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4화. 뒤틀린 재회

작가: 태이해
last update 게시일: 2026-04-30 22:29:07

운명의 갈림길에서 등을 돌린 대가는 선명했다. 그날, 강가에서 소년에게 사탕을 건네지 않고 도망치듯 떠나온 이후, 유주의 세계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해하고 평온한 색채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 번 성인의 삶을 살았던 유주에게 주어진 두 번째 어린 시절은 축복과도 같았다. 유주는 더 이상 서이현이라는 거대한 그림자에 잠식당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따뜻한 품은 당연한 일상이 되었고, 저녁마다 식탁 가득 피어오르는 된장찌개 냄새는 이현의 저택에서 느꼈던 차가운 대리석의 냉기를 씻어내 주었다.

"우리 유주는 어쩜 이렇게 기특할까? 가르쳐주지도 않은 걸 혼자 다 알고."

어머니의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미 한 번의 생을 경험한 유주는 또래 아이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유주는 알고 있었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의 단단함이 얼마나 큰 무기가 되는지를.

하지만 그 모든 노력도 소용없었던 것일까. 15년 동안 정성껏 쌓아 올린 평화의 성벽이, 단 한 번의 '내방 공고'와 '검은 세단'의 등장으로 모래성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성인이 된 후, 그녀는 본능적으로 서가 그룹과 관련된 모든 것을 피해 왔다. 하지만 오늘, 교내 게시판에 붙은 ‘서가 그룹 후계자 내방’ 공고를 본 순간 심장이 발등에 내려앉는 줄 알았다.

‘설마, 아닐 거야. 이번 생에서 우린 접점이 전혀 없었어.’

그 시각, 이현의 검은색 세단이 대학 본관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이현이 내리자,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이현은 학교 관계자들의 환대를 건성으로 넘기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학생들의 얼굴을 훑기 시작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다. 강의실, 광장, 학교 주변 카페까지. 수행원들이 당황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학교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사진 속의 그 얼굴, 하유주만을 쫓고 있었다.

이현의 구둣발 소리가 복도를 울릴 때마다 유주는 벽 뒤로 숨겼고, 그가 광장을 가로지를 때 유주는 인파 틈으로 얼굴을 묻었다.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잇감의 냄새를 쫓듯 집요한 추적이었으나, 유주 역시 이번 생만큼은 결코 잡히지 않겠다는 듯 본능적으로 그 궤적을 비껴갔다. 손바닥에 밴 식은땀이 차갑게 식어갔다.

결국 이현은 유주의 그림자조차 밟지 못한 채 차에 올라타야 했다. 다음 스케줄인 정계 인사와의 오찬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닫히는 차 문 너머로 이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놓쳤어.”

곁에 선 비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누군가 찾으시는 분이라도...?”

“하유주.”

이현은 가죽 시트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보지 못했기에 오히려 갈증은 더해졌다. 분명히 느꼈다. 그녀가 자신을 피해 숨었다는 것을. 그것이 우연이든, 본능이든 상관없었다. 쥐새끼처럼 숨어버린 그녀를 끌어낼 방법은 이 세상에 차고 넘쳤다.

“서가 재단 장학생 명단에서 하유주를 제외해. 오늘부로 모든 후원을 중단한다.”

“네? 하유주 학생은 성적도 우수하고 결격 사유가 전혀 없는데요?”

“내 말이 결격 사유야.”

이현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학교 풍경을 차갑게 응시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직접 전달해. 후원을 계속 받고 싶으면, 구차하게 서류 따위 보내지 말고 본인이 직접 서가 본사로 찾아오라고. 나를 설득할 기회는 직접 와서 잡으라고 말이야.”

며칠 뒤, 유주는 학과 사무실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장학금 지급이 중단되었다는 통보였다. 부모님의 공장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는 있었지만, 고액의 등록금을 감당하기엔 여전히 무리였다.

“하유주 학생, 재단 쪽에서 직접 연락이 왔어. 꼭 본인이 직접 찾아와서 소명해야 한다고 하네.”

