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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서한월
연우의 목소리에 준서의 눈은 순간 반작 빛났다.

“이모! 연우 이모!”

준서는 높은 소리로 연우의 이름을 부르며 화가 난 듯 말했다.

“아빠는 거짓말쟁이예요. 약속도 안 지키고. 앞으로 아빠랑 말도 안 섞을 거예요. 연우 이모, 아빠는 거짓말쟁이예요!”

심지어 마지막에는 연우한테 승현을 일러바쳤다.

전화 건너편에 있던 연우는 준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얼른 핸드폰을 건네받아 다정한 목소리로 준서를 달랬다. 심지어는 승현한테 화를 내는 듯 나무라더니 이번 주말에 만나 같이 게임도 하자고 약속했다.

그제야 준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역시 연우 이모가 말해야 통한다니까.’

‘예전에 아빠한테 혼나거나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엄마를 찾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아빠는 엄마 말 듣지도 않으니까.’

얼마 뒤 준서는 아쉬운 듯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아빠가 방금 엄마 오늘 출장 갔다 돌아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오늘 밤 돌아오겠네?’

‘안돼. 싫어. 엄마가 오면 또 나 단속할 텐데.’

‘그러면 게임도 못 놀 거고. 짜증 나!’

‘아빠는 본인도 엄마랑 있는 걸 싫어하면서 왜 자꾸 나더러 엄마랑 같이 있으래? 아빠 나빠!’

‘아빠 말 안 들을래. 할머니 집 갈래. 그럼 엄마가 돌아와도 같이 있을 필요 없겠지?’

준서는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서툰 동작으로 옷을 껴입었다. 그러면서도 게임기는 잊지 않고 품에 안고는 1층으로 내려가 윤해월의 방문을 두드렸다.

잠에서 깬 윤해월은 눈앞에 있는 귀한 도련님이 또 왜 갑자기 말썽을 피우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애써 졸음을 참으며 기사를 불러와 늦은 밤 준서를 오씨 가문 본가로 보냈다.

...

그 시각 유하는 집에서 한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설령 안다고 해도 해를 거듭할수록 쌓인 실망감 때문에 이제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유하는 이제 이혼하기로 완전히 마음을 다잡았고 양육권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유하는 습관적으로 일찍 일어났다.

컴퓨터에서 패션위크에 관한 최신 소식을 확인한 유하는 가는 길에 회사 아래에서 아침을 사 들고 출근했다.

더 이상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과 아들을 위해 영양가 가득한 아침상을 준비할 필요가 없는 데다, 이곳은 잠시 지내는 곳이라 유하는 요즘 매일 밖에서 음식을 사 먹는다.

그 덕에 넉넉해진 시간에 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나라도 더 할 수 있었다.

오늘 유하는 하루 종일 신입사원을 면접 보고, 최근 업무와 인수인계할 자료를 정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여전히 때맞춰 칼퇴근했다.

월말에 고모할머니가 돌아온다고 했으니, 그 전에 작품을 완성해 작품집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이거야말로 가장 주요한 업무인데, 제때 완성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빠듯했다.

저녁 6, 7시는 마침 퇴근 시간이라 길은 무척 막혔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2시간 넘게 운전해서야 유하는 겨우 W시 교외에 ‘대나무숲’이라는 별장 동네에 들어섰다.

대나무 숲을 지나 도착한 2층짜리 별장 문 옆에는 ‘리아’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유하는 그동안 일하면서 번 월급을 늘 절약하고, 시간 날 때 상류층 고객을 위해 맞춤 제작 옷을 만들어 돈을 벌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이 별장을 사들여 본인의 작업실로 삼았다.

그동안 유하는 비록 가정에 충실하고 IT 업계에 매진했지만, 단 한 번도 디자인을 포기한 적이 없다.

승현은 유하가 밖에 나돌아다니는 걸 유독 싫어한다.

예전에 유하가 MB그룹에 들어오는 걸 거절한 건 그녀가 싫어서인 것도 있지만, 얌전히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정에만 충실한 사모님이 되기를 바라서였다.

하지만 유하는 절대 굴복하는 성격이 아니다.

유하는 오히려 승현이 좋아하는 IT 기술을 배우고 7년이라는 시간을 이용해 승현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심지어 이제는 빈털터리로 이혼하게 될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디자인을 꾸준히 견지해 왔다는 거다.

