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제20화. 무너진 경계선"윽..........!" 이진 역시 이미 한계에 임박해 있었다. 유주의 질벽이 숨 막힐 듯이 조여오는 통에 이대로 무너질 것만 같았다. 가만히 멈춰 서 있어도 터질 것 같은 사정감을 억 누르기 위해 그는 유주를 번쩍 안아 들고 순식간에 자세를 바꿨다. 몸이 움직이는 그 짧은 찰나에 가파르던 절정의 파도가 잠시 가라앉았고, 이진은 특유의 여유로운 페이스를 유지해 냈다. 이내 그는 그녀의 몸을 돌려 침대에 엎드리게 한 뒤, 그녀의 자궁구를 향해 강하게 박아냈다. 퍼억! "하읏..........!" 유주의 뺨을 타고 찔끔,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몸 깊숙한 곳, 닿아서는 안 될 곳까지 거침없이 헤집고 들어오는 그의 난폭한 박음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둔탁한 마찰음이 밀폐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푹, 푹- 퍼억!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산발이 되었고, 단단하게 중심을 잡던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이미 갈피를 잃은 채 흐려져 있었다. 마침내 참아왔던 오르가즘의 절정이 유주를 덮쳤고, 그녀는 이성을 잃은 채 대량의 물줄기를 폭포처럼 쏟아냈다. 푸슉, 하며 자신에게 발사된 유주의 분비물을 이진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거칠게 몰아쉬는 그녀의 살결 위에 혀를 내밀어 그 흔적을 핥아 올렸다. "읏! 그만해! 더럽게 뭐 하는 거야!" 유주가 수치심에 몸을 떨며 소리쳤지만, 이진은 그저 무심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더럽긴." 말 한마디를 툭 내뱉은 그가 유주의 밑구멍에서 자신의 것을 거칠게 빼냈다. 그리고 엉망이 된 채 흐트러져 있는 유주의 머리채를 잡고, 자신의 성기를 그녀의 뜨거운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후, 돌겠네 진짜." 처음 겪는 미친 상황에 유주의 동공이 흐릿하게 풀려가던 그때, 단단한 치아가 점차 절정을 달려가는 이진의 자지를 콱 깨물었다. "윽!" 이진이 짧은 비명과 함께 미간을 찌푸리며 유주를 사납게 내려다보았다. "후....... 하유주, 이 세우
Last Updated: 2026-07-21
Chapter: 제19화. 허물어진 내벽"언제까지 내 위에 있을 거에요? 내기는 내가 졌어요. 인정해요.""그니까 이만 내 몸에서 내려와요. 혹시 나랑 더 하고 싶은 거에요?"그녀의 도발 섞인 말에 이진은 재밌다는 듯이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웃음기 섞인 숨결이 유주의 얼굴 위로 흩어졌다. 이내 그의 하얀 목덜미부터 귀끝까지 화끈하게 붉게 달아올랐다이진이 유주의 위에서 지탱하던 몸을 내리려던 찰나, 어떤 충동이 그를 사로잡은 것인지 생각이 바뀐 듯 다시 그녀의 몸 위로 묵직하게 밀착해 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닿은 피부 사이로 가파른 열기가 번져나갔다."아.... 이러면 진짜 곤란한데.""뭐, 뭐가 곤란하다는 거에요?"이진이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은 삽시산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차가운 눈빛과 대조적으로, 그의 행동은 가차 없이 뜨거웠다. 이내 그녀의 하얗고 봉긋한 가슴에 자신의얼굴을 묻으며, 여린 살결을 뜨거운 입술로 거칠게 삼켜내기 시작했다. 유주는 온몸을 관통하는 낯선 감각에 몸을 잘게 떨었다."네가 자꾸 날 이렇게 자극하면, 진짜 널 가지고 싶어지는데."그의 목소리는 낮게 긁히며 유주의 귓가를 어지럽혔다."널 망가뜨리지 않은 채로, 이 온전한 모습 그대로 가지고 싶은데...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무너뜨려 버리고 싶어.""이 두 마음이 강하게 상충하는데 어쩌지, 유주야?"쉼 없이 몰아치는 말과 함께 그녀의 유려한 가슴 살을 손으로 콱 움켜쥐자, 유주가 참아왔던 신음을 결국 훅 내뱉었다."흣..........""아,아니 그만......!!!"이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붉게 달아오른 유주를 내려다보며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손길에는 망설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유주의 바지와 팬티를 동시에 거칠게 버겻낸 그는, 그녀의 은밀하고 붉은 살결에 시선을 고정했다. 멈출 기색 없는 탐닉이 이어졌다. 그의 뜨거운 혀가 유주의 가장 예민하고 작은 알맹이를 깊숙이 파고들며 강하게 빨아올렸다."아! 아아........!! 흣....""서
Last Updated: 2026-07-10
Chapter: 제18화. 선을 넘는 숨결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위험할 정도로 좁혀졌다. 이진과 유주는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기묘한 내가가 걸린 탓인지, 두 사람 모두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작은 신음조차 내지 않으려 입술을 짓씹으며 참아냈다. 이진은 시선이 유주의 하얀 목덜미와 쇄골 부근에 고정되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유주의 티셔츠 밑단 안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자, 유주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 미세한 반동을 놓치지 않는 이진이 피식, 낮게 웃음을 흘렸다. 순간, 위기감을 느낀 유주가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하자, 이진은 도망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빤히 응시한 채, 속삭였다. "하유주, 이건 반칙이야." "............" "서로 닿지도 못하게 하면, 이 위험한 게임을 시작한 의미가 없잖아."