조교가 건넨 메모지에는 서가 그룹 전략기획실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유주는 그 종이를 받아든 손을 잘게 떨었다. 회귀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줄 알았다. 그 소년에게 사탕을 주지 않았으니, 그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았으니 자신은 평온한 햇살 아래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현은 악마 같은 직관으로 다시금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고 있었다.

‘너였구나. 결국 네가 날 부르는구나.’

유주는 선택해야 했다. 등록금을 포기하고 다시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이현이 쳐놓은 거미줄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갈 것인가.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대학 교정을 비추자, 유주의 눈앞에 예전 생의 기억이 겹쳐 보였다. 피할 수 없는 굴레가 다시금 돌기 시작했음을, 그녀는 직감하고 있었다. 유주는 주먹을 꽉 쥐고 메모지를 구겨 넣었다. 이번에는 지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그녀는 천천히 서가 그룹 본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려앉은 서가 그룹 본사 최고층, 이현은 홀로 와인 잔을 기울이며 입구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와, 유주야. 기다리고 있었어.”

그의 낮은 속삭임이 텅 빈 집무실을 서늘하게 메웠다.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29화. 그녀의 루비 목걸이

    서가 그룹의 일 년 중 가장 성대하고 화려한 밤. 최고급 호텔의 거대한 연회장에서 열린 '서가 창립기념 자선 파티'는 수많은 정재계 인사들과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으로 눈이 시릴 만큼 번쩍였다.유주는 금방이라도 숨이 막혀벌리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며, 제 곁에 선 남자의 단단한 팔에 억지로 이끌리듯 서 있었다. 서이현. 그는 보란 듯이 유주를 자신의 공식적인 파트너로 내세웠다.며칠 전 백화점에서 그가 강압적으로 입혔던 칠흑 같은 블랙 머메이드 드레스. 그 드레스를 입은 유주를 제 옆에 세워둔 이현의 태도에는 한 치의 숨김도 없었다. 수백 명의 시선이 집중된 이 화려한 전장 한가운데서, 하유주라는 여자가 완벽한'서이현의 소유'임을 세상에 공표하려는 오만한 선언이나 다름없었다."긴장 풀지, 하유주. 내 옆에서 그렇게 파랗게 질려있으면 곤란한데."이현이 유주의 허리를거칠게 감싸 안으며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다정한 연인의 귓속말처럼 보였겠지만, 유주의 허리를 강하게 죈 그의 손아귀에는 지독한 통제욕이 묻어났다."우리 동생, 파티의 주인공이 너무 늦게 나타난 거 아니야?"서이진이었다. 완벽하게 세팅된 수트 차림의 그는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든 채 특유의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 앞을 가로 막았다. 이현의 미간이 불쾌감으로 미세하게 좁아졌다."방해할 거면 비켜.""방해라니. 우리가 인사도 못 할 사이는 아니잖아?"이진은 이현의 차가운 경고를 가볍게 무시하더니, 시선을 돌려 유주를 위아래로 끈적하게 훑어 내렸다."드레스는 완벽한데........ 아, 목이 좀 허전하네. 너도 참 무심하지. 이런 날 파트너 목에 보석 하나 안 걸어주고 말이야."이진은 과장되게 혀를 차며, 제 안주머니에서 고급스로운 검은색 벨벳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그래서 내가 준비했지. 우리 유주한테 딱 어울릴 것 같아서."딸깍-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케이스가 열렸다.그리고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유주의 심장이 발밑으로 쿵,하고 처참하게 곤두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28화. 들끓는 지배욕

