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우리 아빠는 사람 속 긁는 데는 아주 선수지.’‘지난 몇 년 동안 엄마 속도 얼마나 뒤집어 놨는데.’‘내 속도 만만치 않게 긁어 놨고.’‘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드디어 기회가 왔으니, 이번 기회에 이 정도는 갚아 줘야지.’‘망할 늙은이, 오늘 밤 잠은 다 잤겠네.’준서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만족스럽게 돌아가 잠들었다....청산 쪽은 새 프로젝트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날 밤 호텔을 떠난 청산은 연구소에서 보낸 전용 차량에 올라 나산시를 떠났다.차 안에서 청산은 한참을 망설였다. 걱정도 되었고, 기대도 되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나무 상자를 열었다.청산은 그대로 굳어졌다.상자 안에는 핑크 수정으로 손수 조각한 장미 한 송이가 들어 있었다. 꽃잎 위에는 물방울처럼 투명한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맑고 투명한 장미는 차 안 조명 아래에서 무지갯빛 광채를 흩뿌렸다.청산은 오래도록 그 장미를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었다. 어쩐지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했다. 답은 전부 이 안에 있었다.청산은 상자 뚜껑을 닫았다....연구소, 사무실.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 서류 몇 부를 내밀었다.“대표님, 확인 서명해 주셔야 하는 자재 선정 서류입니다.”“볼게.”나산시에서 돌아오자마자 업무에 파묻힌 청산은 서류를 받아 한 장씩 넘겼다. 내용을 확인하고, 서명했다.비서의 시선은 책상 위, 목이 긴 유리병에 꽂힌 핑크 수정 장미에 붙들렸다. 청산이 서류 확인을 마치자, 비서는 끝내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대표님, 갑자기 이런 건 왜 두셨어요? 꽤 예쁘네요.”비서는 아무리 봐도 남자가 남자에게 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여자에게 받은 것처럼 보였다. 이전에는 본 적도 없었고, 이 사무실에 이런 종류의 물건이 놓인 적은 더더욱 없었다. ‘며칠 휴가를 다녀오자마자 저런 물건이 나타나다니...’프로젝트에만 매달려 살던 청산에게 데이트할 틈이라도 생긴 건가 싶었다.실은... 비서가 보기엔, 아예 없었던 일도 아니었다
나산시는 작은 도시였다.먼저 비행기를 타고, 다시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몇 사람은 공항에서 한밤중에 전화 한 통으로 끌려 나온 희은과 만났다. 이런 일로 잠을 깨웠는데도 희은이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그렇게 네 사람은 떠들썩하게 나산시로 향했다....다음 날 아침.유하는 눈 밑에 다크서클을 달고 전화받았다가, 로비에 서 있는 훌쩍 자란 아이들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유하는 그냥 물건 하나만 보내 달라고 했을 뿐이었다.물건은 왔다.그런데 왜 그 물건에 네 명의 ‘골칫덩이’까지 딸려 온 걸까?지난 몇 년 동안 이 아이들이 벌인 일은 절대 적지 않았다. 유하는 이제 이 넷만 봐도 덜컥 겁이 났다.역시 유하가 학교도 안 가고 이렇게 멋대로 돌아다니면 되느냐고 두어 마디 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아이들이 돌아가며 유하를 혼냈다. 밤새우지 말라고. 몸 생각을 해야 한다고. 잠을 제대로 자야 한다고.한참을 지나 겨우 그 이야기를 넘겼을 때쯤, 유하는 아이들이 학교를 빼먹고 온 일마저 완전히 잊어버렸다.지금 유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아이들을 먹일 저녁 식사뿐이었다.아이들은 유하의 고향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드디어 시간이 났다며, 호텔에 오래 머물지도 않고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유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아이들이 알아서 나가 주면, 저녁에 핑계를 댈 필요도 없었다. 왜 마음이 찔리는지는 유하 자신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생각은 언제나 생각일 뿐이었다....저녁 식사 자리.유하는 제 주변에 앉은 네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에 있는 청산에게 한목소리로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표정이 멍해졌다.“아이들이 꼭 따라오겠다고 해서...”청산의 눈에 서린 원망이 너무 진해서, 유하는 결국 애써 한마디 덧붙였다.유하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옷까지 갈아입고 나가려던 참에,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딱 맞춰 돌아왔다. 유하가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는 걸 알자마자 따라가겠다고 난리를 쳤다. 그중 제
재윤은 무의식중에 허리를 곧게 세웠다.[크, 큰일은 아니고... 내가 수장고에 작은 나무 상자 하나 넣어 둔 거 있잖아. 넣을 때 너도 옆에 있었으니까 기억하지?]“네, 기억해요.”[그거 나한테 보내 줘. 호텔 주소로.]“그거... 알겠습니다.”재윤은 유하에게 빨리 주무시라고 몇 번이나 당부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 더는 그림을 손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재윤은 작업실에서 나와 아래층 수장고로 향했다. W시에 있을 때면 늘 유하 집에서 지냈으니, 지금 당장 꺼내러 가기에도 어렵지 않았다.비밀번호를 입력했다.안쪽으로 들어간 재윤은 익숙한 걸음으로 비밀번호 잠금장치가 달린 장식장 앞에 섰다. 다시 번호를 누르고 서랍을 열었다.서랍 안에는 작은 물건 세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붉은색 복주머니 하나. 금실로 삐뚤빼뚤한 글씨가 수놓여 있었다.[유하가 평생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세요.]