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람을 죽여 신전에서 추방된 옛 성녀 아스테리아는 죽음의 신을 섬기다 최후를 맞지만, 로젠하르트 공작부인의 몸을 차지해 살아남는다. 젊음을 유지하려 제국민의 피를 마시고 현 성녀 세레나의 신력까지 빼앗은 그녀. 죽어 가던 세레나의 마지막 기도에 천족의 사고뭉치 막내 라엘이 강림한다. 라엘은 신성제국의 연쇄 실종을 수사하던 황태자 카시안과 손잡지만, 힘을 나눌수록 두 사람의 몸과 감각은 위험할 만큼 깊이 얽힌다. 그러나 세레나를 구하는 순간 라엘은 천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끝이 정해진 공조 속에서, 황태자는 성녀의 얼굴을 한 다른 영혼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View More신성제국의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대신전의 첨탑 위에서 거대한 종이 흔들렸다.
댕― 첫 번째 종소리가 수도의 새벽을 깨웠다. 댕― 두 번째 종소리가 대신전 앞에 모인 신도들의 머리 위로 장엄하게 퍼져 나갔다. 댕― 세 번째 종이 울리자 새하얀 날개를 펼친 여신상이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대신전은 한눈에도 성스러워 보였다. 하늘을 향해 뻗은 수십 개의 첨탑과 황금빛 지붕, 빛의 여신이 남긴 기적을 새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까지. 신성제국 아르테온의 중심에 자리한 그곳은 인간의 탐욕이나 악의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장소처럼 보였다. 아픈 이들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가난한 이들은 두 손을 모은 채 작은 기적 하나가 자신에게도 내려오기를 빌었다. 귀족들은 황금과 보석을 바쳤으며, 하얀 예복을 입은 사제들은 여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찬란한 대신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신을 위한 의식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검은 돌로 둘러싸인 지하 기도실에는 여신의 빛이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수십 개의 검은 초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고, 초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바닥에 새겨진 검은 태양의 문양 위로 모였다. 뼈와 가시가 뒤엉킨 기괴한 문양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은제 욕조가 놓여 있었다. 욕조를 채운 것은 물이 아니었다. 붉은 피였다. 피가 가득한 욕조 안에 한 여인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눈처럼 희고 매끄러운 피부 위로 붉은 핏물이 흘렀으며, 탐스럽게 늘어진 금발 끝에서도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오십을 넘긴 것으로 알려진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아델리아 로젠하르트 공작부인. 황실과 혼맥으로 이어진 명문 공작가의 안주인이자 신성제국 최고의 자선가. 그녀는 해마다 대신전에 막대한 기부금을 보냈고, 제국 각지에 고아원과 치료소, 무료 구호원을 세웠다. 병든 평민의 손을 직접 잡고 고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를 사람들은 살아 있는 천사라고 불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델리아는 한때 진짜로 신의 사랑을 받은 여자였으니까. 그때 문밖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아델리아는 피에 젖은 손으로 욕조 가장자리를 쓸어내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철문 사이로 앳된 얼굴 하나가 보였다. “로젠하르트…… 공작부인?” 신전의 구호소에서 일하는 시녀, 마리안이었다. 올해 열일곱이 된 마리안은 병든 어머니의 약값을 벌기 위해 석 달 전 수도로 올라왔다. 낮에는 환자들의 식사를 나르고 밤에는 빈 회랑과 기도실을 청소했다. 로젠하르트 공작가에서 운영하는 구호소에 들어온 덕분에 어머니가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었으니, 힘든 일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평소라면 잠겨 있어야 할 지하 기도실의 철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문 안쪽에서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 마리안은 촛불을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다 보았다. 피로 가득한 욕조. 천장에 매달린 쇠사슬. 그리고 쇠사슬 끝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젊은 남자의 시신을. 마리안의 손에서 촛대가 떨어졌다. 달그락― 작은 소리가 지하 기도실 안에 크게 울렸다. 아델리아는 놀라지도, 서둘러 몸을 가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붉게 젖은 욕조 가장자리에 팔을 기댄 채 아주 다정하게 웃었다. “거기까지 들어오면 안 되었는데.” 마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 살려 주세요.” “내 구호원에서 일하는 아이구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본 것도 전부 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마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을 참으려는 듯한 모습에 아델리아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다지?” 