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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판도라의 상자

Autor: 태이해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8-19 12:20:16

갑자기 이현의 입에서 거칠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뇌리를 날카롭게 찢고 들어오는, 두개골이 부서지 듯한 극심한 통증이었다. 마치 수천 족각으로 깨진 유리 파편 같은 미지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뇌세포를 강타하며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루비, 핏자국으로 얼룩진 손, 그리고 절망적으로 울부짖는 하유주의 환영.

시야가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붉게 점멸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압도적인 두통과 알 수 없는 감각의 폭주에 이현은 운전대를 움켜쥐려던 손을 헛짚었다. 이내 거대한 거목이 쓰러지듯, 이현이 몸이 조수석 쪽으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쿵!

"....! 서, 서이현!!!"

이현의 갑작스러운 실신에 유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본능적으로 두 팔을 뻗어 그의 무거운 상체를 받아냈다. 언제나 완벽하고 서늘했던,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남자가 제 어깨 위로 힘없이 쓰러진 낯선 감각에 유주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현아! 서이현! 정신 차려봐!"

유주는 하얗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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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가 그룹의 성대한 밤을 뒤흔든 두 후계자의 충돌은, 삽시간에 상류층 전체로 번져나간 거대한 스캔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 파편은 가장 잔인하고 날카로운 형태로 서가 그룹의 절대 권력자, 서강태 회장의 집무실을 강타했다."감히 근본도 없는 계집 하나 때문에 내 손자 놈들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개싸움을 벌여?!"서강태 회장의 노성이 웅장한 회장실 벽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책상 위의 크리스털 재떨이가 거칠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노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형형한 살기를 뿜어내는 서 회장의 눈동자가 핏발로 물들어 있었다. "당장 그 하유주라는 년을 잡아 와! 내 눈앞에 무릎을 꿇리고, 사지를 찢어서라도 다시는 서가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만들어!"차갑고 날카로운 악다구니에 집무실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의 지척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전속 비서, 김 비서는 파리한 안색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회장님.... 지금 그 사실보다, 한 가지 더 중대하게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뭐지? 그 계집년 모가지를 비트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대체 뭔데!""서이현 전무님께서.... 창립 파티 직후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습니다. 현재 저택에서 의료진이 대기 중이나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서 회장의 미간이 흉흉하게 구겨졌다. 그러나 김 비서의 입에서 이어진 보고는 한층 더 기괴하고 충격적이었다."더 큰 문제는...... 소문의 그 하유주라는 여성이 전무님의 곁에서 한순간이라도 멀어지면, 전무님의 심박수와 혈압이 위험 수준으로 급격히 곤두박칠친다는 점입니다. 현재로서는 그 여자를 강제로 떼어놓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뭐?! 하! 미치겠군.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내 완벽한 후계자를 살려두기 위해 그깟 계집년을 상전처럼 모시고 있으라는 말이냐!""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제가 전무님을 조금 더 유심히 살폈어야 했는데........""됐어, 닥쳐!"서 회장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넥타이를 홱 젖혔다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34화. 신에게 받은 기회

    서가 그룹의 일 년 중 가장 성대하고 오만한 밤.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로 정재계의 거물들이 잇속을 숨긴 채 교태로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한 손에 크리스털 샴페인 잔을 느릿하게 굴리며, 연회장 입구를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었다. 차갑게 칠링된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왼쪽 가슴 안주머니에 묵직하게 들어찬 벨벳 케이스의 존재감 탓에 신경은 온통 그곳에 곤두서 있었다.잠시 후, 굳게 닫혀 있던 연회장의 육중한 문이 열리며 소란스럽던 장내의 공기가 일순간 숨을 죽였다.시선을 단숨에 집어삼킨 것은 서이현, 그리고 그의 단단한 팔에 팔짱을 낀 채 굳어 있는 하유주였다.빛을 머금은 칠흑 같은 블랙 머메이드 드레스. 서이현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채 유주를 제 곁에 바짝 붙여 세우고 있었다. 굳이 입을 열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과 태도가 말해주고 있었다. 오늘 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하유주는 단순한 개인 비서 따위가 아니라, 완벽하게 '서이현의 것'임을 선포하겠다는 노골적인 과시였다.그러나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서이현의 위압감이 아니었다. 숨이 막히는 듯 하얗게 질려 어깨를 잔뜩 굳히고 있는 하유주의 위태로운 옆모습이었다.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로 질척한 속삭임이 빠르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저 여자가 그 냉혈한 서이현 전무 여자라고?""뭐 하는 집안인데? 처음 보는 얼굴인데.""어디 명문가는커녕 그냥 지방에서 작은 공장 운영하는 집안 딸이라던데......""뭐? 그런 수준의 여자를 어째서 서이현 전무가 직접 파트너로 데려온 거지?"귀를 파고드는 천박하고 날 선 뒷말들에 순간적으로 관자놀이가 찌릿하게 울렸다. 저들이 감히 누구를 입에 올리고 품평질인지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뱃속 깊은 곳에서 사납게 치밀어 올랐다."흠, 흠."나는 샴페인 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며 낮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수군거리던 무리를 서늘하게 쏘아보았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33화. 루비 목걸이의 진실