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당장이라도 선을 넘어버릴 듯 위태로운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날 밀어내지 마. 네가 밀어낼수록 난 더 거칠게 선을 넘고 싶어지니까." 연이어 귓가를 파고드는 낮고 은말한 음성에 유주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잘못하다간 이진의 페이스에 휘말려 정말 끝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유주는 이진에게 마음이 없었다. 분명 없을 터였다. 왜냐하면 그는 서이현의 사촌 형이자, 서가 그룹 사람이니까.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그의 위험한 분위기에 자꾸만 묘하게 끌려 시선이 분산됐다. 이 혼란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려면 이 게임을 빨리 끝내야만 했다. 유주는 승부수를 던지듯 거침없이 몸을 일으켜 이진의 위로 올라탔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도발에 이진은 침묵을 유지한 채 유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내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자조적이면서도 오만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 걸렸다. "...........후우." 유주는 짧은 숨을 내쉰 뒤, 이진의 바지속 안에 부풀어 오른 그의 자지 위로 제 보짓살을 밀착시키며 강하게 압박했다. 예상
Last Updated: 2026-06-25
Chapter: 제17화. 도망칠 수 없는 품 안"네? 서이진씨!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요?!" 직접 간호해 달라는 이진의 뻔뻔한 요구에 유주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등짝을 찰싹 때리며 꾸짖었다. 매서운 손맛에 윽, 하고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이진은 특유의 고집스러운 집착을 꺾지 않았다. 그는 유주의 핸드폰을 제 품 안쪽 깊숙이 밀어 넣더니, 아예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고 드러누워 일어날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는 능청스럽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유주를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그 눈망울 속에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박윤희 여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이진의 부어오르는 발목 상태가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유주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진이 발목 상태가 보통이 아니야. 마침 2층에 네 옆방 비어 있잖니. 발목이 다 나을 때까지 여기서 지내게 하자." "엄마! 그게 무슨 소리야? 절대 안 돼!" 유주는 화들짝 놀라 두 손을 휘저으며 강하게 거부했다. 서이현에게 시달리다 겨우 도망쳐 온 집이었다. 그런데 제 안식처 바로 옆방에 이 위험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를 들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주가 더 반발하기도 전에, 이진이 유주의 손목을 낚아채 가뿐하게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고, 이진의 뜨거운 숨결이 유주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나, 이대로 돌아가면 할아버지한테 죽어." "네? 할아버지라고 하면...."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 할아버지. 서가 그룹 서강태 회장 손자 몸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유주 너 또한 가만두지 않으실 텐데.....괜찮겠어?" 낮게 읊조리는 이진의 목소리에 장난기와 섬뜩한 경고가 동시에 묻어났다. 서가 그룹 서강태 회장. 그 악명 높은 노인의 이름이 나오자 유주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 괴물 같은 집안의 수장이라면, 서이현이나 서이진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결국 유주는 짓눌리는 압박감과
Last Updated: 2026-06-09
Chapter: 제16화. 피할 수 없는 덫서이현에게 풀려나 겨우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 지독한 피로감에 당장이라도 침대에 쓰러지고 싶던 유주의 눈앞에, 또 다른 불청객 서이진이 나타났다. "왜, 왜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이진은 피식, 입매를 유연하게 비틀며 유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겉으로는 한없이 능청스럽고 여유로워 보였지만, 유주를 담아낸 그의 집요한 눈동자 속에는 기어코 그녀의 공간을 침범해 냈다는 기묘한 소유욕과 집착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기대한다고." 이 어이없는 상황에 유주는 미간을 좁히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현에게 시달려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이진까지 나타나 자신을 더 피곤하게 만들고 있었다. 유주가 무어라 쏘아붙이려던 찰나, 박윤희 여사의 목소리가 귀가에 울려 퍼졌다. "어머? 