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국 오해는 풀렸다.다만 그 과정에서 금영이 치른 대가가 조금 컸을 뿐이었다.그날 밤, 금영은 그대로 현청전에서 묵었다.예전에는 황제가 정사를 보는 현청전에 그 어떤 여인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건만, 이제 현청전은 거의 금영의 또 다른 처소나 다름없었다.*서봉전.서 황후는 궁 안 곳곳에 눈과 귀를 심어 두고 있었다.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서 황후의 귀에 들어왔다.이른 아침부터 이전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찾아와 아뢰었다.“마마.”서 황후는 거울 앞에 앉아 단장을 하고 있었다.거울 속 여인은 여전히 화려한 궁의를 입고 있었으나, 더는 젊고 화사하던 시절의 얼굴이 아니었다.환옥은 어떻게든 서 황후를 한층 화사하게 꾸며 보려 애썼지만, 아무리 손을 대도 어딘가 예전 같지 않았다.사실 서 황후가 그리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예전에는 몸가짐과 용모도 무척 잘 관리해 왔다.그 속마음이 진작 검게 썩어 문드러졌든 말든,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화려하고 기품 넘치는 황후였다.하지만 금영이 입궁한 뒤부터 서 황후에게 금영은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밤낮으로 속을 끓이느라 잠조차 편히 이루지 못했다.사람이 늙는다는 게 꼭 하루하루 천천히 오는 것만은 아니었다.어느 순간, 세월이 한꺼번에 얼굴 위로 내려앉기도 했다.그나마 오늘 아침은 드물게 서 황후의 기분이 괜찮았다.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이전에게 말했다.“말해 보거라. 무슨 일이 있느냐?”그러고는 웃으며 덧붙였다.“경춘궁의 그쪽은 아직도 얌전히 있더냐?”어느덧 설이 코앞이었다.그런데 황제는 아직도 모두의 근신을 풀어 주지 않았다.서 황후야 이제 익숙해졌으니 그렇다 쳐도, 경춘궁의 그쪽까지 언제까지고 얌전히 근신하고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하지만 이전이 찾아온 것은 그 일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다른 일이 있었다.이전도 굳이 입에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나 궁에서 이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하는 몸이니 어쩔
황제는 금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얼굴은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짐이 어떻다는 것이냐?”금영은 마음을 다잡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남녀의 정이라는 게 꼭 잠자리의 즐거움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폐하께서 정…… 그 일이 어려우시다면 굳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약을 너무 많이 드시면 몸이…… 몸이 상하시옵니다.”잠자리에서의 그런 일보다 금영에게는 황제의 몸이 훨씬 중요했다.사실 황제가 예전에 정말 어디를 다친 적이 있든 없든, 가만 생각해 보면 황제도 이제 철없는 소년은 아니었다.굳이 혈기만 앞서는 젊은이처럼 그런 일에 지나치게 연연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황제가 금영을 바라보며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니까 금영아, 짐이 이 약을 먹는 게…… 그 일을 제대로 못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냐?”황제는 그제야 깨달았다.사람이 정말 기가 막힐 만큼 화가 나면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금영이 힘들까 봐 그토록 배려했건만, 정작 금영은 자신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금영은 예전에 태자와 마음이 얽힌 적은 있었지만, 당시에도 늘 분수를 지켰다.태자 역시 고귀한 태자의 체통을 세우느라 두 사람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를 입에 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러니 금영이 사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황제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전부였다.사내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말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금영이 알 리 없었다.하물며 눈앞의 사내는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였다.금영은 진심 어린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위로했다.“폐하,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옵소서. 저희에게는 이미 아이까지 있지 않사옵니까. 그런 걸 잘하고 못하고가……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옵니다.”황제는 그렇지 않아도 속에 불이 가득 차 있던 참이었다.그런데 금영의 말은 그 불길에 기름을 들이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칠흑 같은 황제의 눈동자 속에 어두운 불꽃이 일렁이는 듯했다.그는 말없이 금영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금영은 문
