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아는 자신이 배서준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사람과 어떤 친밀한 접촉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끝없는 혐오감만이 밀려올 뿐이었다.눈물이 그녀의 눈가를 따라 흘러내렸다. 남설아는 배서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난 너를 증오해.”그녀의 눈물과 가감 없는 드러낸 증오심에 배서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배서준은 멍하니 그녀 위에 엎드린 채 그녀의 눈물을 마주했다. 생전 처음으로 그는 극도의 혼란을 느꼈다.“너... 이걸 원한 게 아니었어?”배서준은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꺼져!”남설아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혐오와 분노만이 가득 차 있었다.그 모습을 본 순간, 배서준의 가슴이 묘하게 찌르르 아팠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차가운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그러나 손끝이 그녀의 뺨에 닿는 순간, 그는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도망치듯 방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남설아는 침대에 엎드려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문이 닫히자마자 장숙자가 허겁지겁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그녀는 엉망이 된 침대와 손이 묶여 있던 남설아를 보고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급히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묶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주었다.“설아 씨, 괜찮아요?”“괜찮아요.”남설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저으며 장숙자에게 나가서 쉬라고 말했다.장숙자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다가 다행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니라고 판단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남설아는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그러자 거실 한쪽, 카펫 위에서 웅크리고 떨고 있는 코코가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빠르게 다가가 코코를 품에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괜찮아, 코코.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 거야.”코코는 그녀의 체온을 느꼈는지 마치 그녀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그 작
배서준은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질렀다. 숙취에 피로까지 겹쳐서인지 그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그런 뜻이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마.”서유라는 그런 배서준을 보자마자 바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었다.“서준아, 너무 피곤한 거 아니야? 이렇게 하면 좀 나아? 이 상태로 출근하는 건 무리야. 어차피 회사에 큰일도 없는데 그냥 집에서 푹 쉬어. 내가 해장국 끓여줄게, 응?”서유라는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배서준의 가슴에 기대었다. 꼭 다정하고 온순한 고양이 같아서 쉽게 거절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그녀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배서준이 느끼던 답답함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서유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웃었다.“유라야, 나한테 이렇게 신경 써주는 건 너뿐이야. 너만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유라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에게 이런 모습이 없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배서준 곁에 머물 수도 없었을 것이다.그녀는 그동안 많이 참아 왔다. 원래는 그 아이가 죽기만 하면 모든 게 순조롭게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그 아이는 사라졌지만, 남설아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것이다.이제는 배서준의 환심을 사는 것뿐만 아니라 남설아를 경계해야 했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이를 잃고 나서 남설아는 오히려 더 빛나 보였다. 그게 너무도 거슬렸다.배서준은 잠시 쉬고 나서야 기운을 되찾고 말했다.“준비해. 같이 출근하자.”한편, 남설아는 오늘 회사에 휴가를 냈다. 코코를 데려온 이상, 책임을 져야 했다.애지중지 품에 안고 나서서 혹시나 몸에 이상이 있을까 싶어 동물병원에 데려가기로 했다.집을 나서자마자 강연찬의 차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남설아는 조금 놀란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코코를 안고 다가갔다.강연찬은 차에서 내리며 환하게 웃었지만, 그녀 품속의 코코를 보자마자 표정이 살짝 어색하게 굳었다.“너 출근하면서도 얘를 데리고 다니려고?”
