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현과 나태범은 싸우다가 언성이 높아진 끝에 또 그렇게 등을 돌렸다.한편, 요즘 안지영과 고은영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다녔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게다가 고은영은 한 번 출산을 경험한 적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는 늘 육아에 관한 것이었다.그날도 안지영은 뜨개질을 하는 고은영을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쳤다.“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걸 직접 만든다고?”고은영은 실을 손가락에 감아올리며 조용히 웃었다.“직접 만든 게 아무래도 의미가 더 있으니까. 너도 해볼래?”안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못 해. 진짜 이런 건 영 소질 없어.”그녀의 말은 단호했다. 조곤조곤 실을 엮는 고은영의 모습이 보기에는 그럴듯했지만 솔직히 결과물은 꽤나 난해했기 때문이었다.전에 장선명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배준우를 만났을 때, 그가 어처구니없는 컬러와 디자인을 한 목도리를 하고 나온 적이 있었다고 말이다.‘대체 어느 브랜드에서 만든 거지?’그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야 알고보니 그것도 브랜드 제품이 아닌 고은영의 작품이었다는 것이다.그걸 알고 나니 안지영은 이 정도면 오히려 배준우가 참 많이 참았구나 싶었다.고은영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안 할 거면 말지. 뭐 그렇게까지 싫어해.”안지영은 어깨를 으쓱였다.“혹시나 억지로 시킬까 봐.”“내가 그랬다고?”고은영은 장난스레 콧소리를 냈다.“응.”안지영은 짧게 웃었다.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잠시 후, 고은영이 문득 조심스럽게 물었다.“요즘 나씨 가문 상황이 어떤지 알아?”“응?”안지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나씨 가문은 그녀에게 있어 좋은 기억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연루된 사람들도, 관계들도 하나같이 복잡하고 불편했기 때문이었다.“한 달 전쯤에 터졌던 그 일 이후로 나태현이랑 나씨 가문 쪽은 사실상 연을 끊은 것 같더라고...”“진짜? 그 정도야?”안지영은 눈이 커졌다.“그럼 나태현은 한 달 내
진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태현의 눈앞이 순간 하얘졌다.‘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녀가 죽었을 때, 내 곁엔 분명 내 편인 사람들만 있었는데...’“직접 본 게 아니라면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도 있는 거야. 아직 살아있다고 믿어보는 건 어때?”진윤의 말은 따뜻함보다는 절박함에 가까웠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나태현이 그렇게 무너지는 걸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천락 그룹이 무너지는 건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태현이라는 사람까지 함께 무너진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테니까 진윤은 그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한편, 강성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인 천락 그룹이 순식간에 흔들리기 시작했으니 이 소식은 곧장 나태범의 귀에까지 들어갔다.지병으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그는 지팡이를 짚고 천락 그룹 본사로 달려왔다.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그는 깊은 분노를 담아 나태현을 노려봤다.“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나태현은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대답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나태범이 지팡이로 바닥을 세차게 내리쳤다.“겨우 여자 하나 때문에 나씨 가문을 통째로 무너뜨려야 속이 후련하겠어?”나태범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했다. 그가 이미 최근 천락 그룹 내부에서 벌어진 문제들을 어느 정도 수습했기에 나태현이 돌아오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가 도장 찍은 계약서들로 인해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정신 나간 거니? 진짜 미친 거냐고!”나태범은 이성을 잃디 직전이었지만 나태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사람처럼 깊고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너 지금 일부러 나를 화병으로 죽이려는 거냐? 그럼 그냥 죽여, 이 망할 놈아!”나태범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그 속에 담긴 분노는 절망에 가까웠다.량천옥과 고은지, 이 두 여자가 나씨 가문을 무너뜨리고 있
수년간, 나태현은 확신해 왔다.어머니의 죽음은 모두 량천옥이라는 여자가 부모님의 결혼을 망가뜨린 결과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 여자를 증오했다. 따라서 고은지가 량천옥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를 향한 모든 감정이 눈 깜짝할 새에 바로 가라앉았던 것이다.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나태현은 한동안 량천옥을 무너뜨리겠다는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그렇게 그와 량천옥 사이에 얽히고설킨 오래된 악연은 다시 수면 위로 터져 나왔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고은지가 함께 휘말려 들어갔던 것이다.“이제 나씨 가문은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어.”나태현은 또렷하고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진윤은 말문이 막혔다.‘상관없다고?’숨이 막히는 듯한 정적 속에서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지만,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그 순간의 나태현은, 과거의 진윤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충격 앞에서 가문이든, 유산이든, 명예든 모두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요즘 천락 그룹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거야?”진윤이 조심스레 물었다.나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진윤은 입을 열까 망설이다 결국 말을 삼켰다.천락 그룹이 현재 어떤 위기를 겪고 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그동안 크고 작은 사건으로 휘청거렸으니 말이다. 그건 량천옥이 남기고 간 것들, 그리고 고은지가 뒤흔들고 간 것들 때문이었다.나태현이라면 이 모든 문제들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걸 진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로 돌아온 그는 아무것도 수습하지 않은 채 자리만 지켰다. 오히려 회사가 더 무너지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그는 다시 술병을 들었다.“은지가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난 기꺼이 들어줄 거야.”술기운에 약간 잠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깊은 고통은 결코 감춰지지 않았다.고은지는 그를 미워했다. 특히 고희주의 일과 관련해서는 더욱 심했다. 그래서 그녀는 천락 그룹으로 돌아온 후로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행동했