    숨 막힐 듯 옭아매 오는 압박감 속에서도, 이현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짓씹으며 한층 더 맹렬하고 자비 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다.방 안의 온도는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고, 두 사람의 얽혀드는 거친 숨소리와 마찰음이 무거운 공기 속으로 뜨겁게 흩어졌다.자신의 통제 아래 유주를 거침없이 몰아붙이면서도,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현의 눈망울은 기괴할 정도로 태연했다.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 아래에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독한 이성과 냉정함이 서늘하고 자리잡고 있었다.그는 극단적인 쾌락 앞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서가 그룹의 수많은 이들이 서이현이라는 존재 자체를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그래, 서이현은 원래 이런 사람이야.'고통과 아짤한 쾌락.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서 유주는 하얗게 질린 채 방황했다. 하지만 이내 본능적인 감각에 완전히 굴복해 버린 그녀는, 압도적으로 리드해 오는 이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며 그의 거친 호흡에 속도를 맞춰갔다."흐읏.... 이, 이현아...."애타게 헐떡이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유주의 떨리는 음성에, 이현의 서늘했던 눈동자 위로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열기가 훅 끼쳤다. 그는 유주의 몸에 한 치의 틈도 없이 더 깊게 밀착하며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한 번 더 불러. 내이름.""서, 시이현.......!"그녀가 이현의 목덜미에 뜨거운 숨을 뱉어내며 다시 이름을 부르자, 언제나 냉정하던 이현이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온몸을 잘게 떨었다."미치겠네, 진짜."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밀려드는 폭력적인 자극에 유주의 이성이 완전히 끊어질 듯 절정에 치달았다. 쾌락에 잠식당한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현의 목에 두 팔을 단단히 휘감고는, 그의 귓바퀴를 살짝 깨물어 냈다. 그 찰나의 도발적인 자극에 이현 역시 등골을 타고 오르는 짜릿한 오싹함을 느끼며, 마침내 그녀와 함께 가장 깊고 아찔한 감각의 나락으로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퍼억- 푹- 푹-"아.............!"성감으로 온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27화. 꽉 물고 놔주지 않는

    서이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잔인하고도 노골적인 질문은 유주의 귓가를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질투와 광기가 뒤섞인 추궁 속에서, 유주는 묘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허탈감을 느꼈다.지독한 소유욕과 숨통을 조이는 집착 속에서도, 가끔씩 문득 스쳐 지나가던 그의 기괴할 정고로 서글프던 다정함. 과거 차가운 절망 속에서 오직 자신만을 향해 내밀어졌던 그 커다란 손길의 온기를, 순간적으로나마 그리워하고 말았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비참했다.자조적인 한숨이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올랐다. 그의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사람을 속절없이 나약하게 만들고, 모든 저항을 포기한 채 그저 안주하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댜로 그의 체온에 녹아내려 가다가는, 영혼까지 완전히 그에게 잠식당해 뼛조각조차 남지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더 이상 그의 품에 안겨 흔들려서는 안 됐다.유주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떨리는 두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어깨와 가슴팍을 강하게 밀어냈다. 그리고 그의 체온이 남아 있는 서늘한 품에서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엉망으로 흐트러진 호흡을 가까스로 골라 삼키며 말했다. "안에... 안에 사정했다면 어쩔 건데? 너와 난 항상 대화가 이런 식이야. 넌 날 쫓고 집착하고, 난 널 수용하고 받아들이려던 순간 너의 그 숨 막히는 집착 때문에 결국 이렇게 퉁명스럽게 굴게 돼." 유주의 목소리에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서글픔과 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입고 있던 드레스의 끈을 홱 잡아 내려, 이현에게 보란 듯이 이진이 남긴 흔적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서이현, 똑바로 봐. 네가 그렇게 집착하는 하유주는 이런 여자야. 아무하고나 몸을 굴리는 그런 닳고 닳은 여자라고!" 유주의 자학 섞인 절규에도 이현은 당황하기는 커녕, 오히려 피식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 속에서 휘발되었던 집착의 광기가 다시금 검붉게 타올랐다. "하유주. 난 네가 이런 여자라서 오히려 좋아. 내 무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26화. 집착 속의 다정함