우리 유주 왔네. 밥 다 됐어. 이진이랑 같이 들어와서 먹자." "엄,엄마.... 혹시 엄마가 문 열어 준 거야?" "응. 왜?" "엄마!!!!! 아무나 문 열어주면 어떡해!!!" 유주의 고함에 깜짝 놀란 박윤희 여사는 이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내 유주의 등짝을 매섭게 때리며 말을 이었다. "이 기지배가! 친구 귀한 줄도 모르고! 그리고 친구가 앞에 있는데 대놓고 아무나라고 해?" "너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어?" "아, 아파!!! 아니- 엄마! 하-" 박 여사가 유주의 등짝을 한 번 더 때리려 손길을 날린 순간, 이진이 여사의 손목을 부드럽게 낚아채며 싱긋 웃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번뜩였던 서늘하고 차가웠던 눈빛을 순식간에 따뜻한 눈빛으로 갈아끼우고는 여사를 향해 다정하게 속삭였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이렇게 때리시면 어머니 고운 손이 아프잖아요." 그의 능글맞고 싹싹한 행동에 박 여사의 화는 눈 녹듯 누그러졌다. 여사는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이고, 착하기도 해라. 우리 유주가 딱 이진 학생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면 좋을 텐데." "아! 엄마
Last Updated: 2026-06-05
Chapter: 제15화. 소유의 권리"비, 비서라고요...?" "말 그대로야. 내 개인 비서 하라고." 이현은 유주를 서늘한 눈빛으로 훑으며,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바라봤다. 당혹감에 휩싸인 유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아, 아니.... 저기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저 대학생이에요." "그게 뭐가 문제지? 대학? 원하다면 조기 졸업이라도 시켜줄게." "아니, 그게 아니라, 하! 진짜 말이 안 통하네!" 유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하자, 이현은 정말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책상 위 서류를 툭툭치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하유주, 22살 맞지?" "네, 그게 왜요?" "나도 22살인데. 우리, 친구네?" 그의 오만한 목소리가 귓가를 쿡쿡 찌르자, 유주는 불쾌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친구가 무슨 상관이에요? 그쪽은 재벌에 머리까지 좋아서 모든 걸 프리 패쓰 할 수 있었겠지만, 난 아니에요." "어쨋든 전 이 비서일 못해요." 순간, 이현의 장난스럽던 눈빛이 삽시간에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 책상 위로 상체를 숙이자,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유주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내가 지금 너한테 선택하라고 하는 걸로 보여?"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위압적인 태도로 쐐기를 박았다. "이건 네 선택이 아니라 내 결정이고, 넌 그저 따라오기만 하면 돼. 지금 당장 사인하지 않으면, 전화 한 통으로 너희 부모님 공장쯤은 가루로 만들 수 있다는 거 명심해." 이현이 유주에게 다가와 턱을 강압적으로 잡고 돌려 세웠다. 거부할 틈도 없이 그가 입술을 겹쳐왔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유주가 몸부림치며 그의 어깨를 밀쳐냈지만, 이현은 그녀의 두 볼을 양손으로 단단히 감싸 쥔 채 더욱 파고들었다. 숨이 막힐 듯한 키스에 유주의 저항은 서서히 무력해졌다. 한참을 몰아붙이던 이현의 시선이 유주의 쇄골 부근에 머물렀다. 어제 자신
Last Updated: 2026-05-28
Chapter: 싱그'로운 이슬' 완결 후기 😆안녕하세요. 작가 태이해입니다. 드디어 **『싱그로운 이슬』**이 완결되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전작 『망각이 낳은 형벌』의 후일담 같은 분위기로, 조금은 가볍고 편안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원래는 총 6화 정도의 짧은 단편으로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이야기를 써 내려가다 보니 인물들에게 정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분량도 예상보다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싱그로운 이슬』이라는 제목은 남자 주인공 '로운'과 여자 주인공 '이슬'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제목과 웹표지에서 느끼셨을 수도 있겠지만, 풋풋하고 싱그러우면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한 커플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집필한 작품입니다. 오늘부로 『싱그로운 이슬』은 완결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제는 현재 연재 중인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에 더욱 집중하며 작품을 이어 나가려 합니다. 그리고 사실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싶은 작품도 하나 있습니다. 우선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 뒤,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여러분을 찾아뵐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싱그로운 이슬』**을 사랑해 주시고 함께해 주신 모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글솜씨지만, 앞으로도 더 좋은 이야기로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 작가 태이해 드림. 작가 이메일 : taeihae@naver.com 작가 인스타: @taeihae
