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서한월
차로 돌아온 이솔은 아직도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고개를 돌렸더니 친구는 속상한지 고개를 숙인 채 온종일 핸드폰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솔은 너무 마음 아파 유하를 와락 끌어안았다.

“유하야. 괜찮아. 다 잘될 거야.”

갑작스러운 포옹에 유하는 감동되는 동시에 이 상황이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곧이어 어깨에 통증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왜? 왜 그래?”

결혼한 이후로 유하가 우는 걸 본 적 없는 이솔은 이 순간 너무 놀라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때 유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괜찮아. 어깨가 아파서 그래.”

흠칫 놀란 이솔은 그제야 태건이 손을 뻗어 유하를 막을 때 마침 어깨 부위에 손을 올렸다는 걸 떠올렸다.

차 안에 히터가 켜져 있는지라 이솔은 곧바로 유하의 옷깃을 내렸다.

옷 안을 살핀 순간 이솔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유하의 어깨 부위는 자주색으로 멍이 들었다.

태건은 운동하던 사람이라 힘이 워낙 세고, 유하 역시 그런 태건을 밀치느라 적잖이 힘을 썼다. 그 때문에 태건은 유하를 막으려고 힘 조절을 못 해 유하를 다치게 한 모양이었다.

워낙 뽀얀 피부 때문에 살짝 힘줘서 잡아도 빨갛게 자국이 남는데, 이번에는 아예 멍이 들었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나쁜 놈들! 개자식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대할 수가 있어?”

이솔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유하가 반응할 새도 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됐어. 나 괜찮아. 약 바르고 휴식하면 괜찮아져.”

유하는 다정하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여전히 슬퍼하는 이솔을 보더니 얼른 핸드폰을 흔들었다.

“이것 봐. 이게 뭐게?”

눈꼬리에 달린 눈물을 쓱 닦아낸 이솔은 단번에 눈을 반짝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까 사진 지운 거 아니었어?”

액정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방금 태건 앞에서 지운 승현과 연우의 다정한 사진이었다.

유하는 옷깃을 여미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었어?”

비록 맨 처음 IT를 배운 게 승현을 위해서였지만 승현은 여전히 유하를 늘 무시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하는 학습에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덕에 어느덧 IT 업계 최고 전문가와 맞먹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니 이런 사진을 복구하는 건 전문가인 유하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솔은 유하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맞다! 우리 유하 너무 대단해!”

이솔은 유하의 아픈 어깨를 피해 조심스럽게 품에 기대더니 마구 몸을 비볐다.

이솔도 사실 유하가 컴퓨터 학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유하가 이 학과를 선택한 게 승현을 위해서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물론 승현은 유하의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솔은 늘 유하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걸 전문가 수준으로 배웠으니, 이런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걱정하지 마.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비록 이혼 소송이 내 특기는 아니지만, 학교로 돌아가 교수님한테 도움을 청하더라도 이번 소송 멋지게 승소시켜 줄게. 절대 그 나쁜 것들이 원하는 대로 두지 않아!”

이솔은 가슴팍을 팍팍 두드리며 약속하더니 이내 이를 갈았다.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은 버려! 다음에 더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 거야!”

유하는 저릿한 마음을 무시한 채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걱정되어 물었다.

“하지만 나 비서가 오늘 한 협박이 마음에 걸리는데. 네 일자리가...”

이솔은 유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을 휘휘 저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내 친구 사건도 해결하지 못하면 내가 변호사 일 해서 뭐해? 차라리 아버지 회사나 물려받고 말지.”

유하는 이것이 친구의 위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솔은 어릴 때부터 꿈이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잣집 공주님으로 태어났으면서 이 고생을 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 이 자리까지 올라올 필요가 뭐 있었을까?

변호사 직업은 절대 이솔이 말한 것처럼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솔이 이렇게까지 악에 받쳐 도와주겠다고 나서는데, 이 상황에 거절하면 오히려 이솔이 화낼 수도 있었다.

결국 유하는 웃으며 이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너만 믿을게. 아무튼 나도 이제 다시 디자인업계로 돌아갈 생각이니, 정 안 되면 내가 연봉 높게 쳐서 내 개인 변호사로 고용할게.”

