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망각이 낳은 형벌_완결 후기』안녕하세요, 태이해 작가입니다! 드디어 완결 후기로 인사드리네요. 『망각이 낳은 형벌』의 시작, 다들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사실 SNS에서 본 '노로바이러스와 굴'에 관한 일화가 계기였습니다. 고생할 걸 알면서도 다시 굴을 먹고 마는 인간의 굴레를 보고 "망각이 낳은 형벌"이라 표현한 베스트 댓글을 본 순간, '이거다!' 싶었죠. 단순히 웃어넘길 수 있는 일화였지만, '망각'이라는 키워드가 우리 삶과 사랑에서 얼마나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형벌이 될 수 있는지 진지하게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세계관이 지금에 이르렀네요. ㅎㅎ 집필하면서 저의 사심(?)이 듬뿍 담긴 최애 커플은 사실 이안과 은하였습니다. 메인 커플보다도 이안이 더 돋보였으면 해서 마음껏(?) 고생시키고 희생시켰던 기억이 나네요. 이안을 너무 고생시킨 것 같아 집필하며 마음이 아픈 적도 많았지만, 서브 커플만이 줄 수 있는 그 애절한 여운을 꼭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이안... 은하와 잘 지내고 있겠죠?😄😄 완결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저는 벌써 차기작을 구상 중입니다. 이번 작품이 조금 무거운 '형벌'이었다면, 다음 이야기는 조금 더 [집착 광공/치명적인/구원 서사/회귀] 분위기로 구상 중입니다. 이번 작품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찾아뵐 테니, 잊지 말고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태이해 인스타그램👉🏻 @taeihae -작가 태이해 드림🫶🏻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7
Chapter: 외전 2화(完)과거의 비극과 희생을 건너온 네 명에게 신이 준 마지막 선물은 평범하기에 더욱 찬란한 '내일'이었다. 기적 같은 재회 이후, 소연과 은하에게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축복이 찾아왔다. 같은 해, 같은 달에 임신 소식을 알린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이안과 로엘, 한때 마계를 호령하던 전사와 왕은 이제 기저귀 가방을 메고 분유 온도를 맞추는 초보 아빠가 되었다. 네 사람은 소연과 로엘의 펜션 근처에 보금자리를 합치고 '공동 육아'라는 거대한 모험을 시작했다. 소연과 로엘의 아이는 아빠를 꼭 빼닮은 검은 머리칼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로운이었고, 은하와 이안의 아이는 엄마의 금발과 아빠의 다정하고도 강인한 기질을 이어받은 이슬이었다. 수천 년을 살아온 로엘과 이안에게 육아는 그 어떤 마법이나 전투보다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부르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가락을 쥐었을 때, 두 남자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휩싸였다. "이것이 자식의 사랑이라는 것인가..." 로엘은 곤히 잠든 로운의 이마를 짚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가 생긴다는 것, 그 대가 없는 사랑이 주는 평온함은 마왕의 권능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안 역시 이슬이를 품에 안고 달래며, 자신이 지켜야 할 세상이 이제는 이 작은 아이의 웃음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소연과 은하 또한 서로의 아이를 교차해서 돌보며, 피보다 진한 우정으로 맺어진 진정한 가족이 되어갔다. 로운이와 이슬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펜션의 푸른 잔디받을 함께 뛰놀며 소꿉친구로 자랐다. 점잖고 배려심 깊은 로운이는 활발하고 호기심 많은 이슬이의 뒤를 졸졸 따르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운아, 로운! 빨리 와, 저기 나비 봐!" "슬아, 천천히 가. 넘어진다니까."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펜션'잔향'의 가장 아름다운 배경음악이 되었다. 네 어른은 테라스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며 종종 옛날이야기를 나누었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4
Chapter: 외전 1화서울 도심의 활기찬 꽃집 '은하계'에는 달콤한 꽃향기가 감돌았다. 플로리스트 은하는 꽃다발을 다듬으며 곁에서 묵묵히 화분을 올겨주는 이안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번 생의 이안은 그녀의 곁을 지키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눈빛만으로도 마음이 통하는 연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안은 배달을 가려다 말고 길 저편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군중 속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아이 하나가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대여섯 살 남짓 되었을까. 흩날니는 머리칼과 그 특유의 야무진 발걸음, 무엇보다 찰나에 스친 그 눈매가 이안의 심장을 거세게 두드렸다. "소연...?" 이안은 홀린 듯 그 아이를 따라 몇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아이는 신기루처럼 골목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뒤따라온 은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안, 왜 그래요? 아는 사람이라도 봤어요?" 