Last Updated: 2026-07-15
Chapter: 외전) 우리가 함께 걷는 계절 完로운에게 조개껍질을 받으며 눈물 어린 약속을 나눈 지도 어느덧 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참으로 정직하고도 정성스럽게 흘러, 어리기만 했던 소년과 소녀를 어엿한 어른의 길목으로 인도했다. 이슬은 제 방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가만히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녀의 하얀 목련 같은 목선 위에는 가느다란 체인에 걸린, 낡았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경질화된 조개껍질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거울 속 조개껍질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슬의 눈동자에 아스라한 과거의 조각들이 스쳐지나갔다. 5년 전, 로운의 절박하고도 뜨거웠던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직후 이슬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태하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언제나 자신보다 한 걸음 뒤에서, 혹은 짖궃은 장난 뒤에 진심을 숨긴 채 자신을 바라보던 태하. 그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챈 이상 더는 그의 절박한 짝사랑을 모른 척 놔둘 수는 없었다. 그것이 친구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태하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성의였다. 조금은 쌀쌀했던 가을날, 단둘이 마주 앉은 자리에서 이슬은 떨리지만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제 마음을 솔직하게 전했다. 로운을 향한 제 마음의 크기와, 더는 태하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절의 의사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태하는 슬프지만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날이 서 있던 그의 눈매가 그날만큼은 봄날의 눈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진작 눈치채고 있었어." 태하가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나즈막이 고백했다. "네 시선의 끝에는 항상 내가 아니라 로운이가 있었으니까. 널 어떻게 좋아하게 됐는지, 왜 그렇게 네 옆자리를 탐냈는지...." "어쩌면 다 내 가여운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했어, 이슬아. 그리고 내 미련한 마음마저 무겁게 받아들여 줘서 고마워." 참으로 태하다운, 쓰라리면서도 어른스러운 고백이자 사과였다. 그날 이슬은 태하와 참 뜻깊기도 아름다운 이별을 맞이했다. 서로의 앞
Last Updated: 2026-07-15
Chapter: 본편 完) 제14화. 여름날의 완벽한 해피엔딩 갑작스러운 소리에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던 이슬의 시선이 자연스레 바닥으로 향했다. 은은한 아침 햇살이 비쳐 드는 이슬의 방 바닥 위에서, 낡았지만 맑고 영롱하게 빛을 내뿜는 조개껍질의 모습에 이슬은 의아한 듯 동그랗게 눈을 뜨며 나지막이 되물었다. "운아, 이거........ 소연 이모 꺼 아니야?" "어, 어...? 응, 그렇긴 한데....." 로운은 예상치 못한 소지품의 등장에 몹시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슬은 그저 바닥에 떨어진 조개껍질을 조심스레 주워 올려 이리저리 살필 뿐이었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흘러 겉표면이 조금 닳고 낡았을지언정, 로엘의 푸른 마력이 단단하게 깃든 조개껍질은 여전히 신비롭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근데 다시 봐도 진짜 신기하고 예쁘다. 로엘 삼촌, 그때나 지금이나 은근히 로맨틱하다니까? 보는 안목이 아주 남달라." 이슬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눈을 반짝이자, 로운의 눈동자가 깊게 요동쳤다. 그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저도 모르게 툭, 본심을 내뱉었다. ".....예뻐?" "응, 진짜 예뻐." "그럼.... 너 이거 가질래?" "응? 가지라고? 이걸 왜 갑자기 나한테 줘? 이거 소연 이모한테는 세상에 하나뿐인 엄청 소중한 보물이잖아." 이슬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로운은 귓가부터 붉은 기가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어젯밤과 오늘 아침까지 이어진 격정적인 정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이슬의 물음에 쑥스러움이 한꼐에 다다르자, 로운은 온연한 알몸 상태로 제 눈앞에 앉아 있는 이슬의 부드러운 살결이 내심 신경 쓰이는 듯 침대보와 이불을 한꺼번에 끌어 올렸다. 스르륵. 두꺼운 이불을 제 몸에 따뜻하게 감싸 안더니, 이내 이슬의 작은 몸을 제 넓은 품에 빈틈없이 가두어 안았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묵직하고 따뜻한 온기에 이슬은 기분이 좋은 듯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로운의 품에 갇힌 채, 그의 단단하고 넓은 가슴팍에 제
