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씨 사모님은 강연찬이 요지부동인 모습을 보고 눈을 굴리더니 소미란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미란아, 연찬이가 이렇게 말하는데 설아 씨의 건강이 우선이지. 우리 다음에 다시 오는 게 좋겠어.”그러고는 곧바로 강연찬을 향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연찬아, 설아 씨가 입원한 비용이랑 앞으로 회복하는 데 드는 비용, 영양제 같은 것도 전부 우리 소씨 가문에서 책임질게. 사양하지 마.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야.”강연찬은 고개를 저으며 정중히 말했다.“사모님,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런 부분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번거롭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공손한 말투였지만 분명하게 거절하는 의미였다.소미란이 다시 나서려 하자 소씨 사모님은 슬쩍 그녀의 팔을 꼬집으며 제지했고 곧바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알겠어. 연찬아, 너도 좀 쉬어. 다크서클이 많이 내려왔어. 몸조심해야지.”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말을 이었다.“그럼 우리는 이만 가볼게. 설아 씨가 좀 회복되면 다시 올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네, 사모님. 조심히 가세요.” 강연찬이 짧게 대답했다.병실 안, 남설아는 창가에 서서 소씨 가문 모녀의 차가 멀어지는 걸 지켜보다가 코웃음을 쳤다.“오스카에서 여우주연상 하나 줘야겠네.”목소리는 아직 약간 쉬어 있었지만, 정신은 많이 돌아온 상태였다.“서유라가 봤으면 감탄했을걸. 연기력 하나는 정말 수준급이야. 가식 떠는 것도 레벨이 다르더라.”강연찬은 뒤에서 그녀를 안고는 턱을 어깨에 기대었다.“저런 사람들한테 감정 낭비할 필요 없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병원 측엔 얘기 다 해놨어. 다시는 아무도 못 들어올 거야.”남설아는 뒤돌아 그의 품에 안겨서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퇴원하고 싶어.”그녀는 고개를 들어 피곤함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말했다.“저 사람들 분명 또 올 거야. 아예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어.”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회사 일도 내가 직접 확인해
소미란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숨겨두었던 마음속의 불순한 생각이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그래, 이렇게 헛수고로 끝낼 순 없어.’다음 날, 새벽 여명이 막 비칠 무렵, 소씨 사모님은 소미란을 재촉해 과일 바구니와 영양제를 들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다.병실 안에서는 남설아가 깨어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있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강연찬은 보온 용기에 담긴 죽을 조심스럽게 그릇에 따르며 그녀에게 먹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똑똑.”노크 소리가 조용한 병실 안에서 또렷하게 들렸다.강연찬은 죽 그릇을 내려놓고 남설아에게 조용히 손짓해 잠깐만 기다리라는 표시를 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상 앞 커튼을 돌아 나가 바깥쪽 문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소씨 사모님과 소미란이 나란히 서 있었고 한 사람은 과일 바구니를, 다른 한 사람은 영양제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강연찬은 티 나지 않게 눈썹을 살짝 치켜들더니 병실 문을 닫고 문 앞을 막아섰다.“사모님, 미란아.”그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고 공손하지만, 거리감을 두는 말투였다.“연찬아.” 소씨 사모님이 먼저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설아 씨가 깨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이렇게 찾아왔어. 설아 씨는 괜찮아? 어젯밤 일은 정말...”그녀는 말끝을 흐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소미란도 재빨리 말을 이었다.“맞아, 연찬아. 리조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우리도 전혀 몰랐어. 정말 미안해. 설아 씨는... 괜찮아? 우리가 직접 만든 전복죽이랑 과일을 가져왔는데 꼭 전해주고 싶어. 그리고 꼭 얼굴 보고 직접 사과하고 싶어.”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시선은 병실 안으로 향했다.하지만 강연찬은 미동도 하지 않고 여전히 병실을 가로막고 있었다. 목소리에는 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설아가 아직 잠들어 있어. 조금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의사 선생님도 당분간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셨어. 얼굴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
강연찬은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그는 남설아를 꼭 껴안은 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뺨은 연기에 그을려 검게 물들어 있었고 계속 기침했다.“설아야, 설아야?”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고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소미란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소씨 사모님은 재빨리 딸의 팔을 붙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쓸데없이 끼어들지 마.”강연찬은 그들 쪽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남설아를 번쩍 안아 올리고 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병원으로! 빨리!”병원의 환한 조명 아래 의사는 진료를 마치고 엑스레이 사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연기를 좀 마시긴 했지만, 폐에 큰 이상은 없습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면 하루 정도 입원해 관찰하시는 게 좋습니다.”강연찬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입원하겠습니다.”병상에 누워 여전히 기침하는 남설아를 보며 마음이 놓일 리 없었다. 강연찬은 그녀를 병실에 잘 눕힌 뒤, 곁을 지키고 있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소씨 사모님의 전화였다.그는 병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연찬아.”소씨 사모님의 목소리에는 놀란 기색과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설아 씨는 어때? 의사 말은 뭐래?”강연찬은 담담하게 대답했다.“큰 문제는 없답니다. 연기를 좀 마셨다고 해서 입원했습니다.”“그래?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소씨 사모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리조트 쪽은 다 조사를 끝냈어. 부엌 쪽 전기선이 오래돼서, 그게 불씨가 됐나 봐. 정말 운이 안 좋았어. 그래도 다들 무사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부엌이요?”강연찬은 한 번 되뇌었지만 목소리엔 별 감정이 없었다.“알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전화를 끊고 강연찬은 복도에 서서 이마를 살짝 짚었다.‘부엌에서 불이 났다고?’하지만 그와 남설아가 머물던 숙소에서는 아예 부엌의 가스를 한 번도 켠 적이 없었다. ‘조리기구에 손도