마리안의 숨이 멎었다. “어떻게…….” “내 구호원에 들어온 사람인데 내가 모를 리가 있겠니? 어머니의 약값도 전부 내가 내 주고 있단다.” “제발 어머니는 건드리지 마세요.” “그건 네가 얼마나 얌전히 행동하는지에 달렸지.” 아델리아가 욕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렴.” 마리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욕조 아래로 흘러내린 핏물이 검은 돌바닥을 타고 그녀의 맨발까지 다가왔다. 피가 발끝에 닿는 순간, 바닥의 마법진이 붉은빛을 내며 꿈틀거렸다. 죽어 있던 문양이 새로운 제물을 알아본 것처럼 깨어났다. 그제야 마리안은 깨달았다. 자신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소녀는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치렴.” 뒤에서 아델리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최선을 다해서.” 누구도 곧바로 마리안을 쫓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아델리아는 소녀가 절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여유롭게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리안은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뛰어올라 긴 회랑으로 빠져나왔다. 신발 한 짝이 벗겨졌고, 얇은 발바닥은 거친 돌바닥에 쓸려 피투성이가 되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회랑 끝에는 대예배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오늘은 보름달을 맞아 철야 기도가 열리는 날이었다. 저 계단만 오르면 수백 명의 신도와 사제가 있을 터였다. 황실 성기사들이 지키는 대예배당 안까지 도착하면 공작부인도 자신을 함부로 데려갈 수 없을 것이다. 마리안은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았다. 그러나 발끝이 첫 번째 계단에 닿기 직전,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안 돼!” 어둠 속에서 나타난 기사들이 마리안의 몸을 뒤로 끌어당겼다. 소녀는 바닥에 손톱을 세우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손톱이 부러지고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흘렀지만 건장한 기사들의 힘을 이겨 낼 수 없었다. “놔주세요!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세요!” 대예배당에서는 여신을 찬양하는 성가가 들려왔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백 명이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마리안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회랑에 설치된 결계가 소녀의 목소리를 가두고 있었다.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돌아가지 않으면 어머니도 죽어요!” 기사들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오늘 본 건 전부 잊을게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여신께 맹세할 테니까……!” 마리안의 손이 돌바닥을 긁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계단을 향해 뻗었지만 점점 멀어졌다. “제발……!” 그것이 소녀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외침이 될 수도 있었다. 회랑에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반대편에서 일정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또각. 아델리아가 얇은 실내복 위에 검은 가운을 걸친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젖은 옷자락에서 붉은 물이 떨어졌다. 새하얀 대리석 위로 핏방울이 길게 이어졌지만, 주변에 늘어선 시종들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이번 아이는 유난히 시끄럽구나.” 아델리아가 붉게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공포를 많이 느낀 피는 맛이 거칠어지는데.” “의식실에서 진정시키겠습니다, 마님.” 집사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피를 흘리게 하지는 마렴. 성녀의 힘을 완전히 흡수하려면 평소보다 많은 양이 필요하니.” “명심하겠습니다.” 아델리아는 끌려가는 마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삼십여 년 전, 그녀의 이름은 아델리아가 아니었다. 아스테리아. 빛의 여신이 직접 선택했다는 고귀한 성녀. 손길만으로 죽어 가는 사람을 일으키고 기도 한 번으로 메마른 땅에 비를 내렸으며, 그녀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흰 꽃이 피었다고 전해지는 기적의 주인공이었다. 신성제국의 사람들은 아스테리아가 평생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리라 믿었다. 성녀는 배고파해서도 안 되었고, 화를 내서도 안 되었으며,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사랑해서도 안 되었다. 성녀의 몸과 시간, 힘과 감정은 모두 여신과 신성제국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치유를 당연하게 받으면서도 정작 아스테리아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 사람을 죽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자신의 명령을 거부한 늙은 사제의 심장을 신력으로 터뜨렸다. 