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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150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짧지 않았다. 그것은 인류의 기억 속에서 ‘땅’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상을 요괴들에게 내어준 그날 이후, 인류가 기워 붙인 하늘 위 징검다리는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악력으로 짓이겨! 도깨비의 가죽은 바위보다 단단하다!”
전장은 승리를 향한 진군이 아니라, 그저 죽지 않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이었다. 본디 지하의 어둠 속에서 태어나 햇빛조차
보지 못하던 괴물들은, 겁도 없이 지상을 집어삼킬 야욕으로 기어 올라왔다. 놈들은 인간의 살점을 씹어 삼킬수록 뱀처럼
허물을 벗고 더 단단해졌다.
머리를 잘라도 재생했고, 낮이 되어도 죽지 않았다.
무사들은 피로 물든 칼자루를 놓지 못했다. 철퇴가 뼈를 으스러뜨리는 둔탁한 소리, 시퍼런 칼날이 도깨비의 살점을 파고들 때 나는 비릿한 파열음이 전장을 가득 채웠다. 도깨비의 이빨과 손톱이 갑옷을 긁어대며 내는 ‘끼이익-’ 하는 금속음은 무사들의 고막을 찢어 놓았다.
지키다가 손목이 잘려 나가는 것은 차라리 양호했다. 동료의 피와 내장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무사들은 멈출 수 없었다. 물러서는 순간, 우리가 쌓아 올린 징검다리는 무너지고 뒤에 남은 가족들은 놈들의 먹이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땅이 갈라지고 절벽이 무너져 내리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무사와 도깨비는 서로의 목을 조른 채 끝까지 추락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광기에, 도리어 도깨비들이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기이한 풍경조차 연출되었다.
참혹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동료가 죽어 있었고, 매일 저녁에는 새로운 어린 동료가 빈자리를 채우러 칼을 잡았다. 비릿한 피 냄새는 하늘 위 대기 속에서도 가시지 않았다. 앓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막사 안에서도, 누군가는 자신의 잘린 팔을 동여매며 내일의 칼을 갈았다.
끝내 도깨비들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지상은 놈들의 발악으로 지각이 뒤틀려 갈라졌고, 그나마 숨 쉴 곳이었던 대지마저 산산이 부서져 사라져 버렸다. 지하를 잃고 지상마저 잃은 소수의 도깨비들의 굴욕은 뼈아팠으나, 인간 또한 갈 곳을 잃은 신세가 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무너져가는 세상 끝에서 협상을 맺고 하늘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를 건설했다. 그것은 피와 눈물로 쌓아 올린 잔인한 등굣길이었다.
“어머니! 어머니!”
등에 짐을 짊어지고 구름 사이로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징검다리를 오르던 평민들이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허공과 무너져 내리는 대지를 본 순간, 공포에 질린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발을 헛디뎠다. 비명은 짧았다. 떨어지는 자를 붙잡을 손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군가는 동료의 시신을 껴안고 오열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잘린 다리를 끌며 신음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칼을 휘둘렀던 무사들도, 정작 살아남은 가족의 죽음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 아비규환의 와중에도 기이한 풍경은 있었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영주들은 생채기 하나 없이, 수십 명의 쿠노이치(여닌자)에게 호위를 받으며 가장 앞서서 징검다리를 건넜다. 그들은 발밑에서 죽어가는 백성들을 외면했다. 오직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희생된 수많은 목숨을 밟고 올라가는 그들의 뒷모습은, 전쟁의 참혹함보다 더 씁쓸한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승자의 대가였다. 우리는 이겼지만 무너졌고 지상을 얻지 못했으며, 그저 하늘 위 작은 섬에 매달려 숨을 헐떡이는 도망자가 되었을 뿐이다.
그 모든 광기와 비극이 멈춘, 구름 너머의 사각지대. 그곳에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정원이 있었다.
전쟁의 포화가 대지를 찢고 있을 무렵, 홀로 하늘로 도망쳐 숨어버린 존재가 있었다. 야츠키. 그녀는 인간을 죽이지도, 놈들의 피와 살을 탐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섭고 두려워서 안개라는 장막 뒤로 제 몸을 숨겼을 뿐이다.
