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여자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떨리는 입술을 앙다문 여자를 향해 그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네 X 같은 짓 때문에 내 친구가 8개월을 죽은 사람처럼 병상에 누워있었어! 너 피앙세는 맞아? 아님, 지금 얘기해! 총알을 이마에 확 박아줄 테니까!”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하던 감독의 목소리가 공기를 매섭게 갈랐다. 후두둑 눈물을 떨구는 여자를 보면서도 우석은 테이블에 널려 있는 냅킨 한 장 건네지 않았다. 더는 앉아 있지 못하고 결국 도망치고 마는 여자를 끝끝내 붙잡지도 않았다. 감독은 그런 우석을 잠시 지켜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몸이 기억한다는 말, 알아?” 아무리 머리로는 기억을 못해도 몸이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뇌의 의식적 기억보다 신체 반응이 먼저, 더 자동적으로 과거의 경험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는 지나간 일을 떠올리며 넌지시 말했다. “내가 초반해 연출했던 작품 중에 기억 상실 소재를 끌어다 쓴 멜로물이 있어. 거기서는 남자 주인공이 기억을 잃었어도 여자 주인공을 보는 순간 빡! 그냥 눈가가 촉촉해지면서 감정이 막 소용돌이치는 거지. 보고 있으면 그냥 서로 애틋해 미칠 것 같고. 근데, 너는…….” 그 말에 우석이 무심히 되물었다. “난, 뭐?” 감독은 피식 웃었다. “넌…… 좀 변했어. X 같이.” “뭐?” 우석의 눈매가 번쩍였다. “그러니까 그게 예전에는 네가 만인의 히어로였단 말이야. 좋은 놈한테든, 싫은 놈한테든, 나쁜 놈이든 그게 누구든 기본적인 선을 지킨다고 해야 할까, 사람이 참 X같이 착해빠졌었는데 이제는 좀 인간적으로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알아듣게 말해!” “봐, 지금도 봐. 나한테도 버럭 소리부터 지르잖아? 너답지 않게 여잘 울리기나 하고 말이야.” 우석은 뭐라 대꾸하려다 말고 이마를 짚었다. 기억이 텅 빈 자리를 파고드는 답답함이 다시 밀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친구의 변화가 내심 좋은지 말끝에 미소를 걸며 분위기를 돌렸다. “
“어디 뒀지? 내가 그걸…….” 제레마이야 감독은 기적적인 소생을 한 동료이자 친구로부터 아까부터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몇 주는 침대에만 머물러 지내다가 그 다음부터는 물리치료와 재활 등의 집중 치료를 거쳐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이 친구가 곧바로 자신의 핸드폰부터 찾고 있다. 그 눈빛엔 무언가 공허한 구멍 같은 게 있었다. “핸드폰, 물론 중요하지.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아? 기억을 좀 해 봐.” 딱하다는 듯 감독의 눈길이 지금도 병실 문 밖에서 떠날 줄 모르는 친구의 피앙세를 향했다. 긴 잠에서 깨어난 친구는 연인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기억 속에서 그녀의 존재만 쏙 도려낸 듯 남아 있는 것은 차가운 공허감 뿐이었다. 그녀가 다가올 때마다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 속에 치밀어오르는 사람처럼, 마치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듯 굴었다. “어떻게 다른 건 다 기억하면서 마지막 촬영 날 먹은 점심 메뉴까지도 기억하면서 피앙세에 대한 기억이 없지?” 감독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눈 속에는 호기심을 가장한 의심이 번득였다. 무언가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이 비어 있는 조각. 그 안에 무슨 진실이 숨어 있는 걸까. 그는 표정을 거두고 능청스레 제안했다. “그동안 머리카락도 많이 자랐으니까 예쁘게 커트도 하고, 가볍게 스파도 하고, 모처럼 기분 전환이나 하러 갈까? 병원에서도 이제 보호자 동반 짧은 외출은 괜찮다고 하던데.” 우석은 잠시 멈칫했다. 오랜 병상 생활 끝에 다시 바깥 공기를 쐬고 싶다는 충동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감독의 제안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감독은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있던 동료의 휠체어를 밀며 문을 나섰다. 그리곤 슬쩍 메모 하나를 문 앞에 서 있던 애틋한 눈빛의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두 시간 후에 주소에 적힌 커피숍으로. 우연히 마주친 것