    차디찬 밤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침실 안, 유주는 젖은 수건을 조심스레 헹구어 이현의 불덩이 같은 이마를 다시 닦아내렸다. 고작 일곱 살의 그에게 건넸던 첫 번째 알사탕이 평생의 족쇄가 되어 자신의 옭아맸음을 뼈저리게 알면서도, 유주는 또다시 무너져 내린 그에게 다정함이라는 두 번째 알사탕을 기어이 쥐여주고 말았다. 자신을 지옥에 가둔 악마에게 제 손으로 두 번의 구원을 선사한 셈이었다. "........바보같이." 스스로를 향한 자조 섞인 읊조림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러나 유주의 손길은 망설임 없이 섬세하고 다정했다. 이현의 거친 숨결을 따라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정돈해 주고, 땀에 젖은 목덜미와 턱선을 부드럽게 닦아내며 곁을 묵묵히 지켰다. 차갑고 오만하기만 했던 남자가 오직 제 온기에만 안정을 찾으며 작게 헐떡이는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유주의 마음에 지독한 연민과 애증의 싹을 깊게 틔워내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그를 온전히 제 손으로 돌보겠다는 기묘한 결심과 함께, 유주는 그의 차가운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창립기념 자선 파티가 열리기 불과 1시간 전, 서가 백화점 본점의 최고급 VVIP 주얼리 살롱. 서이진은 푹신한 벨벳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묻은 채, 지점장이 공손히 내미는 화려한 보석 트레이들을 무심한 눈초리로 넘겨보고 있었다. 파티 당일, 하유주의 목에 걸어주어 동생 서이현의 서늘한 얼굴을 완벽하게 일그러뜨릴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상무님, 이쪽은 이번 시즌 한정으로 들어온 5캐럿 블루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하, 디자인이 다 지루하네." 이진은 지점장의 말을 단칼에 잘라내며 샴페인 잔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눈부시게 세공된 다이아몬드도, 에메랄드도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하유주라는 여자를 단번에 제 밑으로 끌어당기고, 서이현의 숨통을 날카롭게 긁어버릴 만한 자극이 턱없이 부족했다.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살롱 안쪽의 쇼케이스를 무심히 지나치려던 바로 그 순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32화. 두 번의 구원