그 옆 작은 상자 안에는 루비 크라운 반지가 들어 있었다.두 물건 옆에는 길쭉한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재윤은 그 상자를 집어 들었다.처음에는 핸드폰을 켜서 택배 접수를 하려 했다. 하지만 곁눈에 들어온 나무 상자를 보고 손을 멈췄다. 상자 안에 든 물건을 떠올리자, 재윤은 택배 접수 화면을 닫았다.“직접 가져가는 게 낫겠다.”재윤은 원래 행동이 빠른 편이었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표를 예매했고,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를 마친 뒤 옷을 갈아입었다. 한밤중이었지만 곧장 나산시로 가서 유하를 찾아갈 생각이었다.그런데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거실에는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 소파에는 두 사람이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준서와 성찬이었다.재윤은 준서 발밑에 놓인 농구공을 보고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둘이 왜...?”“그 표정 하지 마. 우리 엄마 집인데 내가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나이를 먹으며 준서는 어릴 때만큼 제멋대로 굴지는 않게 되었지만, 말투와 행동은 여전히 거침없었다. 이 정도만으로도 많이 얌전해진 편이었다.준서는 공을 툭 차
“미안해.”“내가 그 말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긴 시간 눌러 온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 나온 탓인지, 다시 만난 청산에게는 감추기 어려운 날이 서 있었다.유하는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청산을 본 적이 없었다. 유하의 눈에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어딘가 울음으로 이 상황을 넘겨보려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유하는 울면서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작게 떨었다.청산은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쓸어 올리며 제자리에서 몇 걸음 서성였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유하 앞에 함께 쪼그려 앉았다.“됐어. 그만 울어. 내가 잘못했어.”두 사람이 다툴 때면 늘 청산이 먼저 물러났던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청산의 눈가도 붉어졌지만, 청산은 애써 눌러 삼켰다.“너 눈 때문에 고생했잖아. 이렇게 울다가 또 눈 나빠지면...”유하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알고 있었어...?”청산은 기가 막힌 듯 웃었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하의 얼굴에 흐른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내가 네 일 중에 모르는 게 뭐가 있는데?”눈물을 닦아주던 청산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네 눈 다쳤을 때, 나는 기지에서 프로젝트 하나에 매달려 있었어. 외부 연락 장비도 전부 회수된 상태였고. 나오고 나서야 알았어... 그때 너는 이미 해외로 갔고, 오승현이 나를 찾아왔어.”유하가 굳어졌다.“오승현이...”“오승현이 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많이 지껄였지.”청산은 그 이야기를 길게 꺼내고 싶지 않은 듯 말을 돌렸다.“유하야, 너는...”유하의 얼굴을 닦던 청산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청산은 두 손으로 유하의 얼굴을 감쌌다. 두 사람은 뽕나무 아래에 쪼그려 앉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내가 오승현처럼, 네 앞에서 모든 가면을 벗어 던질 수 있었다면 우리의 다음 걸음은... 다른 끝에 닿았을까?”유하는 다시 울 것 같았다.“선배도 참...”청산은 유하의 얼굴을 감싼 채, 이마를 맞댔다
유하가 눈을 들어 청산을 바라보았다.오랜만에 마주한 청산은 예전의 맑고 다정한 분위기에 여유로움까지 더해져 있었다. 세월은 청산에게 많은 흔적을 남겼지만, 그 흔적마저 깊은 분위기로 스며들어 있었다. 이전에 만날 때마다 갖춰 입던 정장 차림과는 달랐다. 지금의 청산은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느슨하게 걸친 셔츠 소매는 팔꿈치 위까지 걷혀 있었고, 허리선은 커피색 와이드 슬랙스 안에 자연스럽게 정리되어 있었다.편안하고 느슨한 차림이었다. 거기에 얇은 은테 안경까지 더해지니, 단정하고 지적인 느낌이 한층 짙어 보였다.분명 익숙한 모습이었다.동시에 어딘가 낯설었다.유하는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당황이 너무 커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곳에서 청산을 마주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계속 아무 말도 안 할 거야?”청산은 시선을 조금 내렸다. 더 몰아붙이지 않고, 몸을 돌려 공장 건물 문 앞으로 걸어갔다. 청산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들어와.”유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청산을 따라 들어갔다.건물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오래도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탓인지 희미한 곰팡내도 났다.안쪽으로 더 들어가 뒷문을 지나자, 어릴 적부터 그 자리에 자라 있던 굵은 늙은 뽕나무가 눈앞에 나타났다. 뽕나무의 가지와 잎은 뒤뜰을 가득 덮고 있었다. 하늘빛은 절반 넘게 가려졌고, 잎사귀 사이로 잘게 부서진 빛만 드문드문 내려앉았다.청산은 뽕나무 앞에 서서 고개를 들고 무성한 나뭇잎을 올려다보았다.“기억나? 너 저 위에서 떨어졌잖아.”청산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을 말하고 있었다. 당시 유하는 자신이 청산을 깔고 앉는 바람에 청산이 운 줄 알고, 한참 동안 달랬었다.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청산이 울고 있었던 건 집안 일 때문이었다.그래도 두 사람은 바로 이곳에서 알게 되었고, 친구가 되었다.그 뒤로 수많은 일이 이어졌다.“가끔 예전 일이 자꾸 떠올라. 잊히지도 않고, 계속 마음에 걸려.”청산의
