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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내 이름으로 된 동의서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4 09:39:49

'대상자 관찰 기록용.'

나는 종이에 적힌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강무겸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누군가 채설주 씨를 관찰하기 위해 그림을 제작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럼 태광이가 저를 감시했다는 거예요?”

“아직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사람은 3년 동안 제 옆에 있었어요. 결혼까지 약속했다고요.”

함께 밥을 먹고, 여행을 가고,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이 누군가의 계획이었다면?

“설주 씨.”

무겸이 처음으로 내 이름을 짧게 불렀다.

“지금은 감정보다 증거가 먼저입니다.”

“당신은 쉽겠죠.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니까.”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종이의 오른쪽 아래를 가리켰다.

작은 관리번호가 인쇄되어 있었다.

SW-204-17.

“서원미술관에서 사용하던 작품 관리번호와 형식이 같습니다.”

“확실해요?”

“감정 의뢰를 받았을 때 관련 자료를 확인했습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럼 당시 자료도 가지고 있겠네요?”

“일부는요.”

“보여줘요.”

무겸은 잠시 망설이다 휴대전화를 꺼냈다.

◇

그가 보여준 것은 이태광에게 받았던 감정 의뢰서였다.

작품명은 '거울 앞의 여자'.

의뢰 목적은 진품 여부 확인.

그리고 의뢰서 하단에는 이상한 문장이 있었다.

'작품 소유권 관련 분쟁으로 모델의 신원 확인이 필요함.'

“소유권 분쟁이요?”

“그림을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2명 있었습니다.”

“누구였는데요?”

“이태광 씨와 신원을 밝히지 않은 다른 사람입니다.”

나는 화면을 확대했다.

“그 사람 이름도 몰라요?”

“태광 씨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감정 의뢰를 받아줬다고요?”

“그림 자체를 확인하는 일과 소유권 분쟁은 별개니까요.”

그의 설명은 차분했다.

나는 다시 액자를 바라봤다.

평범한 가족사진이라고 생각했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뒷면에는 미술관 관리번호가 붙어 있었고, 안쪽에는 나를 관찰했다는 기록까지 들어 있었다.

“이 액자를 수리한 사람이 뭔가 알고 있겠네요.”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일 다시 가볼 거예요.”

“같이 가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혼자 갈게요.”

무겸이 나를 바라봤다.

“제가 불편합니까?”

“당연하죠.”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은 아직 태광이를 죽인 용의자였던 사람이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억지로 설득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대신 이 자료는 경찰에 제출하십시오.”

나는 액자에서 나온 종이와 사진을 따로 보관했다.

무겸이 돌아간 뒤에도 한참 잠들지 못했다.

◇

다음 날 오전 10시.

나는 액자를 들고 수리점을 다시 찾았다.

어제 만났던 여자가 나를 알아봤다.

“어제 오셨던 분이네요.”

“혹시 3년 전 수리 접수 서류도 남아 있나요?”

“전산에 첨부한 건 있을 거예요.”

여자는 컴퓨터를 확인했다.

잠시 후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왜요?”

“결제자는 이태광 씨인데, 수리 동의서는 다른 분이 작성하셨어요.”

“누가요?”

여자가 화면을 돌렸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수리 동의서의 고객 이름.

채설주.

그 아래에는 내 서명이 있었다.

“이거 제가 쓴 거 아니에요.”

“네?”

“제 이름은 맞는데 서명이 달라요.”

나는 휴대전화에서 평소 사용하던 서명 사진을 찾아 보여줬다.

확실히 달랐다.

동의서에는 내가 쓰지 않는 필체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류 사본 받을 수 있을까요?”

여자는 개인정보 확인 절차를 거친 뒤 사본을 출력해 주었다.

나는 그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런데 맨 아래에 또 다른 항목이 있었다.

'부속 자료 확인 및 외부 반출 동의.'

동의 여부에는 체크 표시가 되어 있었다.

“부속 자료가 뭔가요?”

여자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액자 수리만 하는 곳인데요. 이건 일반 양식에 없는 항목이네요.”

“누가 추가한 거예요?”

“오래전 기록이라 확인해 봐야겠어요.”

나는 종이를 접지 않고 가방에 넣었다.

적어도 하나는 분명해졌다.

누군가 내 이름으로 동의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자료를 가져갔다.

◇

수리점을 나온 나는 곧바로 강무겸에게 전화했다.

“동의서를 찾았어요.”

“어떤 동의서입니까?”

“제 이름으로 작성된 가짜 서명이 있어요.”

무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사본 확보하셨습니까?”

“네. 경찰에도 제출할 거예요.”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항목이 하나 있어요.”

나는 외부 반출 동의 부분을 읽어 줬다.

무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문구, 어디선가 본 적 있습니다.”

“어디서요?”

“미술관 자료에서요.”

그가 낮게 덧붙였다.

“제가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나는 곧장 경찰서로 향했다.

담당 형사에게 동의서와 사진, 문자 메시지를 제출했다.

형사는 자료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발신 번호 사용 내역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서명 위조 여부도 조사 요청하죠.”

“이걸로 사건을 다시 수사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증거인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결과가 나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경찰서를 나왔을 때는 오후 1시가 조금 넘었다.

그제야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때 강무겸에게서 전화가 왔다.

“채설주 씨. 자료를 찾았습니다.”

“뭔데요?”

“미술관의 외부 반출 동의서입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게 왜요?”

“그림을 밖으로 옮기려면 작품 소유자와 모델의 동의가 필요하도록 작성돼 있었습니다.”

“모델이라면 저요?”

“네.”

“저는 그런 동의를 한 적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데 서류에 첨부된 신분증 사본이 있습니다.”

“누구 건데요?”

“채설주 씨 겁니다.”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신분증은 3년 전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재발급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지갑을 찾아 줬던 사람은 이태광이었다.

“강무겸 씨.”

목소리가 떨렸다.

“그 동의서 작성 날짜가 언제예요?”

그가 날짜를 읽어 줬다.

2023년 10월 24일.

태광과 내가 처음 만났던 날보다 정확히 일주일 전이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태광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내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우연히 내 지갑을 찾아 줬다는 말까지 거짓이었다.

“설주 씨, 듣고 있습니까?”

나는 겨우 대답했다.

“네.”

“그리고 더 확인된 게 있습니다.”

“뭔데요?”

“동의서에 첨부된 연락처가 이태광 씨 번호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 번호예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제 번호입니다.”

나는 숨을 멈췄다.

강무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문제는 그 당시 저는 이태광 씨도, 채설주 씨도 모르던 때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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