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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랑 한 번 만나볼래?[2]

Author: To파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2 20:00:15

*

한바탕 소란스러운 고백을 듣고 멍한 정신으로 숙소에 돌아온 한별은 심란함에 밤새 뒤척이다 결국 맥주 한 캔을 까고야 말았다. 내일 바쁜 일정을 소화하려면 음주는 최대한 자중해야 한단 걸 알고는 있었지만,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나머지 내일 컨디션 걱정보단 지금 당장 취해서 빨리 잠들고 싶단 마음만 앞서 있었다.

하지만 한 캔, 두 캔 까면 깔수록 그렇게 잊고 싶었던 그녀의 마지막 말이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 뒤를 헤집고 싶어서 이렇게 안달 나 있는데.”

씨발.

분명 떠올리자마자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는 망발인데. 제 귓가에 저 말을 속삭이던 주백희의 표정은 정말 미치도록 야했고 그에 심장이 덜컥여선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못 하고 황급히 도망쳐 나온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다.

여러 의미로 열불이 나는 하루. 어쩌다 이렇게 됐나, 천천히 되짚어보면 결국 잘못한 건 자신이어서 어디다 하소연을 하기도 창피했다. 그냥 묻고 갔어도 평생 이불킥 감인데 왜 안 피워도 될 불을 피우려는 건지. 한별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녀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만 거듭하다가 쌓인 맥주캔이 세 개를 넘어갔을 때, 돌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 안에서 누군가가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걸어 나왔다.

“어? 뭐야, 한별이 너 안 자고 있었어?”

“아... 형. 죄송해요, 저 때문에 깬 건 아니죠?”

“그냥 목말라서 물 마시려 했지. 근데 너 내일 새벽부터 화보 촬영 있잖아. 안 자고 뭐 해?”

“잠이 안 와서......”

“술도 못하는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있어 봐. 안줏거리 좀 가져올게.”

“아니에요! 금방 잘 거예요!”

“금방 자기는 무슨... 그거 다 마시려면 한 시간은 더 걸리겠구먼.”

호연은 테이블 위에 널려있는 맥주캔들을 보고 혀를 차더니 곧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고 눈에 띄는 안주 몇 개와 물병을 챙겨 온 호연은 한별의 옆자리에 널브러져 있던 빈 맥주캔들을 발로 대강 슥 치우곤 그 자리에 앉아 대뜸 예상치 못한 돌직구를 날렸다.

“주백희한테 고백이라도 받았어?”

“풉!”

말을 꺼내지 무섭게 돌아오는 격한 반응에 호연 역시 덩달아 놀라선 눈을 크게 뜬 채 한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뭐야, 그냥 던져 본 건데 진짜야?”

“아, 아니 그런 건 아니......”

“아니긴 무슨. 그 꼬부라진 혀나 어떻게 하고 구라를 까.”

한별은 거짓말을 잘 못하는 편이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려 계속 고개를 뒤로 돌린 채 어거지로 거짓말을 이어가려는 모습을 보니 호연은 기가 차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별 입장에선 저런 취급은 억울했다. 만나보자는 제안을 듣긴 했어도 내가 좋다고 말한 건 아니지 않은가.

“진짜 고백은... 아니에요.”

“고백에 진짜 가짜가 어디 있어? 왜, 너는 걔 별로야?”

“그게 아니라!”

“파트너 하자냐?”

“푸합!”

어쩜 하는 말마다 이렇게 정곡을 찌를 수 있는 건지. 놀란 건 호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주백희가 말을 필터 없이 막 하는 걸로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진짜 저렇게까지 막 한다고? 한별이 저도 모르게 뿜어버린 맥주를 열심히 닦는 동안 겨우 평정심을 되찾은 호연은 또다시 한별의 정곡을 들쑤셨다.

“너 설마 걔한테 걸렸냐?”

“뭐... 뭘요?”

“뭐긴 너 전립선 마사지 하는 ㄱ......”

“아악!! 형!!”

저 형이 신내림이라도 받았나, 말하고는 싶지만 한별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들을 따박따박 꺼내는 호연이 이젠 경이롭게까지 느껴졌다. 그나저나, 그걸 어떻게 안 거지? 분명 할 때마다 멤버들 동선도 잘 살피고 방문도 잘 잠갔는데!

“뭐, 뭐예요?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얘 좀 봐라, 그게 안 걸릴 거라 생각했어? 이 집 방음이 잘 되면 뭐 얼마나 잘 된다고......”

“큰 소리 낸 적은 없었는데......”

“그게 소리 하나 감춘다고 감춰지겠냐? 아무튼 그건 그거고. 그래서 넌 걔한테 뭐라고 대답했는데?”

“대답은 무슨... 탁자 뒤엎고 나왔는데요.”

“그렇게까지 했다고?”

호연은 허허 너털웃음을 흘리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호연이 대뜸 한별에게 전립선 마사지 얘기를 꺼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그 역시 백희의 유별난 성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연은 화이트 스완의 막내인 미라와 꽤 오래전부터 심야 예능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있었고 덕분에 서로의 그룹에 대해 알게 모르게 주고받은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 미라는 주백희에 대한 불만을 많이 토로하였다. 그 언니 데리고 같이 예능 나가기 무섭다느니 숙소 안에서 물꽃놀이짤 찍겠다고 발광하다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느니, 온갖 이야기를 들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하소연은 그래.

