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게다가 저 망할 태자는 아까 어째서 그 뜰에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하필 그때 태자도 황제의 시선을 알아챈 듯했다.태자가 입을 열었다.“소자는 방금 뜰의 서문으로 들어와 가로질러 왔사옵니다. 이곳에서 아바마마를 뵙게 될 줄은 몰랐사옵니다.”금영은 태자가 차라리 해명하지 않았으면 나았겠다고 생각했다.괜히 입을 열어 도둑이 제 발 저린 듯한 꼴이 되어 버렸다.그러나 황제의 표정은 뜻밖에도 지극히 평온했다. 태자의 말을 믿은 듯했다.황제는 태자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담담히 말했다.“원비마마께 문안드리지 않고 무엇 하느냐.”금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 부자가 갑자기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인가?금영은 슬며시 황제를 바라보았다.이황자는 번번이 원비마마라는 호칭을 입에 올려 태자의 속을 뒤집어 놓았지만, 황제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늘 태자의 체면을 조금은 세워 주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황제가 무언가에 자극을 받아 이런 방식으로 태자에게 경고하는 것이리라.태자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원비마마.”황제가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금영도 얼른 얌전히 그 뒤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황제는 줄곧 금영만 바라보았다.금영은 그 시선이 영 불편해져 먼저 입을 열었다.“폐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그대로 말씀해 주시옵소서. 그런 눈으로 계속 신첩을 바라보지 마시옵소서.”황제는 금영을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너는 아직도 태자를 마음에 두고 있느냐?”금영은 황제가 이런 말을 물을 줄은 전혀 몰랐다.그녀는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폐하께서는 대체 어디를 보시고 제가 아직 태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셨사옵니까?”황제는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너는 본디 그에게 시집갈 몸이었다. 너는 목숨을 걸고 그를 구했고, 그 또한 목숨을 걸고 너를 구했다. 그 사이에 어찌 조금의 정마저 없겠느냐?”금영은 난감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황제의 질투가 또 발동한 모양이었다.예전에 자신을 가르치던 상
태자는 겉으로는 흥겹게 술을 마시는 듯했으나, 그 속이 어떠한지는 오직 자신만이 알았다.술잔을 거듭 비우다 보니, 태자 자신도 대체 얼마나 마셨는지 알 수 없었다.금영은 저도 모르게 태자를 몇 번 더 살폈다.다른 까닭은 없었다.지금 태자의 상태가 몹시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의 고요함 같았다.조금 더 경계해 둘 필요가 있었다.태자가 서 황후처럼 음험하고 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한번 눈이 돌아가면 그 또한 성한 인간은 아니었다.그러나 금영은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황제가 버티고 있는 이상, 태자가 큰 풍랑을 일으키기는 어려울 터였다.연회가 절반쯤 지났을 무렵, 황제는 진국공을 따로 만나러 갔다.금영도 그 틈을 타 심연희를 만났다.“마마, 전에 사람을 보내 전하신 일은 모두 처리해 두었사옵니다.”심연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일 처리만큼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수고가 많으셨습니다.”“제 지아비도 저희는 한 식구이니, 마마께서 이리 예를 차리실 필요가 없다고 하였사옵니다.”심연희가 말을 이었다.금영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요즘 영안후부에는 별다른 일이 없습니까?”“태자비마마께서 또 몇 차례 부로 돌아오시어 물건을 적잖이 보내셨사옵니다. 제 지아비는 물론 모두 물리쳤사오나, 태자비마마께서는 무슨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자꾸만 두 분의 우애가 각별한 듯 보이게 하려 하시옵니다.”심연희는 금영이 배경원과 배명월 사이를 오해하는 일만은 원치 않았다.“그분의 성정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사옵니까? 예전에는 둘째 오라버니와 그리도 살갑게 지내더니, 이제 둘째 오라버니가 쓸모없어지자 찾아보지도 않으시고, 우연히 마주쳐도 둘째 오라버니라 부르지조차 않으시옵니다.”“이제 누가 그 진심을 믿겠사옵니까? 모두 제 이익을 꾀하는 것뿐이옵니다.”심연희가 말을 이었다.금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배명월이 어떤 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오늘까지도 포기하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금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황급히 말했다.