이안은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기억하는 그에게 그 아이의 실루엣은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선명했다. 그러나 이안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은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그냥 누군가와 닮은 것 같아서. 가자, 은하야." 이안은 자연스럽게 은하를 이끌었지만, 그의 마음속엔 이미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편, 인파를 빠져나온 아이는 무언가 소중한 보물을 찾으러 가는 모험가처럼 설레는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목적지는 인적이 드문 숲 근처의 공터였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허공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수백 년의 그리움을 고독하게 견뎌온 로엘의 뒷모습이었다. 아이는 멈춰서서 그의 뒷모습을 두 눈에담았다. 그리고 세상을 다 아는 듯한 깊은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로엘." 익숙한 목소리에 로엘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았을 때,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오랜만이야. 나의 이번 생도 함께해 줄래?" *** 그로부터 1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4
Chapter: 36화 (完)기적처럼 재회한 로엘과 소연에게 허락된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유한함'이었다. 로엘은 불멸에 가까운 존재였으나, 소연은 창세의 조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가냘픈 인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끝이 있기에 매 순간을 마지막처럼 사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은하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 소연이 아침을 준비하고, 로엘이 정원의 꽃을 가꾸는 평범한 일상이 수십 번의 계절을 지나 수십 년의 세월로 쌓였다. 로엘은 늙어가는 주름 하나하나를 보석처럼 아꼈고, 소연은 변치 않는 모습의 로엘을 보며 자신이 떠난 뒤 홀로 남을 그를 위해 매일 밤 기도했다. 마침내 소연의 생체 시계가 느려지기 시작한 어느 노을진 오후였다. 침대에 누운 소연의 머리칼은 어느덧 백설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로엘은 젊은 날 그 모습 그대로 소연의 곁을 지키며 그녀의 마른 손을 꼭 쥐었다. "로엘, 울지 마..." 소연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처럼 가냘팠다. 로엘은 끓어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안 울어. 너를 만난 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었으니까." 소연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로엘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마침내 평온한 정적이 방 안을 채웠다. 로엘은 소연의 심장 소리가 멈춘 뒤에도 오랫동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이별이 아니라, 잠시 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긴 입맞춤과 같았다. 소연이 떠난 후, 로엘은 다시 '기록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세계의 틈새로 숨어들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으며 쉐리가 남긴 빛과 라멘트가 짜놓은 인과의 그물망이 그녀를 다시 자신에게 데려다줄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을까. 세상은 몰라보게 변했고, 마계와 인간계의 경계는 이제 전설 속의 이야기로 남았다. 어느 화창한 봄날, 로엘은 소연과의 마지막을 보냈던 그 숲의 공터에 서 있었다. 예전의 집은 흔적도 없이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4
Chapter: 35화마계의 가장 깊은 곳, 만물의 생명이 태동하고 사그라드는 '심연의 방'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깨고 라멘트 장로의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앞에는 육신을 잃고 영혼의 입자로 흩어지기 직전인 이안의 자아가 희뿌연 빛을 내며 부유하고 있었다. 시간은 마계의 서늘한 정기처럼 느릿하게, 때로는 인간계의 계절처럼 정직하게 흘러갔다. 라멘트 장로가 자신의 존재를 깎아 부여했던 '다음 생'의 기회는, 이안에게 있어 단순한 수명의 연장이 아닌 기나긴 기다림의 형벌이자 축복이었다. 그는 수십 년간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소음 속에 몸을 숨긴 채 살아갔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빠르게 변하는 유행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늘 한곳만을 향해 있었다. 누군가가 남겼던 마지막 약속, 그리고 자신을 기억하며 홀로 눈물지었을 그 여린 영혼의 흔적을 쫓아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서울의 오후였다. 빌딩 숲 사이로 부는 바람은 며칠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안은 군중 속에서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이제는 지칠 법도 한 긴 세월이었지만, 이안의 심장은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길모퉁이를 돌아 바삐 뛰오던 누군가가 미처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이안의 가슴팍으로 세차게 부딪혀 왔다. "꺅-!