Last Updated: 2026-07-15
Chapter: 제13화. 녹아내린 낙인의 경계서로의 가슴에 새겨진 낙인이 허공에서 붉고 푸른 빛을 발하며 공명하자, 방 안의 공기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급격히 뜨거워졌다. 반려의 낙인이 완전히 맞닿는 순간, 이슬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 강력한 자극을 느꼈다. 온몸의 신경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발정하듯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하, 읏.... 로, 로운아...." 이슬은 가쁜 숨을 헐떡이며 로운의 단단한 두팔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낙인을 통해 들이닥친 본능적인 갈증은 이성을 마비시키기 충분했다. 제대로 제어되지 않는 몸을 침대 위에서 베베 고던 이슬은, 결국 로운의 커다란 손을 잡아끌어 제 왼쪽 가슴, 잠미 문양이 새겨진 뜨거운 살결 위에 얹었다. 잔뜩 젖은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며, 그년느 울먹이듯 애원했다. "나, 나 이상해........ 몸이 너무 뜨거워. 어떻게 좀 해줘, 제발....!" 그 애달픈 애원에 로운의 이성 또한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평소라면 그녀를 아끼고 배려하려 필사적으로 참았겠지만, 본능을 자극하는 반려의 체취와 자신을 갈망하는 이슬의 흐트러진 모습은 로운의 가슴 속 야성을 사정없이 흔들어 깨웠다. 단숨에 흥분으로 가득 찬 로운의 눈동자가 한층 더 짙은 붉은빛으로 이글거렸다. "..............슬아. 나 한 번 시작하면 이제 못멈춰." 낮게 가라앉은 맹수의 목소리와 함께 로운이 이슬의 입술을 거칠게 집어삼켰다. 동시에 그의 거침없는 손길이 얇은 옷자락을 사정없이 벗겨냈다. 이슬 역시 매달리듯 그의 셔츠를 밀어내며 벗겼고, 이내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방해물도 남지 않은 완전한 나신 상태가 되었다. 서로의 살결이 빈틈없이 맞닿자, 그들은 마치 굶주린 포식자들처럼 서로의 몸을 거칠게 물고 빨며 탐닉하기 시작했다. 아슬의 목덜미와 쇄골, 그리고 푸른 날개 문양이 새겨진 가슴을 진득하게 핥아 내리던 로운의 입술이 점차 아래로 향했다. 부드러운 가슴살을 지나 배꼽으로, 그리고 마침내 이슬이
Last Updated: 2026-07-15
Chapter: 제12화. 반려의 낙인문 뒤에서 들려오는 로운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이슬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잔뜩 긴장한 채 침대 시트를 꼭 움켜쥐고 있던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뱉어냈다. "어....? 어, 들어와."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로운이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방금 전까지 옆집에 누워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차림이었지만, 이슬을 바라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이슬은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린 채 눈동자만 굴렸고, 로운은 그런 이슬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와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느껴지는 서로의 숨결이 어젯밤의 뜨거웠던 온도를 상기시켰다. "몸은.. 좀 어때? 아픈 데는 없고?" 로운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이슬은 온몸의 살결이 다시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뻐근해 미치겠다'는 진실을 말할 수는 없어, 이슬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괜찮아... 네 덕분에 독도 다 빠진 것 같고." "다행이다." 로운이 옅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결연한 눈빛으로 이슬을 응시했다. 무언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한, 진지하면서도 묘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로운이 손을 뻗어 이슬이 꼭 쥐고 있던 이불 자락을 조심스럽게 살며시 아래로 내렸다. "슬아. 혹시... 깨어나서 몸에 이상한 변화 같은 거 없었어?" "어? 변화라니?" "....가슴 근처가 아리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는 거야." 이슬은 쿵, 심장이 제 발로 향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조금 전 셔츠를 내려 확인했던 그 푸르스름한 문양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 동그랗게 커진 이슬의 눈동자를 확인한 로운은 확신이 섰다는 듯 제 셔츠 단추를 빠르게 풀기 시작했다. "로운...? 갑자기 옷은 왜..!!" 당황한 이슬이 눈을 가리기도 전에, 로운의 셔츠 깃이 양옆으로 벌어지며 그
Last Updated: 2026-07-15