    꿈을 꿨다. 이게 꿈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내 곁에 서이현도, 서이진도 없이 평안한 나날이 지속되는 온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으니까. 만약 이 꿈에서 깨어난다면 또다시 그들의 지독한 집착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겠지. 영원히 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싶었다.회귀하기 전, 존재할지도 모르는 신을 향해 서이현을 만나기 전으로 돌려달라고 간절히 빌고 또 빌었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가 그를 모르는 척 살아갈 수 있을까.내 대답은 '아니오'였다.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간절한 바람에 희망이라는 입김만 후- 하고 불어 넣어 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이번 회귀를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가 진짜 죽지 않는 한, 죽어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얻지 않는 한, 영원히 서이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서이현과 얽혔던 잔혹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갇혀 있던 꿈속에서 무거운 눈꺼풀을 어렵게 들어 올려 눈을 떴다. 마지막 기억은 서이현에게 악에 바쳐 소리를 지르다 실신했던 순간이었다."하....."낮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켜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회귀 전, 서이현과 함께 밤을 보내던 안방의 구조와 인테리어가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았다. 심지어 지금 깔고 누워있는 침구의 디자인마저도.'나는 또다시 신의 짖궃은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걸까.'지친 몸을 일으켜 벗어나려던 찰나, 침대 왼쪽에서 서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서이현이 있었다."하.... 서이현, 이 미친놈."낮게 읊조리며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어느새 그의 커다란 손이 유주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아 왔다."어디 가."낮게 가라앉은 그의 잠긴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허리를 감싸 쥔 그의 두터운 팔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원치 않게도 회귀 전 그와 나눴던 기억들을 자꾸만 끄집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25화. 되돌아간 그의 집안에서

    회귄 전에 살았던 그의 집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외관, 그리고 차가운 집안 풍경까지.그녀는 또다시 그의 서늘한 시선 아래 붙잡혀 온 스스로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이럴 순 없었다. 그 참혹했던 과거를 끊어내고 벗어나고자 어렵게 얻은 회귀였는데.... 결국 또다시 그의 손아귀라니.울컥 치밀어 오르는 속상함과 절망감에 유주의 커다란 두 눈망울에 투명한 물기가 가득 서렸다."후....."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발견한 서이현은 조용히 다가와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하유주. 넌 내가 그렇게 싫어?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눈물이 차오를 만큼?"그의 무심한 한마디에 마침내 고여 있던 눈밀이 톡, 뺨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유주는 제어할 수 없는 감정에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어, 싫어! 나한테 너는 서가그룹 전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근데 넌 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건데!"한 번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절규는 멈추지 않았다. 유주는 핏대를 세우며 악에 바쳐 소리를 질렀다."서이현, 진짜 싫어! 미치도록 싫다고!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넌 왜 나를 그냥 가만히 두지 않는 건데........!"'회귀 전이나 지금이나.'말이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유주의 사고가 정지했다.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한 정적 속에서 이현의 눈빛이 삽시간에 기괴할 정도로 차갑게 변해갔다. 차가운 한기가 온몸을 덮쳐오자, 유주는 자신이 치명적인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황급히 소파 위에 던져두었던 가방을 챙겨 그를 지나쳐 대문으로 향하려 했다."야. 하유주, 기거 서."차갑게 내려앉은 일갈."회귀라고? 역시 너, 나와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었네."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이현이 순식간에 유주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가방을 빼앗아 바닥에 거칠게 내던졌다.콰당-"대답해야지."유주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가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순간적으로 몰아치는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24화. 탈의실의 문이 닫히면