그녀가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추는 걸 싫어하는 승현 때문에, 유하는 ‘리아’라는 이름으로 몰래 활동하면서 친한 친구가 추천한 고객들에게 핸드메이드 맞춤 제작 의상 주문을 꾸준히 받아왔다.

훌륭한 서비스, 철저한 고객정보 관리, 좋은 평판, 무엇보다 독창적이면서도 화려하고 신비로운 고전미가 돋보이는 디자인은 유하를 찾는 고객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심지어 오래전 대가 끊겨 무형문화재로 기재된 자수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유하는 그동안 이 업계에서 조용히 이름을 알렸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국제적인 큰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현재 유하가 주문받는 의상 가격은 기본적으로 수천만 원 이상이다. 심지어 수억 원을 넘긴 의상도 몇 벌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롯이 디자인에만 매진할 수 있으니 분명 더 빨리 발전할 게 뻔했다.

별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텅 빈 로비가 보였다.

로비 벽에는 유화와 수묵화가 가득 걸려 있었는데, 대부분이 인물화였다. 그사이 채 완성되지 않은 디자인 초안도 몇 있었다.

공간 가득 차지한 옷걸이에는 다양한 옷감과 채 완성되지 않은 옷이 걸려 있었고, 마네킹과 잡다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앞으로 주말 이틀 동안, 유하는 여기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2층은 완성품과 작품집 등 귀중한 물건을 놓는 곳이라 유하는 곧장 2층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보이는 천을 뒤집어쓴 마네킹에 유하는 잠깐 멈칫했다.

‘이 옷은...’

천을 걷어 내니 마네킹에 걸려 있는 자수 박힌 남성 양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복 소매에는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상운 모양의 표식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리아의 개인 작업실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그 외에 양복 어깨에는 은실로 수놓은 날개를 펼친 학 한 마리가 있었는데, 학의 입에는 값비싼 루비가 박혀 있었다.

마침 심장 부위에 박혀 있는 루비는 조명 아래에서 눈부시게 반짝거려 옷 전체에 우아하면서도 어느 정도 절제된 럭셔리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그 옷을 본 순간 유하는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이건 유하가 승현을 위해 만든 옷이다. 퇴근 후 시간 날 때마다 밤을 새워가며 디자인 초안을 그리고, 신중히 고른 천을 하나하나 직접 커트하고 수 놓은 뒤, 보석 바이어한테서 어렵게 희귀한 루비까지 사들여 3달 동안 만들어낸 옷이다.

원래 결혼 8주년 기념일에 승현에게 선물할 참이었는데, 기념일이 오기도 전에 유하는 남편과 아들의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이제 이 옷만 봐도 그날 거리에서 협박받던 장면이 떠올라 유하는 당장이라도 옷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분에 겨워 가위를 쥐고 옷을 베어버리려던 찰나, 유하는 순간 망설였다.

이 옷은 앞으로 영원히 승현에게 줄 수 없다. 주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망가뜨리자니 유하는 왠지 아쉬웠다.

이건 유하가 몇 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다.

결국 유하는 옷을 건드리지 못하고 다시 흰 천으로 덮어버렸다.

‘나중에 루트를 찾아 팔아버려야겠어.’

핸드메이드 맞춤 제작은 원래 독창적인 다지인과, 개인의 몸매에 꼭 맞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의상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유명하다면 이미 완성된 작품을 남에게 파는 것도 어렵지는 않다.

...

그날 밤.

그린힐, 오씨 저택.

회사 일을 마친 승현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늘 집에서 자신을 반기던 유하는 시선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승현은 윤해월에게 물었다.

“집사람은요?”

윤해월은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해 다시 물었다.

“대표님, 사모님은 얼마 전에 출장 갔잖아요. 아직 안 돌아오셨는데요.”

‘출장?’

‘이미 돌아왔잖아. 어젯밤 분명 봤는데.’

‘에이. 그 여자가 갈 곳이 어디 있다고.’

살짝 의아한 감이 있었지만 승현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가 기억하건대, 유하는 결혼 전에 가족들과 사이가 틀어졌었다. 게다가 그동안 가족한테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

W시에는 유하가 아는 친구도 가족도 없으니 갈 수 있는 곳이 있을 리가 없다.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여기뿐인데, 어디를 가겠어?’

승현은 준서가 본가로 갔다는 걸 알아낸 뒤 바로 집을 떠났다.

