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주임님, 3시 57분인데 콜 막아도 되죠?"
경은이 헤드셋을 내려 놓으며 은영에게 명랑하게 물었다. 질문처럼 물었지만 경은은 이미 시스템을 끄고 헤드셋을 거치대에 걸고 있었다. 경은이 그렇게 하자 주변의 다른 직원들도 하나 둘씩 따라서 시스템을 끄기 시작했다. 한숨과 잡담으로 한순간 소란스러워졌다. 모두가 금요일 오후의 바이브에 얼마간은 행복해 보였다.
"응, 그럴까?"
그날은 한 달의 마지막 주 금요일이었다. 그들이 일하던 부서는 달의 마지막 금요일마다 4시에 업무를 마치고 회사 휴게실에서 조촐한 간식 타임을 가졌다. 업무를 마쳤다고는 하나 퇴근을 해도 되는 건 아니었다. 간식 타임 또한 업무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조그마한 케이크를 주문해 그 달에 생일을 맞았던 직원들의 생일을 다같이 축하했고, 간부들이 일하고 있는 7층에서 센터장이 내려와 한 마디 하기도 했다.
가끔 맥주와 와인 등 가벼운 주류가 제공되기도 했다.
금요일 저녁이지만 약속이 없는 싱글들, 집에 바로 가기 싫은 기혼들... 저마다 각자의 이유로 기다리는 금요일 오후의 혜택이었다.
물론, 빨리 돌아가고 싶은 가정이 있거나 연인이 있는 직원들은 이런 거 안 해도 되니 30분이라도 일찍 퇴근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들이 일하던 부서는 엘리베이터 4층에 있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눈 앞으로 커다란 유리문이 있었고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면 오픈플랜 사무실이었다. 유리문 안쪽 오른쪽에 사방이 유리로 된 신 과장의 사무실이 있었다. 오픈플랜이었지만 군데군데 기둥이 있어서 모든 자리를 한눈에 볼 수는 없었다. 유리문 안으로 들어오기 전 왼쪽에 휴게실과 화장실이 있었다. 휴게실에는 텔레비전과 냉장고와 싱크대와 소파 자리가 있어서 직원들은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거기서 먹기도 하고 커피를 타 마시기도 했다.
4시가 땡 되자마자 직원들이 우르르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주임님, 같이 가요."
"응, 그래."
다들 금요일의 바이브에 젖어 기분이 좋아 보였다. 데이트가 있는지 다들 잘 차려 입은 모습이었다.
"지혜 씨, 약속 있어?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입고 왔어?"
"어머, 차장님! 저 오늘 하루 종일 이렇게 입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보신 거예요? 관심 좀 가져 주세요, 제발요."
빨간색 플레어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지혜 씨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배가 나올지도 모른다며 케이크와 간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오늘 케이크는 다른 날과 달라 보이네? 어디서 산 거야?"
"아니, 요 앞 길 건너 서점 옆에 디저트 가게가 새로 생겼더라고요. 지나다니며 몇 번 봤는데 맛있어 보이는데 너무 비싸잖아요? 그래서 회사 찬스 쓸 수 있을 때 냉큼 가서 사 왔지요, 하하. 이럴 때 아니면 제가 언제 이런 고급 케이크를 먹어 보겠어요?"
사무실의 자질구레한 살림을 도맡아 하는 인사팀의 막내 명희 씨가 명랑하게 말했다.
"명희 씨는 애인 없어?"
"애인이요? 하하하."
"아니, 애인이라는 말이 웃겨? 왜 웃어?"
"그게 저... 그 말이 저는 조금 웃기네요. 남친 없어요."
"아 뭐 애인 있냐고 묻는 것도 아재 말투인가? 남친, 여친이라고 해야 되는 거였어?"
"아니, 아니에요. 저 남친 없는데 주변에 괜찮은 남자 있으면 소개 좀 시켜 주세요."
명희 씨는 누구에게나 살갑고 명랑하게 말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젊은 여자였다. 사무실에 들어오면 사무실 전체가 절로 환해지는 것 같은.
"근데 명희 씨 이렇게 귀여운데 왜 남친이 없어?"
"글쎄요... 왜 없을까요? 저도 그게 궁금해요. 언니 생각에는 이유가 뭐인 것 같아요?"
"음...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냐?"
"아니요, 저 눈 안 높아요. 진짜예요."
"근데 왜 남친이 없어? 명희 씨 정도면 인기 많을 것 같은데."
"만날 기회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제가 이래 봬도 집순이라서."