남설아는 웃음을 거두고 코코를 가볍게 고쳐 안으며 불쾌한 기색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이 시간에 회사에 있어야 하는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거야?”“서준이가 어젯밤에 과음했거든. 내가 밤새 간호했더니 나 힘들다고 오늘 하루 쉬라고 했어.”서유라는 일부러 옷깃을 잡아당기며 피부에 남아 있는 애매한 흔적을 드러냈다.아이를 낳아 본 남설아가 이런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예전 같았으면 이런 걸 보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겠지만, 지금은 그냥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어젯밤에 그렇게 소리치느라 피곤했으면 조용히 쉬지, 여기에는 왜 온 거야? 설마 이 대낮에 여기서도 소리치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 아쉽겠지만 난 그런 취미 없어.”남설아는 서유라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입에서 쉴 새 없이 독설을 내뱉었다.어차피 저 두 사람은 더한 짓도 서슴지 않는 인간들인데, 자신이 이 정도 말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서유라는 깜짝 놀랐다. 예전에는 자기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던 여자가 지금 감히 이런 말을 하다니.“너... 대낮부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서유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더 이상 침착한 척할 수 없었다.남설아는 거의 반사적으로 코코의 귀를 손으로 가린 채 서유라를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남의 남편이 몸에 남긴 흔적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나보고 부끄러움도 모른다고? 요즘은 불륜녀들이 이렇게 당당한 세상이 됐나 보네?”“사랑에서는 사랑받지 못하는 쪽이 진짜 불륜녀야.”서유라는 이를 악물며 한 걸음 다가서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남설아를 노려보았다.“당신이 우리를 손가락질할 자격이 있어? 당신도 다른 남자랑 놀고 있잖아.”남설아는 한 발짝 물러나 강연찬 옆에 섰다.그리고 일부러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장난스러운 눈짓을 보냈다.“맞아. 우리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뭐? 불만 있어? 네 남자인 배서준도 아직 나한테 뭐라 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왜 난리야? 너야말로 여기서 난리 피울 시간 있으면 네 남자한테 잘
강연찬은 남설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조금 전 그녀가 자신을 지키는 모습은 마치 당당한 여전사 같았다.강연찬의 진지한 눈빛을 보자 남설아는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내가 행패 부리는 여자처럼 보이지는 않았어요?”“그게 어떻게 행패를 부리는 여자가 돼? 사람이 문 앞까지 찾아와서 모욕을 주는데 가만히 있는 건 온순한 게 아니라 무능한 거야.”강연찬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우아함이니 품격이니 하는 건 다 헛소리였다. 서유라 같은 뻔뻔한 인간들 앞에서는 강하게 맞서는 게 정답이었다.강연찬의 말에 남설아는 왠지 코끝이 시큰해졌다.그녀는 과거에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배서준에게 끝없이 꾸중을 들었다. 배씨 가문의 사람답지 않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정작 배씨 가문의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배씨 가문이 어떤지 그녀와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동물 병원에 도착하자 수의사는 코코의 작은 몸집을 보고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세심한 진찰 끝에 그는 설명했다. 코코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작았고 태어나서도 형제들 사이에서 젖을 충분히 먹지 못해서 작은 거지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다. 잘 돌봐준다면 앞으로 튼튼하게 자랄 것이다.수의사의 말을 듣자 남설아는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그녀는 바로 코코가 쓸 물건을 고르기 시작했고 심지어 분유도 최고급 제품으로 선택했다.그 와중에 강연찬은 가만히 서서 코코와 눈을 마주치고 서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동물을 무서워했지만, 이상하게도 코코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공포감이 많이 사라졌다.“야옹!”“으악!”코코가 울자 강연찬도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남설아는 깜짝 놀라 돌아와 코코를 품에 안고는 난감한 표정으로 강연찬을 바라보며 말했다.“좀 조용히 해요. 코코가 놀라요.”“남설아, 너 사람이야? 날 사람 취급은 하긴 해? 코코가 놀라면 안 되는데 나는 놀라도 되는 거야?”강연찬은 억울한 표정으로 외쳤다.그
남설아는 서유라가 오늘 배서준을 데리고 온 건, 오로지 자신에게 과시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남설아는 그저 웃음을 지었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와 서유라는 더 이상 같은 경기장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서유라의 시선은 여전히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남설아는 이제 오직 돈만을 원했다. 그리고 배서준이 차라리 죽지 못해 살기를 바랐다.“너! 남설아, 네가 이렇게 나온다고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아? 이번 프로젝트를 따내지 못하면 네가 어떻게 배건 그룹에서 쫓겨나는지 두고 볼 거야.”배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어두운 면을 숨기지 못했다.평소에는 냉정하고 점잖은 모습을 유지했던 그가 지금은 분노로 이를 갈고 핏줄까지 서 있었다.