그가 돌아온 건 사실 준서를 데리러 온 거였다. 전에 분명 연우와 준서를 데리고 놀러 가기로 약속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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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455화

    오늘 회의에서 그 이름이 다시 거론되었다.이용석이 FK테크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그는 심지어 9500억 원 규모의 신규 프로젝트 예산 승인까지 제안했다.회의실은 일순 조용해졌고, 모두가 눈치만 보며 상석에 앉은 유하를 힐끗거렸다.이용석이 프로젝트 계획서를 스크린에 띄웠다.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AI 자동화 연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MB그룹의 산업 구조상, 자동화 기술은 효율을 높이고, 안정적인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었다.그는 말을 이어갔다.“대표님, 이 프로젝트는 사실 전 대표이사님이 생전에 구상하셨던 일입니다. 어찌 보면 유언과도 같습니다.”잠시 숨을 고르고, 정면의 유하를 바라봤다.“대표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 기술이 완성되면 대형 산업 설비를 지능적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기계 고장을 예측하고, 에너지 낭비를 줄이며 위험 요소를 사전에 파악해 안전성을 크게 높일 수 있습니다. 이건 명백히 ‘이익만 있는’ 프로젝트입니다.”이용석의 목소리가 점점 단호해졌다.“물론 외부 기술력을 도입할 수도 있습니다만, 자체 연구진만큼 신뢰할 만한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그러니... 대표님께서 개인적인 이유를 떠나 조금 더 이성적으로 판단해 주시길 바랍니다.”그 말은 명백히 ‘의도된 자극’이었다.순간, 유하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스쳤다.“개인적인 이유요?”그녀의 목소리가 낮고 차분하게 흘렀다.“이사님께서 제 사정을 그렇게 잘 아시는지 몰랐습니다. 어떤 ‘개인적인 이유’라고 생각하시는데요?”그녀의 시선이 살짝 올려졌다.“괜찮다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죠.”회의실 온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이용석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그는 유하가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문제를 거론할 줄은 몰랐다.하지만 이용석의 의문이 완전히 억측은 아니었다.FK테크 관련 안건은 1년 동안 단 한 번도 원안 그대로 통과된 적이 없었다.심지어 기술적으로 큰 문제가 없는 안건조차도 유하가 모두 보류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454화

    MB그룹 하나만으로도 벅찼지만, 유하가 하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이제는 소성란에게 지도를 받으며 Splendid의 경영권까지 천천히 넘겨받고 있었다.압박감은 컸다.하루하루가 버텨내는 일의 연속이었다.그래도 다행이었다.유하는 혼자가 아니었다....전화가 연결됐다.그 순간, 차가웠던 유하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목소리도 한결 낮고 온화했다.“고모할머니, 저 도착했습니다.”[그래.]짧은 대답.소성란의 어조는 그리 좋지 않았다.[언제 돌아올 거야?]소성란은 여전히 오씨 가문을 싫어했다.그리고 그 가문과 유하가 엮이는 것도 못마땅했다.유하가 그런 소성란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만약 승현이 죽지 않았다면, 아무리 거액의 유산이라도 소성란은 유하가 그것을 물려받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소성란은 그에 버금가는 재산과 지위를 유하에게 직접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승현이 남긴 유산은 오히려 ‘짐’이었다.적어도 소성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그녀는 아직도 유하가 겪었던 고통을 잊지 못했다.하지만 승현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일이 끝나자 소성란은 더 이상 유하의 선택을 막지 않았다.‘사람이 죽으면, 남는 건 추억뿐이지.’“금방이에요. 예전처럼, 일주일쯤이면 돌아갈 것 같아요.”유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소성란의 마음속 상처를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MB그룹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그저 빠르게 돌아가겠다고만 했다.짧게 안부를 전한 뒤, 통화를 끊었다....차는 어느새 나무들이 우거진 구역으로 들어섰다.붉은 벽돌 빛 6층짜리 건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고, 그 중앙엔 유리 외벽이 반짝이는 본관 빌딩이 서 있었다.이 일대 전부가 MB그룹 본사였다.주변의 6층 건물들은 각 부서를 위한 별관들이었고, 용도에 따라 세분되어 있었다.1년 전만 해도 이곳은 유하에게 낯선 공간이었다.하지만 이제는 너무도 익숙했다.차에서 내린 유하는 자연스럽게 본관 안으로 들어섰다.대표이사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손가락을 대자 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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