    이현이 깊은 무의식 속에서 절규하며 신에게 매달린 그 처절한 기도가 허공을 맴돌던 그때였다. 이현의 뇌리 속에서 재생되던 과거의 잔혹한 풍경에 기이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하유주..... 내 유주를 제발 깨어나게 해주세요. 제발......." 그가 생명줄처럼 꽉 쥐고 있던, 미래 세계 속 유주의 차가운 손끝이 돌연 투명한 잿빛으로 변하더니 파스스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유주야............?' 마치 사간이 역류하듯, 혹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기루처럼. 그녀의 텅 빈 육신이 미세한 빛의 가루가 되어 이현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놀란 이현이 흩어지는 그녀를 안으려 허공을 허우적거렸지만, 붕괴는 멈추지 않았다. 유주가 누워있던 침대도, 그가 오열하던 넓고 적막한 안방도, 창밖의 풍경도. 두 사람이 존재했던 첫 번째 세계 자체가 거대한 유리창이 깨지듯 산산조각 나며 새하얀 빛 속으로 소멸하고 있었다. '안 돼, 하유주! 가지 마! 안 돼!'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는 압도적인 소멸 속에서, 이현의 절규마저 형체 없이 먹혀들어 갔다. 그것은 두 사람의 엇갈린 기도에 응답한 신이, 그들이 겪었던 참혹한 미래의 시간선 자체를 완벽하게 덮어씌워 지워버리는 경이롭고도 무자비한 순간이었다. "허억..........!" 현재의 시간. 침대에 기절하듯 누워있던 이현의 몸이 크게 한 번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혼수 상태에 빠져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굳게 감긴 그의 긴 속눈썹 사이로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속절없이 흘러내려 베갯잇을 적셨다. "서이현..........?" 그의 곁을 지키며 식은땀을 닦아주던 유주가 흠칫 놀라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손목을 부서져라 쥐고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라고 중얼거리던 그의 오만한 얼굴은, 무언가 소중한 것을 영원히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처절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순간. 유주의 귓가에 얇은 얼음장이 깨져 허공으로 흩어지는 듯한 기묘한 이명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31화. 신에게 올린 두 개의 기도

    다정한 속삭임에도 품 안의 유주는 미동조차 없었다. 새근거리는 숨결은 얕게 이어지고 있었고 체온도 따뜻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리 어깨를 흔들어 깨워도, 귓가에 이름을 부르며 뺨을 쓰다듬어도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영혼이 완전히 빠져나간 빈 껍데기, 식물인간처럼 깊고 끝없는 수면에 빠져버린 것이다. "하유주. 장난치지 마. 당장 눈 떠." 처음엔 그저 자신을 향한 지독한 반항인 줄만 알았다. 분노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이현은 서가 그룹의 모든 권력과 재력을 동원해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유명한 의료진들을 전부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수십 번의 정밀 검사 끝에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이 절망적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 신체적인 이상은 전혀 없으나, 뇌의 의식 활동이 완전히 멈췄습니다. 마치.... 환자 본인이 스스로 깨어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요." 그 선고는 이현의 세상을 완벽하게 붕괴시켰다. 스스로 깨어나기를 거부한다고? 이현은 핏발 선 눈으로 창백하게 누워있는 유주를 내려다보았다. 숨이 막혀올 정도로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 가슴을 짓눌렀다. '나를 보는 게 그렇게 끔찍했어? 내가 곁에 있는 게 너무 증오스러워서..... 차라리 모든 의식을 끊어내고 영원한 도피를 택할 만큼?' 자신을 향한 혐오와 증오가 그녀의 숨통을 조이다 못해, 결국 그녀 스스로 깊은 무의식의 감옥에 갇혀버리게 만들었다고 이현은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내 곁에 완벽하게 가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남은 것은 거저 생기 없이 시들어가는 텅 빈 육신뿐이었다. 텅 빈 안방, 며칠째 식음도 전폐한 채 그녀의 곁을 지키던 이현의 오만했던 얼굴은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오열하다가, 이내 생기 없이 축 늘어진 유주의 가냘픈 손을 제 두 손으로 꽉 부여잡아냈다. 자신은 태어나 단 한 번도 무언가에 고개를 숙인 적이 없는 오만한 사내였다. 절대자 따위는 없다고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30화. 판도라의 상자