"명희 씨 나이 땐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사람도 만나고 놀고 해야지. 내 나이 돼 봐. 마음이 있어도 몸이 안 따라줘서 못 다녀. 젊을 때 많이 놀러 다닐 걸 후회돼."
"에이, 언니도 아직 젊잖아요."
"젊긴. 노안이 와서 내 눈 앞의 명희 씨 얼굴도 잘 안 보여."
"에이, 언니도 참."
"진짜라니까? 자기도 내 나이 돼 봐. 자긴 안 늙을 거 같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사람들은 휴게실에서 잡담을 하며 금요일의 오후를 즐겼다.
휴게실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다같이 부르고 케이크를 나눠 먹는 동안, 은영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 해야 했다. 그날은 5시 땡 되자마자 퇴근해 아들을 데리러 가고 싶었다. 아들을 데리고 같이 마트에 가 찬거리를 사고 집에 가는 길에 놀이터에도 들러 잠깐이라도 그네를 밀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는 집에 가 아이 목욕을 시키고 찌개를 끓이고 고기를 구워 저녁을 차리고 싶었다. 남편과 아이와 셋이 둘러앉아 서로 쌈도 싸서 입에 넣어 주면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싶었다.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
다른 직원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서 슬그머니 자리로 돌아가려고 유리문 안으로 들어서는 은영의 눈에 누군가의 머리꼭지가 보였다. 승희도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은영은 문득, 승희에게 말을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이 카펫으로 되어 있어 발소리가 별로 나지 않는 그곳에서 발바닥이 고무 재질로 된 플랫 슈즈를 신고 있던 은영은 발소리도 내지 않은 채 조용히 승희 자리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은영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드넓은 사무실의 제일 안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승희는 늘 그러고 있었던 것일까?
책상 사이에 파티션이 있어서 바로 옆에 앉아 있어도 몸을 휘어 옆을 들여다봐야만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던 그곳에서.
코너에 있던 승희 자리에 도달하기 전, 한 자리 전 직원은 3주 전에 육아휴직 들어가서 비어 있고 전전 자리는 컴퓨터가 안 돼서 한동안 비어 있던 상황. 오픈플랜이긴 하지만 곳곳에 기둥이 있어서 한 눈에 사무실을 다 볼 수는 없었던 구조. 책상이 2열씩 마주 보고 있었는데 승희는 벽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안전지대에 있었던 것이다. 사무실 입구 방향을 등지고 있었으면 누군가 등 뒤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신경 써야 했을 테니까. 승희는 모두가 휴게실에서 간식 타임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안심했던 모양이다. 카펫피팅 바닥이었기 때문에 발소리도 안 들렸을 것이다.
은영이 승희 자리 근처까지 도착했는데 힐끗 보이는 승희의 머리꼭지서부터 보이는 위쪽 얼굴이 좀 이상해 보였다.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어디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슬픔을 가누지 못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완전한 쾌락의 무아지경에 빠져 절정을 맛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은영은 아픈 거면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한 발짝을 더 떼려다가 무심코 승희 책상 아래를 봤는데 컴퓨터 본체와 신발과 가방, 여러 전선이 뒤엉켜 있는, 책상 아래 그늘진 그 컴컴한 곳에 한 사람이 무릎을 꿇은 자세로 승희 쪽을 향해 있는 걸 봤다. 기도하거나 혹은 벌 서는 자세로 간절하고도 다급해 보이는 움직임들. 그 사람은 승희에게 오럴섹스를 해 주고 있었다.
은영은 차마 더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발소리를 죽여 사무실을 빠져 나갔지만 책상 아래로 양복 바지와 양말과 구두를 봤다.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저 둘이 왜...?'
'아니... 어떻게 저 둘이 저러지?'
'아니... 어떻게 저 둘이 여기서 저런 짓을?'
은영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육성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사무실에서, 아무리 모두가 간식 타임을 갖고 있는 금요일 오후라도, 어떻게 저렇게 간이 배 밖에 나온 짓을 할 수가 있는지 은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만 모르고 있는 거지, 세상 사람들은 원래 다 저러고 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당장 소리를 내어 저 둘이 자기를 보게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야, 그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겠지.
은영은 머리를 세차게 내저었다.
누군가의 약점을 잡고 있는다는 건, 그것도 한 명도 아니라 두 명의 약점을 잡고 있는다는 건 이득일까, 장애물일까?
근데 그건 당사자들이 그게 약점이라고 생각해야 가능한 얘기다.
증거도 없으니 오리발을 내밀겠지. 오히려 그런 폭로를 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고 가겠지.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린 장면에 은영은 도파민이 터져서 이 생각 저 생각 두서없이 했지만 사실 그걸 약점이라고 잡고 이용하는 것 같은 비열한 생각은 그저 재미로 해 본 것 뿐이었다.
