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성녀를 심판하러 왔습니다

죽은 성녀를 심판하러 왔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By:  유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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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죽여 신전에서 추방된 옛 성녀 아스테리아는 죽음의 신을 섬기다 최후를 맞지만, 로젠하르트 공작부인의 몸을 차지해 살아남는다. 젊음을 유지하려 제국민의 피를 마시고 현 성녀 세레나의 신력까지 빼앗은 그녀. 죽어 가던 세레나의 마지막 기도에 천족의 사고뭉치 막내 라엘이 강림한다. 라엘은 신성제국의 연쇄 실종을 수사하던 황태자 카시안과 손잡지만, 힘을 나눌수록 두 사람의 몸과 감각은 위험할 만큼 깊이 얽힌다. 그러나 세레나를 구하는 순간 라엘은 천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끝이 정해진 공조 속에서, 황태자는 성녀의 얼굴을 한 다른 영혼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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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프롤로그. 죽은 성녀는 피를 마신다

신성제국의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대신전의 첨탑 위에서 거대한 종이 흔들렸다.

댕―

첫 번째 종소리가 수도의 새벽을 깨웠다.

댕―

두 번째 종소리가 대신전 앞에 모인 신도들의 머리 위로 장엄하게 퍼져 나갔다.

댕―

세 번째 종이 울리자 새하얀 날개를 펼친 여신상이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대신전은 한눈에도 성스러워 보였다. 하늘을 향해 뻗은 수십 개의 첨탑과 황금빛 지붕, 빛의 여신이 남긴 기적을 새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까지. 신성제국 아르테온의 중심에 자리한 그곳은 인간의 탐욕이나 악의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장소처럼 보였다.

아픈 이들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가난한 이들은 두 손을 모은 채 작은 기적 하나가 자신에게도 내려오기를 빌었다. 귀족들은 황금과 보석을 바쳤으며, 하얀 예복을 입은 사제들은 여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찬란한 대신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신을 위한 의식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검은 돌로 둘러싸인 지하 기도실에는 여신의 빛이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수십 개의 검은 초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고, 초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바닥에 새겨진 검은 태양의 문양 위로 모였다. 뼈와 가시가 뒤엉킨 기괴한 문양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은제 욕조가 놓여 있었다.

욕조를 채운 것은 물이 아니었다.

붉은 피였다.

피가 가득한 욕조 안에 한 여인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눈처럼 희고 매끄러운 피부 위로 붉은 핏물이 흘렀으며, 탐스럽게 늘어진 금발 끝에서도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오십을 넘긴 것으로 알려진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아델리아 로젠하르트 공작부인.

황실과 혼맥으로 이어진 명문 공작가의 안주인이자 신성제국 최고의 자선가. 그녀는 해마다 대신전에 막대한 기부금을 보냈고, 제국 각지에 고아원과 치료소, 무료 구호원을 세웠다. 병든 평민의 손을 직접 잡고 고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를 사람들은 살아 있는 천사라고 불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델리아는 한때 진짜로 신의 사랑을 받은 여자였으니까.

그때 문밖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아델리아는 피에 젖은 손으로 욕조 가장자리를 쓸어내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철문 사이로 앳된 얼굴 하나가 보였다.

“로젠하르트…… 공작부인?”

신전의 구호소에서 일하는 시녀, 마리안이었다.

올해 열일곱이 된 마리안은 병든 어머니의 약값을 벌기 위해 석 달 전 수도로 올라왔다. 낮에는 환자들의 식사를 나르고 밤에는 빈 회랑과 기도실을 청소했다. 로젠하르트 공작가에서 운영하는 구호소에 들어온 덕분에 어머니가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었으니, 힘든 일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평소라면 잠겨 있어야 할 지하 기도실의 철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문 안쪽에서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 마리안은 촛불을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다 보았다.

피로 가득한 욕조.

천장에 매달린 쇠사슬.

그리고 쇠사슬 끝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젊은 남자의 시신을.

마리안의 손에서 촛대가 떨어졌다.

달그락―

작은 소리가 지하 기도실 안에 크게 울렸다.

아델리아는 놀라지도, 서둘러 몸을 가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붉게 젖은 욕조 가장자리에 팔을 기댄 채 아주 다정하게 웃었다.

“거기까지 들어오면 안 되었는데.”

마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 살려 주세요.”

“내 구호원에서 일하는 아이구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본 것도 전부 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마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을 참으려는 듯한 모습에 아델리아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다지?”

마리안의 숨이 멎었다.

“어떻게…….”

“내 구호원에 들어온 사람인데 내가 모를 리가 있겠니? 어머니의 약값도 전부 내가 내 주고 있단다.”

“제발 어머니는 건드리지 마세요.”

“그건 네가 얼마나 얌전히 행동하는지에 달렸지.”

아델리아가 욕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렴.”

마리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욕조 아래로 흘러내린 핏물이 검은 돌바닥을 타고 그녀의 맨발까지 다가왔다. 피가 발끝에 닿는 순간, 바닥의 마법진이 붉은빛을 내며 꿈틀거렸다. 죽어 있던 문양이 새로운 제물을 알아본 것처럼 깨어났다.

그제야 마리안은 깨달았다.

자신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소녀는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치렴.”

뒤에서 아델리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최선을 다해서.”

누구도 곧바로 마리안을 쫓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아델리아는 소녀가 절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여유롭게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리안은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뛰어올라 긴 회랑으로 빠져나왔다.

신발 한 짝이 벗겨졌고, 얇은 발바닥은 거친 돌바닥에 쓸려 피투성이가 되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회랑 끝에는 대예배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오늘은 보름달을 맞아 철야 기도가 열리는 날이었다. 저 계단만 오르면 수백 명의 신도와 사제가 있을 터였다. 황실 성기사들이 지키는 대예배당 안까지 도착하면 공작부인도 자신을 함부로 데려갈 수 없을 것이다.

마리안은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았다.

그러나 발끝이 첫 번째 계단에 닿기 직전,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안 돼!”