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작고 가냘픈 체구였다. 이안의 단단한 품 안으로 파고들듯 부딪힌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중심을 잡아주었다. 손끝에 닿는 온기,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비누 향기. 수십 년 전, 은하가 카페 앞치마를 두르고 소연과 웃고 떠들 때 풍기던 그 익숙한 향취가 이안의 감각을 일깨웠다. "아, 저기... 괜찮으세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굽이치는 긴 금발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산란했고, 이안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에 멈췄다.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에, 깊은 바다를 담아낸 듯 짙은 벽안. 그것은 세월이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4
Chapter: 34화로엘이 돌아오면 모든 비극이 끝날 줄 알았다. 소연은 그와 손을 맞잡고 걷는 매 순간이 기적이라 믿었으나, 운명은 재회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더 가혹한 이별을 던져주었다. 하나뿐인 단짝이자, 텅 빈 1년의 시간을 곁에서 지켜주었던 은하가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왔을때, 소연은 세상을 잃은 듯 오열했다.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것은 그을린 은빛 펜던트뿐이었다. 은하가 목숨을 바쳐 지켜낸 타인의 유품은 주인을 찾아갔으나, 정작 은하 자신의 생명은 어디에서도 보상받지 못했다. 장례를 마친 후, 로엘과 소연은 무거운 벌걸음으로 은하의 자취방을 찾았다. 주인을 잃은 방안에는 아직 그녀가 마시다 만 찻잔과 읽다 덮어둔 책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책상 깊숙한 곳, 가죽 일기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소연은 떨리는 손으로 자물쇠를 열자, 그 안에서 몇 장의 사진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진은 은하가 한 번도 보여준적 없던 모습이었다. 화창한 봄날의 놀이동산, 은하는 남자의 팔짱을 낀 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안?" 로엘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사진 속 남자는 로엘의 가장 충직한 수하이자 벗이였던 이안이었다. 소연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자신과 로엘을 위해 희생한 이안이 은하를 두고 갈 때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감히 상상도 못할 아픈 마음이었겠지... 세 번째 사진은 소연에게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은하가 운영하던 카페에서 소연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앞치마를 두른 채 둘이서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찍은 셀카였다. 사진을 다 확인 한 소연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일기장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은하가 1년 동안 홀로 감내해야 했던 지옥 같은 고독이 박혀있었다. 2025년 x월 x일 로엘이 사라졌다. 소연이는 모든 기억을 잃고 아이처럼 울기만 한다. 분명 로엘이 내 기억도 지우려 했던 것 같은데, 왜인지 나는 모든 것이 선명하다. 이안이 마지막으로 나를 보며 웃어주던 그 표
Última atualização: 2026-05-04
Chapter: 제6화. 지독한 속앓이"어? 뭐라고......?" 이슬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크게 흔들렸다. 로운에게 가지 말라고 낮게 읊조리는 태하의 두 눈에는 금방이라도 투명한 눈물이 차올라 톡 하고 떨어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물기가 어려 있었다. 늘 여유롭던 그의 얼굴에 난생 처음으로 떠오른 간절함이자, 처절한 애원이었다. 하지만 이슬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태하는 고개를 살짝 비틀며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전의 위태로움은 환상이었다는 듯, 그는 순식간에 특유의 나른하고 여유로운 자태를 뽐내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장난이야, 장난. 뭘 그렇게 놀래?" "아....어, 응..." "가자. 사람들 다 빠졌어." 태하는 멍하니 굳어 있는 이슬의 어깨를 툭 치며 한 걸음 앞서 걸어 나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해 보였지만, 굳게 다물린 입술 끝은 미세하게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멀어지는 그의 등 뒤를 바라보며 이슬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엔 방금 전 귓가에 닿았던 그의 숨결과, 미친 듯이 요동치던 심장 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했다. 가슴 속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태하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묵직한 돌덩이가 되어 이슬의 마음을 짓눌렀다. '정말 장난이었을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써 심호흡을 한 이슬은, 아무렇지 않은 척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그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의 뒤를 쫓는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으로 뒤엉킨 실타래 같았다. 이슬을 제치고 앞질러 가던 그 역시 잠시 상념에 빠졌다. 돌이켜보면 이슬은 항상 그랬다. 자신이 한 걸음 다가가면, 약속이라도 한 듯 정확히 한 걸음 멀어지는 야속한 친구였다. 소꿉친구인 로운과 대화를 나눌 때는 아무런 허물도, 벽도 없이 환하게 웃으며 조잘거리던 아이가, 유독 자신이나 다른이들이 다가와 대화에 끼게 되면 귀신같이 입을 다물었다. 최대한 말을 아끼고, 곤란한 표정으로 뒤로