Chapter: 제11화. 살결에 새겨진 너의 흔적로운은 조개껍질의 꺼칠한 표면을 매만지며 미소지었다. 사실 이 조개껍질은 로운의 어머니, 한소연 여사가 남편인 로엘에게 받았던 프로포즈의 증표였다. 당시 인간 세상에 잘 모르던 로엘이 바닷가 모래사장을 걷다가, 유독 예쁘게 빛났던 조개껍질을 발견하고는 제 마력을 쏟아부어 단단하게 경질화시킨 뒤 소연에게 건넸던 아주 특별한 선물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마력으로 단단해진 껍질도 겉면이 조금 닳고 빛이 바랬지만, 소연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런 소연이 어느 날, 아들 로운이 이슬을 바라보는 애틋하고도 따뜻한 시선을 눈치챘다. 그 눈빛에 담긴 깊은 연정을 단박에 알아챈 소연은 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제 생애 가장 소중한 보물 1호인 조개껍질을 로운의 손에 쥐여주며 속삭였다. "로운아, 사랑은 타이밍이야. 이때다 싶으면 주저하지 말고 네 마음을 고백하렴." "엄마, 이건.........." "엄마가 주는 선물, 네가 나중에 정말로 평생을 함깨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프로포즈할 때 주렴." 당황해하는 로운의 머리를 소연은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장난스레 윙크했다. "엄마 보물 1호지만, 우리 아들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줄 수 있어. 우리 아들 파이팅!" "엄마... 진짜 고마워요." 과거의 기억에서 깨어난 로운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조개껍질을 빤히 바라보았다. "후우.... 이제 막 스무 살인데 프러포즈는 너무 부담스러워하려나." 혼잣말을 중얼거린 로운이 껍질을 소중하게 서랍에 넣어두는 그 시간, 옆집 이슬의 방에서는 이슬이 찌푸린 미간을 부여잡고 눈을 떴다. "아이고, 허리야..........." 이슬은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한 극심한 근육통과 하체에서 밀려오는 묵직한 둔통에 신음했다.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몸이 이 지경인지 흐릿한 머리를 굴리던 이슬은, 이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버렸다. 어젯밤 깊은 계곡 속에서 로운과 나누었던 거칠고도 격정적인
Last Updated: 2026-07-14
Chapter: 『망각이 낳은 형벌_완결 후기』안녕하세요, 태이해 작가입니다! 드디어 완결 후기로 인사드리네요. 『망각이 낳은 형벌』의 시작, 다들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사실 SNS에서 본 '노로바이러스와 굴'에 관한 일화가 계기였습니다. 고생할 걸 알면서도 다시 굴을 먹고 마는 인간의 굴레를 보고 "망각이 낳은 형벌"이라 표현한 베스트 댓글을 본 순간, '이거다!' 싶었죠. 단순히 웃어넘길 수 있는 일화였지만, '망각'이라는 키워드가 우리 삶과 사랑에서 얼마나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형벌이 될 수 있는지 진지하게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세계관이 지금에 이르렀네요. ㅎㅎ 집필하면서 저의 사심(?)이 듬뿍 담긴 최애 커플은 사실 이안과 은하였습니다. 메인 커플보다도 이안이 더 돋보였으면 해서 마음껏(?) 고생시키고 희생시켰던 기억이 나네요. 이안을 너무 고생시킨 것 같아 집필하며 마음이 아픈 적도 많았지만, 서브 커플만이 줄 수 있는 그 애절한 여운을 꼭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이안... 은하와 잘 지내고 있겠죠?😄😄 완결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저는 벌써 차기작을 구상 중입니다. 이번 작품이 조금 무거운 '형벌'이었다면, 다음 이야기는 조금 더 [집착 광공/치명적인/구원 서사/회귀] 분위기로 구상 중입니다. 이번 작품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찾아뵐 테니, 잊지 말고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태이해 인스타그램👉🏻 @taeihae -작가 태이해 드림🫶🏻
Last Updated: 2026-05-07
Chapter: 외전 2화(完)과거의 비극과 희생을 건너온 네 명에게 신이 준 마지막 선물은 평범하기에 더욱 찬란한 '내일'이었다. 기적 같은 재회 이후, 소연과 은하에게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축복이 찾아왔다. 같은 해, 같은 달에 임신 소식을 알린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이안과 로엘, 한때 마계를 호령하던 전사와 왕은 이제 기저귀 가방을 메고 분유 온도를 맞추는 초보 아빠가 되었다. 네 사람은 소연과 로엘의 펜션 근처에 보금자리를 합치고 '공동 육아'라는 거대한 모험을 시작했다. 소연과 로엘의 아이는 아빠를 꼭 빼닮은 검은 머리칼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로운이었고, 은하와 이안의 아이는 엄마의 금발과 아빠의 다정하고도 강인한 기질을 이어받은 이슬이었다. 수천 년을 살아온 로엘과 이안에게 육아는 그 어떤 마법이나 전투보다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부르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가락을 쥐었을 때, 두 남자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휩싸였다. "이것이 자식의 사랑이라는 것인가..." 로엘은 곤히 잠든 로운의 이마를 짚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가 생긴다는 것, 그 대가 없는 사랑이 주는 평온함은 마왕의 권능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안 역시 이슬이를 품에 안고 달래며, 자신이 지켜야 할 세상이 이제는 이 작은 아이의 웃음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소연과 은하 또한 서로의 아이를 교차해서 돌보며, 피보다 진한 우정으로 맺어진 진정한 가족이 되어갔다. 로운이와 이슬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펜션의 푸른 잔디받을 함께 뛰놀며 소꿉친구로 자랐다. 점잖고 배려심 깊은 로운이는 활발하고 호기심 많은 이슬이의 뒤를 졸졸 따르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운아, 로운! 빨리 와, 저기 나비 봐!" "슬아, 천천히 가. 넘어진다니까."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펜션'잔향'의 가장 아름다운 배경음악이 되었다. 네 어른은 테라스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며 종종 옛날이야기를 나누었