아스테리아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사제를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꼈다. 사람을 살릴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해방감이었다. 대신전은 사건을 덮었다. 성녀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제국의 신앙이 흔들릴 수 있었으므로, 사제들은 죽음을 병으로 위장한 뒤 아스테리아에게 조용히 참회하라고 명령했다. 다시 자비로운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서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해 주겠다고 했다. 아스테리아는 참회하지 않았다. 두 번째 사람을 죽였고, 세 번째 사람의 목숨도 빼앗았다. 그제야 대신전은 그녀에게서 성녀의 지위를 박탈하고 추방했다. 여신의 축복을 빼앗긴 몸은 빠르게 쇠약해졌고, 사람들은 타락한 성녀가 비참하게 죽으리라 믿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죽어 가던 그녀에게 손을 내민 것은 빛의 여신이 아니었다. 죽음의 신이었다. 죽음의 신을 숭배하는 자들은 타인의 생명을 바칠수록 강한 힘을 얻었다. 목숨을 빼앗으면 젊음을 얻었고, 고통을 바치면 아름다움을 얻었다. 그 집단에서는 누구도 아스테리아에게 타인을 위해 희생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생명이 그녀를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아스테리아는 죽음의 신을 모시는 새로운 성녀가 되었다. 하지만 비밀 집단도 끝내 황실의 토벌을 피하지 못했다. 수백 명의 신도와 함께 불길에 휩싸인 아스테리아는 세상에서 사라졌고, 대신전은 타락한 성녀가 완전히 소멸했다고 선포했다. 몸은 분명히 죽었다. 그러나 죽음의 신에게 수백 개의 생명을 바친 영혼은 사라지지 않았다. 주인을 잃고 떠돌던 아스테리아의 영혼은 갓 숨이 끊어진 젊은 귀족 여인의 육체를 발견했다. 아델리아 로젠하르트. 아이를 유산한 뒤 고열을 앓다 숨을 거둔 스물두 살의 공작부인. 아스테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그 몸을 차지했다. 그날 이후 죽은 공작부인은 다시 눈을 떴다. 사람들은 그것을 여신의 기적이라 불렀다. 아스테리아는 아델리아의 얼굴로 제국 최고의 자선가가 되었다. 고아원을 세우고 치료소를 열었으며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녀의 시설에는 의지할 가족이 없고, 사라져도 찾아올 사람이 드문 이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그녀에게 자선 사업은 선행이 아니었다. 필요할 때마다 가장 싱싱한 제물을 고를 수 있는 거대한 사육장이었다. “성녀의 상태는?” 아델리아가 물었다. 집사는 주변을 살핀 뒤 더욱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도 음식은 거의 드시지 못했습니다. 다리의 감각도 완전히 사라진 듯합니다. 대신전에서는 원인 불명의 신력 고갈증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어리석기는.” 현재 신성제국의 성녀, 세레나. 빛의 여신이 아스테리아를 버린 뒤 오랜 시간이 지나 선택한 새로운 아이였다. 세레나는 지나치게 순하고 사람을 쉽게 믿었다. 자신을 후원하겠다는 공작부인의 친절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아델리아가 선물한 성물을 매일 목에 걸고 다녔다. 그 성물이 신력과 생명력을 조금씩 빼앗아 아델리아에게 전달하는 저주받은 물건이라는 것도 모른 채. 신력을 빼앗기기 시작한 세레나는 가장 먼저 시력을 잃었다. 다음에는 다리의 감각이 사라졌고, 이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아델리아가 찾아오는 날이면 증상은 더욱 심해졌지만, 누구도 제국 최고의 자선가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세레나의 병을 치료하겠다며 값비싼 약과 명의를 보내는 아델리아를 칭송했다. “다음 보름달이면 성녀의 힘이 완전히 제게 넘어옵니다.” 아델리아가 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로 순백의 빛이 피어났다. 본래 세레나의 것이었던 신력이었다. 그러나 빛의 가장자리에는 검은 기운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빛과 죽음의 힘은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두 힘을 한 몸 안에 가두려면 젊고 건강한 피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명이면 충분했지만, 빼앗은 신력이 커질수록 더 많은 피가 필요해졌다. 이제는 서너 명을 바쳐도 몸 안의 균열을 완전히 잠재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델리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세레나의 신력을 모두 빼앗는 순간, 자신은 다시 완전한 성녀가 될 것이다. 빛과 죽음을 동시에 다루는 유일한 성녀. 대신전과 신성제국을 자신의 발아래 두고, 신조차 거역할 수 있는 존재가 될 터였다. “마리안의 피는 목욕에 사용하고, 남은 것은 잔에 담아 가져오렴.” 아델리아는 붉게 젖은 입술을 혀끝으로 천천히 훑었다. “오늘은 유난히 목이 마르는구나.” 같은 시각, 황궁의 동쪽 집무실에도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커다란 책상 위에는 신성제국 전역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지도 위에는 수십 개의 검은 표식이 꽂혀 있었고, 각각의 표식 옆에는 실종자의 이름과 나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가 적혀 있었다. 황태자 카시안 아르테온은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서늘한 푸른 눈이 움직였다. 