그보다, 저 남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거의 확실하다 생각됐지만, 완벽히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사무실에서 부하직원과, 간도 크게 대낮 모두가 사무실 건물 안에 있는 이 상황에서 저런 짓을 하는 남자.
둘이 얼마나 조급하면 저렇게 해야 되는 걸까?
저리도 조급하고 절박한 성행위라니.
은영은 씁쓸하지만 조금 부럽기도 했다.
한 번이라도 살면서 저런 급박한 성욕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은영은 까마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온사인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하자 거리는 색다른 생동감으로 가득 찼다. 늦은 오후의 피곤해 보이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새로이 씻고 꾸미고 나온 사람들이 일제히 재잘대며 어디론가 바쁘게 걷는 모습이었다. 신 과장은 성큼성큼 걸어 어느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자 안이 컴컴한 바가 있었다. '아일랜드'라는 간판을 단 바였다. 이제 막 영업을 시작했는지 안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앳된 남자가 은영과 신 과장을 맞았다. 은영과 신 과장은 창 밖이 보이는 창가의 구석 자리에 앉았다.신 과장은 올드 패션드를 주문했다. 은영이 뭘 주문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자 신 과장이 말했다."같은 걸로 드실래요?"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웨이터는 말없이 공손하게 그들의 주문을 받고 물러났다."그 날 제가 추천해 드린 향수 사셨어요?"은영은 불현듯 신 과장을 백화점에서 마주쳤던 날을 떠올리며 물었다."아, 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추천 감사했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더군요."은영은 신 과장이 '와이프'라고 하지 않고 '아내'라고 말하는 것이 왠지 근사하다고 생각했다."저도 같은 향수를 샀어요. 오늘도 뿌렸는데... 땀 냄새에 섞여서 이젠 향이 안 나겠지만.""아... 어쩐지 어디서 익숙한 향이 난다 했어요."신 과장은 웃으면서 얘기했다.올드 패션드는 쌉싸름한 위스키에 오렌지 제스트 향이 상큼하게 나는 칵테일이었다. 맛이 깔끔하면서 묵직했고 낮에 마신 소주나 맥주, 막걸리보다는 입을 개운하게 해 주었다."이 술 맛있네요."은영이 말했다. "마음에 드세요? 다행이네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입니다."신 과장은 웨이터에게 눈짓으로 같은 걸 두 잔 더 주문했다."아내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사무실 책상 위에 두신 사진을 보니 미인이시던데요."신 과장은 잠시 침묵했다."아? 제가 너무 개인적인 걸 물었나요? 그렇다면 실례했습니다."은영이 신 과장의 표정을 살피고 재빨리 사과했다."아, 아니에요. 미인이죠. 어떤 사람이냐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 안에 앉아 있는 그 상황에서 승희와 신 과장 사이에 흐르는 긴장된 분위기를 감지한 은영은 혼자 속이 탔다. 혹시라도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됐다. 다행히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이 자리가 파했다. 모두 거나하게 취해 그 식당을 나왔다. 그 식당은 산자락 아래에 있었는데 미니 버스 서비스가 있었다. 사장님이 손님들을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태워 줬다. 등산에 거의 모든 직원이 참여했기 때문에 미니 버스에 모든 인원이 다같이 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센터장을 위시한 윗선들이 먼저 내려갔고, 대리나 평사원급들은 식당 마당 평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사장님이 돌아오면 두 번째 라운드에 타서 지하철역까지 가기로 했다. 택시를 부르기도 애매한 위치였고 지하철역까지 내려 가기에는 모두가 술에도 취하고 피곤한 상태였다.신 과장은 첫 번째 라운드 미니 버스에 탈 수도 있었는데 한사코 양보해서 남았다. 승희랑 신 과장은 문자로 싸우고 있는지 승희는 식당 마당의 오른편 끝에, 신 과장은 식당 마당의 왼편 끝에 서서 폭풍 문자짓을 하고 있는 것이 은영의 눈에 보였다.식당 사장이 와서 나머지 인원들을 미니 버스에 태웠다. 신 과장은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고 승희는 맨 뒷자리 창가에 앉았다. 은영은 그 날이 어떻게 끝날까를 상상하며 그 둘을 남몰래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미니 버스 안은 왁자했다. 초저녁밖에 안 된 시각이었기 때문에 다른 약속이 없었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2차 갈 계획들을 세우고 있었다."주임님, 저희랑 한 잔 더 하고 가시죠? 아직 시간이 이른데.""그래요 주임님. 남편분한테는 아직 회식 중이라 빠질 수가 없다고 하면 되지 않아요?""모처럼 토요일에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맥주나 한 잔 더 하고 가요.""말은 고마운데 난 그냥 일찍 가서 쉴까 봐. 등산하며 땀을 많이 흘렸는지 몸도 너무 찝찝하고 해서.""에이, 같이 가시지! 저희도 다 땀 많이 흘렸어요.""나한테도 같이 가자 해 줘서 고마워. 근데 오늘은 자기들끼리