“……또, 바람이 차구나.”
야츠키는 매화나무 아래 앉아 제 손끝에서 피어난 분홍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전쟁의 참혹함을 엿보았던 그녀의 눈동자는 깊고도 슬펐다. 그녀는 외로움과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피워낸 꽃들,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흩뿌리는 안개뿐이었다.
그녀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 영역을 침범하는 것들을 막아내기 위해, 본의 아니게 꽃의 향기를 섞은 요력을 끊임없이 뿜어내야 했다. 그것은 생존의 몸짓이었다.
향기로운 꽃향기가 안개와 섞여 바람을 타고 흘러나갔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이성을 갈아먹는 마약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꽃을 피워낸 그녀 자신은,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홀로 매화 꽃잎을 쥐고 흔들 뿐이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정원. 그녀는 지상의 비명과 하늘 위의 오열도 듣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꽃을 피워내며 스스로를 안개 속에 가두었다.
이곳은 금지구역이었다. 그러나 정찰을 나온 렌은 무의식중에 그 안개 너머로 발을 들였다.
안개 너머로 달콤한 향기가 렌의 코끝을 찔렀다. 그것은 전쟁터의 비릿한 피 냄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향기였다.
붉은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비녀가 꽂혀 있었고, 옅은 손짓으로 가지를 만지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렌과 눈이 마주친 순간,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야츠키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그녀가 당황하며 손을 휘저었다. 가느다란 손끝에서 안개와 섞인 꽃가루가 렌을 향해 흩날렸다.
“……아.”
렌의 입술이 갈라지며 멍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꽃가루가 섞인 안개가 렌의 폐부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독이었다. 하지만 달콤한 독이었다. 렌의 심장이 기이하게 박동했다. 마치 이성이 무너져 내리는 감각.
렌은 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분명 도깨비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붉은 기모노 아래 드러난 그녀의 가녀린 목선과, 꽃을 만지는 하얀 손가락을 보며 렌은 자신의 칼자루를 꽉 쥐었다. 손바닥에 칼집이 박혔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도깨비의 함정인가, 렌은 뒤를 돌아 징검다리로 달리기 시작했다. 폐 속 깊숙이 박힌 꽃향기가 마치 낙인처럼 그의 안을 헤집어 놓았다. 이미 그의 몸은 놈들의 방식대로 침식되고 있었다.
무사에게 더 깊은 전쟁의 참혹함보다 더 끔찍한 것은, 어쩌면 저 안개 너머의 고요함일지도 몰랐다.
렌은 다급하게 징검다리를 건너며,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옷자락에 묻은 매화 꽃잎 하나는
끈질기게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운명은 그렇게, 하늘 위에서 비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8명의 무사가 야츠키라는 치명적인 재앙과 마주하게 될 서막이었다.