어둠 속에서 나타난 기사들이 마리안의 몸을 뒤로 끌어당겼다. 소녀는 바닥에 손톱을 세우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손톱이 부러지고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흘렀지만 건장한 기사들의 힘을 이겨 낼 수 없었다.

“놔주세요!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세요!”

대예배당에서는 여신을 찬양하는 성가가 들려왔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백 명이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마리안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회랑에 설치된 결계가 소녀의 목소리를 가두고 있었다.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돌아가지 않으면 어머니도 죽어요!”

기사들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오늘 본 건 전부 잊을게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여신께 맹세할 테니까……!”

마리안의 손이 돌바닥을 긁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계단을 향해 뻗었지만 점점 멀어졌다.

“제발……!”

그것이 소녀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외침이 될 수도 있었다.

회랑에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반대편에서 일정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또각.

아델리아가 얇은 실내복 위에 검은 가운을 걸친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젖은 옷자락에서 붉은 물이 떨어졌다. 새하얀 대리석 위로 핏방울이 길게 이어졌지만, 주변에 늘어선 시종들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이번 아이는 유난히 시끄럽구나.”

아델리아가 붉게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공포를 많이 느낀 피는 맛이 거칠어지는데.”

“의식실에서 진정시키겠습니다, 마님.”

집사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피를 흘리게 하지는 마렴. 성녀의 힘을 완전히 흡수하려면 평소보다 많은 양이 필요하니.”

“명심하겠습니다.”

아델리아는 끌려가는 마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삼십여 년 전, 그녀의 이름은 아델리아가 아니었다.

아스테리아.

빛의 여신이 직접 선택했다는 고귀한 성녀. 손길만으로 죽어 가는 사람을 일으키고 기도 한 번으로 메마른 땅에 비를 내렸으며, 그녀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흰 꽃이 피었다고 전해지는 기적의 주인공이었다.

신성제국의 사람들은 아스테리아가 평생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리라 믿었다.

성녀는 배고파해서도 안 되었고, 화를 내서도 안 되었으며,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사랑해서도 안 되었다. 성녀의 몸과 시간, 힘과 감정은 모두 여신과 신성제국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치유를 당연하게 받으면서도 정작 아스테리아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 사람을 죽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자신의 명령을 거부한 늙은 사제의 심장을 신력으로 터뜨렸다.

아스테리아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사제를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꼈다. 사람을 살릴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해방감이었다.

대신전은 사건을 덮었다.

성녀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제국의 신앙이 흔들릴 수 있었으므로, 사제들은 죽음을 병으로 위장한 뒤 아스테리아에게 조용히 참회하라고 명령했다. 다시 자비로운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서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해 주겠다고 했다.

아스테리아는 참회하지 않았다.

두 번째 사람을 죽였고, 세 번째 사람의 목숨도 빼앗았다.

그제야 대신전은 그녀에게서 성녀의 지위를 박탈하고 추방했다. 여신의 축복을 빼앗긴 몸은 빠르게 쇠약해졌고, 사람들은 타락한 성녀가 비참하게 죽으리라 믿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죽어 가던 그녀에게 손을 내민 것은 빛의 여신이 아니었다.

죽음의 신이었다.

죽음의 신을 숭배하는 자들은 타인의 생명을 바칠수록 강한 힘을 얻었다. 목숨을 빼앗으면 젊음을 얻었고, 고통을 바치면 아름다움을 얻었다. 그 집단에서는 누구도 아스테리아에게 타인을 위해 희생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생명이 그녀를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아스테리아는 죽음의 신을 모시는 새로운 성녀가 되었다.

하지만 비밀 집단도 끝내 황실의 토벌을 피하지 못했다. 수백 명의 신도와 함께 불길에 휩싸인 아스테리아는 세상에서 사라졌고, 대신전은 타락한 성녀가 완전히 소멸했다고 선포했다.

몸은 분명히 죽었다.

그러나 죽음의 신에게 수백 개의 생명을 바친 영혼은 사라지지 않았다.

주인을 잃고 떠돌던 아스테리아의 영혼은 갓 숨이 끊어진 젊은 귀족 여인의 육체를 발견했다.

아델리아 로젠하르트.

아이를 유산한 뒤 고열을 앓다 숨을 거둔 스물두 살의 공작부인.

아스테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그 몸을 차지했다.

그날 이후 죽은 공작부인은 다시 눈을 떴다.

사람들은 그것을 여신의 기적이라 불렀다.

아스테리아는 아델리아의 얼굴로 제국 최고의 자선가가 되었다. 고아원을 세우고 치료소를 열었으며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녀의 시설에는 의지할 가족이 없고, 사라져도 찾아올 사람이 드문 이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그녀에게 자선 사업은 선행이 아니었다.

필요할 때마다 가장 싱싱한 제물을 고를 수 있는 거대한 사육장이었다.

“성녀의 상태는?”

아델리아가 물었다.

집사는 주변을 살핀 뒤 더욱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도 음식은 거의 드시지 못했습니다. 다리의 감각도 완전히 사라진 듯합니다. 대신전에서는 원인 불명의 신력 고갈증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어리석기는.”

현재 신성제국의 성녀, 세레나.

빛의 여신이 아스테리아를 버린 뒤 오랜 시간이 지나 선택한 새로운 아이였다.

세레나는 지나치게 순하고 사람을 쉽게 믿었다. 자신을 후원하겠다는 공작부인의 친절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아델리아가 선물한 성물을 매일 목에 걸고 다녔다. 그 성물이 신력과 생명력을 조금씩 빼앗아 아델리아에게 전달하는 저주받은 물건이라는 것도 모른 채.

신력을 빼앗기기 시작한 세레나는 가장 먼저 시력을 잃었다.

다음에는 다리의 감각이 사라졌고, 이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아델리아가 찾아오는 날이면 증상은 더욱 심해졌지만, 누구도 제국 최고의 자선가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세레나의 병을 치료하겠다며 값비싼 약과 명의를 보내는 아델리아를 칭송했다.

“다음 보름달이면 성녀의 힘이 완전히 제게 넘어옵니다.”