Última atualização: 2026-05-29
Chapter: 제5화. 심장이 말하는 거짓말"어...? 어, 마음에 들어."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갑작스레 훅 끼쳐온 태하의 낯선 분위기에 이슬은 묘한 의아함을 느끼며 자리에 착석했다. 이내 묵직한 체향을 풍기며 그녀의 바로 옆자리에 태하가 몸을 실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타이밍 좋게 상영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이내 거대한 상영관 안의 조명이 일제히 소등되며 스크린 위로 서늘한 빛이 내려앉았다. 어둠이 밀려오자마자 스크린 화면에 온 시선을 고정한 채 집중하기 시작하는 이슬. 그리고 그런 이슬의 옆모습을, 태하는 조금의 숨김도 없이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이미 안다. 그녀의 옆자리는 이미 자신이 아닌 로운의 것이라는 걸. 그녀의 세상에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계곡 바위 위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꼭 쥐고 있던 그 다정한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치솟아 오른, 질투라고 부르기도 구질구질한 감정이 결국 로운을 도발하게 만들었고, 끝내 영문도 모르는 그녀를 이렇게 제 곁으로 불러내고야 말았다. '참 짜치다, 강태하.' 스스로가 한없이 안쓰럽고 한심하면서도, 눈앞의 하얀 얼굴을 볼 때마다 왼쪽 가슴 깊은 곳이 아릿하게 저려오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온전히 제 몫의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그 따가울 만큼 집요한 시선을 느낀 것일까. 이슬이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려 태하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녀가 소리 없이 입모양을 벙긋거렸다. -왜? 그 순진하고 단순한 의문에 태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아득해졌다. '네가 좋아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라는 진심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이내 피식 헛웃음을 지으며 감정을 감추었다. 대신 앞에 놓인 카라멜 팝콘을 하나 집어 들어 달콤한 알맹이를 그녀의 입속으로 쏙 밀어넣었다.
Última atualização: 2026-05-29
Chapter: 제4화. 달콤한 거짓말의 대가로운에게는 '이슬의 단짝 친구인 수경을 만나러 간다'는 뻔한 거짓말을 남겨두고 나온 길이었다. 거짓말을 뱉어내던 순간의 죄책감은 극장에 들어서기 무서운 속도로 휘발되어 버렸다. 이슬은 매장 한구석,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기둥 옆에 서서 초조하게 발끝을 톡톡 거렸다. 더운 날씨 탓인지 뺨이 화끈거렸다. 로운 몰래 태하를 만나러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의 심장을 주체할 수 없이 뛰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기다렸을까, 등 뒤에서 공기를 긁는 듯한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아, 많이 기다렸어?" 이슬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웅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평소와 다르게 말끔한 차림의 태하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언어에서 그녀는 어딘가 이질적인 감정이 몸 속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태하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슬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늘 딱딱하게 성을 붙여 부르거나, '이슬'이라고 불러도 자신에게 거리를 좁히지 않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슬이' 라니.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낯섦과 동시에 묘한 해방감. 그리고 짜릿한 긴장감이 온몸의 신경을 자극했다. 이슬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고개를 살짝 가누며 물었다. "....왜 나한테 슬이라고 불러?" 그 질문에 태하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피식 입매를 비틀어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는 평소의 그의 모습 대신, 어딘가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분위가가 깃들어 있었다. "왜? 나는 부르면 안 돼?" 태하는 이슬에게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빨리 오라는 듯 길고 곧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손짓 하나에 이슬의 발걸음이 자석에 이끌리듯 그를 향해 움이지려던 찰나였다. 지잉- 지잉-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던 이슬의 핸드폰이 거칠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시간에 자신에게 연락을 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로운뿐이었다. 죄책감이 다시금 가슴을 쿡쿡 찔렀다. 이
