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듣자 안 그래도 어두웠던 황제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폭풍전야, 고요함 속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황제는 강만여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몸을 돌려 침전 밖으로 향했다.
강만여는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진왕은 삼황자를 칭하는 호칭이었고, 진왕비는 곧 강만당, 그녀의 언니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를 위기로부터 구한 것은 결국 언니였다.
그러다 문득 스치고 지나간 생각, 황제는 어쩌면 아직 언니를 잊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언니가 쓰러졌다는 말에 주저 없이 달려갈 리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언니가 왜 건청궁 앞에 쓰러졌을까? 설마 진왕을 위해 탄원이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 소복자가 말한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힌 일이라는 게, 이거였나?'
강만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마음을 다스린 뒤, 다시 일어서 문제의 머리카락을 찾으러 침상으로 돌아가 이불을 들어올렸다.
정말 이 위에 머리카락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황제가 다시 이 이불로 꼬투리를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교체해버리는 편이 나았다.
강만여는 다시 침상을 정리한 뒤, 침전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곧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소복자가 어린 내시 두 명과 함께 다가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강 상궁님은 저녁에 또 나오셔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폐하께서 낮잠은 안 주무실 듯합니다. 그만 가보셔도 될 듯합니다."
강만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한 뒤,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건청궁의 침전궁녀는 총 두명으로, 교대로 근무한다. 원래 이 숙소는 설영(雪盈)이라는 여관과 함께 썼었다.
하지만 며칠 전, 설영이 갑자기 감기에 걸려 약을 복용하다 호전되지 않자, 감염을 막기 위해 규정에 따라 병자들이 머무는 태평소(太平所)로 옮겨졌다.
때문에 강만여는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다른 궁녀들에겐 이건 기회였다. 이대로 설영이 못 돌아오게 되고, 강만여가 출궁하게 되면 건청궁 침전궁녀 자리는 두 개나 남게 된다. 궁녀들은 서로 앞다투어 강만여의 가르침을 받으려 애썼다. 하루라도 더 빨리 숙달된 모습을 보여 남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곳 건청궁은 황제가 머무는 곳이었고, 침전궁녀는 황제 가까이 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책 중 하나였다. 만약 그러다가 황제의 눈에 들기라도 한다면, 고작 궁녀가 아닌 비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건 궁녀들 대다수가 바라는 신분상승의 길이었다.
하지만 강만여는 알고 있었다. 황제는 결코 아무에게나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을, 특히 침전궁녀는 더했다. 왜냐면 그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용빈(容嫔) 역시 선대 황제의 침상을 정리하던 침전궁녀였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의 생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황제는 강만여를 조롱하고 괴롭혔지만, 결코 자신의 침상 위로 들이진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요 며칠 그가 보여주는 행보다 낯설었다. 지난 5년 동안 보여줬던 행동과 너무 상반되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지금 그녀에게 소유욕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강만여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해쳐 나가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날이 지려면 한참, 강만여는 고민하는 것을 멈추고 겉을 챙겨 설영을 보러 태평소로 향했다.
오늘은 흐린 날씨, 당장이라도 하늘에서 눈이 쏟아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겨울이 되자, 태평소엔 환자들이 넘쳤고 곳곳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설영은 입구와 가까운 방에 머물고 있었다. 황제 근처에서 일하던 침전궁녀라 나름 신경을 써준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약을 꼬박꼬박 먹고, 따뜻한 이부자리에 쉬어도 설영은 나아지는커녕 점점 앙상해 갔다.
설영은 강만여의 방문에 허둥지둥 손수건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괜히 기침하다가 병을 옮길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여기 다 병자야. 괜히 병 옮기면 어떡해... 나도 없는데 너라도 폐하의 시중을 들어줘야지."
하지만 강만여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은 원래 튼튼해 이런 병 따위 걸리지 않는다며 손짓으로 설명했다.
"어휴,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괜히 입 방정 떨다가 큰 코 다친 사람 한둘 봤어? 그리고 이틀 뒤면 출궁이잖아. 괜히 병 걸려 고생하면 안 되지."
강만여는 그 말에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설영은 멈추지 않고 벌써 그녀가 이미 출궁한 듯 그 뒤를 고려했다.
"출궁하면 어머니가 마중 나와 주시겠네? 다섯 해 만에 드디어 가족들이랑 설을 보낼 수 있겠어. 내년 봄엔 너의 할머니께서 시집갈 낭군님도 알아보시겠다. 그러면 넌 아이도 낳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 알겠지?"
그 말에 강만여가 애써 눈물을 참으며 손짓으로 대답했다.
'너도 곧 나갈 수 있어. 우리 내년 이맘때쯤 밖에서 만나자.'
궁녀는 해마다 한 번, 해가 바뀌기 전 설날에 맞춰 출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즉, 설영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어지는 기회였다. 그 말을 듣자, 설영은 병색이 가신 듯 얼굴에 살짝 생기가 돌아왔다.
"그럼 그때 되면 네가 마중 나와 줘. 예쁘게 차려 입고 말이야.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확인시켜줘, 알겠지?"
강만여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의 증표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설영이 웃으며 말했다.
"이 나이에 무슨 손가락 걸기야, 유치하게."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약속을 맺었다.
"만여야, 우리에게도 꼭 봄은 올 거야."
강만여는 점점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어졌고, 괜히 울음이라도 터지기 전에 설영을 짧게 안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병을 옮길까 걱정됐던 설영도 얼른 그녀를 배웅했다.
"얼른 가. 출궁 날에 한 번만 나 보러 오면 돼."
강만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운 마음을 안고 태평소를 떠났다.
어느덧 해질 무렵이 되었고, 하늘은 더 짙게 흐려졌다.
강만여는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황제의 취침 준비를 했다.
요 며칠 있었던 일들 때문에, 그녀는 황제의 그림자만 봐도 몸이 움츠러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두려워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가 정리를 마치자, 황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그는 다른 궁녀들이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물리고 강만여만 남게 했다.
황제는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아까 강만당이 실신했던 일 때문인 것 같았다.
강만여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이리 와서 옷 좀 거들 거라."
황제가 침상에 앉아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질렀다. 평소에 절대로 힘든 티를 내지 않던 그였기에, 매우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강만여는 잠시 망설였다. 침전궁녀의 임무 중 하나가 황제의 옷 시중을 드는 것이긴 했지만, 기양은 자신의 몸에 궁녀가 닿는 것을 싫어했기에 평소엔 내시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었다.
하지만 갑자기 자신에게 이러한 명령을 내리자,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황제, 거절할 자격 따위 주어지지 않았다.
강만여는 공손히 허리를 굽힌 채 조심스레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런 다음 숨죽이고 그의 옷깃에 달린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황제의 옷과 침구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비단으로 만들어졌기에, 침전궁녀의 손은 늘 정성껏 관리되어야 했다.
강만여의 손은 원래도 희고 가늘었지만, 매일 옥지고(玉肌膏)를 발라 매우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또한 손톱도 짧고 단정하게 다듬어진 상태였으며 은은한 분홍빛이 돌았다.
그랬기에 늘 길고 뾰족하게 다듬어져 있는 후궁들의 손보다 더 황제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황제는 손을 잠깐 움찔거렸을 뿐, 진짜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강만여의 손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갑고도 부드러운 촉감, 그의 심장이 갑자기 두근두근 빨리 뛰기 시작했다.
황제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전날 강제로 입맞춤을 당했던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황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감히... 나를 거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