남설아, 가만 안 둬. 네가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서유라는 속으로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그녀의
“서 회장님, 사모님, 과찬이세요.”남설아가 겸손하게 말했다.“그냥 가볍게 내린 것뿐이에요.”“남 대표 너무 겸손하시네.”서기찬이 말했다.“이건 아무렇게나 내려서 나올 맛이 아니야. 확실히 기본기와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그러게요, 설아 씨.”차혜미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차 내리는 솜씨가 정말 대단해요. 제가 제자로 들어가고 싶어질 지경이에요.”“사모님, 또 농담하시네요.”남설아가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이런 사소한 재주가 어찌 사모님의 눈에 찰 수 있겠어요?”“설아 씨가 너무 겸손하신 거예요.”차혜미는 찻잔을 바라보며 더욱 남설아에게 호감을 드러냈다.“차를 이렇게 잘 내리시는 걸 보니 정말 감탄밖에 안 나와요.”“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남설아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유라는 마음속에 질투심이 더욱 불타올랐다.남설아가 이렇게까지 다도에 능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자신이 의도한 모욕은커녕 오히려 남설아는 그 자리에서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칭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서유라는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설아 씨의 다도 실력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듣기로 다도도 여러 유파가 있다고 하던데 설아 씨는 어느 쪽이야?”그녀는 남설아의 다도를 비하하려는 의도로 체계 없는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암시하고자 했다.“특정 유파를 따로 배우진 않았어.”남설아는 침착하게 말했다.“그저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내 느낌에 따라 우려내는 것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시 비웃듯 말했다.“그럼 설아 씨만의 파가 생긴 거네? 대단해.”그녀는 남설아만의 파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남설아의 다도가 비전문적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유라 씨, 또 농담하네.”남설아는 작게 웃으며 조롱이 섞인 말투로 답했다.“나는 그냥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일 뿐이야. 감히 한 유파라니.”“남 대표님 너무 겸손하세요.”차혜미가 곧장 나섰다. 그녀는 서유라의 말에 담긴 악의를 알아차리고
“고마워.”남설아가 말했다.“설아 씨, 예전에 서준이 곁에 있을 때도 이렇게 늘 꾸미고 다녔어?”서유라가 불쑥 물었다. 말투에는 살짝 떠보는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남설아가 한때 배서준의 곁에 있었던 시절을 언급하며 남설아의 과거를 상기하려 했다.남설아는 서유라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유라 씨, 농담이 지나치네. 그때의 나는 그저 서준 씨의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했을 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소 우쭐한 말투로 말했다.“나는 설아 씨가 차를 따라주고 시중드는 데 능한 줄 알았어. 내조를 하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잖아?”그녀는 차를 따라주고 시중든다는 것을 일부러 강조해서 말하며 남설아를 모욕하려 했다.“유라 씨 말이 맞아. 내조를 하는 데는 정말 정성이 필요해.”남설아는 차분하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사업을 하는 데 더 능한 편이야.”“그래?”서유라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오늘 설아 씨가 잘해야겠네. 여기 모인 분들 다 업계 내로라하는 분들이니까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겠어.”“걱정해줘서 고마워, 유라 씨.”남설아는 작게 미소 지으며 빈정거림이 담긴 말투로 답했다.“하지만 나는 유라 씨를 실망하게 할 일은 없을 거야.”“그래야지.”서유라는 속으로 비웃으며 남설아가 뭘 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는 듯 말했다.“설아 씨, 차 따르는 데 능하다니까 오늘 여기서 차 한 번 내려보지?”서유라가 제안했다.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묻어 있었다.“여기 좋은 차도 있고 멋진 다기 세트도 있어. 설아 씨의 손재주로는 딱 어울릴 것 같네.”그녀는 손재주라는 말을 다시금 강조하여 말하며 남설아를 하찮은 시중 드는 사람으로 몰아가려 했다.하지만 남설아는 그런 의도를 바로 눈치챘음에도 전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도전을 받아들였다.“좋아, 유라 씨가 이렇게 운치 있는 제안을 하니 한 번 해볼게.”남설아는 여유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다만 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