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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화 눈이 그친 자리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9-07 18:22:35

밤새 내리던 눈은 새벽이 되어서야 그쳤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희미한 빛이 방 안을 천천히 밝히고 있었다.

세린은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면서도 머릿속은

어젯밤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북쪽. 군사들.

그리고 전투가 있었다는 소문.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서로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세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새벽

노을 아래 펼쳐진 마을은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지붕마다 눈이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고, 나뭇가지들은 무거운 눈을 견디며 조용히 늘어져 있었다.

어제까지 보이던 발자국들도 대부분 눈에 덮여 있었다.

세린은 창문에 손을 대고 바깥을 바라봤다.

눈이 그치면 조금은 괜찮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너무 조용했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아직 들리지 않았고,

길을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세린은 그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숨소리까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이상하네.”

작게 중얼거린 순간,

밖에서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린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문밖에서 익숙한 발걸음이

들려왔다. 천천히.

일정한 걸음.

세린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진안이었다. 그의 어깨 위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조금 남아 있었다.

세린은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또 밖에 나갔다 왔어요?”

“그렇소.” “아침부터요?”

“잠깐.” 짧은 대답.

세린은 진안을 바라보다가 한숨처럼 웃었다.

“진안은 아침부터 참 부지런하네요.”

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세린은 그의 옷에 붙은 눈을

발견했다. “잠깐만요.”

세린이 다가가 손으로 그의 어깨에 남아 있는

눈을 털어냈다. 진안이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세린은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가만히 있어요.”

세린은 다시 어깨에 남은 눈을 털어냈다.

그러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됐어요.”

진안은 말없이 세린을 바라보다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세린도 그를 따라 창밖을 바라봤다.

“눈이 정말 많이 왔네요.” “그렇소.”

“어제보다 더 많이 온 것 같아요.”

“그렇소.” 세린이 웃었다. “또 그렇소.”

진안이 그녀를 바라봤다. “왜.”

“아니, 그냥요.”

세린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진안은 말을 정말 짧게 해요.”

“필요한 말만 하오.”

“그래도 조금은 길게 해도 되잖아요.”

“무슨 말을.” “그건…….”

세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냥 오늘 눈이 예쁘다든지.”

진안은 창밖을 바라봤다.

하얀 눈 위로 햇빛이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잠시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어제의 불안도 잠시 잊을 수 있을 만큼 조용한

아침이었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다그닥. 다그닥.

세린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말 한두 마리의 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마리가 눈 쌓인 길을 밟는 소리가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안 역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린이 창가에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 후 하얀 눈발 사이로 사람들이

나타났다. 군사들이었다.

세린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였다.

“또…….” 군사들은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어제보다 많아 보였다.

말을 탄 사람도 있었고, 걸어가는 군사들도 있었다.

모두 두꺼운 옷과 갑옷을 갖추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이동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린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요 며칠 동안 계속 반복되는

모습이었다. 진안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에도 북쪽으로 가는 것 같아요.”

“그렇소.” “왜 계속 북쪽으로

가는 걸까요?” “알 수 없소.”

세린은 진안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러나 세린은 어쩐지 그의 눈빛이 평소보다

조금 더 깊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진안.” “왜.”

“혹시…… 저 사람들을 아는 거예요?”

진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아니오.” 짧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때 군사들의 행렬에서 한 사람이 잠시 멈췄다.

세린의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군사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아주 잠깐 이쪽 집을 바라봤다.

세린은 자신도 모르게 창문에서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

군사는 곧 다시 말을 움직였다.

행렬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향했다.

발자국과 말발굽 자국만이 눈 위에 길게 남았다.

세린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방금…….” “무엇이.”

“아니에요.”

세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저 사람이 이쪽을 본 것 같아서.”

진안의 눈빛이 아주 잠깐 변했다.

하지만 세린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진안은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시오.” “……네.”

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작은 의문이 남았다.

왜 자꾸 자신이 보고 있는 방향으로 군사들의.

시선이 향하는 것 같을까. 우연일까.

아니면 정말 무언가가 있는 걸까.

세린은 그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오전에는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눈이 많이 쌓인 탓에

사람들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길을 걸었다.

아이들은 눈을 밟으며 웃었고, 어른들은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겉보기에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세린도 약초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마을의 작은 약방에 가져다줄 약초가 있었다.

진안도 뒤따라 나왔다.

세린은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진안.” “뭐.”

“저 따라오는 거예요?”

“그렇소.”

“제가 약초 가져다주는 것뿐인데요.”

“알고 있소.”

“그럼 왜요?”

진안은 잠시 세린을 바라봤다.

“같이 가겠소.”

세린은 잠깐 말을 잃었다.

“……그래요.”

그녀는 괜히 입가에 올라오는 웃음을

숨기며 앞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눈길을 걸었다. 발밑에서 눈이 사각거리며

밟혔다. 세린은 조심스럽게 걸었지만 눈이

깊게 쌓여 발이 자꾸 빠졌다.

세린의 발이 눈 속으로 푹 빠졌다.

“앗.” 몸이 살짝 흔들렸다.

진안이 바로 손을 뻗었다.

세린의 팔을 잡아 중심을 잡아주었다.

“…….” 세린은 잠시 진안을 바라봤다.

“괜찮아요.” “알겠소.”

진안은 손을 놓았다.

세린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굴이 조금 뜨거워진 것 같았지만, .

차가운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약방에 도착하자 주인은 세린이 가져온

약초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약초가 귀한데 잘 가져왔구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그래. 고맙다.”

세린은 미소를 지었다.

진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은 진안을

발견하고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어머나.” 세린이 돌아봤다.

“왜요?” 주인은 진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같이 온 분이…… 참 잘생겼구나.”

세린이 잠시 멈췄다. “아…….”

주인은 웃으며 말했다.

“어디서 온 분인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아주 훤하네.” 옆에 있던 젊은 사람도

슬쩍 진안을 바라봤다.

“그러게요. 눈매가 아주 선명하네요.”

세린은 괜히 진안을 바라봤다.

진안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저 사람은 원래 저래요.”

세린이 작게 말했다. “뭐가?”

“칭찬받아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주인이 웃었다.

“잘생긴 사람들은 원래 그런가 봐.”

세린은 괜히 시선을 피했다.

진안이 그녀를 바라봤다.

“가겠소.” “아, 네.”

두 사람은 약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세린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안은 참 신기해요.” “또 왜.”

“사람들이 잘생겼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관심 없소.”

“역시.” 세린은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두 사람은 다시 눈길을 걸었다.

잠시 후 세린이 걸음을 멈췄다.

“진안.” “왜.”

“저기 봐요.”

세린이 가리킨 곳에는 눈 위에 낯선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과는 달랐다.

한쪽으로 이어진 발자국은 담장 뒤에서

시작되어 골목 끝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세린은 그것을 바라봤다.

“누가 여기 있었던 것 같아요.”

진안의 시선이 발자국으로 향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가시오.” “왜요?” “추우니.”

세린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걸었다.

뒤에 남겨진 발자국은 눈발이 다시

흩날리면서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세린은 몰랐다.

그날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평범했던 겨울날이 조금씩 낯설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진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깊어져 있었다.

무언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그만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평온한 일상에 또 하나의 이름이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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