이솔은 그 말에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드디어 마음 다잡은 거야?”

‘우리 유하 디자인 실력은 또 알아줘야지!’

유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IT 업계에서도 전문가가 되었다.

그런데 디자인 업계에서는 이미 십 대 때 이름을 날리고, 천재 디자이너로 불렸다.

더군다나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린 전통 의상 연구자이자 글로벌 패션 디자이너가 바로 유하의 스승님이다.

유하의 스승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13개 오트 쿠튀르 브랜드 중 하나를 창립한 분으로, 풍부한 인맥과 자원을 자랑한다.

안타깝게도 집안 사정과 결혼 후 승현을 위해 IT 업계로 갈아타면서 수년이란 세월을 허비했지만, 유하의 재능에 다시 돌아올 마음만 있다면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 칠 수 있을 거다.

...

내일 또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잠깐 대화를 나누다 이내 헤어졌다.

회사 근처에 있는 단층 아파트에 막 도착했을 때, 유하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의아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확인한 유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고모할머니 소성란이었다.

낮에 전화하려다가 결국 하지 못하고 문자를 보낸 유하는 솔직히 답장받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오늘 바로 답장이 왔다.

유하는 참지 못하고 서둘러 문자를 읽어 봤다.

[나 요즘 멜라노 패션위크에 참석 중이야. 얼마 뒤에 패리 오트 쿠튀르 패션쇼에 참석해야 해. 네 일은 이번 달 말에 돌아가서 얘기하자. 그때 최근 그린 작품 가져와.]

7년 만에 처음 대화해 보는 거지만, 소성란은 여전히 노련하고 시원시원했다.

하지만 이왕 답장받았으니 두 사람 사이는 다시 회복할 희망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인지 하루 종일 팽팽했던 긴장감이 이제야 풀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좋은 일이 하나라도 있네.’

‘이번 달 말까지 열흘 정도 있어.’

‘지금 회사 인수인계를 하는 것 외에 이것도 제대로 준비해야겠어.’

‘고모할머니는 일에 있어 누구보다 엄숙하고 친분보다는 작품과 실력으로 말하는 사람이니까.’

속으로 계획을 세우며 샤워를 마친 유하는 어깨에 약을 바르고는 이내 잠자리에 누웠다.

비록 잠들기 전 뭔가 잊은 것 같았지만 하루 종일 피곤한 탓에 유하는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

그린힐, 오씨 저택.

가사도우미도 이미 잠든 시각, 준서 혼자 거실에서 밤새 게임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까지 놀다 보니 문득 짜증이 밀려왔다.

‘엄마한테 전화하기는 싫은데. 엄마는 매번 똑같은 말만 하고 이것저것 당부해서 싫어. 그런데 너무 심심하네.’

‘연우 이모랑 놀고 싶어. 연우 이모는 나랑 잘 맞는데 엄마는 너무 재미없어.’

오늘 오후만 해도 준서는 어렵게 승현의 회사로 가서 연우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승현은 또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기사더러 그를 바래다주라고 당부했다.

오늘 저녁에 돌아올 거라고 했으면서.’

‘아빠, 거짓말쟁이!’

준서는 핸드폰을 꺼내 승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환 한참 뒤에야 겨우 연결되었다.

“아빠, 언제 와요?”

[엄마가 출장 다녀왔잖아. 오늘은 엄마랑 같이 있어.]

잔뜩 흥분한 준서와 달리 승현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아니에요!”

준서는 순간 더 언짢아졌다.

“아빠는 거짓말쟁이예요!”

[엄마 안 왔어?]

승현은 살짝 놀란 듯 물었다.

‘출장 끝난 거 아닌가? 그래서 오늘 나 미행해서 몰래 사진도 찍은 거잖아. 그런데 집에 안 갔다고? 오늘 일 때문에 화내는 건가?’

‘그런데 몰래 미행하고 사진 찍은 건 벌 받아 마땅하잖아.’

‘이제 점점 막 나가네. 며칠 뒤면 알아서 다시 기어들어 오겠지 뭐. 항상 그랬으니까.’

승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안 왔어요!”

준서는 화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엄마는 싫거든요. 엄마랑 같이 있는 거 너무 짜증 나요. 아빠, 빨리 와요.”