그는 북부에서 시작해 서부와 남부, 수도까지 이어진 표식을 하나씩 확인한 뒤 손에 들고 있던 명단을 내려놓았다. “마흔세 명.”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지난 일 년 동안 확인된 사람만 마흔세 명입니다.” 카시안의 맞은편에는 황실 성기사단장 데미안이 서 있었다. 그는 두꺼운 서류철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공식 기록에서는 열일곱 명만 실종자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나머지는 병사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다고 처리되었습니다.” “시신이나 이동 기록은?” “없습니다. 장부에만 적혀 있습니다.” “기록을 작성한 사람들은?” “대부분 로젠하르트 공작가에서 후원금을 받는 시설의 책임자들입니다.” 카시안이 붉은 실을 들어 지도 위의 표식들을 연결했다. 흩어져 있던 수십 개의 선이 하나의 문장 앞에서 겹쳤다. 붉은 장미를 문 은빛 뱀. 로젠하르트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공작부인이 직접 관련되었다고 보십니까?” 데미안의 질문에도 카시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델리아 로젠하르트는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귀부인이었다. 증거 없이 그녀를 조사했다가는 황실이 신전의 자선 사업을 탄압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대신전의 고위 사제들과 오랫동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시안은 사람들의 칭송보다 기록을 믿었다. 기록은 지나치게 선명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난달 대신전에서 사라진 견습 사제도 공작부인의 추천으로 들어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실종되기 전날, 그는 황실 감찰부에 탄원서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탄원서의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발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없앤 거겠지.” 카시안은 명단 가장 아래에 적힌 이름을 바라보았다. 마리안 베르. 로젠하르트 구호소 소속. 대신전 야간 시녀. 열일곱 살. 오늘 밤 근무가 끝난 뒤 황실 감찰관과 만나기로 되어 있던 소녀였다. 마리안은 구호소에서 이상한 장부를 발견했다며 보호를 요청해 왔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카시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대신전으로 간다.” “지금은 철야 기도 중입니다. 황실에서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면 신전이 반발할 겁니다.” “군사를 이끌겠다고 한 적은 없어.” 카시안은 책상 위에 놓인 검을 집어 들었다. “너와 나, 둘이면 충분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움직이실 생각입니까?” “황실에 도움을 청한 제국민이 사라졌다.” 검을 허리에 찬 카시안이 집무실 문으로 향했다. “그것만으로 내가 움직일 이유는 충분해.” 그 시각, 대신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성녀의 방에서는 가느다란 숨소리만 이어지고 있었다. 세레나는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홀로 누워 있었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오는지, 곁에 누가 서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손끝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온몸이 타는 듯 아팠고, 오래전부터 감각을 잃은 다리는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닌 듯했다. 세레나는 자신에게 남은 신력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원인 모를 병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의 힘을 훔치고 있었다. 의심되는 사람도 있었다. 늘 다정한 목소리로 안부를 묻고 자신의 손을 잡아 주던 로젠하르트 공작부인. 그녀가 다녀간 밤이면 더 많은 신력이 사라졌다. 하지만 세레나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었다. 말하려 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델리아가 선물한 목걸이가 목을 조였기 때문이다. 성물을 벗으려 하면 손가락이 굳었고, 도움을 청하려 하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세레나는 한때 수천 명의 병자를 구했던 성녀였지만, 지금은 자신 한 사람조차 구할 수 없었다. ‘여신이시여.’ 메마른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제발 제 기도를 들어 주세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기도가 신에게 닿지 않은 지 오래였다. 세레나는 자신의 신력이 고갈되면서 기도의 통로마저 끊겼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이 죽으면 아델리아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대신전에서 사라진 시녀와 견습 사제들, 구호소에 들어갔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죽음을 밝혀 줄 사람도 없었다. ‘저를 살려 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세레나의 보이지 않는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제 몸을 가져가셔도 괜찮아요. 