아델리아가 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로 순백의 빛이 피어났다. 본래 세레나의 것이었던 신력이었다. 그러나 빛의 가장자리에는 검은 기운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빛과 죽음의 힘은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두 힘을 한 몸 안에 가두려면 젊고 건강한 피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명이면 충분했지만, 빼앗은 신력이 커질수록 더 많은 피가 필요해졌다. 이제는 서너 명을 바쳐도 몸 안의 균열을 완전히 잠재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델리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세레나의 신력을 모두 빼앗는 순간, 자신은 다시 완전한 성녀가 될 것이다.

빛과 죽음을 동시에 다루는 유일한 성녀.

대신전과 신성제국을 자신의 발아래 두고, 신조차 거역할 수 있는 존재가 될 터였다.

“마리안의 피는 목욕에 사용하고, 남은 것은 잔에 담아 가져오렴.”

아델리아는 붉게 젖은 입술을 혀끝으로 천천히 훑었다.

“오늘은 유난히 목이 마르는구나.”

같은 시각, 황궁의 동쪽 집무실에도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커다란 책상 위에는 신성제국 전역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지도 위에는 수십 개의 검은 표식이 꽂혀 있었고, 각각의 표식 옆에는 실종자의 이름과 나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가 적혀 있었다.

황태자 카시안 아르테온은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서늘한 푸른 눈이 움직였다. 그는 북부에서 시작해 서부와 남부, 수도까지 이어진 표식을 하나씩 확인한 뒤 손에 들고 있던 명단을 내려놓았다.

“마흔세 명.”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지난 일 년 동안 확인된 사람만 마흔세 명입니다.”

카시안의 맞은편에는 황실 성기사단장 데미안이 서 있었다. 그는 두꺼운 서류철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공식 기록에서는 열일곱 명만 실종자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나머지는 병사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다고 처리되었습니다.”

“시신이나 이동 기록은?”

“없습니다. 장부에만 적혀 있습니다.”

“기록을 작성한 사람들은?”

“대부분 로젠하르트 공작가에서 후원금을 받는 시설의 책임자들입니다.”

카시안이 붉은 실을 들어 지도 위의 표식들을 연결했다.

흩어져 있던 수십 개의 선이 하나의 문장 앞에서 겹쳤다.

붉은 장미를 문 은빛 뱀.

로젠하르트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공작부인이 직접 관련되었다고 보십니까?”

데미안의 질문에도 카시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델리아 로젠하르트는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귀부인이었다. 증거 없이 그녀를 조사했다가는 황실이 신전의 자선 사업을 탄압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대신전의 고위 사제들과 오랫동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시안은 사람들의 칭송보다 기록을 믿었다.

기록은 지나치게 선명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난달 대신전에서 사라진 견습 사제도 공작부인의 추천으로 들어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실종되기 전날, 그는 황실 감찰부에 탄원서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탄원서의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발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없앤 거겠지.”

카시안은 명단 가장 아래에 적힌 이름을 바라보았다.

마리안 베르.

로젠하르트 구호소 소속. 대신전 야간 시녀. 열일곱 살.

오늘 밤 근무가 끝난 뒤 황실 감찰관과 만나기로 되어 있던 소녀였다. 마리안은 구호소에서 이상한 장부를 발견했다며 보호를 요청해 왔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카시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대신전으로 간다.”

“지금은 철야 기도 중입니다. 황실에서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면 신전이 반발할 겁니다.”

“군사를 이끌겠다고 한 적은 없어.”

카시안은 책상 위에 놓인 검을 집어 들었다.

“너와 나, 둘이면 충분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움직이실 생각입니까?”

“황실에 도움을 청한 제국민이 사라졌다.”

검을 허리에 찬 카시안이 집무실 문으로 향했다.

“그것만으로 내가 움직일 이유는 충분해.”

그 시각, 대신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성녀의 방에서는 가느다란 숨소리만 이어지고 있었다.

세레나는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홀로 누워 있었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오는지, 곁에 누가 서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손끝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온몸이 타는 듯 아팠고, 오래전부터 감각을 잃은 다리는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닌 듯했다.

세레나는 자신에게 남은 신력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원인 모를 병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의 힘을 훔치고 있었다.

의심되는 사람도 있었다.

늘 다정한 목소리로 안부를 묻고 자신의 손을 잡아 주던 로젠하르트 공작부인. 그녀가 다녀간 밤이면 더 많은 신력이 사라졌다.

하지만 세레나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었다.

말하려 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델리아가 선물한 목걸이가 목을 조였기 때문이다.

성물을 벗으려 하면 손가락이 굳었고, 도움을 청하려 하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세레나는 한때 수천 명의 병자를 구했던 성녀였지만, 지금은 자신 한 사람조차 구할 수 없었다.

‘여신이시여.’

메마른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제발 제 기도를 들어 주세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기도가 신에게 닿지 않은 지 오래였다. 세레나는 자신의 신력이 고갈되면서 기도의 통로마저 끊겼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이 죽으면 아델리아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대신전에서 사라진 시녀와 견습 사제들, 구호소에 들어갔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죽음을 밝혀 줄 사람도 없었다.

‘저를 살려 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세레나의 보이지 않는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제 몸을 가져가셔도 괜찮아요. 제게 남은 힘을 전부 거두셔도 돼요.’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한 번.

그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한 번.

‘그러니 저 여자를 막아 주세요.’

세레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신력을 기도에 실었다.

‘더는 아무도 죽지 않게 해 주세요.’

희미한 기도가 인간계의 하늘을 넘어 천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신에게 닿았다.

천궁에서는 때마침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콰아아앙―!

황금빛 지붕이 반으로 갈라지고, 구름을 엮어 만든 정원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놀란 신조들이 날아올랐으며 잠들어 있던 고대 신수들이 연못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소란의 중심에는 새하얀 날개를 지닌 여자가 서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 작고 아름다운 얼굴. 천족의 고귀함을 증명하는 날개 끝에는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었고, 손에는 반으로 부러진 신창이 들려 있었다.

천족의 말썽쟁이 막내, 라엘이었다.