"주말인데 같이 못 보내서 미안해.""아니야, 회사 행사인데 빠지면 안 되지. 좋은 시간 보내다 와. 승재는 걱정 말고.""에휴... 좋은 시간이 될지 모르겠네. 등산이래.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토요일에 등산이 웬 말이야?""건강에도 좋고 단합도 하고 좋지 뭐.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녀 와. 올라가다 힘들면 다 올라가지 않아도 되잖아.""자기는 어쩜 그렇게 도덕 선생님같이 말해? 우리 센터장님이 찾고 있는 인재네. 하하""하하, 그런가? 기왕 가는 거 좋은 마음으로 가면 좋지 뭐.""오늘 승재랑 뭐 할 거야?""어? 그건 비밀인데? 오늘은 보이즈 데이라구! 엄마한텐 비밀이야. 그치, 승재야?""네, 맞아요. 비밀이에요.""그래? 엄마 서운한데?""에이, 서운해 하시지 마세요. 사나이끼리는 비밀을 지켜야 된다고 아빠가 그랬어요.""그래? 호호호.""승재는 걱정 말고 회식하면 회식도 갔다가 와.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밥 굶고 있지는 않을 테니.""알았어. 그럼 둘이 재미있는 하루 보내. 저녁에 봐."은영은 등산화를 신고 집에서 나왔다.토요일이었고, 일 년에 두 번 정도 있는 직원 단합대회 날이었다. 도시의 북쪽 끝에 자리한 산을 함께 오를 계획이었다. 회사에서 집합하여 대절 버스를 같이 타고 산 아래까지 같이 가서 등산한 뒤 내려와서 회식을 하고 파하는 일정이었다. 어떤 직원들은 주말에 회사 체육대회, 등산 등을 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은영의 회사 분위기는 보수적인 편이라 그런지 그런 것들도 업무의 연장선상이라는 인식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거의 모두가 참여했다. 기혼 직원들은 오히려 기다리기도 했다. 가족들을 돌보느라 주말에는 더 바쁘기 마련인데, 그런 가운데 회사 행사는 좋은 핑곗거리였던 것이다. 직원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그런 날들엔 오후 일찍부터 술자리가 벌어졌다."주임님, 오셨어요? 옷이 너무 화사하네요! 편한 복장 하시니까 대학생 같아요."진경이 싹싹하게 한 마디 했다."어머, 고마워 진경 씨. 립서비스인 줄은 알지만
은영은 집에 가는 길에 속옷과 향수와 와인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 승재의 학원비가 생각나서 잠깐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언제까지고 아이만 생각하며 자신의 행복을 담보 잡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아이가 소중한 거는 소중한 거고, 나는 늙어간다.하루하루.내 행복을 찾는다고 해서 아이를 내팽개치는 건 아니다.결연한 마음을 먹고 빨간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백화점에 가는데 너무 추레하게 가고 싶지는 않았다. 백화점 1층 화장품 코너에서 혼자서만 겉돌고 싶지는 않았다. 백화점 직원들은 자기들도 서비스 업종 종사자의 저임금을 받으면서 자기들과 비슷한 임금을 받을 법한 소박한 외양의 고객들을 무시했다. 어쩌면 당연하다. 열과 성을 다해 세일즈를 해도 공짜 기프트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대다수일 확률이 높으니까. 외모와 차림새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득 없는 일에 세일즈와 고객 서비스의 에너지를 다 쏟고 싶지 않다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로이다. 많이 당했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지 않아도 진이 빠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가방이나 구두, 시계나 코트 같은 걸 슬쩍슬쩍 보고 누구한테 아양을 떨고 누구한테는 그저 미소만 띄울지 판단한다. 어찌 보면 직업적 노련함이다. 그 판단이 항상 딱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은영은 향수 코너에서 이것저것 시향해 봤다. 아무래도 달콤한 향이 좋을 것 같았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시향지를 흔들며 향을 느껴보고 있는데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뜻밖에도 신 과장이 있었다. "과장님, 여기서 뭐 하세요?""어, 배 주임님. 배 주임님은 여기서 뭐 하세요?""아, 그냥 향수 구경하고 있었어요. 과장님 향수 사시는 거예요?""네, 제 건 아니고 아내 하나 사 줄까 해서요.""아, 네. 아내분이 좋아하시겠네요. 향수 사는 남자 새롭네요, 호호."은영은 신 과장의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화점 1층의 환하디 환한 조명 아래 신 과장의 얼굴이 모공 하나하나까지 적나라하게 보