Last Updated: 2026-05-04
Chapter: 외전 1화서울 도심의 활기찬 꽃집 '은하계'에는 달콤한 꽃향기가 감돌았다. 플로리스트 은하는 꽃다발을 다듬으며 곁에서 묵묵히 화분을 올겨주는 이안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번 생의 이안은 그녀의 곁을 지키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눈빛만으로도 마음이 통하는 연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안은 배달을 가려다 말고 길 저편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군중 속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아이 하나가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대여섯 살 남짓 되었을까. 흩날니는 머리칼과 그 특유의 야무진 발걸음, 무엇보다 찰나에 스친 그 눈매가 이안의 심장을 거세게 두드렸다. "소연...?" 이안은 홀린 듯 그 아이를 따라 몇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아이는 신기루처럼 골목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뒤따라온 은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안, 왜 그래요? 아는 사람이라도 봤어요?" 이안은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기억하는 그에게 그 아이의 실루엣은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선명했다. 그러나 이안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은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그냥 누군가와 닮은 것 같아서. 가자, 은하야." 이안은 자연스럽게 은하를 이끌었지만, 그의 마음속엔 이미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편, 인파를 빠져나온 아이는 무언가 소중한 보물을 찾으러 가는 모험가처럼 설레는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목적지는 인적이 드문 숲 근처의 공터였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허공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수백 년의 그리움을 고독하게 견뎌온 로엘의 뒷모습이었다. 아이는 멈춰서서 그의 뒷모습을 두 눈에담았다. 그리고 세상을 다 아는 듯한 깊은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로엘." 익숙한 목소리에 로엘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았을 때,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오랜만이야. 나의 이번 생도 함께해 줄래?" *** 그로부터 1
Last Updated: 2026-05-04
Chapter: 36화 (完)기적처럼 재회한 로엘과 소연에게 허락된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유한함'이었다. 로엘은 불멸에 가까운 존재였으나, 소연은 창세의 조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가냘픈 인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끝이 있기에 매 순간을 마지막처럼 사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은하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 소연이 아침을 준비하고, 로엘이 정원의 꽃을 가꾸는 평범한 일상이 수십 번의 계절을 지나 수십 년의 세월로 쌓였다. 로엘은 늙어가는 주름 하나하나를 보석처럼 아꼈고, 소연은 변치 않는 모습의 로엘을 보며 자신이 떠난 뒤 홀로 남을 그를 위해 매일 밤 기도했다. 마침내 소연의 생체 시계가 느려지기 시작한 어느 노을진 오후였다. 침대에 누운 소연의 머리칼은 어느덧 백설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로엘은 젊은 날 그 모습 그대로 소연의 곁을 지키며 그녀의 마른 손을 꼭 쥐었다. "로엘, 울지 마..." 소연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처럼 가냘팠다. 로엘은 끓어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안 울어. 너를 만난 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었으니까." 소연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로엘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마침내 평온한 정적이 방 안을 채웠다. 로엘은 소연의 심장 소리가 멈춘 뒤에도 오랫동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이별이 아니라, 잠시 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긴 입맞춤과 같았다. 소연이 떠난 후, 로엘은 다시 '기록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세계의 틈새로 숨어들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으며 쉐리가 남긴 빛과 라멘트가 짜놓은 인과의 그물망이 그녀를 다시 자신에게 데려다줄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을까. 세상은 몰라보게 변했고, 마계와 인간계의 경계는 이제 전설 속의 이야기로 남았다. 어느 화창한 봄날, 로엘은 소연과의 마지막을 보냈던 그 숲의 공터에 서 있었다. 예전의 집은 흔적도 없이
