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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벽류진(碧流陣) 의 회의

Penulis: 요정리더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8-05 15:22:31

제2화

벽류진(碧流陣)의 회의실, 구름 사이로 스며든 희뿌연 습기가 눅눅한 비린내와 섞여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150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대지를 찢어 놓았고, 인류의 기억 속에서 ‘땅’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한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남은 건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징검다리와, 굶주린 늑대처럼 날이 선 8명의 최정예 무사들뿐이었다.

총대장 테츠잔의 육중한 존재감 아래, 무사들은  모여들었다. 막내 렌은 떨리는 손으로 정찰 보고서를 건넸다.

경계선의 이상 징후와 지형적 변화만이 건조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렌의 뇌리 속에는 보고서에 담지 못한, 안개 너머의 낙원이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붉은 기모노,  하얀 피부, 그리고 자신을 향해 짓던 그 몽롱한 표정. 그건 인간이 아닌 도깨비였다. 렌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으나, 펜을 쥔 손은 끝내 그 사실을 적지 못했다.

그 존재를 털어놓는 순간, 이 짐승 같은 선배들이 그녀를 사냥감으로 삼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렌. 보고서가 평소보다 빈약하군. 사각지대에서 정녕 아무것도 보지 못했나?”

테츠잔의 묵직한 물음이 정적을 깼다.

“지상을 벗어나 하늘까지 도망쳤지만, 이제 한계다. 요기가 거의 없는 남은 도깨비들과 손을 잡든, 아니면 씨를 말려 그들의 살을 취하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식량도, 약초도 바닥났어. 우리를 버린 영주들이 하늘 위에서 호의호식하는 동안, 우리는 여기서 썩어가고 있지.”

가란이 검은 갑옷을 삐걱거리며 냉혹하게 읊조렸다. 그는 지난달 전투에서 동료 '키바'가 굶주림과 부상으로 비명을 지르다 죽어갔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 분노가 끓어올라 가란의 목소리에는 전쟁의 잔혹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남은 놈들을 다 찢어 죽여야 합니다. 우리 식량이 부족한 이유도 놈들이 남아있기 때문이지. 저 하늘 섬 밑바닥 지하에 놈들의 비축 식량이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비사가 탁자를 거칠게 내리찍었다. 그의 말투는 거칠었고, 윗선에 대한 분노와 약탈의 갈망으로 가득했다.

“죽이면 해결되나요, 가란 님? 비사 님, 좀 진정하시죠. 놈들의 피와 살이 우리 부상자를 살릴 영약이 된다는 건 이미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머리만 쳐서 될 일이 아닙니다.”

유우가 뱀처럼 가느다란 눈매를 휘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나른하게 덧붙였다. 겉으로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짓지만, 그 눈빛은 항상 타인의 약점을 파고드는 데 능숙했다. 그는 동료가 죽어 나갈 때도 유일하게 웃음을 잃지 않는, 감정이 거세된 듯한 자였다.

“천박한 소리 말게, 유우. 놈들의 혈액은 오염되어 있네. 정화되지 않은 도깨비의 기운은 오히려 우리에게 독이 될 뿐이야. 내 침통에 남은 약초가 다 떨어져 가네. 놈들의 심장에서 나오는 정수만이 유일한 해답일세.”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신지로가 한의사의 침통을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그는 의원처럼 차분하고 존대하는 말투를 유지했지만,  마치 해부 대상처럼 관찰하고 있었다. 그에게 인간과 도깨비의 경계는 단지 '약효의 차이'일 뿐이었다.

“불경은 삼가십시오. 영주님들의 호위가 곧 우리의 생존입니다.”

미츠키가 서늘하게 한마디를 얹었다. 말이 없는 그는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자였고, 그의 검은 늘 칼집 속에서 울고 있었다.

“그만하지. 결국 핵심은 약초와 식량이다. 우리가 놈들과 손을 잡든, 찢어 죽이든 결정이 필요해.”

시온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정리했다. 그는 늘 모두의 의견을 조율하는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갈라치기의 표적이 되지 않는, 이상적인 무사이자 친근한 동료였다. 

하지만 그 미소 뒤편,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시온은 렌의 미세한 떨림과 옷자락에 묻은 매화 향기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것은 렌의 동공이 흔들리는 이유였다. 시온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징검다리 위에서는 절대로 날 수 없는, 농밀하고도 고혹적인 향기가 렌에게서 풍기고 있다는 것을.

“렌, 우리 막내. 정찰 보고가 영 시원치 않네? 보고서보다 네 눈동자가 왠지 더 많은 걸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유우가 귀신같이 렌의 턱을 낚아채며 도발했다. 찰나 렌의 심장이 멎을 듯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험한 길을 돌아왔을 뿐입니다.”

“거짓말을 하는군. 아주 잘 익은 과일을 본 사냥꾼의 눈빛인데.”

유우가 렌을 몰아세우려던 찰나, 시온이 다정하게 유우의 어깨를 밀어내며 렌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우, 막내를 너무 몰아세우지 마. 렌은 지난주 혼자 내내 전방을 돌았어. 지금은 피로가 극에 달했을 테니 너그러이 봐주자고. 렌, 고생 많았어.”

시온은 렌의 어깨를 친근하게 다독였다. 그는 유연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그 손길이 닿는 순간, 시온의 머릿속에서는 아주 응큼한 상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잘 익은 과일이라……. 대체 무엇이 이 아이의 정신을 홀렸길래 저토록 멍한 표정을 짓는 거지?’

시온의 이성은 렌을 보호하고 동료들을 조율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그는 후배앞에선 친근한 형이자 신사였다. 그러나 그 신사적인 껍데기 아래, 가녀린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강렬한 지배욕과 소유욕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는 렌이 보았을 무언가를 머릿속으로 그그려보았다.기모노 안의 투명한 살결, 자신의 지배 아래 놓였을 때 나올 신음. 시온은 입꼬리를 올렸다.

렌은 그 미소가 자신을 보호해주는 형의 자애로움이라 믿었지만, 사실은  응큼한 사냥꾼이 먹잇감을 정조준하는 순간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무사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렌은 서둘러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내내, 옷자락에 묻은 매화 향기가 렌의 코끝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 향기는 마치 여인이 자신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이는 유혹처럼 들렸다.

렌은 가슴이 터질 듯한 공포와, 형용할 수 없는 설렘을 동시에 느꼈다.

빈 회의실에 홀로 남은 시온은 자신의 손등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렌의 어깨를 짚었던 손길이었다. 손끝에서 풍겨오는 은근한 향에 코를 가까이 묻고 숨을 들이켰다.

‘아무도 모를 거야.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시온은 눈을 감고, 존재하지 않는 여인의 몸을 손안에 쥐고 있는 듯한 감각에 젖어 들었다. 그녀가 기모노를 풀어헤치고, 자신의 발치에서 복종하며 헐떡이는 모습. 그 뒤틀린 쾌락의 상상은 시온의 평범한 일상을 지탱하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시온은 서두르지 않았다. 렌이 훔쳐본 그 꽃이 어디에 피어있는지, 확실하게 밝혀내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전쟁이 남긴 참혹한 비극은, 그렇게 8명의 무사들에 의해 또 다른 형태의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지상을 잃은 인류의 징검다리 위에서 늑대들과 하나의 꽃, 그 치명적인 사냥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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