“라엘!”

대천사의 호통이 천궁을 뒤흔들었다.

라엘은 부러진 신창을 등 뒤로 슬그머니 감추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네가 그 말을 한 것이 이번 달에만 열두 번째다!”

“아직 이번 달이 사흘이나 남았는데 열두 번밖에 안 했으면 많이 줄인 것 아닌가요?”

대천사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라엘은 호기심이 많았고 참을성이 없었다. 출입이 금지된 곳에는 반드시 들어갔으며, 만지지 말라는 물건은 일단 만져 본 뒤에야 왜 만지면 안 되는지 확인했다.

이번에는 봉인된 신창이 정말로 천궁의 벽을 가를 만큼 강한지 궁금했다.

결과는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였다.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수리는 제가 할게요.”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하고 구름 정원을 폭우 구름으로 바꿔 놓았지.”

“꽃에는 물이 필요하잖아요.”

“그 비 때문에 인간계의 한 왕국이 사흘 동안 물에 잠겼다!”

라엘이 시선을 피했다.

바로 그때 인간계에서 올라온 기도가 천궁에 도착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운 빛이 대천사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세레나의 마지막 기도였다.

기도를 통해 세레나의 몸에 새겨진 저주와 빼앗긴 신력, 신성제국 전역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이 차례로 드러났다.

대천사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죽은 성녀가 돌아왔군.”

“죽은 성녀요?”

라엘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다가왔다.

“아스테리아다. 죽음의 신을 따르다 소멸한 것으로 알려진 타락한 성녀가 인간의 몸을 차지했다.”

“그럼 잡아 오면 되잖아요.”

“신들이 인간계에 직접 개입할 수는 없다.”

“그럼 천족을 보내면 되죠.”

라엘은 별다른 생각 없이 말했지만,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대천사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강한 힘을 가졌으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천상에 두었다가는 또 무엇을 부술지 알 수 없는 사고뭉치. 마침 인간계에 내려보낼 이유가 필요한 천족의 막내.

라엘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왜 그렇게 보세요?”

“인간계를 구하고 싶다고 했지?”

“제가 간다고는 안 했는데요.”

“방금 천족을 보내자고 하지 않았느냐.”

“저 말고 다른 천족도 많잖아요.”

대천사가 웃었다.

오라버니가 저렇게 다정하게 웃을 때는 대개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라엘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발밑으로 거대한 강림진이 펼쳐졌다.

“잠깐만요.”

“성녀 세레나의 몸에 강림하여 그녀의 빼앗긴 신력을 되찾아라.”

“왜 제가 가요?”

“아스테리아의 영혼을 붙잡아 천상으로 압송하고, 신성제국에서 벌어진 실종 사건의 진상도 밝혀야 한다. 세레나의 시력을 되돌린 뒤 그녀가 자신의 몸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 육체를 지켜라.”

“이건 임무가 아니라 추방이잖아요!”

라엘이 다급히 날개를 펼쳤지만 이미 늦었다. 천궁의 바닥이 빛으로 변하면서 그녀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건을 해결하기 전에는 돌아올 수 없다.”

“오라버니!”

“인간계에서는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마라. 세레나의 육체가 손상되면 원래 영혼도 위험해진다.”

“그 중요한 걸 떨어뜨리면서 말하면 어떡해요!”

“건투를 빈다.”

빛이 닫혔다.

라엘은 끝없는 구름 아래로 추락했다.

그리고 인간계에서는 죽어 가던 성녀의 심장이 마침내 멈췄다.

방을 지키던 시녀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성녀님께서 숨을 쉬지 않으십니다!”

다급한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사제와 의원들이 몰려왔지만 누구도 성녀의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빛의 기둥이 대신전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신전 전체가 뒤흔들렸다.

창문이 깨지고 촛대가 쓰러졌다. 성녀의 침대 주변으로 수백 개의 빛 문자가 떠올랐고, 조금 전까지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세레나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쿵.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에서 흩날렸다.

세 번째 박동과 함께 성녀가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줏빛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라엘은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다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아무것도 안 보여?”

강림은 성공했다.

육체의 원래 주인인 세레나의 영혼도 몸 안쪽에서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목에는 무언가가 단단히 채워져 있었고, 팔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온몸은 수백 개의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이 몸,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엉망이잖아.”

그 순간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대신전으로 달려온 황태자 카시안이 성기사들을 이끌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머리카락 아래로 서늘한 푸른 눈이 성녀를 향했다.

조금 전까지 죽었다던 사람이 살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라 불러야 했다.

하지만 카시안은 곧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세레나는 눈을 뜨자마자 여신을 찾지도 않았고, 자신을 둘러싼 사제들에게 괜찮다고 안심시키지도 않았다. 대신 답답하다는 듯 목에 걸린 성물을 잡아당기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성녀 세레나.”

카시안의 목소리에 라엘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예요?”

방 안의 사제들이 술렁였다.

신성제국에서 황태자의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더구나 세레나는 여러 공식 행사에서 카시안과 만난 적이 있었다.

카시안이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카시안 아르테온입니다.”

“황태자?”

“그렇습니다.”

“마침 잘됐네요. 이리 와 봐요.”

명령하듯 말한 라엘이 손을 내밀었다. 카시안이 경계하며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허공을 더듬다 그의 가슴을 짚었다. 단단한 제복을 만진 손이 위로 올라가 턱과 뺨, 콧날을 차례로 훑었다.

카시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뒤따라 들어온 사제들과 성기사단장은 숨을 삼켰다. 평소의 세레나라면 황태자의 얼굴을 함부로 만질 사람이 아니었다.

라엘은 손끝으로 카시안의 이목구비를 확인한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무엇이 말입니까?”

“얼굴은 괜찮은 것 같아서요.”

“…….”

“앞으로 계속 붙어 다녀야 할 사람의 얼굴이 별로면 곤란하잖아요.”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시안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던 성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느다란 손목 너머로 미약한 신력과 함께 전혀 다른 존재의 기운이 느껴졌다.

신성하면서도 낯설고, 인간이 품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강대한 기운이었다.