소미란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네. 알겠어요, 엄마.”강연찬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남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다정했다.소씨 가문의 모녀가 종일 애써 연기한 ‘화목한 분위기’가 어쩐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남설아와 강연찬 모두 이런 억지스러운 평화에 익숙지 않았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리조트의 숙소는 각각 떨어져 있는 단독 빌라 형태로, 조용하고 한적했다.남설아는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웠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낮에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지쳐 있었기에 그녀는 금방 깊은 잠에 빠졌다.강연찬은 그녀의 이불을 살포시 덮어주었다. 하지만 본인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소씨 가문 모녀의 연극, 단순히 화해를 위한 것으로 보기엔 뭔가 석연치 않았다. 하여 그는 자꾸만 이 연극 뒤에 숨은 속내를 의심하게 됐다.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중, 밖에서 뭔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고 움직이는 듯한 기척이었다.강연찬은 눈썹을 찌푸리며 문 쪽으로 다가가 살짝 문틈을 열고 바깥을 살폈다.밖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자는 남설아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가 숙소에서 몇 걸음 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날카로운 경보음이 밤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고 곧이어 가까운 다른 숙소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화재 경보였다.“불 난 거야?”남설아는 경보음에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뭔가가 타는 듯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급히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돌리려 했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문이 왜 이래?”남설아는 당황한 채 손잡이를 몇 번이고 돌려봤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잠긴 듯했다.“연찬 오빠? 오빠!”남설아는 문을 두드리며 불안한 목소리로 불렀다. 밖에서는 소씨 사모님과 소미란이 급하게 옷을 걸치고 달려 나왔다.두 사람 모두 당황한 얼굴이었다.“무슨 일이야?
남설아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우리 둘이 여기 앉아서 저 모녀가 벌리는 연극을 맞춰줘야 하는 건가? 이 리조트를 통째로 빌린 것 같은데, 꽤 돈을 들였겠네. 사모님도 참.”강연찬은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온 김에 편하게 좀 쉬어. 그쪽에서 벌린 판인데 우리는 그냥 구경이나 하자. 소씨 가문이 어떻게 보상할지는... 미란이가 얼마나 그럴싸하게 연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진심이 있느냐에 달렸지.”남설아는 가방에서 벨벳 상자를 꺼내 강연찬에게 건넸다.“여기, 사과의 의미라며 선물까지 챙겨왔어.”강연찬은 상자를 받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귀걸이 한 쌍이 들어 있었는데 정교하고 빛깔도 예뻤다.그는 상자를 닫아 무심하게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소미란이 제법 큰 걸 준비했네.”남설아는 찻잔을 들어 살짝 김을 불며 말했다.“그 사과는 일단 받은 셈 치지 뭐.”강연찬은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만 봐도 남설아와 같은 생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모녀가 꽤 정성을 들여 꾸민 연극이지만, 문제는 관객이 좀처럼 몰입을 안 한다는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소미란이 직접 찾아왔다. 표정이 어딘가 어색한 그녀는 두 사람 앞에 다가와 말했다.“연찬아, 설아 씨... 엄마가 식사하러 오시라고 하셨어요. 바비큐 다 준비됐대요.”그녀는 말을 멈추며 강연찬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곧장 시선을 남설아에게 돌렸다.“설아 씨, 저... 앞으로는 절대 민폐 안 끼칠게요. 연찬이도... 제발 나한테 화 풀었으면 좋겠어.”강연찬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남설아에게 물었다.“뭐 좀 먹을래?”남설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사모님께서 뭘 준비하셨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네 사람은 온천 옆 야외 테이블에 둘러앉았다.불판 위에서는 고기가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었고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소씨 사모님은 분주히 움직이며 남설아에게 고기를 챙겨주고 소미란에게는 강연찬을 좀 챙기라고 눈짓하기 바빴
소미란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한 눈빛으로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강연찬이 설아 씨를 선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겠죠. 아마... 아마도 제가 설아 씨보다 못난 사람이어서 그렇겠죠. 저는 설아 씨처럼 뛰어나지도 않고 그 사람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도 아니에요. 예전엔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늘 설아 씨가 그 사람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랑이란 게 빼앗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그 사람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제가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는 거니깐요.”소미란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췄다.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한 모습이었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체념 같기도 한, 뭔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한 기색이 비쳤다.“그래서 이제야 좀 알겠더라고요. 계속 이런 상태로 지낸다면 나만 초라해지고, 모두가 불편해질 뿐이라는 걸 말이에요. 제가 졌어요, 설아 씨.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앞으로는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거나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요. 이젠 강연찬을 그저 친구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두 사람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랄게요.”소미란은 이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남설아는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별다른 표정 없이 침착하게 듣고 있다가 소미란의 말을 끝냈을 때야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었다.“소미란 씨, 오늘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네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애써 표정 관리하는 소미란을 바라보며 덧붙였다.“하지만 저와 연찬 오빠 사이에는 미란 씨가 생각하는 그런 쟁탈전 같은 건 없었어요.”남설아의 담담한 반응에 소미란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말했다.“네, 이제야 알겠어요. 설아 씨, 저는 엄마한테 가보도록 할게요. 도와드릴 게 없는지 가봐야겠어요.”소미란은 그렇게 말하고는 남설아가 무슨 말을 더하려고 할까 봐서인지, 얼른 일어나 바비큐를 하는 소씨 사모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도망치듯 빠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