제게 남은 힘을 전부 거두셔도 돼요.’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한 번. 그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한 번. ‘그러니 저 여자를 막아 주세요.’ 세레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신력을 기도에 실었다. ‘더는 아무도 죽지 않게 해 주세요.’ 희미한 기도가 인간계의 하늘을 넘어 천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신에게 닿았다. 천궁에서는 때마침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콰아아앙―! 황금빛 지붕이 반으로 갈라지고, 구름을 엮어 만든 정원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놀란 신조들이 날아올랐으며 잠들어 있던 고대 신수들이 연못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소란의 중심에는 새하얀 날개를 지닌 여자가 서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 작고 아름다운 얼굴. 천족의 고귀함을 증명하는 날개 끝에는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었고, 손에는 반으로 부러진 신창이 들려 있었다. 천족의 말썽쟁이 막내, 라엘이었다. “라엘!” 대천사의 호통이 천궁을 뒤흔들었다. 라엘은 부러진 신창을 등 뒤로 슬그머니 감추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네가 그 말을 한 것이 이번 달에만 열두 번째다!” “아직 이번 달이 사흘이나 남았는데 열두 번밖에 안 했으면 많이 줄인 것 아닌가요?” 대천사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라엘은 호기심이 많았고 참을성이 없었다. 출입이 금지된 곳에는 반드시 들어갔으며, 만지지 말라는 물건은 일단 만져 본 뒤에야 왜 만지면 안 되는지 확인했다. 이번에는 봉인된 신창이 정말로 천궁의 벽을 가를 만큼 강한지 궁금했다. 결과는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였다.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수리는 제가 할게요.”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하고 구름 정원을 폭우 구름으로 바꿔 놓았지.” “꽃에는 물이 필요하잖아요.” “그 비 때문에 인간계의 한 왕국이 사흘 동안 물에 잠겼다!” 라엘이 시선을 피했다. 바로 그때 인간계에서 올라온 기도가 천궁에 도착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운 빛이 대천사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세레나의 마지막 기도였다. 기도를 통해 세레나의 몸에 새겨진 저주와 빼앗긴 신력, 신성제국 전역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이 차례로 드러났다. 대천사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죽은 성녀가 돌아왔군.” “죽은 성녀요?” 라엘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다가왔다. “아스테리아다. 죽음의 신을 따르다 소멸한 것으로 알려진 타락한 성녀가 인간의 몸을 차지했다.” “그럼 잡아 오면 되잖아요.” “신들이 인간계에 직접 개입할 수는 없다.” “그럼 천족을 보내면 되죠.” 라엘은 별다른 생각 없이 말했지만,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대천사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강한 힘을 가졌으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천상에 두었다가는 또 무엇을 부술지 알 수 없는 사고뭉치. 마침 인간계에 내려보낼 이유가 필요한 천족의 막내. 라엘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왜 그렇게 보세요?” “인간계를 구하고 싶다고 했지?” “제가 간다고는 안 했는데요.” “방금 천족을 보내자고 하지 않았느냐.” “저 말고 다른 천족도 많잖아요.” 대천사가 웃었다. 오라버니가 저렇게 다정하게 웃을 때는 대개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라엘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발밑으로 거대한 강림진이 펼쳐졌다. “잠깐만요.” “성녀 세레나의 몸에 강림하여 그녀의 빼앗긴 신력을 되찾아라.” “왜 제가 가요?” “아스테리아의 영혼을 붙잡아 천상으로 압송하고, 신성제국에서 벌어진 실종 사건의 진상도 밝혀야 한다. 세레나의 시력을 되돌린 뒤 그녀가 자신의 몸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 육체를 지켜라.” “이건 임무가 아니라 추방이잖아요!” 라엘이 다급히 날개를 펼쳤지만 이미 늦었다. 천궁의 바닥이 빛으로 변하면서 그녀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건을 해결하기 전에는 돌아올 수 없다.” “오라버니!” “인간계에서는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마라. 세레나의 육체가 손상되면 원래 영혼도 위험해진다.” “그 중요한 걸 떨어뜨리면서 말하면 어떡해요!” “건투를 빈다.” 빛이 닫혔다. 라엘은 끝없는 구름 아래로 추락했다. 그리고 인간계에서는 죽어 가던 성녀의 심장이 마침내 멈췄다. 방을 지키던 시녀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성녀님께서 숨을 쉬지 않으십니다!” 다급한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사제와 의원들이 몰려왔지만 누구도 성녀의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빛의 기둥이 대신전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신전 전체가 뒤흔들렸다. 