“당신은 세레나가 아니군.”

라엘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황태자는 눈치가 빠르네요.”

카시안이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차갑게 물었다.

“성녀의 몸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이미 이 여자가 다 망가뜨려 놓았는걸요.”

“이 여자?”

라엘은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성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델리아 로젠하르트.”

카시안의 눈빛이 변했다.

황실에서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던 이름이었다.

그 순간 몸 깊은 곳에서 세레나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탁드려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그 여자를…… 막아 주세요.』

세레나가 겪은 고통이 라엘에게 밀려들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홀로 견딘 시간과 빼앗긴 신력,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 간 사람들의 마지막 기억이 가슴을 짓눌렀다.

라엘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인간계로 쫓겨났다는 불만도 잠시 잊혔다.

누군가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위해 사람을 죽였다. 다른 사람의 삶과 힘을 빼앗아 제 것으로 삼았으며, 이제는 신성제국 전체를 자신의 제단으로 만들고 있었다.

라엘은 불의를 오래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애초에 참을성이 있었다면 천상에서 사고뭉치로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태자.”

“말하십시오.”

“제 목에 걸린 것부터 끊어 줘요. 그리고 로젠하르트 공작부인이 성녀에게 보낸 물건은 하나도 남김없이 압수하고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부 저주받은 물건이니까.”

라엘이 카시안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로 작은 빛 하나가 피어났다. 빛의 성녀가 사용하던 신력과 닮았지만 근원부터 달랐다. 인간은 감히 품을 수 없는 천상의 권능이었다.

그 빛을 본 카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당신이 찾는 사람들은 대신전 지하에 있어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죽은 사람들이 알려 줬어요.”

라엘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카시안이 있는 곳을 정확히 바라보았다.

“그러니 지금부터 저와 함께 가요.”

“어디로 말입니까?”

그녀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죽었다고 믿었던 성녀를 잡으러.”

멀리 떨어진 지하 의식실에서 아델리아가 피가 담긴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잔에 입술이 닿기 직전.

쨍그랑―!

새하얀 균열이 은잔을 가로질렀다.

아델리아의 미소가 사라졌다.

세레나의 몸에 박아 두었던 저주의 흔적이 하나둘 끊어지고 있었다. 죽어 가던 성녀에게서 전에 없던 강대한 힘이 솟구쳤다. 인간의 신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고 뜨거운 빛이었다.

아델리아는 깨진 잔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엇이 내려온 거지?”

라엘은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이 붙잡아야 할 여자가 과거 진짜 성녀였다는 것을.

아델리아 역시 알지 못했다.

그토록 탐냈던 성녀의 몸에 천상에서 가장 골치 아픈 막내가 내려왔다는 것을.

피로 젊음을 유지하는 죽은 성녀와, 사고를 치고 인간계로 내려온 천족의 막내.

그리고 신보다 증거를 믿는 신성제국의 황태자.