    갑자기 이현의 입에서 거칠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뇌리를 날카롭게 찢고 들어오는, 두개골이 부서지 듯한 극심한 통증이었다. 마치 수천 족각으로 깨진 유리 파편 같은 미지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뇌세포를 강타하며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루비, 핏자국으로 얼룩진 손, 그리고 절망적으로 울부짖는 하유주의 환영.시야가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붉게 점멸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압도적인 두통과 알 수 없는 감각의 폭주에 이현은 운전대를 움켜쥐려던 손을 헛짚었다. 이내 거대한 거목이 쓰러지듯, 이현이 몸이 조수석 쪽으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쿵!"....! 서, 서이현!!!"이현의 갑작스러운 실신에 유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본능적으로 두 팔을 뻗어 그의 무거운 상체를 받아냈다. 언제나 완벽하고 서늘했던,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남자가 제 어깨 위로 힘없이 쓰러진 낯선 감각에 유주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이현아! 서이현! 정신 차려봐!"유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현의 어깨를 흔들며 깨워보려 애썼다. 하지만 이현은 미동없이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은 듯 미동조차 없었다. 그의 단단했던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차갑게 맺혀 흘러내렸고, 숨결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고 가빴다.'도망쳐야 해.'이성을 마비시켰던 두려움이 가시자,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자신을 옭아매던 지독한 족쇄가 아주 잠시 느슨해진, 기적 같은 틈이었다. 지금 당장 차 문을 열고 이대로 어둠 속으로 도망친다면, 이 미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유주는 도망치지 못했다. 제 어깨에 묵직하게 기대어 온 그의 체온, 과거 자신이 아플 때마다 묵묵히 병간호를 해주던 그 서글프고 다정했던 손길의 기억이 발목을 강하게 붙잡고 늘어졌다. 자신을 끔찍하게 옭아매는 악마이면서도, 결국 제 세상의 유일한 구명줄이기도 했던 남자. 유주는 결국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현의 차가운 뺨을 감싸 쥐었다."제발...... 사람 놀라게 하지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5화. 거미줄의 입구

    서가 그룹 본사 로비는 인간의 오만을 형상화한 것 같은 공간이었다. 초고층 빌딩의 무게를 지탱하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은 마치 신전의 그것처럼 위압적이었고, 발소리조차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매끄러운 바닥은 침입자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반사해냈다. 하유주는 로비 한복판에 서서 가쁘게 몰아치는 숨을 억눌렀다. 손바닥에 쥔 메모지는 이미 땀으로 눅눅해져 글씨가 번져 있었다. 15년 전, 그 강가에서 등을 돌려 달아났을 때 유주는 믿었다. 사탕을 건네지 않았으니, 그 소년의 고독에 참견하지 않았으니, 이번 생의 궤적은 서이현이라는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4화. 뒤틀린 재회

    이현의 집무실은 한낮에도 그림자가 짙었다.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채광조차 그의 서늘한 분위기에 눌려 맥을 못 추는 듯했다. 비서가 두고 간 ‘서가 문화재단 장학생 선발 명단’을 넘기던 이현의 손길이 일순간 멎었다.정작 그 '조각'이 된 하유주는, 대학교 도서관 한구석에서 숨을 죽인 채 전공 서적에 파묻혀 있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현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유주는 그가 이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유주는 가방을 챙겨 재빨리 건물 뒷문으로 향했다. 인파가 몰리는 정문 대신, 후진 지하 통로를 통해 학교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3화. 엇갈린 계절의 온도

    소년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원래의 기억대로라면, 유주는 지금쯤 주머니 속 사탕을 만지작거리며 저 소년에게 다가가 “왜 혼자 울고 있어?”라고 다정하게 물어야 했다. 그 친절이 씨앗이 되어 20년 뒤의 괴물을 키워낼 것이었다.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유주가 있는 방향을 두리번거렸다. 유주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공포와 전율이 전신을 감쌌다. '만나면 안 돼. 말을 걸어서도, 눈을 마주쳐서도 안 돼!’ 유주는 주머니 속에 든 알사탕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2화. 신이 응답한 단 하나의 기도

    이현의 집착은 해가 저물수록 더욱 노골적이고 집요해졌다. 그에게 밤은 유주를 온전히 자신의 방안에 가두어 두는 시간이었다. 넓고 차가운 침실, 은은한 조명만이 감도는 그 공간에서 유주는 매일 밤 질식할 것 같은 공포를 견뎌야 했다. 이현은 항상 유주보다 늦게 잠들었다. 최근 들어 그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유주가 방에서 몰래 나와 거실 창문을 열어보았다는 보고를 받은 날부터, 그는 집 안의 모든 보안 시스템을 직접 재점검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CCTV 영상을 밤새 돌려보느라 며칠째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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