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귀비는 복잡한 표정으로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강만여를 바라봤다.
"일어나거라. 너 때문에 이 위험을 무릅쓴 것이 아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강만여는 고통에 부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귀비가 다시 말했다.
"폐하께서 너를 나름 특별히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냥 후궁이 되지 그러느냐? 괜히 고생을 자처하지 말고."
하지만 강만여는 고개를 저으며 평온하고도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의지가 확고한 것을 본 난귀비는 속으로 안도의 함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폐하는 그리 만만한 분이 아니시다. 너를 지키고자 소복자까지 남긴 것을 보니, 낮잠은 피해도 밤은 어려울 듯싶다. 저녁에 또 누굴 보내서 널 빼내야 할지 고민해보마."
강만여는 두 손을 모아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정말 감나무신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남은 이틀 어떻게 황제를 피할까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난귀비가 먼서 손을 내밀어주었다. 그뿐 아니라, 그녀의 출궁을 위해 다른 후궁들도 손을 보탤 것이라 했다.
물론 후궁들이 무슨 의도로 이러는 것인지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히 출궁을 할 수 있다면, 그게 누구든 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급 내기사 강 태의(江太医)와 함께 돌아왔다. 강만여는 난귀비의 지시에 따라 기절한 척 침상에 다시 누웠다.
강 태의는 간단히 진맥한 뒤, 침을 놓고 몸을 덥혀줄 약을 처방했다.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으니, 곧 깨어날 것입니다."
이대로는 얼마 버틸 수 없다는 걸, 강만여도 알고 있었다.
황제가 떠나기 전 내렸던 명령, 살아 눈을 뜬다면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가야 했고 계속 못 일어날 경우 죽은 것으로 간주해 시신이 되어 집으로 돌려보내질 것이다.
죽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반드시 살아서 궁을 나가야만 했다. 이 명령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순간 그녀는 황제가 자신의 연기를 눈치챈 건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 하지만 진짜 알고 있었다면 결코 이 정도로 끝냈을 황제가 아니었다.
난귀비는 황제가 그녀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고, 성은을 입어 황궁에 남을 생각이 없는지 물었지만, 강만여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궁을 나가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사랑하는 이와 남은 평생을 보내는 것, 그녀가 바라는 것은 이런 자유였다.
강만여는 얼마 전 서청잔이 한 말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다시 굳건히 다짐했다.
'그래, 조금만 버티자.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면, 모레 아침...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5년 전 화려한 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휘날리던 소년을 떠올렸다.
'지금도 그 모습일까? 아니면 많이 변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 소년이 어떤 모습으로 변했든 반드시 알아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건청궁, 황제가 침전으로 돌아오고 꽤 시간이 들었지만 침상으로는 올라가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궁녀들이 정리한 침상이 못마땅한 것도 아니었고, 온도와 향도 모두 완벽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이 불안하고 짜증났다.
황제는 결국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다 겨우 억지로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손량언은 조용히 담요를 덮어주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부채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동시에 다른 궁인들도 황제의 소식을 듣고 모두 숨죽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히 이 상황에 눈에 띄였다가는 엄한 불똥이 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제2총관인 호진충(胡尽忠)이 손량언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어쩌면 좋습니까? 강 상궁이 출궁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폐하의 심기가 좋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진짜 출궁하시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조용히 하거라."
손량언이 말했다.
"안 그래도 좀 전에 소복자도 사고쳐 한 소리 들었는데, 또 헛소리인가? 폐하께서 강 상궁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것이라고 누가 그러더냐?"
"그걸 말해야 압니까?"
호진충이 답했다.
"폐하 본인만 인정하지 않으실 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요. 그냥 출궁하지 말라고 명하시면 될 일을, 뭘 저리 어렵게 구시는지... 아유, 속 터집니다."
그러자 손량언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정 급하면 네가 직접 폐하께 말해보지 그러느냐? 그것도 아니면 폐하의 마음을 풀 방법이라도 찾아오던가. 그러면 내 기꺼이 이 총관자리도 네에게 내어주마."
"제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호진충은 겉으론 손사례를 쳤지만, 속으로는 눈을 반짝였다.