창문이 깨지고 촛대가 쓰러졌다. 성녀의 침대 주변으로 수백 개의 빛 문자가 떠올랐고, 조금 전까지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세레나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쿵.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에서 흩날렸다. 세 번째 박동과 함께 성녀가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줏빛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라엘은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다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아무것도 안 보여?” 강림은 성공했다. 육체의 원래 주인인 세레나의 영혼도 몸 안쪽에서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목에는 무언가가 단단히 채워져 있었고, 팔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온몸은 수백 개의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이 몸,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엉망이잖아.” 그 순간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대신전으로 달려온 황태자 카시안이 성기사들을 이끌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머리카락 아래로 서늘한 푸른 눈이 성녀를 향했다. 조금 전까지 죽었다던 사람이 살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라 불러야 했다. 하지만 카시안은 곧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세레나는 눈을 뜨자마자 여신을 찾지도 않았고, 자신을 둘러싼 사제들에게 괜찮다고 안심시키지도 않았다. 대신 답답하다는 듯 목에 걸린 성물을 잡아당기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성녀 세레나.” 카시안의 목소리에 라엘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예요?” 방 안의 사제들이 술렁였다. 신성제국에서 황태자의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더구나 세레나는 여러 공식 행사에서 카시안과 만난 적이 있었다. 카시안이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카시안 아르테온입니다.” “황태자?” “그렇습니다.” “마침 잘됐네요. 이리 와 봐요.” 명령하듯 말한 라엘이 손을 내밀었다. 카시안이 경계하며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허공을 더듬다 그의 가슴을 짚었다. 단단한 제복을 만진 손이 위로 올라가 턱과 뺨, 콧날을 차례로 훑었다. 카시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뒤따라 들어온 사제들과 성기사단장은 숨을 삼켰다. 평소의 세레나라면 황태자의 얼굴을 함부로 만질 사람이 아니었다. 라엘은 손끝으로 카시안의 이목구비를 확인한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무엇이 말입니까?” “얼굴은 괜찮은 것 같아서요.” “…….” “앞으로 계속 붙어 다녀야 할 사람의 얼굴이 별로면 곤란하잖아요.”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시안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던 성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느다란 손목 너머로 미약한 신력과 함께 전혀 다른 존재의 기운이 느껴졌다. 신성하면서도 낯설고, 인간이 품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강대한 기운이었다. “당신은 세레나가 아니군.” 라엘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황태자는 눈치가 빠르네요.” 카시안이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차갑게 물었다. “성녀의 몸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이미 이 여자가 다 망가뜨려 놓았는걸요.” “이 여자?” 라엘은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성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델리아 로젠하르트.” 카시안의 눈빛이 변했다. 황실에서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던 이름이었다. 그 순간 몸 깊은 곳에서 세레나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탁드려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그 여자를…… 막아 주세요.』 세레나가 겪은 고통이 라엘에게 밀려들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홀로 견딘 시간과 빼앗긴 신력,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 간 사람들의 마지막 기억이 가슴을 짓눌렀다. 라엘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인간계로 쫓겨났다는 불만도 잠시 잊혔다. 누군가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위해 사람을 죽였다. 다른 사람의 삶과 힘을 빼앗아 제 것으로 삼았으며, 이제는 신성제국 전체를 자신의 제단으로 만들고 있었다. 라엘은 불의를 오래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애초에 참을성이 있었다면 천상에서 사고뭉치로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태자.” “말하십시오.” “제 목에 걸린 것부터 끊어 줘요. 