Última atualização: 2026-05-28
Chapter: 제3화. 잔향의 굴레"강태하. 선 넘지 마."그 짧은 한마디에는 로운의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태하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호선을 그렸다. 불꽃이 튀는 대치 상황이었지만, 정작 그 불꽃의 원인인 이슬은 당황한 기색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여름날의 평화롭던 호숫가는 그렇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은 태하가 짐짓 아무 일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설 때까지 계속되었다.그날 밤, 집에 돌아온 이슬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자꾸만 낮의 장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로운과 동시에 나뭇잎을 낚아채듯 잡았던 찰나의 손길. 심장이 터질 듯 쿵쿵거렸던 그 순간의 감각이 생생했다. 그녀는 주머니 속에 챙겨온 그 나뭇잎을 꺼내 책상 위에 고이 올려두었다.문득, 낮의 소란 끝에 로운이 태하의 귓가에 남긴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졌다. 태하의 그 기분 나쁜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이슬은 결국 핸드폰을 켰다.[강태하. 아까 로운이 마지막으로 뭐라고 말했어?]잠시 후, 화면 위로 태하의 답장이 떴다.[궁금해?ㅋㅋ 그럼 내일 12시까지 창세 영화관 앞으로 와.][뭐? 그냥 알려주면 되지. 치사해 진짜.][아, 참고로 로운한테는 비밀로 하고 와. 잘자라.]태하의 뻔뻔한 태도에 이슬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이대로 잠들 수는 없었다. 그녀는 책상에 놓인 나뭇잎을 들어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나뭇잎 끝에 닿는 그녀의 숨결이 떨리고 있었다."여름의 신 화연님, 저의 첫사랑은 이루어질까요?"간절한 속삭임과 함께 나뭇잎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이후 이슬은 침대에 몸을 느른히 기대 누웠고, 이내 그녀의 무거운 눈커풀이 감기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품에 안고 자고 있던 나뭇잎이 미세하게 진동하더니, 곧이어 옅은 연기와 함께 스스로 발화하며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나뭇잎이 타버리고 남은 은빛 잔재가 신비로운 바람을 타고 두 갈래로 나뉘어 허공을
Última atualização: 2026-05-27
Chapter: 제2화. 물살 아래 숨겨진 진심 "운아, 너는 나중에 어떤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 갑작스럽게 파고든 그녀의 질문에 잔잔하던 호숫가에 돌을 던진 듯, 파문은 로운의 심장까지 거세게 일렁였다. "너......가 아니라 나? 나, 나 누구랑 결혼하고 싶냐고?"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으며 로운은 황급히 이슬과 겹쳐져 있던 손을 떼어냈다.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손끝이 저릿했다. 머쓱함에 헝클어진 머리를 아무렇게나 긁적이며 그는 서둘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호수 너머로 길게 늘어진 노을 빛이 눈이 시릴 정도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당황하고 그래? 그냥 물어본 건데." 이슬이 짓궃은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물기가 맺힌 속눈썹 아래로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리고 너, 귀 엄청 빨개졌어." 이슬의 지적에 로운은 홧홧해지는 볼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슬의 심장도 덩달아 불규칙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닿아있던 손의 온기가 아직도 손등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혹시, 로운이도 나랑 같은 마음인 걸까?' '아니, 그럴리가 없어. 우린 그냥 어릴 때부터 친구잖아.' 이슬이 수줍은 상념에 잠겨 로운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 찰나였다. 정적을 깨고 귀를 찢는 듯한 경쾌하면서도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운! 이슬! 너네 또 붙어있네. 연애하냐?" 갑작스러운 난입에 로운과 이슬은 동시에 움찔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다가온 태하가 짖궃은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 그런 거 아니거든? 시끄러워 태하야." 로운은 홧홧해진 볼을 애써 감추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물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여전히 오른 열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태하는 그런 로운의 뒷모습을 보며 킥킥거렸다. 입꼬리를 비틀어 웃는 그의 표정에는 단순한 장난기 이상의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이슬 역시 멋쩍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Última atualização: 2026-05-27