세 사람의 운명이 핏빛 보름달 아래에서 처음으로 얽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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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죽은 성녀는 피를 마신다
신성제국의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대신전의 첨탑 위에서 거대한 종이 흔들렸다.댕―첫 번째 종소리가 수도의 새벽을 깨웠다.댕―두 번째 종소리가 대신전 앞에 모인 신도들의 머리 위로 장엄하게 퍼져 나갔다.댕―세 번째 종이 울리자 새하얀 날개를 펼친 여신상이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대신전은 한눈에도 성스러워 보였다. 하늘을 향해 뻗은 수십 개의 첨탑과 황금빛 지붕, 빛의 여신이 남긴 기적을 새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까지. 신성제국 아르테온의 중심에 자리한 그곳은 인간의 탐욕이나 악의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장소처럼 보였다.아픈 이들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가난한 이들은 두 손을 모은 채 작은 기적 하나가 자신에게도 내려오기를 빌었다. 귀족들은 황금과 보석을 바쳤으며, 하얀 예복을 입은 사제들은 여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찬란한 대신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신을 위한 의식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검은 돌로 둘러싸인 지하 기도실에는 여신의 빛이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수십 개의 검은 초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고, 초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바닥에 새겨진 검은 태양의 문양 위로 모였다. 뼈와 가시가 뒤엉킨 기괴한 문양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은제 욕조가 놓여 있었다.욕조를 채운 것은 물이 아니었다.붉은 피였다.피가 가득한 욕조 안에 한 여인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눈처럼 희고 매끄러운 피부 위로 붉은 핏물이 흘렀으며, 탐스럽게 늘어진 금발 끝에서도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오십을 넘긴 것으로 알려진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아델리아 로젠하르트 공작부인.황실과 혼맥으로 이어진 명문 공작가의 안주인이자 신성제국 최고의 자선가. 그녀는 해마다 대신전에 막대한 기부금을 보냈고, 제국 각지에 고아원과 치료소, 무료 구호원을 세웠다. 병든 평민의 손을 직접 잡고 고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를 사람들은 살아 있는 천사라고 불렀다.틀린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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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가 깨어난 뒤로 이상해졌다
죽었다고 믿었던 성녀를 잡으러 가겠다는 라엘의 선언이 떨어지자,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조금 전까지 기적이라며 감격하던 사제들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벌렸고, 누군가는 불경한 말을 들었다는 듯 가슴 위에 성호를 그었다. 침대 곁에서 눈물을 훔치던 시녀마저 손수건을 쥔 채 굳어 버렸다.카시안만이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라엘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앞의 여자는 분명 성녀 세레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도, 핏기를 잃은 창백한 피부도, 빛을 잃은 자줏빛 눈동자도 자신이 알던 성녀의 것이었다.그러나 그 안에서 자신을 마주하는 존재는 세레나가 아니었다.평소의 세레나는 누구를 대하든 조심스러웠다. 부탁할 일이 있어도 몇 번이나 말을 고르고, 상대가 불편해할까 염려하며 먼저 물러서는 사람이었다. 황태자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은 뒤 품평하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죽은 성녀를 붙잡으러 가자고 명령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모두 나가라.”카시안의 명령에 대신전의 의원이 당황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하지만 전하, 성녀님께서는 조금 전까지 심장이 멎어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안정을 취하지 않으시면 다시 위독해질 수 있습니다.”“의원과 성기사단장만 남고 모두 나가라고 했다.”“전하.”“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서늘한 음성이 방 안을 가르자 사제들은 더는 반박하지 못했다. 성녀를 모시던 시녀들까지 머뭇거리며 밖으로 나갔고, 묵직한 문이 닫힌 뒤에는 카시안과 성기사단장 데미안, 대신전의 의원 한 명만 남았다.카시안은 문밖의 인기척이 완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라엘의 손목을 놓아주었다.붙잡혀 있던 자리에는 붉은 손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지나치게 가는 손목이었다. 한 손으로 감싸고도 손가락이 남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시안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라엘은 그 변화를 볼 수 없었다.그녀는 손목을 매만지며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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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제단
철문이 굉음과 함께 닫혔다.쿵―!복도를 밝히던 빛이 끊기고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카시안의 검에서 흘러나오던 황금빛 신성력마저 보이지 않는 막에 짓눌린 것처럼 급격히 희미해졌다.계단 아래에 서 있던 마리안의 모습도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전하!”데미안이 즉시 뒤로 몸을 돌려 철문을 밀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성인 남자 둘이 나란히 통과할 만큼 활짝 열려 있던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을 틈에 꽂아 힘껏 비틀어도 마찬가지였다. 문 표면에 새겨진 검은 태양의 문양만이 심장처럼 붉은빛을 내며 한 번씩 뛰었다.쿵.문양이 박동할 때마다 지하의 공기가 무거워졌다.라엘은 카시안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는 어둠이 짙어졌다는 사실보다 주변의 소리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대신전 위층에서 들리던 종소리도, 철야 기도를 올리는 신도들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이곳만 세상에서 잘려 나간 듯했다.“결계예요.”라엘이 낮게 말했다.“우리가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카시안은 한 손으로 그녀의 몸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검을 앞으로 세웠다. 품 안에 있는 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몸을 비스듬히 돌린 자세였다.“아델리아가 만든 겁니까?”“흔적은 그 여자 것이 맞아요. 하지만 지금 결계를 움직인 건 다른 사람이에요.”“공범이 신전 안에 있다는 뜻이군.”“그것도 우리가 이곳으로 오는 모습을 지켜본 공범이겠죠.”라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철컥.철컥.어둠 속에서 느린 발소리가 이어졌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바닥을 긁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카시안은 라엘을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자세를 낮췄다.갑자기 몸을 조인 팔에 라엘의 어깨가 그의 단단한 가슴에 더욱 깊이 닿았다. 바로 곁에서 뛰는 심장 소리와 낮아진 호흡이 고스란히 전해졌다.“데미안, 오른쪽을 맡아.”“예, 전하.”데미안이 카시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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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은 황궁에 계십니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들판 위로 바람이 불었다.이름 모를 꽃들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하늘도, 땅도, 멀리 보이는 지평선도 지나칠 만큼 희었다. 천상과 닮았으나 천상은 아닌 곳. 누군가의 영혼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 작은 안식처였다.라엘은 꽃밭 한가운데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신비로운 연보라색 머리카락. 