금영이 황제의 곁에 앉자 은은한 향기가 희미하게 황제의 주위를 맴돌았다.붉은 먹을 묻힌 붓으로 상소문을 살피던 황제의 손끝마저 조금씩 느려졌다.한참이 지나서야 황제는 말없이 슬그머니 옆으로 몸을 옮겼다.가만히 있었으면 모를까.그가 대놓고 거리를 벌리자 금영의 마음은 더욱 언짢아졌다.그렇게까지 자신을 피하고 싶은가?‘내 몸에 가시라도 돋았나? 아니면 내가 사람이라도 잡아먹나?’금영은 아예 황제의 팔을 끌어안고 나지막이 물었다.“폐하, 어찌 그러시옵니까?”황제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려는 듯, 금영은 다시 손을 들어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어디 편찮으신 것이옵니까?”그런데 막상 손을 대 보니 황제의 이마가 제법 뜨거웠다.뜨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지금뿐만이 아니었다.요 며칠 내내 황제는 까닭도 없이 가슴속에 불덩이라도 품은 듯 속이 뜨겁게 달아오르곤 했다.바로 그때였다.밖에서 위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황제는 위명의 목소리를 듣고 대답했다.“들어오너라.”위명은 탕 한 그릇을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탕을 내려놓은 뒤 금영에게 말했다.“마마, 약선탕이 조금 식거든 폐하께서 드시도록 일러 주시겠사옵니까?”말을 마친 위명이 웃으며 덧붙였다.“이 안에 귀한 약재가 꽤 많이 들어갔사옵니다!”금영 역시 황제가 어째서 날마다 약선탕을 먹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설마 정말 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금영이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그 약선탕에는 무엇이 들었나?”무엇을 치료하려고 먹는 약선인지 알면 황제가 대체 어디가 불편한지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오늘 이 자리에 손복안이 있었다면 아무리 물어도 쉽게 답을 듣지 못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하필 오늘 여기 있는 사람은 이 눈치 없는 사내였다.“구기자와 녹용, 인삼, 그리고 호랑이……”위명은 입이 너무 빨랐다.약선탕에 들어간 중요한 재료 몇 가지를 그만 줄줄이 불어 버렸다.호랑이…… 뭐?금영은 순간 자신의 귀를
대신들은 기가 죽은 얼굴로 현청전에서 줄줄이 나오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쳤다.손복안은 조심스레 전각 문을 닫았다.위명이 손복안을 힐끗 바라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복안, 요 며칠 폐하의 성정이 부쩍 사나워지신 것 같지 않습니까?”그 바람에 위명은 별일도 없이 황제 앞을 얼쩡거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지난해 작산 행궁에서부터 봉급을 몇 번이나 삭감당한 탓에, 이런저런 벌봉을 다 합치면 앞으로 받을 일 년 치 봉급까지 이미 까먹은 셈이었다.그 일 년을 이제야 겨우 버텨 냈다.조금만 더 있으면 드디어 다시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그런데 어찌 감히 황제 앞에 나가 스스로 화를 자초하겠는가?그러다 또 한두 달 치 봉급이라도 깎였다가는……올해를 대체 무슨 수로 버틴단 말인가?손복안은 위명을 힐끗 쳐다보았다.눈이 멀지 않고서야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위명이 다시 물었다.“이 간신배 같으니. 폐하의 심중을 헤아리는 데는 누구보다 능하시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일 때문에 폐하께서 그리 심기가 불편하신 겁니까?”무슨 일 때문이겠는가.손복안은 속으로 생각했다.‘보양탕까지 드셨는데도 여전히 기세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셨으니 그렇지. 원비마마 같은 고운 꽃 앞에서 사내의 체면을 구기셨는데, 기분이 좋으실 리가 있나?’비록 자신은 환관의 몸이었지만 사내들의 이런 사정에는 제법 밝았다.하지만 손복안은 그 사실을 위명에게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위명이 다시 캐묻으려던 순간이었다.손복안이 돌연 몸을 돌려 예를 올렸다.“원비마마를 뵙습니다.”어느새 금영이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금영이 안으로 향하자 손복안은 막기는커녕 따로 기별을 올리지도 않았다.그저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말했다.“마마, 폐하께서 오늘 심기가 썩 좋지 않으시옵니다. 부디 잘 달래 드리시옵소서. 옥체를 상하시면 아니 되옵니다.”금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문가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황제가 싸늘하게 말했다.“다 나가라 하지 않았나? 복안은 대체 일을 어찌하는 것인가