제 49화 시대의 이음과 떠나는 그림자테츠잔이 떠난 뒤, 도깨비의 근원을 밝혀냈다는 승전보는 허망할 정도로 공허했다. 훈련장 도장 곳곳에는 그가 살아있을 때의 흔적이 박제처럼 남아 있었다. 매일 새벽이면 낮은 기합 소리와 함께 대나무를 가르던 칼소리가 울려 퍼지던 훈련장은 이제 텅 비어 있었다. 무사들은 그가 늘 앉아있던 평상 근처를 지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평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그의 낡은 찻잔과 훈련이 끝나면 툭툭 먼지를 털어내던 대장의 투박한 뒷모습이 눈앞에 선연했다." ’대장’님은... 이제 존재할 수없는 건가…."막내 렌이 훈련장 한구석에서 검의 손잡이를 꽉 쥔 채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대장이 없는 벽류진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다시 칼을 잡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대장의 죽음은 그들의 세계가 무너져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사들은 각자의 방에서, 혹은 연습장에서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도장 전체를 휘감은 무거운 침묵은 마치 거대한 늪처럼 생존자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각자의 가슴 속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실감과 동료를 잃었다는 죄책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깊은 침묵을 깬 것은 미츠키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며칠째 숨만 붙어있던 그가 깨어난 것은 발표이후 이틀이 지난 새벽이었다. 미츠키의 의식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답답한 공간, 그곳에서 미츠키는 홀로 길을 걷고 있었다.'야츠키를 지켰으니, 그걸로 됐다. 내가 없어도 훌륭한 자들이 있으니 우리가 이긴 거야.'미츠키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 어둠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에게 바치는 마지막 변명이었고 스스로를 짓누르는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듯한 고독함이 미츠키를 덮쳐왔다. 그때, 저 멀리서 희미한 형체가 보였다. 테츠잔이었다. 미츠키는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려갔다. 테츠잔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
제 48화 도깨비의 탄생의 진실영주 거처의 참화는 여전히 매캐한 잿내를 뿜어내며 폐허의 전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에 탄 목재가 타다 남은 검은 뼈대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신지로와 가란 그리고 엄선된 세 명의 전령은 무너진 기와집의 잔해를 하나하나 걷어내며 흔적을 찾고 있었다. 뼈대만 남은 무거운 서까래를 들어 올리던 전령 중 하나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멈칫하며 신지로를 급히 불렀다."신지로 님, 이쪽을 봐주십시오... 바닥이 어딘가 이상합니다."전령이 가리킨 곳은 화마를 처절하게 겪고도 기이할 정도로 온전하게 보존된 거대한 돌문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재로 변했음에도 그 문만은 세월의 때와 음산한 기운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가란이 무거운 팔로 문을 밀어젖히자, 퀴퀴하고 낡은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것은 오랜 세월 외부와 차단된 지하 비밀 서고의 냄새였다. 그 안에는 쿠로기리가 남긴 수백 년의 방대한 기록이 어둠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신지로는 떨리는 손으로 횃불을 높이 들고 가죽 장정의 낡은 일기장을 펼쳤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그동안 그들이 겪어왔던 도깨비들의 정체와 파편들이 퍼즐처럼 끔찍하게 맞춰지기 시작했다.인간과 도깨비가 지상을 두고 핏빛 전쟁을 벌인 끝에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무려 150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어둠 속에서 인간의 파멸을 비웃으며 살아남은 자가 바로 오백 년을 넘게 살아온 쿠로기리였다.일기장의 갈피마다 기록된 지상의 역사는 충격적이었다. 쿠로기리가 태어났을 무렵의 지상에는 오직 인간들만이 번성해 있었고, 지하에는 무리도 짓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서로를 물어뜯던 몇 안 되는 원시적인 도깨비들만 살아가고 있었다. 놈들은 서로를 갉아먹다 우연히 지상이라는 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밤의 어둠을 틈타 몇 명씩 기어올라와 인간을 사냥하기 시작했다.인간의 살과 피가 지고의 맛이라는 것을 깨달은 도깨비들의 밤마실은 갈수록 대담해졌고, 그