눈을 감고 있어도 단정하고 온화한 인상이 느껴지는 얼굴. 라엘이 지금 빌려 쓰고 있는 몸의 진짜 주인이었다.“세레나.”불러도 대답은 없었다.라엘은 꽃을 헤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세레나의 모습은 흐릿해졌다. 손끝이 햇빛에 녹는 눈처럼 투명했다.하지만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세레나는 잠들어 있었다.누군가에게 힘을 빼앗긴 채,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든 것이다.라엘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싸려는 순간, 꽃밭이 일그러졌다.낯선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화사한 햇살이 비치는 신전의 정원이었다. 눈이 보이던 시절의 세레나가 하얀 장미를 다듬고 있었다. 그 앞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아델리아 로젠하르트.그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성녀님을 생각하며 특별히 주문한 것이랍니다.’상자 안에는 은빛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중앙에 박힌 보랏빛 보석은 성스러운 빛을 머금은 것처럼 영롱했다.세레나는 의심하지 않았다.아델리아는 오랫동안 신전을 후원해 왔다. 전염병이 돌았을 때는 구호소를 세웠고, 흉년에는 누구보다 많은 식량을 내놓았다.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과 병든 이들을 위한 요양원도 운영했다.사람들은 그녀를 살아 있는 성녀라 불렀다.세레나 역시 그녀를 선한 사람이라고 믿었다.‘제가 직접 걸어 드려도 될까요?’아델리아가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차가운 보석이 세레나의 가슴에 닿던 순간, 아주 가느다란 비명이 들렸다. 착각이라 여기고 넘길 만큼 희미한 소리였다.그날 밤부터 세레나는 악몽을 꾸었다.검은 손이 심장을 움켜쥐고, 이름 없는 이들이 어둠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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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냄새가 나는 공작부인
“공작부인에게서 왜 이렇게 진한 피 냄새가 나는 걸까요?”라엘의 물음이 떨어진 순간, 방 안에 있던 모든 소리가 멎었다.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들던 바람도, 신관들의 예복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도 사라졌다. 라엘의 손을 잡고 있던 아델리아의 손가락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러나 당황은 찰나였다.아델리아는 금세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피 냄새라니요?”“아주 많은 사람의 피가 엉겨 붙은 냄새예요.”“성녀님께서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아델리아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새벽, 신전 서쪽 구호소 일부가 무너졌답니다. 저도 부상자들을 옮기는 일을 도왔으니 그때 피가 묻었을지도 모르겠어요.”“그래요?”“예. 보시다시피 급히 오느라 옷도 갈아입지 못했으니까요.”장미 향이 더욱 짙어졌다. 아델리아가 향이 밴 소매를 일부러 라엘 가까이 가져온 듯했다.하지만 라엘이 맡은 피 냄새는 옷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아델리아의 살갗 아래, 본래 그 몸에 속하지 않은 영혼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마신 피와 빼앗은 생명력이 영혼에 눌어붙어 만들어 낸 악취였다.라엘이 천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이상하네요. 옷이 아니라 공작부인의 몸속에서 나는 것 같은데.”사절단에 섞여 있던 신관 하나가 숨을 삼켰다. 카시안은 말없이 아델리아를 바라보았고, 다미안의 손은 어느새 검 손잡이 가까이 내려가 있었다.아델리아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그 순간 두 사람의 맞잡은 손 사이로 차가운 기운이 파고들었다.죽음의 기운이었다.가느다란 검은 실이 라엘의 손바닥을 뚫고 들어와 손목을 휘감았다. 피부 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영혼을 직접 노리고 들어오는 저주였다.동시에 아델리아의 몸 안에서 낯선 얼굴이 웃었다.연한 금발과 청명한 녹색 눈동자. 오래전 신전에 걸려 있던 초상화 속에서라면 누구보다 신성하고 아름답게 보였을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욕망과 광기로 일그러져 있었다.옛 성녀 아스테리아.그녀의 입술이 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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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은 영혼의 얼굴을 비춘다
거울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이 라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표면이 물처럼 출렁이며 손과 팔을 삼켰다. 라엘이 반대편 손으로 거울의 은제 테두리를 붙잡았지만, 발밑이 미끄러지며 몸 전체가 앞으로 쏠렸다.“라엘!”카시안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거울 안에서 끌어당기는 힘은 사람 하나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라엘의 어깨가 표면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카시안은 그녀의 몸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세게 당겼다.그러나 두 사람의 몸에 이어진 신력이 동시에 반응했다.라엘의 손목에 새겨진 검은 장미와 카시안의 심장 옆에 박힌 죽음의 표식이 붉게 빛났다.쿵.거울 너머에서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한 번의 박동이 침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카시안의 발이 바닥에서 밀렸고, 거울 가까이에 있던 촛대와 탁자까지 검은 표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다미안이 카시안의 망토를 붙잡았다.“전하!”그 순간 침실 문이 부서졌다.쾅!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저택의 기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목이 기이하게 꺾인 자도 있었고 가슴에 검이 박힌 채 걷는 자도 있었다.죽은 자들을 움직여 만든 인형이었다.다미안은 한 손으로 카시안의 망토를 붙들고 다른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가장 먼저 달려든 인형의 목이 잘려 나갔지만, 몸은 쓰러지지 않았다.목을 잃은 시체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이런 빌어먹을…….”다미안이 이를 악물었다.거울의 힘은 점점 강해졌다. 카시안의 상체까지 검은 표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라엘의 몸은 이미 절반 이상 보이지 않았다.카시안은 자신의 망토를 붙잡고 있던 다미안의 손을 떼어 냈다.“밖을 맡아.”“전하, 안 됩니다!”“거울이 닫히지 않게 해.”“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그래서 혼자 보낼 수 없다.”카시안은 망설이지 않았다.라엘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준 채 거울 속으로 몸을 던졌다.“전하!”다미안의 외침이 멀어졌다.시야가 검게 뒤집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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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제물은 나였다
라엘의 손목에 새겨진 검은 장미가 심장을 향해 뿌리를 뻗기 시작했다.하얀 피부 아래로 검은 핏줄이 빠르게 번졌다. 손목을 휘감은 가시는 팔꿈치를 지나 어깨까지 올라왔고, 그 끝이 가슴을 향해 파고들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터졌다.라엘의 무릎이 꺾였다.“라엘!”카시안이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장부 조각 위에서는 여전히 붉은 글자가 번지고 있었다.〔성휘제 최종 제물 변경.〕〔라엘.〕카시안의 이름에 그어진 검은 선이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더니 종이 위에서 떨어져 나왔다. 가느다란 연기가 된 선은 라엘의 손목으로 스며들었다.동시에 카시안의 심장을 감싸고 있던 죽음의 표식도 반응했다.그가 가슴을 움켜쥐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전하!”다미안이 다급히 다가왔다.“가까이 오지 마!”라엘이 외쳤다.그녀와 카시안 사이에 검은 실이 나타나 있었다. 영혼의 공간에서 더 깊게 연결된 두 사람을 따라 저주가 옮겨 다니고 있었다.카시안에게 새겨졌던 제물의 표식이 라엘에게 넘어가는 대신, 라엘이 느끼는 고통이 카시안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다미안이 검 끝으로 검은 실을 끊으려 했다.“자르면 안 돼.”라엘이 이를 악물고 그의 검을 붙잡았다.“이건 단순한 저주가 아니야. 제물의 자리를 바꾸는 계약이야.”“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우선 이 방에서 나가야 해.”바닥에 흩어진 거울 조각들이 일제히 떨리기 시작했다.조각마다 아스테리아의 얼굴이 비쳤다. 웃는 얼굴, 분노한 얼굴, 피를 마시며 황홀하게 눈을 감은 얼굴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라엘을 바라보았다.‘찾았다.’수십 개의 입술이 동시에 움직였다.‘네 영혼으로 향하는 길을.’깨진 거울 사이에서 검은 손들이 쏟아져 나왔다.다미안이 검을 휘둘렀다. 신력이 실린 검격에 앞쪽의 손들이 잘려 나갔지만, 거울 조각은 침실 바닥과 벽을 기어 다니며 끊임없이 새로운 손을 만들어 냈다.카시안은 고통을 누른 채 일어섰다.“장부를 챙겨.”“이미 있습니다.”다미안이 타다 남은 종이를 품 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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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기 전까지만
