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유건이 첸잉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스름한 새벽빛이 번지고 있었다. 언덕 너머로 붉게 물든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을 보며, 유건은 문득 속초에서 서하와 함께 보았던 일몰을 떠올렸다. 그때도 하늘은 붉었다. 다만 그날의 붉음은 밤으로 향했고, 지금은 아침으로 향하고 있었다. 함께 살던 언니가 졸업한 뒤로는 혼자 지낸다는 첸잉의 아파트는 두 사람이 살기에도 넉넉해 보였다. 거실에는 서로 다른 취향의 쿠션과 머그잔, 다른 계열의 전공책들이 여전히 널부러져 있었다. 이미 술기운은 말끔히 가셨다. 문이 닫히자 첸잉이 먼저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이 그녀를 끌어안자, 말캉하고 부드러운 살결의 냄새가 아랫배 안쪽 깊숙이까지 밀려 들었다. 첸잉의 온몸이 성감대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유건의 손길 하나에도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유건은 그 작은 반응들을 하나씩 기억해냈다. 유건과 첸잉은 서로의 몸을 입술로, 손으로 훑어내렸다. 마음 안쪽까지 충분히 젖어서 흘러넘칠 정도가 되자, 첸잉이 간절하게 유건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았다. 한동안은 가만히 있었다. 곧 움직임이 시작되고, 전희가 너무 길었기 때문일까 금방 첸잉의 안이 차올랐다. “뭐야.” 첸잉이 웃으면서도 유건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 때였다. 유건의 마음에서도 무언가가 왈칵하고 쏟아지기 시작했다. 왜 채원이 단단히 결합되었을 때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는지, 유건은 비로소 알 거 같았다. 아마 몸의 문이 열린 것처럼 꼭꼭 닫아두었던 문이 열려버려, 오래 혼자 짊어졌던 기억을 잠시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괜찮을 것 같은 순간이 왔었을 거다. 지금 유건이 왈칵 쏟은 정액처럼 비밀 얘기를 쏟아도 괜찮을 거 같은 느낌을 받은 것처럼. 평생 비밀처럼 품고 갈거라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을 했고,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질문을 던졌고, 유건이 말을 멈추면 가만히 등을 쓸어주었다. “그랬구나.” 그녀는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다. 첸잉이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건.
“…그래서 말이야, 내 친구랑 하고 있었다니까.”“와, 그건 좀 너무 많이 넘었네. 너네 집에서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첸잉의 전전남친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건은 첸잉과의 그날밤을 떠올렸다. 첸잉도 같은 기억에 닿았는지 잠시 유건을 바라봤다. 물담배 호스를 옆으로 밀어놓고는 느닷없이 물었다.“제임스 작년에 결혼한 거 알아?”“뭐?”“애도 있어.”첸잉이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찾았다.“봐. 애기 완전 귀여워.”화면 속 제임스는 아기를 품에 안고 웃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의 얼굴이 조금 남아 있기는 했지만, 어딘가 낯설었다.한동안 인스타를 지우고 보지 않았었다. 누군가의 근황을 보는 일이 견디기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 별것 아닌 사진들. 여행지에서 찍은 풍경이나 생일 케이크, 친구들과 나란히 웃고 있는 얼굴들.자신이 멈춰 있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들의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서러웠다.“걔가 우리 중에 제일 먼저 애 아빠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그러게.”하지만 안 어울리는 건 아니었다. 제임스는 사귈 때마다 진심이었으니까. 물론 자의 타의적으로 그 기간이 짧았을 뿐. “나 결혼식도 갔잖아.”“어디서 했는데?”“샌디에이고. 완전 예뻤어. 바다가 보이는 데서 했거든.”“너는 남자친구 없어?”“지금?”“응.”“없어.”첸잉이 술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헤어졌어. 넉 달 전에.”“오래 만났어?”“삼 년.”“꽤 오래 만났네.”“그러게. 내 인생에서 제일 긴 연애였어.”“왜 헤어졌는데?”“걔가 다른 여자 좋아했거든.”유건이 첸잉을 바라봤다.“바람피웠어?”“아니. 그랬으면 차라리 쉬웠을 텐데.”“그건 또 무슨 소리야.”“그냥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됐대. 자기도 어쩔 수 없었다고.”첸잉이 웃었다.“웃기지 않아?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으면서 헤어지는 건 그렇게 쉽게 결정하더라.”“그래서?”“그래서 뭐. 헤어졌지.”“안 붙잡았어?”“붙잡았어.”유건이 조금 놀란 얼굴을 하자 첸잉의