그러나 그가 여기서 분노하다가 당장 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남설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녀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덤덤하게 말했다.“서준 씨,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본인부터 돌아보시죠.”그렇게 말한 뒤, 코코를 품에 안고 거침없이 밖으로 나갔다.그녀가 떠나자, 병원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동물 미용사조차 숨소리를 죽이며 혹시나 자신이 괜히 말려들까 봐 조심스러워했다.배서준의 감정이 격변하는 걸 느낀 서유라는 속으로 놀랐다.그녀는 배서준이 남설아 때문에 이런 감정 변화를 보일 줄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서준아, 서준아... 괜찮아?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굳이 토리 사료 사러 오자고 하지 않았으면 설아 씨가 화를 내지 않았을 텐데.”서유라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사과했다.“그 여자가 화를 내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배서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짜증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곧 서유라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그녀는 미세하게 몸을 떨었고 품에 안겨 있던 치와와마저 주인의 감정을 따라 조용히 흐느꼈다.그제야 배서준은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했음을 깨닫고 황급히 그녀를 다독였다.“미안해, 유
남설아를 지금까지 버티게 만든 것은 애정 같은 게 아니었다. 그녀를 지탱한 것은 증오였고 원망이었으며 끝없는 부정적인 감정들이었다.그녀는 자기 딸을 죽게 만든 사람이 멀쩡하게 잘 살아가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들이 서로 애정 어린 눈빛을 주고받으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건 그녀에게는 지옥과도 같았다.만약 그들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면 나은이는 대체 뭐가 되는 건가. 그리고 그녀 자신은 대체 뭐란 말인가.남설아는 단호한 눈빛으로 강연찬을 바라봤다.“오빠, 도와줄 거죠?”지금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강연찬뿐이었다. 남설아 또한 그에게 의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혼자 버티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도와줄게. 하지만 난 네가 잘 지내길 더 바랄 뿐이야.”강연찬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그가 그녀를 돕겠다는 건 진심이었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그녀가 이 증오와 집착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복수에 몰두하다가 결국 자신을 갉아먹는 걸 그는 원하지 않았다.“나 잘 지낼 거예요. 나은이에게 약속했거든요. 난 잘 살아갈 거라고요.”남설아는 살며시 웃으며 품속의 코코를 어루만졌다.그 모습을 본 강연찬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차를 몰아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다 문득 말을 꺼냈다.“남도일이 널 보고 싶어 해. 벌써 안에서 몇 번이나 자살 소동을 벌였어. 만날 거야?”“네.”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품속의 코코를 내려다보면서 확실히 그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고 느꼈다.남설아가 그렇게 쉽게 대답할 줄 몰랐던 강연찬은 잠시 멈칫했다가 덤덤하게 말했다.“그 사람 널 만나도 별로 좋은 말은 안 할 텐데. 마음 단단히 먹어.”“우리 사이는 어차피 끝을 내야 해요. 해야 할 말이 있고 밝혀야 할 일도 있어. 직접 마주 보고 확실히 끝내야죠.”남설아는 조용히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오빠, 고마워요.”그녀가 지금 강연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고맙다는 말뿐이었다
회사로 돌아온 강연찬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어떻게 하면 빠르고 강하게 배건 그룹을 차지하면서도 배서준을 무너뜨리고 자신에게 피해가 없도록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서진영은 그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짜증 난 듯 책상을 쾅 내리쳤다.“형, 내가 업무 보고하고 있는데 도대체 뭘 그렇게 멍때리고 있어요? 딴생각 중이죠?”“아니야, 듣고 있어.”강연찬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서진영을 향해 웃어 보였다.하지만 그의 태도를 보니 딱 봐도 대충 얼버무리는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서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한 달 안에 이 두 가지 기술적 난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형은 요즘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하고 도대체 해결책은 생각해 본 거예요?”“사실 난 설아한테 한 번 보여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걔가 더 잘할걸?”강연찬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남설아의 능력을 인정하는 서진영이었지만 지금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그는 곧바로 얼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형, 우리 배건 그룹이랑 경쟁 관계라는 걸 잊은 거예요? 내가 알기로 위화 그룹이 배건 그룹이랑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해요. 이미 첫 번째 소프트웨어 샘플까지 넘겼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랑 경쟁이 심한 상황에서 지금 우리 핵심 기술 문제를 남설아한테 넘긴다는 건 우리 손으로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난 절대 반대예요.”기술 분야는 자그마한 차이가 큰 결과를 불러오는 곳이다. 이런 치열한 경쟁 속에서 리스크를 감수하는 건 위험했다.강연찬은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난 설아를 믿어. 걘 절대 우리 정보를 넘기지 않을 거야.”“형은 남설아를 믿는 거예요? 아니면 부부 관계를 믿는 거예요? 둘 사이에 감정이 어떻든 간에 법적으로는 부부고 여전히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우리 회사는 이제 막 시작한 단계고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할 여유는 없어요.”그제야 강연찬은 남설아가 왜 자기 회사로 오길 꺼렸는지 깨달았다