검은 장미에서 떨어진 꽃잎 하나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재로 변했다.라엘의 가슴에 남은 꽃잎은 세 장.성휘제까지 남은 시간도 사흘이었다.‘꽃잎이 모두 떨어지는 밤, 네 몸은 나의 것이 된다.’아스테리아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라엘의 심장을 파고들던 통증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나 표식은 지워지지 않았다. 검은 장미의 가시는 새로 만들어진 육체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아래로 느리게 뛰는 심장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카시안이 망토 자락을 여며 라엘의 몸을 가렸다.“표식을 옮길 수 있나?”“다른 사람한테?”“내게 돌려놔.”라엘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처음으로 제 눈에 담은 카시안의 얼굴은 목소리만 들었을 때보다 훨씬 단단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아래로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났고, 피가 묻은 얼굴에도 흐트러짐이 거의 없었다.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차갑지 않았다.걱정과 분노, 조금 전 자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느꼈던 두려움까지 감추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싫어.”라엘이 잘라 말했다.“왜지?”“겨우 빼앗아 왔는데 다시 줄 것 같아?”“그건 빼앗은 게 아니라 떠넘겨진 거다.”“결과는 같아. 아스테리아는 이제 너보다 나를 원하고 있어.”“그 사실이 마음에 드나?”“적어도 네 심장을 뽑겠다는 계획은 미뤄졌잖아.”카시안의 표정이 굳었다.“네가 대신 죽는다면 아무 의미 없다.”“죽을 생각 없다니까.”“아까 심장이 멎었다.”“그건 세레나의 몸이고, 지금 나는 멀쩡해.”라엘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자신의 심장이 분명하게 뛰고 있었다. 세레나의 약한 육체를 빌리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박동이었다.그러나 카시안은 안심하지 않았다.“해가 뜨면 이 몸은 사라진다고 했지.”“응.”“그럼 표식은?”라엘의 손이 멎었다.그 부분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표식은 세레나의 육체가 아니라 라엘의 영혼을 따라왔다. 해가 뜬 뒤 임시 육체가 사라져도 저주는 영혼에 남을 가능성이 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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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성녀의 진짜 이름
한 글자.‘에.’세레나의 손가락이 라엘의 손바닥 위에서 멈췄다.검은 가시가 그녀의 목을 휘감아 꽃밭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빛을 잃은 눈동자가 고통으로 흔들렸고,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목소리 대신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세레나!”라엘은 멀어지는 손을 붙잡았다.검은 가시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팔까지 휘감았다. 날카로운 끝이 피부를 찢고 영혼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라엘은 손을 놓지 않았다.꽃밭 아래에서 떠오른 거대한 눈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검은 눈동자 안에는 수백 명의 얼굴이 비쳤다. 아스테리아에게 피를 빼앗긴 사람들, 죽은 뒤에도 영혼을 붙잡힌 희생자들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내 진명을 입에 담는 순간, 세레나의 영혼부터 찢어질 테니까.’아스테리아의 웃음소리가 하얀 세계를 뒤흔들었다.‘그 아이가 네게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니?’검은 가시가 더욱 거세게 세레나를 끌어당겼다. 발밑의 꽃들이 썩어 가며 검게 변했다.라엘은 세레나의 손목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말하지 않아도 돼.”세레나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이름은 내가 찾을게.”‘라엘…… 님.’“그러니까 버텨.”라엘의 몸에서 금빛이 터져 나왔다.가시가 타들어 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하나를 끊으면 두 개가 돋아났고, 두 개를 끊으면 네 개가 세레나의 영혼을 휘감았다.이곳은 세레나의 내면이었지만 이미 절반 이상 아스테리아의 저주에 잠식되어 있었다. 라엘이 무리하게 힘을 쓰면 세레나의 영혼도 함께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아스테리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해 봐.’검은 눈이 즐겁다는 듯 휘어졌다.‘그 아이를 구하려고 힘을 쓸수록 네가 직접 세레나를 찢게 될 테니.’라엘은 입술을 깨물었다.가시를 태우던 금빛이 흔들렸다.그 순간 멀리서 희미한 박동이 들렸다.쿵.세레나의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라엘의 영혼과 연결된 또 하나의 심장.카시안이었다.‘라엘.’현실에서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하얀 세계까지 닿았다.‘눈을 떠.’은빛 실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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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를 심판하는 자들
대성전의 종이 갈라진 순간, 수도를 뒤덮은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검붉은 구름은 대성전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며 태양을 집어삼켰다. 한낮이 되어 가는 시각인데도 황궁 안은 해가 진 것처럼 어두워졌고, 창밖에서는 놀란 사람들의 비명과 기도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라엘의 가슴에 새겨진 검은 장미가 거칠게 뛰었다.쿵.심장을 움켜쥐는 통증에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카시안이 즉시 허리를 받쳐 세웠다.“라엘.”“괜찮아.”“그 말은 네가 쓰러질 때마다 듣는군.”카시안은 라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황제 앞이라는 사실도, 침실에 내관들이 가득하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움직임이었다.“가슴이 어떻게 됐지?”“진명을 부른 것에 반응했어.”라엘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세레나의 몸에서는 장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영혼에 뿌리내린 가시가 사납게 뒤틀리는 감각만은 분명했다.“에리사라는 이름이 맞으니까 저주가 거부하는 거야.”“그렇다면 계약이 깨진 건가?”황제가 물었다.“아직 아니야.”라엘은 핏빛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진명을 빛 아래에서 불러야 해. 그런데 아스테리아가 수도에서 태양을 가렸어.”금서고의 기록에서 말한 ‘빛’은 단순한 햇빛이 아니었다. 신성제국의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빛, 죽은 성녀가 버리고 달아난 신의 권능을 뜻했다.현재 그 힘이 가장 강하게 모인 곳은 대성전이었다.하지만 대성전마저 죽음의 기운에 잠식된 상태였다.“저 붉은 결계를 걷어 내지 못하면 진명을 알아도 소용없어.”“결계는 어디에서 시작됐지?”카시안이 물었다.“종탑.”라엘은 갈라진 종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더듬었다.“아니, 종탑 아래에 있는 무언가야. 대성전 전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대신관은 황태자가 성녀를 감금했다고 주장하며 제국민을 대성전으로 불러 모았다. 단순히 여론을 선동하려는 것이 아니었다.사람들의 신앙을 이용해 결계를 완성하려는 것이다.대성전 앞에 모인 이들이 성녀를 돌려 달라고 외칠수록 그 간절함이 신력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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