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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김희랑
수업 종이 울리자 교문 밖에는 인적이 드물어졌다.

김도아는 머릿속으로 앞으로 사흘 밤을 연속 근무할 때 버틸 만한 음식으로 무엇을 사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끊었다.

“어르신께서 수년간 아가씨를 그리워하고 계세요. 돌아오신 걸 알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나이 든 사람들은 감정이 앞서는 법, 운전기사는 눈물을 훔치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동안 밖에서 고생 많으셨죠. 지금 바로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에요, 기사님.”

한편 김도아는 눈물을 쏟는 운전기사와 달리 너무나도 평온했다.

“지금 돌아가면 서로가 꽤나 민망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그곳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집이었던 적이 없었다.

김도아는 김씨 가문의 딸로 스무 해를 넘게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자신이 가짜라는 통보를 받았다.

부모님은 친부모가 아니었고 소꿉친구에서 남편으로 된 성지민마저 그녀가 효성 그룹 딸이란 신분 때문에 접근했을 뿐이었다.

예기치 못한 화재가 별장 전체를 태웠는데 임신 중이던 김도아가 가장 먼저 불이 난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부모님을 구했지만 정작 자신은 지붕 아래에 깔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너머로 그녀의 부모님은 가장 먼저 구출된 친딸 김효린을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김효린, 김씨 가문에서 갓 찾은 친딸, 한 가족 세 식구는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서로 꼭 껴안고 있었다.

한편 김도아는 이 화재에서 까마득히 잊힌 존재였다.

불길이 그녀의 주위를 덮쳤고 연기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세상이 온통 암흑으로 변했다.

그것은 어쩌면 단순한 사고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친딸 김효린이 방화범인 줄 알고 경찰의 질문에 일부러 딸아이를 감싸주었다.

심지어 병상에서 막 정신을 차린 김도아에게 온갖 회유와 압력을 가하며 따지지 말아 달라고 반강제로 부탁했다. 그녀가 김효린의 인생을 빼앗았기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어 이 같은 짓을 벌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성지민은...

그녀의 남편 성지민은 그녀 부모님의 사주를 받고 한창 그녀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김도아가 자신이 가짜 딸이라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으면서도 호화로운 생활을 계속 누리기 위해 그 사실을 숨겼고 친딸 김효린이 밖에서 고생하도록 만들었다고 의심했다.

성지민이 돌아왔을 때, 불에 타 죽을 뻔했던 김도아는 이미 한 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남의 인생을 훔친 나쁜 년이고 속셈이 뻔한 천한 년이며 부모와 남편에게 의심받는 악인으로 전락했다. 뭐가 됐든 다 상관없으니 그저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성지민이 한사코 거부하며 그녀를 감금했다.

바로 그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는 성지민과 김효린의 대화를 생생하게 들었다.

“왜? 속상해? 설마 이제 와서 김도아 사랑하게 됐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네가 걔를 얼마나 역겨워했는지 스스로 잘 알잖아. 매번 키스한 뒤에는 입술 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닦아냈으면서!”

“초심 잃지 마, 지민아. 10살부터 이 집안에 들어와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김도아 옆에서 몸을 던진 게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잖아. 난 이제 친부모님 찾았고 너랑도 결혼할 거야. 효성 그룹은 여전히 네 것이 된다는 뜻이야. 알겠니?”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것은 정말이지 한순간의 일이었다.

김도아는 그날 사랑과 증오가 한순간에 뒤바뀔 수 있음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따뜻하고 열정적이었던 모든 순간이 전부 거짓이었다. 그녀가 인생 전반기에 경험했던 모든 행복한 시간들은 성지민이 꾸민 음모에 불과했다.

김도아는 배를 꽉 움켜쥐었다. 몸이 으슬으슬 춥고 떨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피가 흥건하게 흘렀고 결국 난산으로 아이마저 잃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감정이 무너져내려 고통스러운 마음에 깨진 유리 조각으로 성지민의 어깨를 꾹 찔렀다. 혼란을 틈타 김도아는 필사적으로 이 도시를 탈출했다.

그날의 사건은 결국 덮이지 못했다. 20년간 화려한 삶을 누렸던 김씨 가문의 딸 김도아는 가짜에 불과했으며 그 충격으로 유산하고 정신이 무너져 미치광이가 되어 도망쳤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대중 앞에 나타난 것은 진짜 효성 그룹의 친딸 김효린이었다.

어느덧 8년이 흘렀다...

운전기사 앞에 서 있는 것은 한없이 평온하고 담담한 표정의 여자뿐이었다.

운전기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그 일로 어르신은 늘 후회하십니다. 아가씨께 뭐라도 보상해 주길 바라셨어요...”

“사실 보상받을 건 없어요.”

김도아는 땅을 기어가는 개미를 한참 동안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제가 남의 인생을 훔쳐서 20년이나 호의호식을 누렸잖아요. 뭘 더 보상받겠어요? 수혜자인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죠. 그때는 어렸고 철이 없었어요. 어쩌면 저에게는 애초에 주어지지도 않을 풍족한 삶을 선물해 주신 분들인데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는 정말 많이 변했다. 운전기사가 기억하던 김도아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보풀이 인 스웨터, 물이 빠진 청바지, 화장기 없는 얼굴로 꼬마 녀석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운전기사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혹시... 재혼하셨어요?”