“그게, 폐하. 진국공부의 후원이 경치가 제법 좋사온데, 신첩과 함께 한 바퀴 둘러보시겠사옵니까?”황제는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답했다.“그러지.”금영이 황제를 모시고 자리를 뜨자, 진국공부 사람들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서 노부인을 황급히 방 안으로 모셔 갔다.“어머님, 어찌 그런 말씀까지 거리낌 없이 하십니까?”하온숙은 오늘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했다.그러나 서 노부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못 할 말이 뭐가 있느냐? 영안후 그 못난 것은 망할 영감탱이의 기개를 반도 못 닮아서는, 금영이를 냉큼 궁에 들여 비로 삼게 하지 않았느냐!”“태자비가 되지 못했으면 또래의 괜찮은 사내를 찾아 좋은 혼처를 마련해 줬어야지. 궁에 들이다니. 흥, 서가의 그 심보 고약한 계집이 그 아이를 얼마나 들볶을지 누가 아느냐.”서 노부인은 말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어머님, 아무리 말씀하셔도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이제 와 무슨 말을 한들 달라지겠습니까?”하온숙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그래도 소혁 그 녀석에게 금영이가 자신을 따른 것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알려 줘야지! 그래야 더 조심하고 살뜰히 지켜 줄 것 아니냐!”서 노부인이 목소리를 높였다.“게다가 망할 영감탱이가 이 일을 알면 분명 속이 뒤집힐 텐데……”그 말을 하던 서 노부인의 눈빛이 다시 흐릿해졌다.그녀의 머릿속에는 문득 세상 근심 하나 없이 웃던 젊은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하온숙은 서 노부인이 연로한 데다 요즘 들어 정신이 흐려지는 일이 더욱 잦아졌음을 알고 있었다.그저 힘없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과거 변방을 지키던 시절, 서 노부인이 황제를 친아들처럼 보살폈던 정을 생각하여 황제가 진국공부를 벌하지 않기만을 바랐다.한편 금영은 황제의 손을 잡고 진국공부의 후원을 거닐고 있었다.황제가 노여워할까 걱정된 금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폐하, 혹시 언짢으신 것이옵니까?”황제는 금영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볍게
금영과 황제가 진국공부에 도착했을 때는 신랑과 신부가 이미 혼례의 큰 절까지 모두 마친 뒤였다.연회가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황제가 금영을 데리고 나타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몸을 숙여 예를 올렸다.황제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다들 일어나라.”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금영은 몇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알아차렸다.굳이 생각할 것도 없이 태자와 배명월일 것이다.태자의 눈에는 여전히 깊은 정과 억눌린 마음이 가득했고, 배명월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그런데 진국공부의 진여란이 금영을 바라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금영이 아니냐?”서 노부인의 며느리인 하온숙이 황급히 곁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 이분은 원비마마이십니다.”“무슨 원비마마냐. 그 망할 영감탱이가 금이야 옥이야 아끼던 손녀 아니냐? 그런데 요즘 어찌 이리 살이 올랐느냐?”서 노부인이 금영을 바라보며 물었다.금영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배가 하루가 다르게 불러 오고 있었으니, 정신이 흐릿한 서 노부인이 자신이 살쪘다고 여긴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금영은 서 노부인이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정신이 흐려진 듯하다고 생각했다.그럼에도 금영은 서 노부인에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자신이 영안후부의 친손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 진국공부의 연회에 왔을 때도, 서 노부인은 사람을 가려 대하거나 제 신분에 따라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오히려 조부가 예전에 서 노부인에게 주었던 물건을 하나도 남김없이 금영에게 돌려주었다.훗날 금영이 태자와의 혼약을 파기했을 때에도, 서 노부인은 몰래 사람을 보내 진국공부로 시집올 마음이 있는지 물었다.세상에는 남이 쓰러졌을 때 돌을 던지는 사람이 많았으나, 어려울 때 손을 내미는 사람은 드물었다.서 노부인은 이토록 나이가 들고도 여전히 그런 사람이었다.젊은 시절에도 정이 깊고 거침없는 성정이었을 테니, 조부가 마음에 두었던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진국공부 사람들이 당황