그리고 로젠하르트 공작부인이 성녀에게 보낸 물건은 하나도 남김없이 압수하고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부 저주받은 물건이니까.” 라엘이 카시안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로 작은 빛 하나가 피어났다. 빛의 성녀가 사용하던 신력과 닮았지만 근원부터 달랐다. 인간은 감히 품을 수 없는 천상의 권능이었다. 그 빛을 본 카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당신이 찾는 사람들은 대신전 지하에 있어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죽은 사람들이 알려 줬어요.” 라엘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카시안이 있는 곳을 정확히 바라보았다. “그러니 지금부터 저와 함께 가요.” “어디로 말입니까?” 그녀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죽었다고 믿었던 성녀를 잡으러.” 멀리 떨어진 지하 의식실에서 아델리아가 피가 담긴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잔에 입술이 닿기 직전. 쨍그랑―! 새하얀 균열이 은잔을 가로질렀다. 아델리아의 미소가 사라졌다. 세레나의 몸에 박아 두었던 저주의 흔적이 하나둘 끊어지고 있었다. 죽어 가던 성녀에게서 전에 없던 강대한 힘이 솟구쳤다. 인간의 신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고 뜨거운 빛이었다. 아델리아는 깨진 잔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엇이 내려온 거지?” 라엘은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이 붙잡아야 할 여자가 과거 진짜 성녀였다는 것을. 아델리아 역시 알지 못했다. 그토록 탐냈던 성녀의 몸에 천상에서 가장 골치 아픈 막내가 내려왔다는 것을. 피로 젊음을 유지하는 죽은 성녀와, 사고를 치고 인간계로 내려온 천족의 막내. 그리고 신보다 증거를 믿는 신성제국의 황태자. 세 사람의 운명이 핏빛 보름달 아래에서 처음으로 얽히기 시작했다.라엘은 서류 위에 그대로 적었다. 여인은 그 펜을 보며 등을 조금 굽혔다.“그걸 적으면 안 찾을 겁니까? 집 나갈 이유가 있었다고.”“소재를 확인하는 일은 계속합니다.”오렌의 대답 뒤에 마르타의 시선이 라엘에게 옮겨 왔다. 라엘은 여인이 묻고 싶은 말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찾으면 데려다주는 거죠?”이번에는 오래 침묵하지 않았다.“먼저 안전한지 확인할 거예요. 그리고 엘렌 씨가 집에 돌아오고 싶은지도 물을 겁니다.”마르타가 손을 움켜쥐었다.“싫다고 하면요.”“억지로 데려오지는 않을 거예요.”여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라엘은 평가장 안에서 했던 대답을 떠올렸다. 그때는 종이 울리고 면담이 끝났지만, 지금 눈앞의 사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펜을 내려놓았다.“그 말을 들으면, 딸을 영영 못 볼 것처럼 느껴지실 것 같아요.”마르타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눈가가 젖었지만 손으로 닦지는 않았다.“돌아오라는 말은 안 할게요.”한참 뒤 여인이 말했다.“살았는지만 알려 줘요. 내가 때렸다고 말해도 돼요. 화가 나서 아직 얼굴 보기 싫다고 해도…….”그녀의 목소리가 끊겼다. 라엘은 물잔을 권하려다 방에 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렌이 작업실에 둔 주전자 쪽을 눈으로 가리켰다. 라엘은 허락을 받고 물을 따라 왔다.마르타는 잔을 받았지만 마시지 않았다.“문을 열어 놓고 자요. 혹시 와서 두드리는데 못 들을까 봐.”라엘은 약속할 수 있는 말을 골랐다.“다음 주 넷째 날에 다시 소식을 드릴게요. 그때까지 새로 확인된 것이 없어도 연락하겠습니다.”마르타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날 안 되면?”“늦어지기 전에 알려 드릴게요. 이건 담당자가 바뀌어도 볼 수 있게 기록하겠습니다.”여인은 탁자 위 달력을 끌어왔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짚었다. 라엘이 같은 날짜를 확인해 주자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졌다.⸻새로운 단서는 서랍 속에 있지 않았다.마르타는 엘렌이 가져간 물건을 설명하다 작업대 아래에서 얇은 상자를 꺼냈다.
동부 외곽으로 향하는 마차에는 황실 문장이 없었다.라엘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서류철을 다시 펼쳤다. 모서리가 닳은 신고서에는 열한 달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실종자의 이름은 엘렌 바르트, 당시 나이는 열아홉. 회색 외투를 입고 갈색 천 가방을 든 채 집을 나갔으며,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는 동부 직조 공방 앞이었다.그 아래에는 신고인이 덧붙인 문장이 있었다.왼쪽 귀 뒤에 작은 흉터가 있음.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이 조금 휘어 있음.라엘은 그 문장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 신고를 받은 관리가 적은 내용은 두 줄뿐이었다. 공방에 확인했으나 해당 인물의 소재를 알 수 없음. 성인이므로 자발적 이탈 가능성 있음.그다음 조사 기록은 비어 있었다.맞은편에 앉은 선임 조사관 오렌은 창밖을 보다가 라엘이 같은 페이지를 세 번째 넘겼을 때 입을 열었다.“오늘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라엘은 고개를 들었다. 오렌은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외투 소매에는 오래된 기워 붙인 자국이 있었고, 서류를 넣은 가방의 잠금쇠는 한쪽이 다른 색이었다. 그는 황후라는 호칭 대신 수습 과정에서 쓰는 이름으로 그녀를 불렀다.“라엘 씨. 