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를 거둔 기양은 몸을 일으켜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날 때린 게 이로써 두 번이다. 이번에는 네가 가족을 상실한 슬픔에 있음을 감안해 넘어가겠다. 다만 명심하거라. 네 목숨은 내 것이다. 어미의 죽음을 핑계로 죽으려 들면 내 당장 강연해에게 네 어미의 시체를 들개들 먹이로 만들라고 지시하겠다.”그의 손이 강만여의 얼굴을 부드러우면서도 강압적인 점유욕이 느껴지게 어루만졌다.그의 눈빛은 잔인하면서도 단호했다. 마치 세상 만물을 무시하는 듯 모든 생사가 자기 손아귀에 있는 듯한 위압감을 풍겼다. 그녀는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기양은 그녀의 처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방금까지만 해도 서둘러 그녀에게 가고 싶었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천근만근 무거워진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그는 한 번도 이렇게 주저해 본 적이 없었다.피 묻은 칼로 선황제의 가슴을 찌를 때도 망설임 없었건만, 지금 이 문 안의 궁녀 때문에 가슴을 졸이며 망설였다.기양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문을 열었다.안에서 지키던 내관 두 명이 허리를 굽히며 문을 닫아 주었다.방 안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그녀의 눈동자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호흡조차 희
“폐하, 만여 낭자가 깨어났습니다.”서청잔이 두꺼운 문발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아뢰었고 얼마 뒤, 검은 곤룡포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깨어났다고?”비록 평온해 보이는 목소리였으나, 이리 서둘러 나오는 걸 보면 여간 속 탄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서청잔은 허리를 조금 펴고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감정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 이면은 한 여인에 대한 걱정이었다.“네. 한번 들러 보시겠습니까?”기양은 그의 얼굴을 살피며 그녀에 대한 특별한 감정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했다.그러나 아무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황제
서청잔이 허리를 굽혀 이불 위에 눈물자국을 남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냉담하기로 유명한 서청잔의 눈에 이 순간만큼은 넘쳐흐를 듯한 연민으로 가득했다.그는 어려서부터 고아였고 들개와 먹을 것을 다투고 천지를 집 삼아 살아왔다. 세상의 차가움을 다 보았고 인간의 따듯함과 냉정함을 겪었기에 더는 아무에게도 연민을 느끼지 않았다.하지만, 이 여인만은 예외였다.그가 맞아 죽을 뻔했던 그날, 강만여는 자기의 허약한 몸으로 그를 감싸줬고 거센 발길질을 막아줬다.피를 토하며 쓰러질 때까지 그를 놓지 않았고, 그 핏자국은 그의 가슴에
“만여야.”그녀의 이름을 부른 서청잔은 침상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만여야, 네가 얼마나 슬픈지 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지금부터 하는 말 귀담아서 잘 들어. 밤사이 고민하고 내일 아침에 답해줘.”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힘조차 없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비통함을 억누르며 그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눈물 한 방울이 속눈썹을 타고 아래로 떨어지더니 곧이어 그녀의 양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이제 어머니가 없는 몸이 되었다. 5년간, 자금성을 벗어나 어머니와 다시 만날 날만 기
손량언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농이 지나치십니다. 서 장인은 소신처럼 내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서 장인까지 의심하십니까?”기양은 얼굴을 찌푸린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도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으나, 수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궁에 여인이들이 이리도 많은데 그자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쓴 적이 있더냐? 기절한 궁녀를 안고 온 것은 둘째 치고, 평소의 그였다면 눈 속에서 얼어 죽어도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다.”“하오나 폐하를 위해 그런 것이 아니 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