생각이 저만치 날아가던 여름의 머리 위로 가벼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손길이었다. 부드러운 구름이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여름이 정신을 차렸을 때, 유하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여름이는 자주 멍해지는구나... 밥 먹을 때도 그러더니.”‘아아아아아, 너무 가까워!’‘식사할 때는 할머니랑 얘기하고 계셨잖아요. 저까지 보고 계셨어요?’여름의 얼굴이 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유하는 여름이 긴장한 줄 알았는지 두어 걸음 물러섰다. 조금 거리를 둔 채 유하가 말했다.“공부 열심히 해. 디자인에 관심 있으면 대학 졸업하고 ‘Splendid’의 인턴십도 한번 생각해 보고.”“네?”여름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차 한 대가 다가왔다. 운전기사가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갈게.”유하는 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기 전, 유하는 여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공부 열심히 해. 내가 한 말도 마음에 두고 잘 생각해 봐. 할머니께는 말씀드리지 말고.”말을 마친 유하는 여름에게 살짝 윙크했다.“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여름의 머릿속은 죽처럼 뒤섞여 있었다. 여름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밤길을 따라 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여름은...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이런 생각을 했다.‘내일 애들한테 말해야지.’‘나 유하 이모 봤다고. 같이 밥도 먹었다고! 한 상에서 같이 밥도 먹었다고!’...학교를 둘러보고 선생님도 만난 뒤, 유하는 바로 W시로 돌아가지 않았다.유하는 운전기사에게 하루 휴가를 주었다. 그러고는 산뜻한 민트색 시폰 원피스로 갈아입고, 레이스 장식이 달린 밀짚모자를 썼다. 이곳을 천천히 걸어 볼 생각이었다.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은 곳이었다.다시 이 도시에 발을 들이고 보니, 예전에 짙게 가라앉아 있던 어둠은 사라지고 그리움만 남아 있었다.걷고 또 걷다 보니, 유하는 어느새 한 공장 앞에 서 있었다.기억 속에서 이 공장은 오래전 이미 버려진 곳이었
연우의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룸 안 여기저기서 작은 웃음들이 새어 나왔다.그 웃음에는 어떤 존중도 없었다.‘내? 웃기지도 않지.’이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유하를 제대로 된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오승현의 친구들이란 대개 이런 식이었다.겉으론 예의를 차리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유하를 지우고 연우를 ‘정실’로 취급했다.하지만 유하도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 하나 사람답게 생각하진 않았다.그 사람들의 시선 따위 무시한 채, 그저 조용히 오승현만을 똑바로 바라봤다.말 한마디 없이.침묵이, 오히려 더 강하게 방을 짓
N Laugh, 2층 프라이빗 라운지.넓고 화려한 프라이빗 룸 안, 명품 정장과 고급 드레스를 입은 젊은 남녀 십수 명이 자유롭게 앉아 있었다.그 중심에 오승현과 하연우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서로의 어깨가 거의 닿을 만큼 가까이.이 자리에 모인 인물들은 모두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이었다.오씨 가문과 하씨 가문, 그리고 그 주변 권세가들 사이에서 자라온 인맥들.자연스레 말투도 가볍고, 대화도 막힘이 없었다.“승현아, 이번에 만든 신설 법인 있잖아. FK테크, 맞지? 기술팀은 구성 끝났어?”승현의 오른쪽에 앉은 배
‘출국하고 나서 다시 돌아올 거냐...’그 질문은 굳이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유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너무 단정적인 것 같아 곧 다시 작게 끄덕였다.지난번 일을 겪은 뒤로, 유하의 마음속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일단 국내를 벗어나기만 하면 돼.’‘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변호사팀이나 진주연이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한다면...’‘최악의 경우라도 2년 분리 거주 후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어. 방법은 있어.’유하의 속내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청산
“싸우냐고요? 아니에요.”준서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사실대로 대답했다.준서의 눈에 엄마는 언제나 온화한 사람이었다.단 한 번, 엄마가 화내는 모습을 본 건 연우 이모와 함께 있었을 때였다.그래서인지 요즘은 연우를 만나러 가는 일조차 엄마에겐 차마 말하지 못했다.“이모, 예전에 엄마랑 오해가 있다고 했잖아요. 이제 화해하고 잘 지내기로 했다면서... 언제 화해하는 거예요?”엄마를 피해 다니는 게, 어린 준서에겐 그저 답답하고 번거로웠다.“곧이야, 곧.”연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동자 깊은 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