황제는 그날 금영과 합방했을 때,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오늘 현청전에서도 일을 치른 뒤 금영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이지 않았던가.황제는 이런 일로 금영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그는 밤새 속으로 끙끙 앓으며 견뎠고, 정신없이 하룻밤이 지나갔다.손복안은 황제가 보양탕까지 들었으니 밤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싶어, 일찌감치 사람을 시켜 뜨거운 물을 준비해 두게 했다.그런데 웬걸.손복안이 근무를 마치고 쉬러 갈 때까지도 황제는 끝내 물을 들이라 하지 않았다.이튿날 새벽.손복안은 소녕전 앞에서 위명과 마주쳤다.손복안은 자신의 뒤를 이어 밤새 당직을 선 소동자에게 물었다.“후반야에 폐하께서 물을 들이라 하셨느냐?”소동자는 고개를 저었다.그 모습을 본 손복안의 눈빛에 생각이 깊어졌다.아무래도 보양이라는 게 한 번으로 끝날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몇 번은 더 제대로 챙겨 드려야 할 듯했다.손복안이 황제를 걱정하느라 속을 태우고 있는 줄도 모르고, 위명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복안, 소동자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소곤소곤 나누셨습니까?”손복안이 소동자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그러자 소동자는 기다렸다는 듯 쏜살같이 사라졌다.손복안은 위명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제 이 사내가 현청전 문을 걷어차고 들어가려 했던 일이 떠올랐다.그는 말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위명이 미간을 찌푸렸다.“복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손복안이 싱긋 웃었다.“저희 어머니께서 제가 어릴 적부터 바보와는 멀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위명은 할 말을 잃었다.‘두고 보십시오. 언젠가는 반드시 폐하께 이 간신배의 진면목을 알려 드리고 말 테니!’그 뒤 며칠 동안에도 보양탕은 날마다 재료와 조리법을 달리해 황제의 탁자 위에 올랐다.그러나 정작 물을 들이라 한 일은 두 번도 되지 않았다.이유는 별것 없었다.막상 불이 붙은 뒤 억지로 참아야 하는 그 괴로움이 황제로서는 도무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애초에는 그저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송정희가 직접 나서서 이 후환을 없애 주기만을 바랐다.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송정희는 정말이지 쓸모없는 인간이었다.배금영을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배금영이 황제의 여인이 되도록 길까지 터 주었으니!하지만 이제 와 서 황후가 아무리 후회한들 이미 늦은 일이었다.예전 금영이 궁 밖에 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영안후부에서 버림받은 여인에 불과했다.그때의 서 황후라면 개미 한 마리를 짓이기듯 손쉽게 금영을 죽일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이제 금영을 죽이는 일은 예전처럼 쉽지 않았다.아무래도 좀 더 머리를 써야 할 듯했다……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때였다.밖에서 이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마마, 소인에게 긴히 아뢸 일이 있사옵니다.”서 황후가 말했다.“들어오너라.”이전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아뢰었다.“마마, 내정사 쪽에서 소식이 왔사옵니다.”조씨가 다급히 물었다.“어찌 되었사옵니까? 안 첩여가 마마께 불리한 말이라도 했사옵니까?”서 황후가 낮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본궁이 사람을 해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그 계집이 무슨 수로 본궁을 물고 늘어지겠느냐?”틀린 말은 아니었다.서 황후는 늘 다른 사람에게 넌지시 뜻만 내비칠 뿐, 직접 분부를 내려 꼬투리를 잡히는 법이 없었다.무엇보다 이번 일만큼은 정말 서 황후가 손을 댄 일이 아니었다.“안 첩여의 오라버니가 지금도 국구 대감 밑에서 일하고 있사오니, 함부로 입을 놀릴 리는 없사옵니다. 다만 소인이 식사를 들여보낼 때 사람을 시켜 몰래 안 첩여에게 물어보게 했사옵니다.”이전이 말을 이었다.“안 첩여의 말로는, 본래 두창 딱지(天花痘痂: 두창 환자의 피부 발진이 마르면서 생기는 딱지)를 곱게 갈아 만든 가루를 아기 황자의 몸에 뿌리려 했다고 하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손에 생칠이 묻었다고 하옵니다.”그 말을 들은 서 황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차갑게 코웃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