장숙자는 남설아가 나은이를 떠올리는 걸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설아 씨, 나은이는 이제 없어요. 부디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남설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나은이에게 약속했어요. 잘 살아가겠다고. 난 그 약속을 지킬 거예요.”그녀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나은이의 사진을 바라보았다.“나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잘 살아갈 거예요.”남설아의 태도가 이렇다 보니 장숙자는 더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말을 해봤자 그녀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 뿐이었다.결국 장숙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설아 씨, 전 정말 설아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때 배서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남설아 품에 안긴 작은 생명체를 보곤 얼굴을 찡그리며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더러워 죽겠네.”남설아는 반사적으로 코코를 꼭 끌어안고는 눈살을 찌푸린 채 배서준을 바라보았다.이 남자는 도대체 요즘 왜 이러는 걸까, 예전에는 그렇게 집에 돌아오라는 부탁에도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요즘은 왜 이렇게 뻔뻔하게 찾아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자기는 이미 이 집을 나왔는데 대체 왜 이토록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건지, 정말 지긋지긋했다.“서준 씨, 왜 또 왔어요?”남설아는 코코를 안고 일어서며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나는 네 남편이야. 내가 여기 안 오고 어디 있어야 하는데?”배서준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치며 짜증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는 남설아가 품 안의 작은 고양이를 보호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더욱 기분이 상했다.“회사에 출근한다고 한 게 다 빈말이었나 보네. 이제 보니까 역시 네 성격은 절대 안 변하는구나. 고작 고양이 한 마리에 정신이 팔려서는, 네가 말하던 꿈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결국 다 허울뿐이었네.”배서준은 의자에 털썩 앉아 남설아를 내려다보며 비꼬았다.사실 이런 말다툼은 지난 몇 년 동안 두 사
“유라 씨였군요.”차혜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투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다.“서준 씨도 같이 왔네요.”“사모님, 안녕하세요.”배서준도 서유라 뒤를 따라 인사를 건넸다.“유라 씨,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졌나요?”차혜미는 의례적인 말투로 물었다.“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서유라는 웃으며 대답했고 그 얼굴에는 자신감이 엿보였다.이번 기회에 차혜미 앞에서 이미지를 조금 회복해보려는 속셈이었다.그녀는 차혜미가 들고 있던 가방을 보며 곧장 칭찬을 시작했다.“사모님, 정말 안목이 좋으세요. 저 가방은 이번 시즌 신상인데 저도 얼마 전에 소개 영상 봤거든요.”서유라는 자연스럽게 자신도 그 가방에 관심이 있다는 듯 말하며 호감을 얻어보려 했다.하지만 차혜미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려 남설아를 향해 말했다.“설아 씨, 이 가방은 설아 씨가 추천해준 거잖아요. 어때요, 괜찮죠?”“네, 사모님께 정말 잘 어울리실 거예요.”남설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그렇죠, 나도 마음에 들어요.”차혜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이걸로 하죠.”그녀는 점원에게 말했다. “이 가방 포장해주세요.”“네, 사모님.”점원은 공손하게 대답했다.서유라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그녀를 무시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사람들이 많은 매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그녀는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욕감과 질투심이 동시에 끓어올랐다.서유라는 남설아를 향해 노골적으로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지금이라도 당장 남설아를 물어뜯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배서준 역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차혜미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남설아를 편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자신들과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그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서유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차혜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여전히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유라 씨, 아직 몸도 다 회복 안 됐을 텐데 무리하지 마세요.
