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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서한월
차로 돌아온 이솔은 아직도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고개를 돌렸더니 친구는 속상한지 고개를 숙인 채 온종일 핸드폰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솔은 너무 마음 아파 유하를 와락 끌어안았다.

“유하야. 괜찮아. 다 잘될 거야.”

갑작스러운 포옹에 유하는 감동되는 동시에 이 상황이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곧이어 어깨에 통증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왜? 왜 그래?”

결혼한 이후로 유하가 우는 걸 본 적 없는 이솔은 이 순간 너무 놀라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때 유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괜찮아. 어깨가 아파서 그래.”

흠칫 놀란 이솔은 그제야 태건이 손을 뻗어 유하를 막을 때 마침 어깨 부위에 손을 올렸다는 걸 떠올렸다.

차 안에 히터가 켜져 있는지라 이솔은 곧바로 유하의 옷깃을 내렸다.

옷 안을 살핀 순간 이솔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유하의 어깨 부위는 자주색으로 멍이 들었다.

태건은 운동하던 사람이라 힘이 워낙 세고, 유하 역시 그런 태건을 밀치느라 적잖이 힘을 썼다. 그 때문에 태건은 유하를 막으려고 힘 조절을 못 해 유하를 다치게 한 모양이었다.

워낙 뽀얀 피부 때문에 살짝 힘줘서 잡아도 빨갛게 자국이 남는데, 이번에는 아예 멍이 들었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나쁜 놈들! 개자식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대할 수가 있어?”

이솔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유하가 반응할 새도 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됐어. 나 괜찮아. 약 바르고 휴식하면 괜찮아져.”

유하는 다정하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여전히 슬퍼하는 이솔을 보더니 얼른 핸드폰을 흔들었다.

“이것 봐. 이게 뭐게?”

눈꼬리에 달린 눈물을 쓱 닦아낸 이솔은 단번에 눈을 반짝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까 사진 지운 거 아니었어?”

액정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방금 태건 앞에서 지운 승현과 연우의 다정한 사진이었다.

유하는 옷깃을 여미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었어?”

비록 맨 처음 IT를 배운 게 승현을 위해서였지만 승현은 여전히 유하를 늘 무시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하는 학습에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덕에 어느덧 IT 업계 최고 전문가와 맞먹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니 이런 사진을 복구하는 건 전문가인 유하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솔은 유하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맞다! 우리 유하 너무 대단해!”

이솔은 유하의 아픈 어깨를 피해 조심스럽게 품에 기대더니 마구 몸을 비볐다.

이솔도 사실 유하가 컴퓨터 학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유하가 이 학과를 선택한 게 승현을 위해서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물론 승현은 유하의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솔은 늘 유하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걸 전문가 수준으로 배웠으니, 이런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걱정하지 마.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비록 이혼 소송이 내 특기는 아니지만, 학교로 돌아가 교수님한테 도움을 청하더라도 이번 소송 멋지게 승소시켜 줄게. 절대 그 나쁜 것들이 원하는 대로 두지 않아!”

이솔은 가슴팍을 팍팍 두드리며 약속하더니 이내 이를 갈았다.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은 버려! 다음에 더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 거야!”

유하는 저릿한 마음을 무시한 채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걱정되어 물었다.

“하지만 나 비서가 오늘 한 협박이 마음에 걸리는데. 네 일자리가...”

이솔은 유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을 휘휘 저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내 친구 사건도 해결하지 못하면 내가 변호사 일 해서 뭐해? 차라리 아버지 회사나 물려받고 말지.”

유하는 이것이 친구의 위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솔은 어릴 때부터 꿈이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잣집 공주님으로 태어났으면서 이 고생을 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 이 자리까지 올라올 필요가 뭐 있었을까?

변호사 직업은 절대 이솔이 말한 것처럼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솔이 이렇게까지 악에 받쳐 도와주겠다고 나서는데, 이 상황에 거절하면 오히려 이솔이 화낼 수도 있었다.

결국 유하는 웃으며 이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너만 믿을게. 아무튼 나도 이제 다시 디자인업계로 돌아갈 생각이니, 정 안 되면 내가 연봉 높게 쳐서 내 개인 변호사로 고용할게.”

이솔은 그 말에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드디어 마음 다잡은 거야?”