펍 바로 맞은편 호텔이었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향의 친구들이라 방은 하나씩 따로 잡았다고 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이언이 서하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서하의 입술을 연신 머금었다. 조금 전까지 잔잔히 식어가던 모닥불에 마른 장작을 던져 넣은 것 같았다.재혁과의 마지막 밤 이후 처음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한 적도 없었다. 다만 은근슬쩍 다가오는 남자들을 하나둘 밀어내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었다.유건에게 보내지 않을 문자들을 쓰다 지우는 일마저 그만둔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닿는 체온은 생각보다 빠르게 서하를 달아오르게 했다.서핑이 취미라던 이언에게서는 정말 바다 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한참을 서하는 이언의 어깨, 가슴, 팔뚝의 냄새를 코로, 입으로 들이켰다. 햇볕에 오래 마른 피부와 낯선 향이 뒤섞여 있었다.이언도 그런 서하의 리듬에 맞춰줬다. 당장이라도 안으로 밀고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견디고 있다는 걸 서하도 알았다. 이미 서하의 허벅지에는 그의 쿠퍼액으로 번들거렸으니까. 더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까지 힘줄이 도드라진 그의 성기를 보고 서하가 숨을 가다듬고 손으로 훑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언의 호흡이 크게 흐트러졌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울대 아래에서 가까스로 억눌리는 것을 보자, 서하가 피식 웃으면서 안으로 잡아 끌었다. “…아….하…”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근육이 찢어질 듯 경련했다. 아무리 윤활이 충분해도 소용없는 것 같았다. 갯벌처럼 질척해진 안을 이언이 거듭 파고들었다 빠져나올 때마다, 겨우 메워진 자리에 다시 흔적이 깊게 패었다.이언의 손과 입술이 오래 머문 젖꼭지는 조금만 누르면 터질 듯하다.서하는 그의 등에 솟은 근육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더듬었다.자신이 의사였다면 이것들이 무슨 근육인지 하나하나 구별할 수 있었을까.생각하다가 웃음이 났다. 아니, 의사라도 지금은 머릿속이 새까매졌을 것이다.눈을 감았다. 별이 가
골이 들어가자 펍 안이 들썩였다.사방에서 함성이 터지고 누군가는 테이블을 두드렸다. 서하의 옆에 앉아 있던 동료가 두 팔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딱히 응원하는 팀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서하는 이렇게 한마음으로 떠들썩해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가만히 있어도 주변의 열기가 알아서 마음을 밀어 올렸다. 제 감정을 애써 소모하지 않아도 덩달아 바닥까지 일렁이고 나면, 묵은 것들이 한 번씩 솎여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맥주 거품이 잦아든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려던 때였다. 대형 스크린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서양인 남자 둘과 맥주를 마시고 있는 동양인 남자였다. 골보다는 친구의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한 모양이었다. 모두가 스크린을 향해 환호하는 와중에도 남자는 옆에 앉은 사람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서하가 시선을 거두지 못한 건 유난히 눈이 반짝여서였다. 조명 때문인가, 아니면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빛 때문인가. 문득 펍 안의 모든 불이 꺼져도 저 눈만은 반짝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바라봤을까.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고, 정면에서 보니 더했다.검은 눈동자 안쪽에 작은 불빛이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런데도 차갑거나 날카롭지 않았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온기까지 느껴질 것 같은 광원이었다.남자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친구에게 향해 있던 웃음기가 그대로 눈가에 남아 있었다. 서하가 맥주잔을 입술에 가져가며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진 팀장님.”옆자리에서 동료가 불렀다.“네?”“경기는 저쪽인데 뭘 그렇게 봐요?”서하는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잘생긴 사람.”동료가 곧장 몸을 돌리려 하자 서하가 웃으며 팔을 잡았다.“보지 마.”“어디요?”“됐어.”“어디냐니까.”아직도 저 눈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다시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서하는 맥주만 들이켰다. 이미 미지근해진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한 잔 더 시킬 사람?”바 앞은 사람들로 붐