식탁 위에서 남설아는 정신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식사 예절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서둘러 먹는 모습이었다.마치 무언가 급하게 가야 할 일이 있는 듯했다.강연찬은 그녀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설아야, 좀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그는 말하며 조심스럽게 물 한 잔을 따라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오빠, 괜찮아.”남설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하며 계속해서 음식을 입에 넣었다.“서강 그룹 사모님이랑 쇼핑 약속이 있어서 빨리 먹고 가야 해.”“쇼핑?”강연찬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눈치였다.“너랑 사모님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어?”“회사 일 때문이지.”남설아는 밥을 삼킨 뒤 설명했다.“서강 그룹이 우리 쪽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여. 이런 기회는 꼭 붙잡아야 하잖아.”“그렇구나.”강연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마음에 덧붙였다.“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안전도 챙기고.”“응, 알겠어.”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 음식을 다 삼킨 후 그녀는 먼저 제안했다.“쇼핑 끝나면 오빠가 데리러 와줄래?”“응, 당연하지.”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강연찬은 기분이 좋아졌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오빠는 천천히 먹어. 과일 좀 준비해올게.”남설아는 차혜미와 시내 중심에 있는 대형 쇼핑몰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한 그녀는 쇼핑몰 입구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췄다.차 문이 열리고 차혜미가 차에서 내렸다.“사모님, 오셨어요.”남설아는 서둘러 다가가며 밝고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설아 씨, 오래 기다리셨죠?”차혜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아니에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남설아가 대답했다.“그럼 들어가 볼까요?”“네.”두 사람은 웃으며 함께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고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었다.차혜미는 비록 연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전혀 거들먹거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남설아는 기쁨에 겨워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이 좋은 소식을 곧바로 강연찬에게 알렸다.“오빠, 서강 그룹이 우리랑 협력하기로 했어!”남설아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해냈어!”“정말이야?”강연찬도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정말 잘 됐다. 난 처음부터 네가 잘 해낼 거라 믿었어.”“이건 다 오빠 덕분이야.”남설아는 진심으로 말했다.“오빠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렇게 순조롭진 않았을 거야.”“나한테 그럴 필요 없어.”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이건 우리 둘이 함께 이뤄낸 성과잖아.”“응!”남설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서강 그룹이라는 큰 파트너를 얻었으니 오늘은 제대로 축하해야겠어.”“좋아.”강연찬이 말했다.“어떻게 축하하고 싶어?”“오빠가 정해줘.”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난 오빠를 믿어.”“그럼 내가 준비할게.”강연찬이 말했다.“분명 마음에 들 거야.”“응, 기다릴게.”남설아가 환하게 웃었다.그날 저녁, 강연찬은 직접 요리를 해 한 상 가득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또한, ‘협력 성사 축하’라는 문구가 적힌 케이크도 샀다.“와 너무 푸짐하다.”남설아는 차려진 음식을 보고 감탄했다.“오빠, 진짜 대단해.”“맛있게만 먹어주면 돼.”강연찬은 웃으며 말했다.“얼른 먹어봐.”“응.”남설아는 젓가락을 들고 한입 먹어보았다.“맛있어. 오빠, 요리 실력 엄청나게 늘었네.”“맛있다니 다행이다.”강연찬이 말했다.“앞으로 자주 해줄게.”“좋아.”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는 매일 맛있는 거 먹겠네.”두 사람은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분위기는 무척 따뜻하고 편안했다.“이번 일도 오빠가 곁에서 도와준 덕분이야.”남설아는 기쁜 얼굴로 잔을 들며 말했다.“오빠가 함께해줘서 나도 버틸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오빠.”남설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오빠가 있어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설아야, 넌 원래부터 훌륭한 사람이야. 난 단지 옆에서 조금 도왔을 뿐이야