Last Updated: 2026-05-04
Chapter: 35화마계의 가장 깊은 곳, 만물의 생명이 태동하고 사그라드는 '심연의 방'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깨고 라멘트 장로의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앞에는 육신을 잃고 영혼의 입자로 흩어지기 직전인 이안의 자아가 희뿌연 빛을 내며 부유하고 있었다. 시간은 마계의 서늘한 정기처럼 느릿하게, 때로는 인간계의 계절처럼 정직하게 흘러갔다. 라멘트 장로가 자신의 존재를 깎아 부여했던 '다음 생'의 기회는, 이안에게 있어 단순한 수명의 연장이 아닌 기나긴 기다림의 형벌이자 축복이었다. 그는 수십 년간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소음 속에 몸을 숨긴 채 살아갔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빠르게 변하는 유행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늘 한곳만을 향해 있었다. 누군가가 남겼던 마지막 약속, 그리고 자신을 기억하며 홀로 눈물지었을 그 여린 영혼의 흔적을 쫓아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서울의 오후였다. 빌딩 숲 사이로 부는 바람은 며칠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안은 군중 속에서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이제는 지칠 법도 한 긴 세월이었지만, 이안의 심장은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길모퉁이를 돌아 바삐 뛰오던 누군가가 미처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이안의 가슴팍으로 세차게 부딪혀 왔다. "꺅-!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작고 가냘픈 체구였다. 이안의 단단한 품 안으로 파고들듯 부딪힌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중심을 잡아주었다. 손끝에 닿는 온기,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비누 향기. 수십 년 전, 은하가 카페 앞치마를 두르고 소연과 웃고 떠들 때 풍기던 그 익숙한 향취가 이안의 감각을 일깨웠다. "아, 저기... 괜찮으세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굽이치는 긴 금발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산란했고, 이안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에 멈췄다.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에, 깊은 바다를 담아낸 듯 짙은 벽안. 그것은 세월이
Last Updated: 2026-05-04
Chapter: 34화로엘이 돌아오면 모든 비극이 끝날 줄 알았다. 소연은 그와 손을 맞잡고 걷는 매 순간이 기적이라 믿었으나, 운명은 재회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더 가혹한 이별을 던져주었다. 하나뿐인 단짝이자, 텅 빈 1년의 시간을 곁에서 지켜주었던 은하가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왔을때, 소연은 세상을 잃은 듯 오열했다.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것은 그을린 은빛 펜던트뿐이었다. 은하가 목숨을 바쳐 지켜낸 타인의 유품은 주인을 찾아갔으나, 정작 은하 자신의 생명은 어디에서도 보상받지 못했다. 장례를 마친 후, 로엘과 소연은 무거운 벌걸음으로 은하의 자취방을 찾았다. 주인을 잃은 방안에는 아직 그녀가 마시다 만 찻잔과 읽다 덮어둔 책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책상 깊숙한 곳, 가죽 일기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소연은 떨리는 손으로 자물쇠를 열자, 그 안에서 몇 장의 사진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진은 은하가 한 번도 보여준적 없던 모습이었다. 화창한 봄날의 놀이동산, 은하는 남자의 팔짱을 낀 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안?" 로엘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사진 속 남자는 로엘의 가장 충직한 수하이자 벗이였던 이안이었다. 소연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자신과 로엘을 위해 희생한 이안이 은하를 두고 갈 때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감히 상상도 못할 아픈 마음이었겠지... 세 번째 사진은 소연에게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은하가 운영하던 카페에서 소연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앞치마를 두른 채 둘이서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찍은 셀카였다. 사진을 다 확인 한 소연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일기장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은하가 1년 동안 홀로 감내해야 했던 지옥 같은 고독이 박혀있었다. 2025년 x월 x일 로엘이 사라졌다. 소연이는 모든 기억을 잃고 아이처럼 울기만 한다. 분명 로엘이 내 기억도 지우려 했던 것 같은데, 왜인지 나는 모든 것이 선명하다. 이안이 마지막으로 나를 보며 웃어주던 그 표
Last Updated: 2026-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