제 47화 재(灰) 위에 남겨진 진실벽류진의 의무실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신지로는 익숙한 손길로 약재를 섞으며 회진을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긴 전쟁사의 기록을 쫓는 연구자의 그것처럼 침착했으나, 내면에서는 수만 가지 가설이 뒤섞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테츠잔과 유우의 빈자리가 의무실 전체의 무게를 바꿔놓은 듯했다.가장 먼저 야츠키의 곁에 멈춰 섰다. 재생은 더디지만 확실했다. 그 옆, 의식을 잃고 잠든 미츠키의 상태를 살핀 뒤, 그는 시온의 침상으로 향했다. 시온은 눈을 뜰 수 없음에도 신지로의 기척을 정확히 짚어냈다."신지로.""시온."신지로는 시온의 곁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시온은 옅은 쓴웃음을 지었다. 보이지 않는 눈이 허공을 향했다."이제….무사로서는 끝이군.... 은퇴해야겠어. 다른 녀석들은 어떤가?.. 야츠키는... 아직도 상태가 안 좋은가?"신지로는 묵묵히 시온의 펄스를 짚었다. "야츠키는 살아있다. 모두 제 몫을 다했어. 오히려 의료라는 핑계로 최전선을 지켜보기만 했던 내가 면목이 없을 뿐이다. 시온, 너는 무사로서 할 일을 다했다.""아니. 전투원으로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된 것 같아 찜찜하군.""그런 소리 마라. 네가 버텨준 덕분에 우리가 틈을 파고들며 움직일 수 있었던 거야."신지로는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시온의 마음을 다독였다. 이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쿠로기리는 야츠키의 요기가 깃든 공격에 재생력을 잃었다. 그 틈을 타 마무리를 지었지. 하지만 이 모든 걸 감추기엔 상황이 너무 복잡해. 쿠로기리가 죽어간 그 영주 거처에 다시 가볼 생각이다. 뭔가 우리가 놓친 근거가 있을 거야."시온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회진의 마지막은 렌과 가란이었다. 둘의 몸은 만신창이였으나, 도깨비 사냥꾼 특유의 경이로운 회복력으로 상처는 눈에 띄게 아물고 있었다. 신지로는 가란의 어깨를 짚으며 상태를 확인했다."너희라도 멀쩡해서 다행이군.
제 46화 침묵의 무게, 무너진 계단벽류진의 성역, 외부와는 철저히 단절된 8인 정예만의 공간. 그곳에 위치한 의무실의 공기는 마치 멈춰버린 시간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렌이 조심스럽게 야츠키를 침상에 내려놓았다. 야츠키의 몸은 쿠로기리와의 격전으로 인해 끔찍하게 찢기고 파여 있었으나 그녀는 깊은 수면 속에서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스스로를 재구성하고 있었다.신지로는 전쟁사를 온몸으로 겪어온 의사이자 연구자였다. 그는 야츠키의 상처를 면밀히 살폈다. 도깨비의 재생력치고는 처참할 정도로 느린 속도였다. 일반적인 도깨비라면 벌써 아물었을 상처들이, 그녀의 몸 위에서는 마치 죽어가는 짐승의 흉터처럼 더디게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이를 악문 신지로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깨비로서의 본능이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야츠키에게 자신의 육체를 빠르게 재구성하는 것은 아직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다. 신지로는 떨리는 손으로 야츠키의 환부를 핀셋으로 건드리며, 도깨비의 세포가 어떻게 인간의 살점과 뒤섞여 기이한 재생을 시작하는지 기록했다. 150년 동안 축적된 방대한 의학 기록물들과 비교해 봐도, 그녀의 재생 양상은 기존의 어떤 사례와도 일치하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지로는 야츠키의 살점이 조금씩 서로를 끌어당기며 붙어가는 모습을 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다행이다... 재생은 되고 있어. 비록 느리지만, 죽지는 않았다는 증거야.'하지만 그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의무실은 오직 신지로가 다루는 약품 냄새와 동료들의 얕은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신지로는 메스를 잡는 방법을 알고나서부턴 도깨비를 해부하고, 그들의 생태를 분석해 온 연구자로서 눈앞의 광경을 그저 ‘회복’이나 ‘상해’라는 단순한 단어로 치부할 수 없었다. 의무실 탁자 위에는 테츠잔이 평소 즐겨 읽던 병법서와 유우가 손질하던 보조용 단검이 놓여 있었다. 주인 잃은 물건들이 뿜어내는 정적은 그 어떤 비명보다 더 날카롭게 생존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렌은 벽 한구석에 서서