서유라는 병원에서 며칠 더 머물렀고 그 며칠 동안 배서준은 거의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 곁을 지켰다.그 모습에 서유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역시 이 계략은 언제 써도 효과 만점이다.하지만 그녀도 단순히 아픈 척만 해서는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배서준이 완전히 자기에게 빠지도록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이날도 배서준은 평소처럼 병상 옆에 앉아 사과를 정성스레 깎고 있었다.서유라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서준아, 나 계속 민폐만 끼치는 거 같아. 회사 일은 괜찮아?”“괜찮아, 신경 쓰지 마.”배서준은 깎은 사과를 서유라에게 건네며 말했다.“회사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넌 몸이나 잘 추슬러.”“하지만...”서유라는 말을 맺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왜? 무슨 일 있어?”배서준은 다정하게 물었다.“그냥 내가 이렇게 아프기만 해서 너한테 짐이 되는 건 아닐까 해서.”서유라는 눈을 내리깔며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 널 짐처럼 느낄 리가 있겠어?”“그래도...”서유라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회사 상황이 안 좋다는 말도 들리고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그런 소리 하지 마.”배서준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회사의 일은 나 혼자 감당 못 해서 그런 거야.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날 위로하려는 거라면 그런 말 안 해도 돼.”서유라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알아. 결국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까지...”“유라야, 그건 진짜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회사 일은 내가 잘 정리할 테니까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응.”서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뻐했다.역시나 배서준은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에 가장 약했다.불쌍한 척, 약한 척, 조금만 애교를 부리면 뭐든 들어줄 것이다.“난 처리할 일
“설아는 잘못한 게 없어요. 배 대표님이 뭔데 이렇게 몰아붙이는 거죠?”강연찬이 단호하게 말했다.“이건 나랑 남설아 사이의 일이에요. 강 대표님이 끼어들 일은 아닙니다.”배서준은 냉랭하게 응수했다.“지금 설아는 내 파트너이자 내 친구입니다.”강연찬의 말투는 확고했다.“배 대표님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설아를 몰아붙이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몰아붙인다고요?”배서준은 비웃으며 말했다.“내가 언제 남설아를 몰아붙였다는 겁니까?”“아닌가요?”강연찬이 되물었다.“됐어, 오빠. 그만해.”남설아가 나섰다.“나는 괜찮아. 이런 사람들과는 굳이 말 섞을 필요 없어.”남설아의 말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그래도 나 지켜줘서 고마워, 오빠.”“우리가 그런 말 할 사이야?”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너만 괜찮으면 됐어.”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송우민은 조용히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그는 배서준이 아직 남설아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눈치챘고 그 점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배서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그런 그가 남설아에게 밀린다는 사실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만약 남설아가 아직도 배서준을 좋아한다고 믿게 만든다면 그는 분명 어떻게든 다시 붙잡으려고 할 것이다.그러면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연회가 끝난 후, 배서준과 서유라는 차로 돌아왔다.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서준아, 나 너무 쓸모없는 사람이지?”서유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계속 너한테 민폐만 끼치고, 나 너한테는 짐 같은 존재지?”“바보야, 그런 말 하지 마.”배서준이 다정하게 달랬다.“넌 짐이 아니라 내 소중한 사람이야.”“하지만 난 자꾸 널 힘들게 하고 화나게 하잖아.”서유라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나 진짜 무능한 사람 같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울지 마, 유라야. 울지 마.”배서준은 그녀를 안으며 애틋하게 말