장례식이 끝난 지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일주일 내내, 나태현은 매일 천락 그룹에 출근하며 숨 막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회사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고 심지어 평소 대범한 양지호조차도 신경을 곤두세운 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고은지 사건 이후로 나태현의 안색은 단 한 번도 나아진 적이 없었다. 몸은 돌아왔지만 사람 자체는 여전히 냉철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며 타인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날, 진윤이 나태현의 사무실을 찾았다.“뭐 마실래?”나태현은 묻는 동시에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책상 위의 재떨이는 이미 꽉 찬 담배꽁초로 넘쳐나고 있었다. 요즘 따라 담배를 피우는 양은 눈에 띄게 늘어난 상태였다.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담배 좀 줄여. 몸 망가져.”나태현은 담뱃재를 툭툭 털며 고개를 숙였다. 눈빛 속 깊은 감정은 감춰졌다.“오늘 병원에 갔다가 단집사님 만났어.”진윤이 조용히 말했다.“단집사?”“너희 집에 다른 집사도 있어?”“...”그날 이후로 단집사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없었다. 일주일 전에 걸려 왔던 전화 한 통뿐이었다.“너희 아버지 상태가 별로 안 좋더라.”“그래?”마치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인 듯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그런 그의 반응에 진윤은 가슴이 답답했지만 그도 이해했다. 진윤도 진성택이 죽었을 때, 장례식조차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은지 씨 쪽은?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어?”진윤이 화제를 돌렸다. 어차피 그도 처음부터 나태범에 대한 옹호 따위 할 생각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단지 병원에서 들은 상황을 전한 것뿐이다.고은지 이야기가 나오자 나태현은 또다시 슬픔에 잠겼다.“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렸는데 넌 기어코 듣질 않더라.”주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은지를 향한 그의 감정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그는 그저 부정으로 일관했고 결국 이렇게 된 것이었다.나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 캐비닛에서 술병 두 개를 꺼냈다.진윤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장례식 현장은 언제나 슬픔이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하늘마저 이를 아는 듯 이내 비를 흩뿌리기 시작했다.고은영은 사실 이 자리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태현에게 의심을 살까 우려되어 어쩔 수 없이 배준우와 함께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그러나 장례식장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태현이 고희주의 장례식을 이렇게까지 성대하게 치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량천옥 씨는 왜 안 왔어요?”고은영은 목소리를 낮춰 배준우에게 물었다.“정확한 상황은 나도 몰라.”배준우는 담담히 대답했지만 그 역시 마음속으로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고은영은 곧장 나태현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이런 자리에 량천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의심을 사기 쉬운 상황이었다.‘량천옥이라면 분명 이 정도는 예상해서 알아서 잘할 사람인데...’하지만 오지 않았으니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고은영도 개의치 않기로 했다.고은영은 영정사진 앞에 꽃을 올리고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배준우에게 조용히 말했다.“이젠 그만 돌아가요.”배준우는 알겠다며 나태현에게 다가가 짧게 인사했다.“은영이가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어해서 이만 가볼게요.”나태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도 깊고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이런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견딜 수 없었다. 아니,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한편, 차 안에서.창밖의 비가 차창을 조용히 적시는 가운데, 고은영은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장례식 말이에요. 생각보다 더 크게 치렀던데요. 꽤 많은 가문 사람들도 와 있었고...”“나 대표님이 치른 장례식인 만큼 다른 사람들도 함부로 빠질 수 없었겠지. 네 오빠들도 올 거야.”배준우는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전 더 이상 그 사람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고은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방금 장례식장
그날 오후, 낡은 단칸방 안에서.량천옥은 무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맞은편에는 딸 량의가 앉아 있었다.고은지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한 달, 량의는 도저히 이 허름한 셋방에서 홀로 지내는 딸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다시 찾아온 것이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데려가려고 말이다.“그만 돌아가세요. 전 당신 보고 싶지도 않아요.”량천옥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량의는 그녀를 바라보며 가슴이 조여왔다. 시간이 그렇게 오래 흐른 것도 아닌데 그녀는 어느새 몰라보게 늙어 있었다.“그 아이는 이미 떠났어. 그것 때문에 더 이상 너를 갉아먹지 마. 너에겐 아직 윤이가 있잖아.”배윤이라는 이름에, 량천옥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잠시 시선을 떨어뜨린 그녀는 이내 다시 말없이 입꼬리를 내렸다.“그 애는 배항준의 아들이에요.”“천옥아, 너...”량의가 입을 열자 량천옥은 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됐어요. 나가세요. 나가라고요!”그녀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지 그 누구도 몰랐다.‘돌아가라니? 어디로?’여기는 고은지가 집이라 불렀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희주를 기다릴 수 있다면서 말이다.‘그렇다면 나도 이 자리에서 희주를 기다릴 수 있는 건 아닐까?’희주라는 이름이 머릿속을 맴돌자 량천옥의 혼란스러운 의식 속에서 뭔가가 번뜩였다.그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 기억이 어지럽게 뒤엉켰고 감정도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희주가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량천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래, 희주가 아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몰라. 왜 지금까지 그걸 잊고 있었던 걸까? 희주가 은지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데...’“천옥아, 지금 어디 가는 거야?”갑작스레 밖으로 나서는 그녀를 본 량의는 당황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하지만 량천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다급히 골목을 빠져나갔다.량의는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량천옥이 그녀의 전화번호를 차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