준서는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때 전화 건너편에서 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현아, 누구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459화

    낮인데도 하늘은 잿빛이었다.가늘게 내리는 비가 도로 위를 덮고 있었다.그 흐린 풍경 속 주황색 벤틀리 한 대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차는 조용히 미끄러지듯 달렸고, 뒷좌석에는 유하가 베이지색 긴 니트 원피스를 입은 채 눈을 감고 머리를 기대어 있었다.핸드폰 진동음이 잔잔한 실내를 울렸다.며칠째 이어진 강도 높은 일정에 몸이 무겁게 가라앉은 유하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전화받았다.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뱉었다.“하연우?”‘이 여자가 이제 전화를 다 하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유하는 잠시 생각하다가 굳이 전화를 끊지 않고 받았다.“무슨 일이야.”말투는 차가웠다.[내 프로젝트 계획서 반려했다며?]전화기 너머의 연우 목소리는 유하보다도 더 냉담했다.유하는 눈을 뜨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그게 그렇게 의외야?”짧은 정적.[그 계획서엔 문제 없어.]연우의 목소리가 단단하게 떨어졌다.유하는 피식 웃었다.“그래.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더라.”“하지만 네 개발팀 수준으론 그걸 감당 못 해. 게다가 네 계획서에 구멍이 몇 개나 뚫려 있는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내가 꼭 구체적으로 짚어줘야 알겠어?”잠시 숨소리만 들렸다가 연우의 목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소유하, 내가 쓴 계획서는 완벽해. 넌 그냥 나를 일부러 막고 있잖아.][FK테크는 승현이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운 회사야. 그 사람의 열정, 그 사람의 꿈이 전부 그 안에 있어.][넌 승현이를 죽게 했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승현의 피땀까지 짓밟겠다는 거야?]연우의 말끝이 떨렸다.[자금만 막지 않으면, 더 좋은 기술팀을 영입할 수도 있어. 그럼 프로젝트는 반드시 성공해.]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끝이 천천히 굳었다.‘이 여자는... 정말 이해가 안 돼.’지난 1년 동안 유하와 오광진은 승현의 사고 이후 남은 문제들을 정리하느라 숨 쉴 틈도 없었다.FK테크는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458화

    “도련님이... 왜 갑자기 유학가겠다고 하는 거예요?”유하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어디로요?”오광진이 짧게 대답했다.“Y국.”유하는 말이 막혔다.“국내에서 공부할 수는 없나요?”오광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거기 있으니 그렇지. 네 시어머니가 널 보러 해외 나가겠다고 고집 피우는 것도 다 그 때문이야.”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속엔 답답함이 배어 있었다.승환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늘 그래왔다.이상할 정도로 건조한 부자 관계.오씨 가문에선 이제 익숙한 일이었다.유하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놀라지도 않았다.“저희 고모할머니도 절 필요로 하세요. 게다가... 고모할머니는 제가 국내에 오래 머무는 걸 좋아하지 않으세요.”‘정확히 말하자면... 오씨 가문에 있는 걸 싫어하는 거겠지.’오광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반박하지는 않았다.오씨 가문과 소성란의 사이가 틀어진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다.7, 8년 전에 시작된 해묵은앙금이었다.그는 이를 악물었다.‘오승현 이놈... 가고 나서도 아비에게 골칫거리만 남기고 갔구나.’...서재를 나와 복도를 걸으며 유하는 잠시 망설였다.하지만 결국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번호는 승환이었다.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유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유학 가려고?”[누나 지금 본가예요?]“응.”[맞아요. 가고 싶어요.]승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우리 예전에 그랬잖아요. 누나가 Y국 가면 나도 거기서 만나자고. 유학이 제일 자연스러운 방법이니까요.]그 어조가 점점 진지해졌다.[그리고... 누나, 솔직히 전 요즘 죄책감이 들어요. 지도교수님이랑 수학 과제 연구하느라 누나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몰랐어요. 정말... 누나를 영영 못 볼 뻔했잖아요.]승환은 숨을 삼켰다.[누나 혼자 해외에 있는 거, 전 정말 걱정돼요. 저한텐 누나밖에 없어요.]유하는 입술을 떼었다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457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유하는 한참 동안 박영심과 담소를 나눴다.박영심이 하품을 하며 피곤한 기색을 보이자, 유하는 그제야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하지만 바로 집을 나서지 않고, 대신 서재로 향했다.문을 열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오광진이 고개를 들었다.유하의 눈빛은 이미 냉정했다.“어머님, 어떻게 된 건가요?”그녀의 목소리는 낮지만 단호하며 눈썹 사이가 단단히 모였다.“어머님, 상태가... 뭔가 이상하세요.”오광진은 한숨을 내쉬며 손끝으로 이마를 눌렀다.그리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기억 문제야.”그가 낮게 말했다.“네 시어머니 기억이... 계속 사라지고 있어.”“뭐라고요?”유하의 표정이 굳었다.그녀는 자리로 다가가며 묻는다.“지금... 어머님은 어느 정도신가요?”“열여덟 살 이전...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어.”오광진의 목소리는 완전히 꺾여 있었다.“잠깐만요.”유하는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요. 어머님... 저는 알아보시던데요.”그녀의 말에 오광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나도 그게 이상하더라.”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이번 주 내내 의사랑 같이 네 시어머니 반응을 살폈어. 우리가 결혼한 것도 잊었고, 아들도 기억 못 한다.”그는 허탈하게 웃었다.“그런데... 너만 기억하더라.”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눈빛이 흔들렸다.“나와 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잖아. 성인 되자마자 약혼했고, 그땐 서로 손만 잡아도 얼굴이 빨개졌지.”오광진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지금은... 날 남자친구라고 생각하더라.”그 말에 서재 안의 공기가 서늘해졌다.“이게 참, 웃기지 않냐?”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남편인 난 잊었는데, 너는...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니.”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며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어머님이... 날 기억하신다고?’‘왜... 나만?’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그동안 유하는 진짜 위험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456화