“건??”첸잉이었다. 유건의 눈이 커짐과 동시에 신호가 바뀌었다. 첸잉은 얼른 인도쪽으로 스쿠터를 붙이고는 헬멧을 벗었다. 검은 머리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고등학교 때보다 훨씬 길어진 머리, 조금 짙어진 화장. 얼굴에는 그때의 앳된 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웬일이래.”첸잉이 웃음을 떠트렸다. 한쪽 볼에만 보조개가 패이는 건 그대로다.“너 여기 학교 다녀??”“응, 넌?? 졸업하지 않았어??”가끔 제임스 인스타를 통해 건너건너 대학 졸업 사진을 본 거 같았다. “했지, 대학원 다녀.”첸잉도 5년만에 보는 게 너무 신기한지 유건의 이곳저곳을 자세히 보는 거 같았다. “너, 이따 저녁에 시간돼??“”왜?“”친구 생일 파티 있는데, 너도 와.“”내가 거길 왜가.“”심심하잖아.“첸잉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는 여전하다. 유건은 피식 웃으며 번호를 입력했다.“저녁에 봐, 건.”스쿠터는 다시 매끈하게 도로로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옛날 기억들이 몰려왔다. 유건은 괜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거 같았다. -------그날 저녁, 유건은 첸잉이 보내준 주소 앞에서 한동안 집을 올려다봤다.생각했던 것보다 더 사람이 많았다. 낮은 담장 너머로 음악이 흘러나왔고, 열어둔 유리문 사이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작게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음악 소리를 따라 집 안을 가로질러 뒤뜰로 나가자 작은 수영장이 나타났다. 수영장 가장자리에는 맨발로 앉아 두 다리를 물에 담그면서 담배를 피우는 무리들이 있었다. 방금 물에서 나온 듯 머리칼과 어깨가 흠뻑 젖은 남자는 수건을 허리에 걸친 채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비키니 차림의 여자가 선베드에 비스듬히 누워 친구와 깔깔거렸다.희뿌연 연기가 웃음소리 사이로 느릿하게 흩어졌다. 영어와 중국어가 뒤섞여 쉴 새 없이 오갔다. 누군가 큰 소리로 웃을 때마다 그보다 더 큰 목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 중간중간 아는 얼굴들이 있어 몇 마디
“신세 크게 졌네요.”재혁이 재킷을 벗어 직원에게 건네고 있는 본일에게 말했다.“응당 해야할 일이었는데요.”본일은 무심하게 대꾸하고 자리에 앉아 재혁을 응시했다. 자신도 깔끔하고 단정한 축에 속했지만 재혁의 단정함은 결이 달랐다.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몸에 밴 사람 같았다.—알았을까?자신의 아들이 아니란 걸 알고도 충분히 키울 사람이었다. 그래서 혜원이 그렇게 하염없이 빠진 걸 수도. “병명은 혜원이한테 들었죠?””네, 대략.“재혁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본일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저도, 저희 모친께서도 가진 병이죠.”바로 스트레이트로 꽂아버린다. 재혁의 기분따위, 별로 고려하고 싶지 않다. 저 태연한 얼굴이 한 번쯤 구겨지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다. 자신은 이십 년이 넘도록 마음 한구석이 그렇게 구겨진 채 살아왔으니까. 그러나 회심의 일격은 보기 좋게 빛나갔다. “그렇군요.”재혁은 살짝 입술을 비틀었다. 휘청한 것은 오히려 본일 쪽이었다. —알면서 왜??놀라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유전성이라는 말과 본일의 병력이 한 문장 안에 놓였는데도 재혁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본일은 저도 모르게 혀끝으로 어금니를 눌렀다.“혜원이랑 같이 살 겁니다.”이번에는 본일 자신도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재혁씨한텐 내가 얘기할게,그날 밤, 팔을 베고 누운 혜원이 본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당부하듯 했던 말이었다. 그 약속을 불쑥 가로채 버렸다.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재혁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얕은 한숨을 내쉰 그가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본일에게 시선을 꽂는다. “혜원이가 그래요? 같이 살겠다고?””네.“재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본일은 묘한 승리감 같은 것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막상 재혁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생각했던 것만큼 통쾌하지 않았다.“유건이는 압니까?”“아직.”재혁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뭘 어디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