그 말에 김도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낀 약혼반지를 쳐다보았다.

올해 4월, 그녀는 주경찬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네. 아직 정식으로 절차는 밟지 못하고 있어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성지민한테 여쭤봐 주실래요? 언제쯤 이혼할 수 있을지 말이에요.”

성지민에게 감금당했던 그녀는 너무나 처참하게 도망치느라 이혼 절차를 밟을 겨를이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아직도 법적으로 부부 관계였다.

이제 이렇게 긴 세월이 흘렀으니 묵은 원한에도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되었다.

김도아는 정중하면서도 다소 거리를 두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성지민 애도 꽤 컸던데 저 때문에 서로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빨리 절차를 마무리했으면 좋겠어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우리 각자 새로운 삶을 시작했잖아요. 피차 얽매여봤자 좋을 건 없어요.”

운전기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날 밤, 기사는 성지민을 모시러 갔다가 낮에 김도아와 나눈 대화를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다.

성지민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녁 술자리에서 그는 몇 번이나 딴생각에 잠겼다. 자리를 마련한 동은 그룹 안기준 대표가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성 대표님, 음식이 입에 안 맞으세요?”

옅은 회색 담배 연기가 성지민의 얼굴을 가렸다. 그는 평소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임했다.

안기준의 딸이 마침 근처에서 쇼핑을 마치고 아빠의 의도적인 부름에 이리로 달려왔다. 그녀는 성지민을 보더니 놀라움과 동시에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여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금방 관리를 받고 왔는지 머릿결부터 피부까지 윤기가 났고 이제 막 성인이 되어 풋풋하고 싱그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종일 성 대표님이 우상이라고 입에 달고 살더니 정작 만났는데 왜 또 아무 말도 못 해?”

안기준이 일어서서 딸에게 자리를 내주며 억지로 앉혔다.

“눈치 챙겨야지. 대표님 잔 빈 거 안 보여?”

소녀는 조심스럽게 성지민 앞의 술병을 집어 들었고 어색함과 긴장감 속에서 술을 따랐다.

이에 성지민이 말했다.

“안 대표님, 이러실 필요 없어요.”

“별말씀을요.”

안기준이 웃으며 말했다.

“성 대표님께 술을 따라 드리는 건 예림의 복이죠.”

소녀가 몸을 굽혀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다 따르자 안기준이 기다렸다는 듯 딸 안예림을 성지민 쪽으로 밀어붙였다.

“이 기회에 성 대표님께 경험담이나 좀 들어. 대표님이 한두 마디만 하셔도 네 졸업 논문은 충분히 쓸 수 있을 거야.”

성지민이 몸을 뒤로 살짝 젖히자 아빠에게 밀쳐진 소녀는 그에게 넘어지지 않으려 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아이를 다그치고 싶은 겁니까 안 대표님 본인이야말로 안달이 난 겁니까?”

의미심장한 말투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안기준이 웃음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던 찰나, 성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대충 집어 들었다.

“배웅하실 필요 없어요.”

안기준은 황급히 쫓아나갔다.

“벌써 가시려고요? 좀 더 계시지... 음식도 아직 다 드시지 못했잖아요...”

이때 성지민의 비서 진수빈이 그를 가로막았다.

“이쯤에서 멈춰 주시지요, 안 대표님. 저희 대표님은 이미 입맛이 다 떨어지셨어요.”

안기준은 결국 멈춰 서더니 뒤돌아서 속 터지는 눈길로 딸을 쳐다보았다.

“아빠! 아까는 왜 저를 밀치고 그래요?”

안예림은 떠밀린 물건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오히려 불편해하며 말했다.

“성 대표님은 그런 분이 아니잖아요. 아빠가 이러시면 저만 싸구려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나중에 어떻게 얼굴을 봐요.”

안기준이 시큰둥하게 쏘아붙였다.

“뭐가 싸구려야? 기회를 줘도 못 잡는 게 바보지! 성 대표 옆자리를 노리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이번에 제대로 눈도장 못 찍으면 다음엔 또 언제 기회가 생길지 몰라!”

“소문으론 성 대표님 곧 약혼하신다던데 지금 저더러 내연녀 짓이라도 하라는 뜻이에요? 게다가 대표님 아들도 있어요. 난 새엄마 될 생각 없으니 헛된 기대는 품지도 말아요. 절대 안 하니까!”

“아직 안 했잖아. 그리고 그건 약혼이지 결혼이 아니야.”

안기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자고 너처럼 의욕 없는 딸을 뒀을까...”

소녀는 아빠가 보지 않는 틈을 타 몰래 눈을 희번덕거렸다.

한편 안기준은 성지민의 비서 진수빈에게 계속해서 문자를 보내며 오늘 접대가 미흡했던 점에 대해 거듭 사과했다.

...

한진의 밤, 거리는 차들로 붐볐고 네온사인이 밤을 밝혔다.

성지민은 뒷좌석에 앉아 잠깐 눈을 붙였다. 차가 신호등 앞에서 멈췄을 때 비서 진수빈이 무언가를 보고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성지민은 비스듬히 눈을 뜨고 건너편 편의점 안의 누군가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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