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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우리가 처음 만난 날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4 09:32:50

‘우리가 처음 만난 날도 내가 정한 거야.’

나는 휴대전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죽은 이태광의 번호로 도착한 문자.

그것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누군가 계획했다는 내용이었다.

“채설주 씨.”

강무겸이 나를 불렀다.

“그 문자, 답장하지 마십시오.”

“왜요?”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줄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곧바로 메시지를 캡처했다.

“답장은 안 해요. 대신 경찰에 제출할 거예요.”

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확인할 게 있어요.”

나는 사진 속 그림을 가리켰다.

“이 그림이 태광이와 만나기 전에 제작됐다면, 태광이는 처음부터 저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잖아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부터 확인해야겠네요.”

나는 가방을 챙겼다.

무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였습니까?”

“액자 수리점이요.”

◇

태광을 처음 만난 건 3년 전이었다.

당시 나는 오래된 가족사진의 액자가 깨져 수리점을 찾았다.

그곳에서 태광은 내 옆에 서 있었다.

“이 사진, 오래됐네요.”

처음 건넨 말이었다.

나는 낯선 남자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짧게 대답했다.

“네.”

그런데 수리점 주인이 액자를 고치는 동안 태광은 계속 말을 걸었다.

“혹시 근처에 사세요?”

“왜요?”

“저도 이 동네에 처음 왔거든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커피 한 잔으로 이어졌다.

그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태광이가 일부러 거기 왔을 수도 있어요.”

차에 올라타며 내가 말했다.

무겸은 안전벨트를 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누가 두 사람의 만남을 준비했는지 확인해야겠죠.”

“태광이가 직접 했을 수도 있잖아요.”

“맞습니다. 아직 어느 쪽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광과 함께했던 시간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그가 먼저 고백했던 날.

결혼하자고 청혼했던 날.

행복하다고 믿었던 순간들이 전부 의심스러워졌다.

◇

수리점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오래전 수리 기록도 남아 있나요?”

“얼마나 오래됐는데요?”

“3년 정도요.”

여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전산 기록은 남아 있을 거예요.”

나는 당시 방문 날짜와 이름을 알려줬다.

여자가 컴퓨터를 확인하는 동안 무겸은 진열된 액자들을 살펴봤다.

“채설주 씨, 맞네요.”

나는 카운터로 다가갔다.

“기록이 있어요?”

“네. 가족사진 액자 유리 교체하셨네요.”

여자는 화면을 확인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결제하신 분이 다르네요.”

심장이 내려앉았다.

“누구요?”

“이태광 씨요.”

“네?”

“비용을 미리 내셨네요.”

나는 무겸을 바라봤다.

태광이 처음 만난 여자에게 액자 수리비를 대신 내준다고 했던 기억은 있었다.

그런데 여자의 다음 말이 이상했다.

“방문하시기 하루 전에 결제됐어요.”

“잠깐만요.”

나는 카운터를 붙잡았다.

“그 사람이 저보다 먼저 돈을 냈다고요?”

“네. 예약도 그분이 하셨는데요.”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액자를 예약한 적이 없었다.

깨진 액자를 들고 처음 방문한 날, 우연히 태광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예약 내용 보여주실 수 있어요?”

여자가 화면을 돌렸다.

예약자 이태광.

수령인 채설주.

방문 예정 시간 오후 4시.

내가 태광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

수리점 밖으로 나오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겸이 내 팔을 가볍게 받쳤다.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나는 몸을 바로 세웠다.

“태광이는 처음부터 저를 알고 있었어요.”

“적어도 그날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왜 모르는 사람인 척했을까요?”

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휴대전화에서 태광과 찍은 첫 사진을 찾았다.

처음 만난 지 일주일 뒤였다.

사진 속 태광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 무겸이 물었다.

“채설주 씨가 수리하러 갔다는 가족사진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집에 있어요.”

“확인해 볼 수 있습니까?”

“왜요?”

“액자에 붙어 있던 수리점 관리번호가 필요합니다. 당시 주문 기록을 더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랍에서 액자를 꺼냈다.

오래된 가족사진은 여전히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액자 뒷면을 살펴보던 무겸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것 좀 보십시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작은 종이 라벨이 붙어 있었다.

'서원미술관 소장품 관리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미술관 이름이 여기 있어요?”

“서원미술관은 이태광 씨가 사망한 곳입니다.”

무겸이 라벨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 아래에는 희미한 숫자가 남아 있었다.

전시실 204.

작품번호 17.

나는 숨을 삼켰다.

“그림이 사라진 전시실 번호도 204였죠?”

“맞습니다.”

나는 곧바로 액자의 뒷판을 열었다.

사진 뒤쪽에 얇은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오래된 전시 목록이었다.

그중 17번 작품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 앞의 여자.'

나는 무겸을 바라봤다.

“이게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

그가 종이 아래쪽을 가리켰다.

작품 제목 밑에는 짧은 문장이 인쇄되어 있었다.

'초상화의 실물 모델은 작품 제작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아래.

모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채설주.

나는 종이를 움켜쥐었다.

태광이 나를 만나기 전부터 누군가 내 이름으로 그림을 제작했다.

그림을 보관했던 미술관의 관리번호는 내 가족사진 액자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중심에 죽은 약혼자가 있었다.

그때 무겸이 낮게 말했다.

“채설주 씨. 이태광 씨가 당신에게 접근한 이유가 단순한 연애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종이 맨 아래에는 작품의 제작 목적이 적혀 있었다.

'대상자 관찰 기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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