    이현의 저돌적이면서도 묘하게 부드러운 혀가 유주의 입안을 유영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달뜬 숨을 내뱉었다. 아찔한 감각이 뇌리를 스치며 아랫배 끝이 간질거림과 동시에 저려왔다. 탈의실 안을 밀도 높게 부유하던 공기는 가빠진 두 사람의 숨결로 인해 한층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찰나의 반응을 놓치지 않은 이현의 입꼬리가 유연하게 호선을 그렸다.지독하고 진득한 키스가 이어지던 도중, 유주는 몽롱해지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으려는 듯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가느다란 속눈썹 사이로 들어찬 이현의 얼굴. 평소의 무심하고 차가운 가면 뒤로, 묘하게 흥분된 열기가 넘실거리는 남자의 모습이 유주의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졌다."하아, 읏....."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유주가 이현의 단단한 가슴을 살짝 밀어내며 타오르는 숭을 갈무리했다."후............"이현 역시 나직하게 숨을 가다듬었다. 그는 붉게 달아올라 헐떡이는 유주의 모습을 제 두 눈에 오롯이 박아 넣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반응을 탐닉하던 그의 뜨겁게 흥분해 올라와있던 열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며 살얼음판 같은 서늘함이 들어찼다.갑작스럽게 온도가 떨어진 그의 시선에 유주는 섬뜩한 소름이 피부 위로 도지는 것을 느꼈다. 위험 신호를 감지한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 찰나였다. 이현이 주저 없이 손을 뻗어 유주의 가슴을 덮고 있던 드레스 옷자락을 확 제쳐냈다.스르륵-이현과의 격정적인 키스에 취해, 옷매무새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탓이었다. 깊게 파인 스쿱 라인 아래, 하얀 살결 위로 새겨진 이진의 은밀하고 붉은 흔적들이 이현의 서늘한 눈동자에 박혔다. 순간, 완전히 덫에 걸렸다는 위기감이 유주의 전신을 옥죄어왔다."하유주."낮고 묵직하게 가라앉은, 그야말로 얼음장 같은 말투였다."너 이거 뭐야."그의 핏기 없는 목소리에 유주의 속눈썹이 경련하듯 잘게 떨렸다. 유주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그를 향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제 몸이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5화. 거미줄의 입구

    서가 그룹 본사 로비는 인간의 오만을 형상화한 것 같은 공간이었다. 초고층 빌딩의 무게를 지탱하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은 마치 신전의 그것처럼 위압적이었고, 발소리조차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매끄러운 바닥은 침입자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반사해냈다. 하유주는 로비 한복판에 서서 가쁘게 몰아치는 숨을 억눌렀다. 손바닥에 쥔 메모지는 이미 땀으로 눅눅해져 글씨가 번져 있었다. 15년 전, 그 강가에서 등을 돌려 달아났을 때 유주는 믿었다. 사탕을 건네지 않았으니, 그 소년의 고독에 참견하지 않았으니, 이번 생의 궤적은 서이현이라는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3화. 엇갈린 계절의 온도

    소년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원래의 기억대로라면, 유주는 지금쯤 주머니 속 사탕을 만지작거리며 저 소년에게 다가가 “왜 혼자 울고 있어?”라고 다정하게 물어야 했다. 그 친절이 씨앗이 되어 20년 뒤의 괴물을 키워낼 것이었다.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유주가 있는 방향을 두리번거렸다. 유주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공포와 전율이 전신을 감쌌다. '만나면 안 돼. 말을 걸어서도, 눈을 마주쳐서도 안 돼!’ 유주는 주머니 속에 든 알사탕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2화. 신이 응답한 단 하나의 기도

    이현의 집착은 해가 저물수록 더욱 노골적이고 집요해졌다. 그에게 밤은 유주를 온전히 자신의 방안에 가두어 두는 시간이었다. 넓고 차가운 침실, 은은한 조명만이 감도는 그 공간에서 유주는 매일 밤 질식할 것 같은 공포를 견뎌야 했다. 이현은 항상 유주보다 늦게 잠들었다. 최근 들어 그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유주가 방에서 몰래 나와 거실 창문을 열어보았다는 보고를 받은 날부터, 그는 집 안의 모든 보안 시스템을 직접 재점검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CCTV 영상을 밤새 돌려보느라 며칠째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한 상태였다

  • 그 시절 나를 찾아 회귀하였습니다   제1화.보이지 않는 감옥

    서울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평창동의 고요한 저택. 유주는 통유리창 너머로 저물어가는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하늘은 마치 누군가 쏟아버린 와인처럼 불길하고도 선명했다. “유주 아가씨, 식사 준비됐습니다.”등 뒤에서 들려오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유주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 집의 고용인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없었다. 그들은 유주를 ‘손님’이라 부르지만, 실상은 감시 대상이라는 것을 유주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유주는 마지못해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길게 뻗은 대리석 테이블 끝에는 이미 한 남자가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