서 황후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조씨가 황급히 다가와 서 황후를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서 황후는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그러고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차갑게 웃었다.“천한 것! 무는 개는 짖지 않는다더니, 제법 감쪽같이 발톱을 숨기고 있었구나!”독벌 사건에 이어 이번 사향 사건까지, 서 황후는 연달아 두 번이나 금영에게 크게 당했다.그러니 금영을 향한 증오로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다만 태후의 경고가 효과를 본 것인지, 아니면 방금 일을 저지른 터라 확실한 방도가 없이는 금영을 건드리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어찌 되었든 그 뒤로 오랫동안 서 황후는 서봉전 안에만 머물렀고, 더는 밖으로 나와 금영을 괴롭히지 않았다.현비 역시 성실하게 중궁의 권한을 맡아 처리하며 별다른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금영이 이번 일로 얻은 것은 서 황후를 다시 서봉전에 가두어 둔 것만이 아니었다.우심이라는 또 다른 수확도 있었다.독벌 사건이 지나간 뒤, 금영은 우심을 믿고 자신의 사람으로 거두었다.우심 역시 독을 써서 서 황후를 해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런 상황에서 금영에게 의탁할 기회가 생겼으니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서봉전에서 발견된 사향은 바로 우심이 충성을 증명하고자 바친 물건이었다.지난번 일이 벌어진 뒤, 서 황후는 크게 노하여 서봉전 안에 사향을 숨긴 자를 찾아내려 했다.다행히 서 황후가 한바탕 뒤집어 놓는 과정에서 현비가 서봉전에 심어 둔 사람 하나만 찾아냈을 뿐, 우심에게서는 아무런 수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우심은 본래 춘산 사냥터에서 온 사람이라 신분도 깨끗했다.겉으로 보나 속으로 보나 금영이나 현비와는 조금도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다.과거에는 서 황후가 온갖 수단을 써서 금영의 곁에 자신의 사람을 심으려 했다.이제 금영도 서 황후의 서봉전 안에 비밀스러운 첩자 하나를 심어 둔 셈이었다.추석이 지나자 가을비가 한 차례 내릴 때마다 날씨가 한층 서늘해졌다.금영은 소녕전 뜰에 서 있었다.
황제는 눈앞의 금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금영은 얼굴이 창백한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선마저 불안하게 흔들렸다.황제는 금영이 조금 전의 일로 아직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줄로만 여겼다.그리하여 마음속의 미안함과 애틋함은 더욱 깊어졌다.*그 시각, 태후와 서 황후는 함께 서봉전에 도착해 있었다.주변에 외인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태후가 팔을 들어 올렸다.서 황후는 태후를 부축하고 있던 터라 손안이 순간 허전해졌다.태후는 곧장 자리에 앉았다.그 얼굴에는 평소의 자애로움이 사라지고, 차가운 위엄만이 감돌았다.“황후! 정녕 나를 크게 실망시키는구나!”“내가 진작 경고하지 않았느냐. 후궁의 총애 다툼에 온 정신을 쏟지 말라고 하였다!”“폐하께서 누구를 총애하시든 그대로 두면 될 일이다! 너는 네가 황후이고 네 아들이 태자라는 사실만 명심하면 충분하다!”“그런데 지금 네 꼴을 보아라.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계집애 하나조차 용납하지 못하다니,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것이냐?”태후가 차갑게 물었다.서 황후는 억울함이 가득한 눈으로 태후를 바라보았다.“어마마마, 정말 신첩이 아니옵니다. 신첩이 원비를 해친 것이 아니옵니다.”“이번에 내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수상한 구석이 남아 있다 해도 황제는 네게 죄를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감히 내 앞에서까지 발뺌하려 드느냐?”태후는 실망스러운 눈으로 서 황후를 바라보았다.서 황후는 여전히 해명했다.“어마마마, 부디 신첩을 믿어 주시옵소서.”“믿으라고? 내가 무엇을 보고 너를 믿어야 하느냐?”태후의 눈빛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마치 서 황후의 속내를 모조리 꿰뚫어 보는 듯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황후, 네가 지금껏 무슨 일을 벌여 왔는지 정말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느냐?”그동안 태후는 매사에 자비로운 모습을 보였고, 불심 또한 깊어 보였다.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었다.태후 역시 한낱 후궁에서 시작하여 끝내 황후의 자리에 올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