Chapter: 제1화. 싱그로운 첫사랑 계곡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름을 만끽했다. 누군가는 서둘러 신발을 벗어 던진 채 바지를 걷어 올리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갔고, 또 누군가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싱그러운 수풀과 나무 열매를 바라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신이 난 것은 단연 이슬이었다. "아, 시원해.....!" 이슬은 뒤도 안 돌아보고 신발을 벗더니, 입고 있던 긴 치마를 허벅지께까지 과감하게 걷어 올렸다. 그리고는 큰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햇살에 투명하게 빛나는 뽀얀 발목과 발을 물속에 퐁당 담갔다. 찰랑이는 맑은 물결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보석처럼 부서졌다. 이슬은 내리쬐는 열기에 숨을 한 번 몰아쉬더니, 치렁한 머리를 묶으려는 듯 입술을 벌려 검은 머리끈을 살짝 앙-하며 다물었다. 그리고 보드랍고 하얀 두 손으로 웨이브진 금발을 한데 모아 높이 올려 묶기 시작했다. 길게 드러난 가녀린 목덜미, 입술에 물린 머리끈, 그리고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금빛 머리칼까지. 푸른 계곡물과 어우러진 그녀의 모든 실루엣이 마치 정교하게 그려진 한 폭의 명화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눈에 담은 것은 로운이었다. 두근. 두근. 순간, 온몸을 타고 기묘하게 간질거리는 소름이 돋았다. 쿵. 쿵. 쿵.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통제 불능으로 날뛰는 심장 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 박혀 나뒹굴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낯설고 뜨거운 감각에 로운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굳어버렸다. 그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이슬이 고개를 돌렸다. 로운과 시선이 마주치자, 이슬은 특유의 회사한 미소를 싱긋 지어 보이며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리 와서 앉으라는 무언의 손짓이었다. 로운은 제 속도 모르고 해맑게 웃는 소꿉친구를 보며, 주뼛거리는 걸음으로 느리게 다가갔다. 이내 로운은 이슬의 바로 옆, 물속에 조심스레 발을 담갔다. 시원한 물
Última atualização: 2026-05-21
Chapter: 제16화. 피할 수 없는 덫서이현에게 풀려나 겨우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 지독한 피로감에 당장이라도 침대에 쓰러지고 싶던 유주의 눈앞에, 또 다른 불청객 서이진이 나타났다. "왜, 왜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이진은 피식, 입매를 유연하게 비틀며 유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겉으로는 한없이 능청스럽고 여유로워 보였지만, 유주를 담아낸 그의 집요한 눈동자 속에는 기어코 그녀의 공간을 침범해 냈다는 기묘한 소유욕과 집착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기대한다고." 이 어이없는 상황에 유주는 미간을 좁히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현에게 시달려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이진까지 나타나 자신을 더 피곤하게 만들고 있었다. 유주가 무어라 쏘아붙이려던 찰나, 박윤희 여사의 목소리가 귀가에 울려 퍼졌다. "어머? 우리 유주 왔네. 밥 다 됐어. 이진이랑 같이 들어와서 먹자." "엄,엄마.... 혹시 엄마가 문 열어 준 거야?" "응. 왜?" "엄마!!!!! 아무나 문 열어주면 어떡해!!!" 유주의 고함에 깜짝 놀란 박윤희 여사는 이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내 유주의 등짝을 매섭게 때리며 말을 이었다. "이 기지배가! 친구 귀한 줄도 모르고! 그리고 친구가 앞에 있는데 대놓고 아무나라고 해?" "너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어?" "아, 아파!!! 아니- 엄마! 하-" 박 여사가 유주의 등짝을 한 번 더 때리려 손길을 날린 순간, 이진이 여사의 손목을 부드럽게 낚아채며 싱긋 웃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번뜩였던 서늘하고 차가웠던 눈빛을 순식간에 따뜻한 눈빛으로 갈아끼우고는 여사를 향해 다정하게 속삭였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이렇게 때리시면 어머니 고운 손이 아프잖아요." 그의 능글맞고 싹싹한 행동에 박 여사의 화는 눈 녹듯 누그러졌다. 여사는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이고, 착하기도 해라. 우리 유주가 딱 이진 학생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면 좋을 텐데." "아! 엄마
Última atualização: 2026-06-05
Chapter: 제15화. 소유의 권리"비, 비서라고요...?" "말 그대로야. 내 개인 비서 하라고." 이현은 유주를 서늘한 눈빛으로 훑으며,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바라봤다. 당혹감에 휩싸인 유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아, 아니.... 저기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저 대학생이에요." "그게 뭐가 문제지? 대학? 원하다면 조기 졸업이라도 시켜줄게." "아니, 그게 아니라, 하! 진짜 말이 안 통하네!" 유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하자, 이현은 정말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책상 위 서류를 툭툭치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하유주, 22살 맞지?" "네, 그게 왜요?" "나도 22살인데. 