    4월 5일.MB그룹 일들을 정리하고, 박영심을 만나러 본가로 가기 전, 유하는 먼저 묘역으로 향했다.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먹구름이 깔린 하늘 아래, 바람이 서늘했다.아무도 데리고 오지 않았다.운전기사도, 비서도.유하는 조용히 차에서 내려손에 든 흰 꽃 한 다발을 품에 안고 묘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묘비 앞에 다가서서 꽃을 내려두고,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검은 비석의 흑백사진.눈빛이 매섭고, 어딘가 위험한 남자였다.그 얼굴을 바라보며 유하는 아주 천천히 손을 뻗어 묻은 먼지를 닦아냈다.표정은 담담했다.눈빛은 조용했고, 숨결만 느리게 흔들렸다.“하루 늦었어.”유하는 어제 왔어야 했지만 오지 않았다.일부러, 하루를 늦췄다.유하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넌 내 인생에 늘 지각했잖아. 그래서 나도 이번엔 늦게 왔어.”‘조금씩 더 늦다가, 언젠간 아예 안 올지도 몰라.’“그날이 와도... 화내지 마.”잠시 멈추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근데 네가 화내도, 난 모르니까.”유하는 허리를 곧게 펴고, 비석을 내려다보다가 미묘하게 웃었다.“간다. 내년에 또 올게.”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물론... 안 올 수도 있겠지. 이 길도 험하고, 4월이면 비도 많고, 습기도 심하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하잖아.”말은 가볍게 흘러나왔지만, 끝내 미소는 조금 옅어졌다.‘참, 나도 가끔은 유치해.’자기 말을 떠올리며 유하는 고개를 작게 흔들고 돌아섰다.묘역을 벗어날 때까지 그녀의 걸음은 일정했다.뒤돌아보지 않았다.한참 후.묘 뒤편 숲속에서 한 남자의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그가 묘비 앞에 서서 긴 손을 들어 비석 위를 천천히 쓸었다.그 손끝에 닿은 이름.오승현.바람이 불었다.남자의 검은 트렌치코트 자락이 가볍게 흩날렸다.하늘은 여전히 흐렸다....오씨 가문 본가.유하는 유리문을 밀고 꽃이 가득한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안에는 작은 삽을 손에 쥔 박영심이 화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455화