“요즘 언니가 게동에 빠졌거든요? 뒤 뚫리는 남자 얼굴이 그렇게 꼴린다나... 아무튼 영업하겠답시고 그걸 자꾸 거실에 틀어 놓는데. 진짜 그놈의 손모가지를......”

정말 독특한 취향이다 싶었다. 뭐, BL물 좋아하는 여자야 흔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여자 아이돌 중에서도 그런 류의 장르를 덕질 하는 애들이 왕왕 있었기에 그땐 그러려니 했는데, 한별의 성벽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니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녀가 좋아하는 건 BL이 아니라 다른 쪽인 게 아닐까. 그래서 잔뜩 상기되고 지친 얼굴로 늘어진 채 주백희에게 기대고 있는 한별을 보고 호연은 잠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혹시 뒤를 쑤시며 신음하고 있는 한별을 보고 스위치가 눌려 일을 벌인 게 아닐까. 하는 뭐 그런.

설마 진짜 그랬으리라곤 생각 안 하지만, 그래도 만약에 그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뭐, 확실히 그런 경험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다시 한번 경험하려면 이미 자신과 비슷한 성벽이 있단 게 검증된 인물과 다시 하는 게 더 좋겠지. 그러니 한 대 맞을 걸 각오하고 주백희도 그런 제안을 했던 걸 테고, 거기에 한별은 창피하고 열 받아서 책상 뒤엎고 나왔다는 것도 다 알겠는데. 그것 때문에 이렇게 심란해할 것까지 있나?

눈치가 빠른 호연은 한별이 단순 열 받은 속을 식히기 위해 술을 들이부은 게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뭔가 더 있구나?”

호연의 물음에 한별은 맥주캔을 입에 물고 고개를 숙였다.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어떻게 말해야 쪽팔림은 최대한 감추면서 제 심란함을 잘 설명할 수 있을지. 한참 말을 고르던 한별이 우물쭈물 내뱉은 물음엔 취기와 새벽 감성이 고루 섞인 탓에 묘한 야릇함과 아련함이 묻어 있었다.

“형은 느끼는 얼굴 보고 반한다는 말이 납득이 가요?”

저건 뭔 소리래.

누가 들어도 주백희가 내뱉었을 법한 쌉소리에 호연은 어이없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쌉소리에 이렇게까지 머리를 싸매고 있는 얘도 얘고 참. 호연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밤새 한별을 괴롭히던 고민을 심드렁한 목소리로 한방에 정리해 주었다.

“뭐... 모르는 거지?”

“네?”

“아니,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느끼는 순간은 진짜 나도 모르는 새 확 오는 거고... 그게 빠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주백희 같이 즉흥적이고 사고회로가 독특한 애들은 네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불꽃이 튈 수도 있고... 뭐.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럼 뭔 데요?”

“너는 어땠는데?”

호연의 물음에 한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내 저럴 줄 알았지. 자존심이 세고 수줍음이 많은 한별이었기에 자신이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쾌감을 조르는 그 순간을 제대로 상기하지 못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술이 들어갔으니 조금 솔직하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맥주캔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리던 한별이 조심스럽게 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좋... 았긴 했죠.”

인정하기 정말 싫지만, 주백희의 손기술은 제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애널 자위에 맛을 들이긴 했지만, 순전히 뒤만으로 가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순간엔 수치심, 후일에 대한 걱정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에 취해 그녀의 손안에서 녹아내리고 싶었을 뿐.

그때의 감각이 선명히 떠오를수록 한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톡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익었을 즈음, 호연이 마지막 돌직구를 날렸고 이미 시동이 걸려있던 한별은 기어코 폭발하고 말았다.

“그럼 한 번 즐겨 봐. 뭘 재고 그래?”

“제가 형인 줄 알아요?!”

“알지, 알지~ 너 선비 새끼인 거 누가 몰라? 근데 너도 걔랑 해서 좋았다며. 그럼 그것만 즐겨도 되잖아.”

“그니까 그게 어떻게 되냐고요!”

“어휴, 피곤한 녀석.”

이래서 고지식한 놈은 안 된다니까.

펄쩍 뛰는 한별을 보며 혀를 끌끌 찬 호연은 맥주를 홀짝이며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나였으면 한 번 만나볼 텐데.”

“형은 원래 그렇잖아요.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막고.”

“하하... 그래도 난 항상 진지하게 만난다? 그리고 몸 정이 마음 정 되기도 하잖아. 혹시 아니? 그렇게 즐기다가 진짜 사랑이 싹틀지.”

진짜 사랑.

그 말에 한별은 코웃음을 쳤다. 사랑이 싹트긴 내 수치심만 무럭무럭 자라겠지. 애초에 첫 만남부터 볼꼴 못 볼꼴 다 봤는데 우리 사이에 설렘이란 게 싹 틀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데뷔만을 꿈꾸며 보수적인 생활을 고수해 왔던 한별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이미 일은 다 벌여놓곤 뭐 저리 오바를 하는 건지.

호연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한별의 등을 강하게 두드려 주었다. 쓸데없는 걱정 말고 잠이나 잘 자라는 걱정과 질책이 한 데 섞인 복합적인 격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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