배서준은 고개를 홱 돌려 남설아를 노려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거기서 뭐 해? 빨리 의사부터 부르러 가야 할 거 아냐!”남설아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서유라의 연기는 참으로 어설펐다.이렇게 진부한 수법으로 배서준을 속이려 들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굳이 그녀를 들춰내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배서준은 이미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믿고 있었고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밖에 안 들릴 것이다.“알겠어요, 의사 부를게요.”남설아는 담담히 대답하고 돌아섰다.그녀는 한쪽 구석으로 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끊은 뒤, 입가에는 비웃는 듯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서유라, 이번에는 네가 망가질 차례야. 기다려 봐.’연회장 안은 서유라의 모습으로 인해 술렁이기 시작했다.여러 사람이 몰려와 그녀의 상태를 걱정하며 물었다.“유라 씨, 괜찮아요?”“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배 대표님, 유라 씨 빨리 병원으로 모셔야겠어요.”사람들이 각자 떠들어대며 현장은 점점 어수선해졌다.배서준은 서유라를 품에 안고 초조함에 휩싸였다.그는 서유라가 왜 갑자기 아픈 건지 몰랐지만 속으로는 분명 남설아가 무슨 말을 해서 그녀를 자극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그렇게 생각하자 남설아에 대한 미움은 더욱 깊어졌다.“비켜주세요. 다들 좀 비켜줘요.”배서준은 크게 외쳤고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실려 있었다.“유라가 쉬어야 하니까 제발 좀 그만들 하세요.”사람들은 그의 기세에 눌려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길을 비켜주었다.배서준은 서유라를 안은 채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그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내내 그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 있었고 운전대를 쥔 손에는 핏줄이 불쑥불쑥 솟아 있었다.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조수석에 기댄 서유라는 슬며시 배서준의 표정을 살폈다.그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는 의기양양했다.예상대로였다. 자신이 아픈 척
서유라는 싸움에서 진 사람처럼 기가 죽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배서준의 이미지도 사람들 눈에 한순간에 추락했고 그는 무척이나 난처하고 부끄러웠다.그는 점점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만약 그때 남설아와 이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초라해지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연회가 끝난 뒤 배서준과 서유라는 함께 차에 올랐다.“서준아, 미안해.”서유라는 고개를 숙인 채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오늘 내가 괜히 설아 씨한테 차를 우리라고 제안했어. 설아 씨가 그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너 잘못 아니야.”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피곤한 어조로 말했다.“남설아가 괜히 잘난 척을 한 거지.”그는 서유라가 마음 아파하는 게 안쓰러워 모든 잘못을 남설아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그래도 난 아직도 미안해.”서유라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내가 너를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게 했잖아.”“바보야, 네 탓이라고 한 적 없어.”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응.”서유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배서준의 품에 안겼다.하지만 배서준의 마음은 딴 데로 향하고 있었다.그는 과거의 남설아를 떠올리고 있었다.한때 그녀는 단지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매일 자신과 아이만 바라보며 살아가던 그녀가 도대체 언제 다도를 배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다도 실력이 이 정도라니, 서 회장 부부가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지금 저 여자가 내가 알던 남설아가 맞는 건가?’그는 마음속 깊이 혼란스러웠다.남설아는 분명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이 쉽게 이해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서유라는 배서준의 시선이 자꾸만 허공으로 향하는 걸 느끼고는 그가 또다시 남설아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그녀의 마음속에 위험 신호가 울렸다. 그녀는 반드시 이 둘의 접촉을 막아야만 했다.‘남설아, 가만 안 둬. 네가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서유라는 속으로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그녀의