우리, 친구네?" 그의 오만한 목소리가 귓가를 쿡쿡 찌르자, 유주는 불쾌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친구가 무슨 상관이에요? 그쪽은 재벌에 머리까지 좋아서 모든 걸 프리 패쓰 할 수 있었겠지만, 난 아니에요." "어쨋든 전 이 비서일 못해요." 순간, 이현의 장난스럽던 눈빛이 삽시간에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 책상 위로 상체를 숙이자,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유주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내가 지금 너한테 선택하라고 하는 걸로 보여?"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위압적인 태도로 쐐기를 박았다. "이건 네 선택이 아니라 내 결정이고, 넌 그저 따라오기만 하면 돼. 지금 당장 사인하지 않으면, 전화 한 통으로 너희 부모님 공장쯤은 가루로 만들 수 있다는 거 명심해." 이현이 유주에게 다가와 턱을 강압적으로 잡고 돌려 세웠다. 거부할 틈도 없이 그가 입술을 겹쳐왔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유주가 몸부림치며 그의 어깨를 밀쳐냈지만, 이현은 그녀의 두 볼을 양손으로 단단히 감싸 쥔 채 더욱 파고들었다. 숨이 막힐 듯한 키스에 유주의 저항은 서서히 무력해졌다. 한참을 몰아붙이던 이현의 시선이 유주의 쇄골 부근에 머물렀다. 어제 자신
Última atualização: 2026-05-28
Chapter: 제14화. 되풀이되는 악몽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지자, 전화기를 쥔 유주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덮쳐 어디론가 끌고 갈 것만 같은 서이현의 기세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소름이 돋았다. 유주는 애써 숨을 고르며 침착하게 대응하려 노력했다. "네, 무슨 일이시죠?" 퉁명스러운 대꾸에 수화기 너머로 피식, 이현의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내 그의 입에서 쏟아진 한마디는 유주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아까 집 들어가기 전까지도 서이진이랑 함께 있던데." ".........." 집 앞에서의 일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족쇄를 제 발목에 채운 듯했다. 회귀 전부터 이어져 온 그 집요하고 악질적인 감시. 그는 여전히 타인의 삶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지독한 소유욕의 화신이었다. "대답이 없네. 날 자극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너에게 더 집착하길 바라는 거야?" 유주는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울컥한 감정을 억지로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 한마디가 마치 그녀의 목을 단단히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하, 제가 원해서 같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리고 같이 있었다 한들, 서이현 전무님과 제가 무슨 상관이죠?" 욱해서 내뱉은 말은 서이현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듯했다. 한층 더 낮고 서늘한 기운을 두른 그의 목소리가 유주의 귓가를 짓눌렀다. "내일 아침, 너희 집 앞으로 데리러 갈 테니까 전화하면 바로 나와." "나 외에는 그 누구와도 함께할 생각 따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유주가 그에게 무어라 반박하려던 찰나, 이현의 다음 말은 그녀의 가슴 속에 날카로운 쐐기를 박았다. "내일 안 나오면, 너희 부모님이 운영하는 공장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될 줄 알아." 회귀 전과 똑같은 협박이었다. 사리가 나올 것 같은 기분에 유주는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악다구니를 했다. "하, 너는 정말 항상..... 서이현, 이 개또라이 새끼야!" 이현은 그녀의
Última atualização: 2026-05-27
Chapter: 제13화. 덫에 걸린 숨소리유주와 이진의 귓가를 사정없이 파고드는 목소리.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유주의 엄마, 박윤희 여사였다."엄, 엄마........?""그래, 유주야. 뭘 그렇게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유주의 시선이 이진과 엄마 사이를 좌우로 오가며 세차가 흔들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유주가 입술을 짓씹으며 변명거리를 찾던 바로 그 찰나.이진의 매끄러운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언제 굳어 있었냐는 듯, 박윤희 여사를 향해 세상 무해하고 살갑게 웃어 보였다."안녕하세요, 어머님.""그래, 유주 친구니?""네, 유주 친구 서이진이라고 합니다."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능숙했다. 이진은 특유의 다정한 눈빛을 흘리며 능글맞은 멘트를 툭 던졌다. "유주가 누굴 닮아 이렇게 미인인가 했더니, 어머님을 쏙 빼닮아서였네요."그 말 한마디에 박윤희 여사의 눈빛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단 번에 흘러가는 공기의 흐름을 읽어낸 유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 싶은 직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유주는 다급하게 엄마의 팔짱을 꽉 끼어안으며 강제로 몸을 돌려세웠다."엄마! 빨리 집에 가자, 응?""얘, 유주야! 뭐가 그렇게 급해?"박윤희 여사는 제 팔이 끌려가는 와중에도 슬쩍 고개를 돌려 이진을 힐끔거렸다. "잘생긴 친구가 싹싹하게 인사까지 하는데, 제대로 받아주지 않고 가는 게 어디 있어?"