‘우리 유하 디자인 실력은 또 알아줘야지!’

유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IT 업계에서도 전문가가 되었다.

그런데 디자인 업계에서는 이미 십 대 때 이름을 날리고, 천재 디자이너로 불렸다.

더군다나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린 전통 의상 연구자이자 글로벌 패션 디자이너가 바로 유하의 스승님이다.

유하의 스승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13개 오트 쿠튀르 브랜드 중 하나를 창립한 분으로, 풍부한 인맥과 자원을 자랑한다.

안타깝게도 집안 사정과 결혼 후 승현을 위해 IT 업계로 갈아타면서 수년이란 세월을 허비했지만, 유하의 재능에 다시 돌아올 마음만 있다면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 칠 수 있을 거다.

...

내일 또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잠깐 대화를 나누다 이내 헤어졌다.

회사 근처에 있는 단층 아파트에 막 도착했을 때, 유하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의아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확인한 유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고모할머니 소성란이었다.

낮에 전화하려다가 결국 하지 못하고 문자를 보낸 유하는 솔직히 답장받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오늘 바로 답장이 왔다.

유하는 참지 못하고 서둘러 문자를 읽어 봤다.

[나 요즘 멜라노 패션위크에 참석 중이야. 얼마 뒤에 패리 오트 쿠튀르 패션쇼에 참석해야 해. 네 일은 이번 달 말에 돌아가서 얘기하자. 그때 최근 그린 작품 가져와.]

7년 만에 처음 대화해 보는 거지만, 소성란은 여전히 노련하고 시원시원했다.

하지만 이왕 답장받았으니 두 사람 사이는 다시 회복할 희망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인지 하루 종일 팽팽했던 긴장감이 이제야 풀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좋은 일이 하나라도 있네.’

‘이번 달 말까지 열흘 정도 있어.’

‘지금 회사 인수인계를 하는 것 외에 이것도 제대로 준비해야겠어.’

‘고모할머니는 일에 있어 누구보다 엄숙하고 친분보다는 작품과 실력으로 말하는 사람이니까.’

속으로 계획을 세우며 샤워를 마친 유하는 어깨에 약을 바르고는 이내 잠자리에 누웠다.

비록 잠들기 전 뭔가 잊은 것 같았지만 하루 종일 피곤한 탓에 유하는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

그린힐, 오씨 저택.

가사도우미도 이미 잠든 시각, 준서 혼자 거실에서 밤새 게임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까지 놀다 보니 문득 짜증이 밀려왔다.

‘엄마한테 전화하기는 싫은데. 엄마는 매번 똑같은 말만 하고 이것저것 당부해서 싫어. 그런데 너무 심심하네.’

‘연우 이모랑 놀고 싶어. 연우 이모는 나랑 잘 맞는데 엄마는 너무 재미없어.’

오늘 오후만 해도 준서는 어렵게 승현의 회사로 가서 연우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승현은 또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기사더러 그를 바래다주라고 당부했다.

오늘 저녁에 돌아올 거라고 했으면서.’

‘아빠, 거짓말쟁이!’

준서는 핸드폰을 꺼내 승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환 한참 뒤에야 겨우 연결되었다.

“아빠, 언제 와요?”

[엄마가 출장 다녀왔잖아. 오늘은 엄마랑 같이 있어.]

잔뜩 흥분한 준서와 달리 승현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아니에요!”

준서는 순간 더 언짢아졌다.

“아빠는 거짓말쟁이예요!”

[엄마 안 왔어?]

승현은 살짝 놀란 듯 물었다.

‘출장 끝난 거 아닌가? 그래서 오늘 나 미행해서 몰래 사진도 찍은 거잖아. 그런데 집에 안 갔다고? 오늘 일 때문에 화내는 건가?’

‘그런데 몰래 미행하고 사진 찍은 건 벌 받아 마땅하잖아.’

‘이제 점점 막 나가네. 며칠 뒤면 알아서 다시 기어들어 오겠지 뭐. 항상 그랬으니까.’

승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안 왔어요!”

준서는 화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엄마는 싫거든요. 엄마랑 같이 있는 거 너무 짜증 나요. 아빠, 빨리 와요.”

준서는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때 전화 건너편에서 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현아,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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