“서 회장님, 사모님, 과찬이세요.”남설아가 겸손하게 말했다.“그냥 가볍게 내린 것뿐이에요.”“남 대표 너무 겸손하시네.”서기찬이 말했다.“이건 아무렇게나 내려서 나올 맛이 아니야. 확실히 기본기와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그러게요, 설아 씨.”차혜미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차 내리는 솜씨가 정말 대단해요. 제가 제자로 들어가고 싶어질 지경이에요.”“사모님, 또 농담하시네요.”남설아가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이런 사소한 재주가 어찌 사모님의 눈에 찰 수 있겠어요?”“설아 씨가 너무 겸손하신 거예요.”차혜미는 찻잔을 바라보며 더욱 남설아에게 호감을 드러냈다.“차를 이렇게 잘 내리시는 걸 보니 정말 감탄밖에 안 나와요.”“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남설아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유라는 마음속에 질투심이 더욱 불타올랐다.남설아가 이렇게까지 다도에 능할 줄은 몰랐다.게다가 자신이 의도한 모욕은커녕 오히려 남설아는 그 자리에서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칭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서유라는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설아 씨의 다도 실력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듣기로 다도도 여러 유파가 있다고 하던데 설아 씨는 어느 쪽이야?”그녀는 남설아의 다도를 비하하려는 의도로 체계 없는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암시하고자 했다.“특정 유파를 따로 배우진 않았어.”남설아는 침착하게 말했다.“그저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내 느낌에 따라 우려내는 것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시 비웃듯 말했다.“그럼 설아 씨만의 파가 생긴 거네? 대단해.”그녀는 남설아만의 파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남설아의 다도가 비전문적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유라 씨, 또 농담하네.”남설아는 작게 웃으며 조롱이 섞인 말투로 답했다.“나는 그냥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일 뿐이야. 감히 한 유파라니.”“남 대표님 너무 겸손하세요.”차혜미가 곧장 나섰다. 그녀는 서유라의 말에 담긴 악의를 알아차리고
“고마워.”남설아가 말했다.“설아 씨, 예전에 서준이 곁에 있을 때도 이렇게 늘 꾸미고 다녔어?”서유라가 불쑥 물었다. 말투에는 살짝 떠보는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남설아가 한때 배서준의 곁에 있었던 시절을 언급하며 남설아의 과거를 상기하려 했다.남설아는 서유라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유라 씨, 농담이 지나치네. 그때의 나는 그저 서준 씨의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했을 뿐이야.”“그래?”서유라는 다소 우쭐한 말투로 말했다.“나는 설아 씨가 차를 따라주고 시중드는 데 능한 줄 알았어. 내조를 하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잖아?”그녀는 차를 따라주고 시중든다는 것을 일부러 강조해서 말하며 남설아를 모욕하려 했다.“유라 씨 말이 맞아. 내조를 하는 데는 정말 정성이 필요해.”남설아는 차분하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사업을 하는 데 더 능한 편이야.”“그래?”서유라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오늘 설아 씨가 잘해야겠네. 여기 모인 분들 다 업계 내로라하는 분들이니까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겠어.”“걱정해줘서 고마워, 유라 씨.”남설아는 작게 미소 지으며 빈정거림이 담긴 말투로 답했다.“하지만 나는 유라 씨를 실망하게 할 일은 없을 거야.”“그래야지.”서유라는 속으로 비웃으며 남설아가 뭘 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는 듯 말했다.“설아 씨, 차 따르는 데 능하다니까 오늘 여기서 차 한 번 내려보지?”서유라가 제안했다.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묻어 있었다.“여기 좋은 차도 있고 멋진 다기 세트도 있어. 설아 씨의 손재주로는 딱 어울릴 것 같네.”그녀는 손재주라는 말을 다시금 강조하여 말하며 남설아를 하찮은 시중 드는 사람으로 몰아가려 했다.하지만 남설아는 그런 의도를 바로 눈치챘음에도 전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도전을 받아들였다.“좋아, 유라 씨가 이렇게 운치 있는 제안을 하니 한 번 해볼게.”남설아는 여유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다만 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