대놓고 날아오는 칭찬에 이진의 눈매가 유연하게 휘었다. 엄마에게 붙들려 안절부절못하는 유주의 모습이 제법 우스웠던, 이진은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쐐기를 박듯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다정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어머님. 다음에 제대로 인사드리러 올게요. 그때 제게 맛있는 밥 한 끼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어머, 그래요. 이진 학생. 언제든지 놀러 와요.""네! 어머님, 조심히 들어가세요."이진이 싹싹하게 목소리를 높이자, 박윤희 여사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Última atualização: 2026-05-19
Chapter: 제12화. 선명한 낙인이진은 자신과 키스하던 도중 유주가 이현의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 하자,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으음......." 유주가 몸을 뒤척이며 감겼던 눈을 뜨자, 눈앞의 인영이 이현이 아닌 이진이라는 사실이 선명히 들어왔다. 꿈속에서 이현과 나누었던 키스가 설마 서이진과 했던 것이었을까. 잠에서 막 깬 유주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이진은 유주가 앉아 있는 조수석 시트를 뒤로 젖히고는 그대로 그녀의 위를 덮쳐 눌렀다. "헉, 뭐 하시는 거예요?" 갑작스럽게 몰아붙이는 이진의 기세에 놀란 유주가 두 팔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가녀린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턱을 잡아 돌려 제 시선에 억지로 맞추었다. "하유주, 똑바로 봐." "네 눈앞에 있는 건 나야. 나, 서이진이라고!" 그의 서늘한 음성이 좁은 차 안을 울렸다. 순간, 이대로 서이진에게 휘말려 페이스를 잃으면 안 된다는 직감이 유주의 온몸을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도리어 이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쏘아붙였다. "근데요? 제가 보기엔 서이현이나 서이진이나 다를 거 하나 없어요." 그녀의 서늘한 냉소가 입술 끝에 매달렸다. "이제 '서가' 사람이라면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고요!" 이어 유주는 제 몸을 짓누르는 이진의 어깨를 힘껏 밀쳐내며 외쳤다. "그러니까 당장 비켜요!" 매몰차게 대답하는 유주를 내려다보는 이진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도 입술 끝에는 기이한 미소가 걸렸다. 툭 치면 부러질 듯 가녀린 여자가 내뱉는 독설이 이토록 자극적이었던가. 가벼웠던 마음의 무게추가 걷잡을 수 없이 무겁게 기울며, 그녀를 제 발아래 굴복시키고 싶다는 뒤틀린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하-!" "씨발, 하유주 존나 가지고 싶다. 진짜-" 그의 눈동자 속에서 번들거리는 욕망이 노골적으로 형태를 드러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치
Última atualização: 2026-05-15
Chapter: 제11화. 탐나는 그녀"유주야, 명심해. 이현이는 널 부수어서라도 가지려 하겠지만, 난 아니야. 난 네가 스스로 나한테 오길 기다릴 거거든." 이진의 눈동자에 기이한 승부욕이 어렸다. 그것은 이현의 노골적은 폭력성보다 더 기괴한 집착이었다. "............." 유주는 대답 대신 차문에 몸을 기댔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밤거리의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유주는 떨리는 손을 들어 목덜미에 얹었다. 이현이 입 맞추었던 목덜미가 마치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같은 시각, 이현은 자신의 차 안에서 운전대를 부술 듯 움켜쥐고 있었다. 차 앞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처참했다. 유주를 겁줬다는 자책감보다, 이진의 뒤에 숨어 자신을 보던 유주의 공포 어린 눈빛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유주...." 그녀의 이름을 뇌까리는 이현의 목소리에 처절한 갈증이 묻어났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오늘 자신의 행동이 유주를 더 멀리 밀어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녀가 다른 누구의 손을 잡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게 나았다. 이현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채 두 번을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받았다. -네, 전무님. "하유주 동선 24시간 감시해. 서이진과 접촉하는 순간 보고하고." -네, 알겠습니다. 뚝. 전화를 끊은 이현이 시트를 깊에 파고들며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유주의 향기가 감도는 것만 같았다. "나한테서 못 벗어나. 죽어도 내 옆어서 죽어." 그것은 연정이자 저주였고, 동시에 하유주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서이현 자신의 비명이기도 했다. 한편, 이진의 차 안에는 유주는 차갑게 식은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이 싸움의 끝에 무엇이 남을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갈 길은 영영 끊어졌다는 사실뿐이었다. 서이현의 뜨거운 광기와 서이진의 차가운 계락 사이에서, 유주는 숨이 막히는 압박감을 느끼며 눈을
Última atualização: 2026-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