손량언의 말을 들으니,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진짜 황제의 마음을 풀 수 있다면, 차기 총관 자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일이 아닐테니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황제는 겨우 겉잠에 드나 싶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손량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영화궁(永和宫)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강화공주가 아파 울고불고 아무것도 드시지 않아고 있다고 장비마마께서 폐하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짜증이 났지만, 잠에서 깨어나 밖을 쳐다봤다. 어느덧 해가 뉘엇뉘엇 지고 있었다.
"또 어디가 아프다고 하더냐?"
기양이 황제의 자리를 오른 뒤로 본 유일한 자식, 가황공주는 자금성의 보물이자, 그가 가장 아끼는 존재였다. 그런 공주가 아플때면 궁은 한차례 크게 떠들썩해지곤 했다.
황제는 손량언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은 뒤, 또 가마를 타고 영화궁으로 향했다.
이 소식은 곧 익곤궁에도 전달되었고, 난귀비는 강만여에게도 알려주었다.
"어서 가거라.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셨으니, 지금이 기회이다. 얼른 업무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 쉬거라. 장비마마께서 널 위해 공주까지 희생시켰다. 절대로 실수하면 안 된다."
강마여는 거의 반나절을 누워있었기에, 몸이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그녀는 얼른 난귀비에게 인사를 건네고 소복자와 함께 건청궁으로 돌아왔다.
소복자는 이 내막을 알지 못했기에 그저 조심스레 그녀를 부축하며 걱정스러움을 내비쳤다.
"강 상궁님, 조금만 더 참으면 됩니다. 오늘만 지나면 다시 가족들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강만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위로에 마음에 따뜻해져 잠시 추위마저 잊었다.
모두가 그녀에게 조금만 버티라고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그러니 반드시 무사히 이틀을 버텨야만 했다.
출궁 전날은 인수인계와 여러 절차들을 밟아야 해 당직은 면제된다. 운이 좋으면 궁 안에서 간단한 송별회도 열 수 있었다.
그러니 사실상 오늘만 무사히 지나면 내일부터는 공식적으로 건청궁에 올 필요가 없었다.
한편, 황제는 영화궁에 도착하자마자 가화공주를 품에 안아야만 했다. 공주는 그제야 원하던 것을 얻은 것마냥 울음을 그치고 어리광부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자신의 딸을 무릎에 앉힌 뒤, 잘게 다져진 고기와 달걀죽을 숟가락으로 떠먹이며 달래주었다.
공주는 곧 배가 빵빵하게 불러왔고, 여유롭게 황제의 옷자락에 달린 금색 노리개를 가지고 놀았다.
장비와 궁녀들은 그런 두 부녀 사이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희가 달랠 때는 전혀 울음을 멈출 생각을 안 하더니, 폐하가 오시니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지셨네요. 정말 다정한 부녀사이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자신의 옷에 달린 노리개를 가지고 놀고 있는 딸을 보며 전날의 강만여를 떠올렸다.
그렇게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졌고, 황제는 아이가 가지고 놀던 노리개를 떼어준 뒤, 장비에게 안겨주었다.
"난 이만 돌아가도록 하마. 아이가 노리개를 가지고 놀다가 삼키는 일이 없도록 잘 지켜보거라."
장비는 아이를 품에 안으며 초조한 마음과 달리 겉으로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공주마마께서 폐하를 무척 그리워하셨답니다. 조금만 더 함께 있어주시면 아니되겠사옵니까?"
그러자 황제의 미간이 찌푸리며 매섭게 장비를 노려보았다.
장비는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티를 낼 수 없어 꿋꿋이 버텼다.
"아직 조정 업무를 봐야 한다.”
이 말을 끝으로 황제는 딸의 볼을 살짝 꼬집은 뒤 몸을 돌렸다.
"밖은 날이 차니, 나올 필요 없다."
"예, 폐하. 그럼 신첩, 여기서 배웅하겠나이다."
황제는 떠났고, 장비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서둘러 하급 내시를 불렀다.
"건청궁에 가서 그 계집이 아직도 있는지 확인해 보거라."
내시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고, 장비는 공주를 품에 안은 채 가슴을 쓸어내렸다.
강만여 하나 때문에 자신의 딸을 반나절이나 굶겼다. 성공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할 수 있는 만큼 해주었다. 이 다음은 강만여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