    오늘 회의에서 그 이름이 다시 거론되었다.이용석이 FK테크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그는 심지어 9500억 원 규모의 신규 프로젝트 예산 승인까지 제안했다.회의실은 일순 조용해졌고, 모두가 눈치만 보며 상석에 앉은 유하를 힐끗거렸다.이용석이 프로젝트 계획서를 스크린에 띄웠다.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AI 자동화 연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MB그룹의 산업 구조상, 자동화 기술은 효율을 높이고, 안정적인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었다.그는 말을 이어갔다.“대표님, 이 프로젝트는 사실 전 대표이사님이 생전에 구상하셨던 일입니다. 어찌 보면 유언과도 같습니다.”잠시 숨을 고르고, 정면의 유하를 바라봤다.“대표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 기술이 완성되면 대형 산업 설비를 지능적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기계 고장을 예측하고, 에너지 낭비를 줄이며 위험 요소를 사전에 파악해 안전성을 크게 높일 수 있습니다. 이건 명백히 ‘이익만 있는’ 프로젝트입니다.”이용석의 목소리가 점점 단호해졌다.“물론 외부 기술력을 도입할 수도 있습니다만, 자체 연구진만큼 신뢰할 만한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그러니... 대표님께서 개인적인 이유를 떠나 조금 더 이성적으로 판단해 주시길 바랍니다.”그 말은 명백히 ‘의도된 자극’이었다.순간, 유하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스쳤다.“개인적인 이유요?”그녀의 목소리가 낮고 차분하게 흘렀다.“이사님께서 제 사정을 그렇게 잘 아시는지 몰랐습니다. 어떤 ‘개인적인 이유’라고 생각하시는데요?”그녀의 시선이 살짝 올려졌다.“괜찮다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죠.”회의실 온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이용석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그는 유하가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문제를 거론할 줄은 몰랐다.하지만 이용석의 의문이 완전히 억측은 아니었다.FK테크 관련 안건은 1년 동안 단 한 번도 원안 그대로 통과된 적이 없었다.심지어 기술적으로 큰 문제가 없는 안건조차도 유하가 모두 보류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454화

    MB그룹 하나만으로도 벅찼지만, 유하가 하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이제는 소성란에게 지도를 받으며 Splendid의 경영권까지 천천히 넘겨받고 있었다.압박감은 컸다.하루하루가 버텨내는 일의 연속이었다.그래도 다행이었다.유하는 혼자가 아니었다....전화가 연결됐다.그 순간, 차가웠던 유하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목소리도 한결 낮고 온화했다.“고모할머니, 저 도착했습니다.”[그래.]짧은 대답.소성란의 어조는 그리 좋지 않았다.[언제 돌아올 거야?]소성란은 여전히 오씨 가문을 싫어했다.그리고 그 가문과 유하가 엮이는 것도 못마땅했다.유하가 그런 소성란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만약 승현이 죽지 않았다면, 아무리 거액의 유산이라도 소성란은 유하가 그것을 물려받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소성란은 그에 버금가는 재산과 지위를 유하에게 직접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승현이 남긴 유산은 오히려 ‘짐’이었다.적어도 소성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그녀는 아직도 유하가 겪었던 고통을 잊지 못했다.하지만 승현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일이 끝나자 소성란은 더 이상 유하의 선택을 막지 않았다.‘사람이 죽으면, 남는 건 추억뿐이지.’“금방이에요. 예전처럼, 일주일쯤이면 돌아갈 것 같아요.”유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소성란의 마음속 상처를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MB그룹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그저 빠르게 돌아가겠다고만 했다.짧게 안부를 전한 뒤, 통화를 끊었다....차는 어느새 나무들이 우거진 구역으로 들어섰다.붉은 벽돌 빛 6층짜리 건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고, 그 중앙엔 유리 외벽이 반짝이는 본관 빌딩이 서 있었다.이 일대 전부가 MB그룹 본사였다.주변의 6층 건물들은 각 부서를 위한 별관들이었고, 용도에 따라 세분되어 있었다.1년 전만 해도 이곳은 유하에게 낯선 공간이었다.하지만 이제는 너무도 익숙했다.차에서 내린 유하는 자연스럽게 본관 안으로 들어섰다.대표이사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손가락을 대자 지문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