제 45화 멸살(滅殺)의 끝과 남겨진 재(灰)영주들의 거처는 멸망한 왕국 그 자체였다. 쿠로기리의 요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고풍스럽던 기와지붕은 독기에 부식되어 뼈대만 앙상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그들을 보호하던 높고 견고했던 돌담은 이제 승자의 시신을 감추어줄 무덤의 벽처럼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한때 영주들이 거닐며 담소를 나누었을 정원은 독기에 짓눌려 형체도 없이 뭉개졌고, 그곳에 피어있던 꽃들은 모두 검게 타 죽어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전투가 끝난 자리에는 승리자의 환희 대신 기괴할 정도의 침묵만이 감돌았다. 렌은 각성의 여파로 깊은 잠에 빠져든 야츠키를 품에 안은 채, 더는 한 발자국도 옮길 힘이 없어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어 있었다. 그의 온몸은 쿠로기리와의 격전으로 인해 찢기고 파여 있었고, 뼈가 드러날 정도의 상처에서는 쉴 새 없이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가란은 부서진 도끼자루를 지팡이 삼아 짓이겨진 어깨를 틀어막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으나, 그마저도 핏물에 젖어 온몸이 후들거리고 있었다.신지로는 의식 없는 미츠키와 양 눈을 다쳐 허공을 더듬는 시온의 곁을 지키며, 자신의 마지막 남은 기력을 짜내 그들의 맥박을 확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시신을 수습할 힘은커녕, 스스로 영주 거처의 높은 돌담 밖으로 나갈 기력조차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8인의 정예 중 가장 강했던 테츠잔과, 뛰어난 지략으로 판을 짜던 전략가 유우는 이미 현장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신지로는 무너진 천장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읊조렸다."우리가... 끝까지 버텼어야 했는데."그것은 자책이자, 돌아갈 곳조차 잃어버린 자들의 처절한 탄식이었다. 그때였다. 무너진 영주 거처의 정문 너머로, 숲을 헤치고 그림자 같은 인영들이 나타났다. 벽류진의 일반 무사들이라면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철저히 금기시된 공간. 그곳에 낯선 5명의 무리가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것이다.그들은 테츠잔의 전령 담
제 44화 裂(열) - 닿지 않는 환영과 끊어진 재생쿠로기리의 등 뒤에서 돋아난 가시들이 공기를 찢으며 야츠키의 복부를 꿰뚫었다. 야츠키는 비명 대신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쿠로기리를 노려보며, 자신의 배를 뚫고 나온 가시를 제 손으로 붙잡아 뜯어냈다. 살점이 뜯겨 나가는 소리가 마당에 울렸다."크큭, 도깨비의 혈통이라 이건가? 끈질기군."쿠로기리가 야츠키의 왼쪽 팔을 덥석 잡아 단숨에 꺾어버렸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지만, 야츠키의 보랏빛 요기가 뱀처럼 감겨들자 끊어진 신경과 근육이 실타래처럼 엉키며 순식간에 붙어재생되었다. 그러나 쿠로기리의 발길질이 야츠키의 가슴팍에 내리꽂혔고, 그녀는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을 굴러 나뒹굴었다.쿠로기리가 기괴한 고속이동으로 순식간에 야츠키의 앞에 나타났다. 머리통을 짓이겨버리려 주먹을 내리꽂으려던 순간이었다.피잉-신지로의 손에서 날아간 은빛 침이 쿠로기리의 관자놀이를 스쳤다. 독이 묻은 은침이 피부에 박히자 쿠로기리의 움직임이 찰나, 멈칫했다."지금이다!"그 틈을 놓칠 리 없는 벽류진의 무사들이 움직였다. 칼 한 자루만 남은 렌과 부식된 도끼날을 쥔 가란이 쿠로기리의 양쪽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무사들의 일격이 괴물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혔다. 검신이 박힌 자리를 타고 검은 피가 솟구쳤다."이 벌레 같은 인간들이... 신성한 도깨비들의 싸움에 감히 끼어들어?"쿠로기리가 광기 어린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단순한 안개가 아니었다. 생존의 위협을 느낀 도깨비가 토해내는 최후의 발악, 썩은 살점의 냄새를 머금은 부식의 안개였다.그 안개는 시온의 참월도가 휘둘러진 궤적을 타고 그의 양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아아악-!"시온이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다. 환청이 들리고, 뇌를 뒤흔드는 환영이 보였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핏빛 안개 속에서 옷을 전부 벗은 채, 요염한 자태로 자신을 유혹하는 야츠키의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