"어머, 주임님! 머리 하셨네요? 너무 잘 어울려요.""주희 씨가 역시 눈썰미가 있네. 살짝만 다듬은 건데 알아보겠어?""알아보다 마다요. 완전 상큼한데요? 꽤 자르신 거 같은데요?""고마워. 잘 어울린다니 다행이네.""어려 보여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하하, 그런 건 없고 그냥 기분 전환차."은영은 어려 보인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그냥 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월요일의 사무실은 활기가 넘쳤다."다들 주말 잘 보냈어? 주말에 뭐 했어?"젊은 여자가 많은 사무실이라 화제는 자연스레 주말에 한 데이트 이야기, 클럽에 가서 부킹한 이야기, 소개팅한 이야기로 모아졌다. 마흔 초반이었을 뿐이지만 은영은 어느 정도 소외감을 느꼈다. 물론, 기혼 직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혼 직원들은 기혼 직원들끼리 모여 주말에 시댁에 호출되어 간 이야기, 시어머니가 냉장고 속 간섭한 이야기, 자녀들의 친구 부모들과의 트러블,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공동 복도에 내어 놓은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은영은 문득 자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젊은 미혼 직원들의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도 못 했고, 그렇다고 나이가 좀 있는 기혼 직원들간의 대화에도 썩 공감이 안 됐다. 아마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이 든 기혼 직원들간의 대화에 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 험담이거나 체념이거나 울분이거나 박탈감이거나 후회로 수렴되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정작 그저 재미로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진심이 아니면서도. 사실은 결혼 생활에 만족하고 있고 한 사람과 결혼까지 가서 자녀를 낳고 사회에서 말하는 완벽하게 제도권 안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데에 우월감을 느끼면서도. 가끔 사람들은 거짓으로 불행을 지어낸다. 이유는 다양하다. 그렇게 해야 집단 생활 내에서 미움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불행을 이야기하면서도 눈은 웃고 있다. 은영은 속 없는 사람처
"승재 이제 아빠랑 자러 갈까?"저녁 식사 후 아이와 한참 퍼즐을 같이 해 주던 은영의 남편 태형은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빠, 이거 조금만 더 하고 싶어요.""우리 승재 눈에 잠이 그렁그렁한데?""아니에요! 잠 없어요. 눈에 잠 없단 말이에요."승재는 돌연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태형은 승재가 귀여워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내일 일어나서 축구 교실 가려면 이제 자러 가야 돼. 일찍 자야 우리 승재 아빠만큼 키 큰다. 일찍 자야 키 요정이 승재한테 오는 거야. 자, 우리 이거 정리할까?"태형은 '장난감을 정리하자'라는 문장을 마음대로 음을 넣어 노래를 부르며 나서서 치우기 시작했다. 태형의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노래에 승재는 웃음을 터트렸다. 승재도 이내 태형을 따라 고사리손으로 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퍼즐 조각과 듀플로 더미들, 장난감 자동차들을 하나 하나 주워 각각 알맞은 상자에 넣기 시작했다. 은영은 둘의 말소리, 노랫소리를 건너 들으며 행복한 마음이 됐다.이윽고 태형은 승재를 들어 올려 품에 안고는 승재의 방으로 향했다. 승재 방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은은한 빛의 램프를 켜고 승재를 침대에 내려 눕혔다. 태형은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던 동화책을 펼쳐 승재에게 읽어 주기 시작했다.은영은 태형의 기척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다시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후 화장실에 갔었기 때문에 다시 아래를 깨끗이 씻고 싶었던 것이다. 은영은 꼼꼼하게 세정제를 발라 따뜻한 물로 씻고 보송한 수건으로 세심하게 닦았다. 몸에 바디로션을 바르고 향수도 뿌렸다. 야한 팬티를 입고 슬립 드레스 란제리를 입은 뒤 램프의 조도를 낮췄다.은영은 티브이를 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볼 만한 프로그램을 찾았다.태형의 잠자리 동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은영은 조바심이 났다.티브이의 볼륨을 줄여 승재 방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태형은 사자도 되었다가 선생님도 되었다가 코알라도 되었다가 개구쟁이 소년이 되기도 하면서 열성적으로 동화 구연을 해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