우리가 먼저 설명해야 할 건 왜 열한 달 동안 연락이 없었는지입니다.”“기록에는 담당자가 바뀌었다고 되어 있어요.”“두 번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신고서는 다른 서류와 함께 보관됐고요.”“그러면 그렇게 말씀드리면…….”말하던 라엘은 입을 다물었다.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딸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오렌은 그녀가 멈춘 것을 보고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설명하되, 그걸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지는 맙시다.”마차가 큰길을 벗어나자 바퀴 아래에서 돌이 튀었다. 낮은 집들이 가까워졌고, 지붕 사이로 물에 젖은 가죽 냄새가 흘러들었다. 신고인 마르타 바르트는 구두를 수선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라엘은 마지막 문의서에 적힌 주소를 확인한 뒤 서류철을 닫았다.그녀는 오늘
라엘의 면담은 카시안의 것보다 짧게 끝날 줄 알았다.서부 별관의 지하 창고에 들어간 시각과 안나를 발견한 경위, 칼베르에게서 열쇠를 넘겨받은 과정까지는 이미 경위서에 적었다. 그녀는 같은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서명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헬레나 모렌은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펜을 멈추었다.“문을 열었을 때 안나 벨로스가 먼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라엘은 창고 안을 떠올렸다. 낮은 천장과 벽에 기대앉아 있던 여인, 입을 막은 천을 풀자 터져 나온 기침. 안나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밧줄이 젖어 있었다. 울음 때문에 말이 끊겼고, 라엘은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나가지 못하게 했다고…….”“칼베르 로딘이 그랬다는 이름도 그때 들으셨습니까?”라엘의 입술이 멈추었다. 이름은 들었다. 분명히 들었지만, 그것이 재갈을 풀어 준 직후였는지 물을 마신 뒤였는지까지는 선명하지 않았다. 여인이 자신을 따라 지하로 내려왔다고 말한 기억과 칼베르를 복도로 끌어내던 순간이 겹쳐 있었다.“그건 정확하지 않아요.”헬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기록에 표시했다. 실망하거나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그럼 최초 발언에는 이름을 특정하지 않은 것으로 남기고, 이후 확인한 내용은 따로 구분하겠습니다. 칼베르의 열쇠로 문을 연 것은 직접 보셨습니까?”“네. 제가 열었어요.”“열쇠를 받은 시점에 문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질문은 계속되었다. 라엘은 안나의 손목에 난 상처를 어디까지 직접 보았는지, 물그릇을 누가 옮겼는지, 칼베르의 소매에 묻은 소금을 자신이 먼저 확인했는지 하나씩 되짚었다. 몇 가지는 데미안이 말해 준 것이었다. 그때 함께 있었기에 자신이 보았다고 생각했던 장면도 있었다.면담실에는 작은 창문 하나가 있었다. 창틀에서 떨어진 햇빛이 탁자 끝을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라엘은 그 빛이 처음보다 손등에 가까워졌을 때야 자신이 한 시간 넘게 같은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경위서 일부를 정정해도 될까요?”“물론입니다.”
침실로 돌아왔을 때는 동쪽 창문이 이미 희게 밝아지고 있었다.라엘은 문을 닫고서야 어깨에 힘을 풀었다. 지하 창고에서 맡았던 눅눅한 소금 냄새가 아직 옷깃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몇 번이나 씻었는데도 손가락 사이에 밧줄의 거친 감촉이 남았다. 안나를 묶었던 매듭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겁에 질린 사람에게 시간이 얼마나 길게 흐르는지 알고 있어서, 칼로 끊어 내는 순간까지도 마음이 급했다.카시안은 창가에 서 있었다. 밤새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다. 라엘이 다가가자 그가 먼저 시선을 내렸다.“손은?”“괜찮아. 화상 입었던 데도 안 벌어졌고.”그는 대답만 듣고 넘어가지 않았다. 라엘이 내민 오른손을 받아 손바닥과 손목을 차례로 살폈다. 붕대가 없어도 될 만큼 나은 자리에 엄지손가락이 아주 가볍게 닿았다. 전처럼 당장 의사를 부르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손을 놓지 않은 채 물었다.“안나 벨로스는.”“물을 조금 마셨어. 세레나가 곁에 있고. 잠들었다가 깨면 문부터 확인한대.”카시안의 턱이 굳었다. 라엘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했다. 자기 궁 안에서 사람이 사라졌고, 사흘 동안 누구도 제대로 찾지 않았다. 그 사이 궁에서는 식사가 올라왔고 회의가 열렸으며, 정해진 시간마다 복도의 등불이 꺼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네가 오늘 할 일은 있어.”그가 고개를 들었다.“궁인들 출입 기록을 조사관들에게 넘기는 것. 관련 부서에 기록 폐기 금지 명령을 내리는 것. 그리고 안나가 치료받는 동안 급료가 끊기지 않게 하는 것.”“처벌은?”“판결이 나온 뒤에.”카시안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엘은 잡힌 손을 빼지 않고 한 걸음 더 다가갔다.“지금은 내가 할 수 없는 일도 있고.”“무엇이지.”“네가 잠드는 것.”그의 눈에 아주 옅은 웃음이 스쳤다. 오래 버티던 것이 조금 느슨해지는 얼굴이었다.“그건 명령인가.”“부탁. 당신 아내가 하는.”카시안은 라엘의 손등에 입술을 댔다. 짧은 입맞춤 뒤에도 고개를 들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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