무려 8개월 만의 소생이었다. 죽은 듯 8개월여의 시간을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있던 우석이 기적적으로 깨어난 뒤 그의 매니지먼트 회사를 비롯해서 현지 사정은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멈추었던 시계가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크랭크 업을 이주 남짓 남겨놓은 시간부터 느껴졌던 몸의 이상 신호. 갑작스런 방향 감각의 상실과 두통, 메스꺼움이 지속되며 들고 있던 휴대폰을 손에서 놓쳐버리는 등 어느 순간부터는 급격히 손발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피로의 누적에서 비롯된 건 줄만 알았다. 최대한 촬영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버텨 간신히 크랭크 업까지 마친 뒤, 그의 몸의 이상을 눈치챈 감독의 권유로 우석은 정밀 검사를 받게 되었다. CT와 MRI 촬영을 하게 되었고, 그 검사에서 뇌출혈의 흔적을 발견했다. 지연성 뇌출혈. 두통과 어지럼증을 동반한 건 그래서였고, 범위가 넓었다. 수술이 불가피했다. 모든 건 불행히도 오수아가 일으킨 교통사고로 인해 비롯된 것이었다. 사고 당시 별다른 몸의 이상이 없다고 생각해 차량이 반파될 정도의 큰 충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검사를 받거나 하지 않았었는데, 뒤늦게 문제가 된 걸 알게 된 것이다. ‘교통사고라는 게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도 나중에 탈 나고 후유증이 생길수도 있어요. 같이 병원으로 가서 검사한 번 받아보시죠. 차량이 저렇게 부서졌는데.’ ‘너 차 반파됐다며? 지금은 외상이 없어 보여도 나중에 고생할 수 있어. 당장 입원해서 CT라도 찍자!’ 그 말을 들을 걸. 이미 지나간 일들에 대한 후회로 눈앞이 캄캄했다. 왜 그때 좀 더 신중하지 못했을까. 다 괜찮다고, 별일 아닐 거라고 그렇게 넘겨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최고의 의료진들이 붙을 거야. 걱정 말고 수술 받아.” 촬영장에서 밤낮 함께 지내며 어느새 형제처럼 가까워진 제레마이야 감독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목소리를 낮게 눌렀다.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닌 필사적인 설득이었다. “수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런데 너 이러는 거 진짜 연우석 때문이면 나도 더 못 도와줘. 이러다 소문이라도 나면…… 연우석이 진짜 가만있을 것 같아? 솔직히 너 인터뷰 때마다 계속 애매하게 연우석 드립 치는 거 기자들도 다 알아. 대중들도 다 안다고.” 대표가 우려섞인 충고를 늘어놓자 오수아는 거의 절규하듯 받아쳤다. “대표님 바보예요? 알라고, 제발 알아달라고 하는 거잖아요!” 그 고백은 치기 어린 장난도, 단순한 언론 플레이도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곧 생존의 선언이었다.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추락했던 경험! 그 공포가 너무나도 생생해서 다시는 그 밑바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박감에 짓눌려 있었다. 배우 연우석은 그녀에게 동경과 연민, 사랑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재기를 위한 발판이기도 하였다. “이러니 회사를 두 번이나 말아먹지. 정 모르겠음, 다 급을 맞춰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때 그 사고 이후, 나 캐스팅은커녕 찾아주는 곳이 아무데도 없었어요. 그러다 연우석 인터뷰에 얼굴 내밀고 나서야 간신히 일일극 하나 따낸 거라고요. 근데, 언제까지 일일극이나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요. 주목 받으려면 이슈가 필요하고, 나한텐 그게 연우석이예요. 아시겠어요?” 대표는 할 말을 잃었다. 성공에 대한 집착인지 미련인지 눈이 벌게서 달려드는 오수아를 상대하다 하마터면 얼이 나가버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가 한 순간에 바닥까지 추락해버렸던 경험 때문일까. 그래서 이제는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걸까. 어찌됐든, 성공과 재기에 대한 열망과 연우석에 대한 집요하고도 무서운 집착은 결과적으로 오수아로 하여금 연우석의 병실을 찾아내도록 만들었다. 언젠가 대표가 말한, 영화사 직원들이 꽤 오래 드나들었다는 병실. 처음엔 그저 다리 부상 정도이겠거니 생각했다. 제대로 걸음을 내딛을 수 없어 재활 치료 정도를 받고 있는 거겠거니. 이전에 와이어에서 떨어지는 자신을 받아줄 때도 그랬으니까 어디
미니애폴리스 세인트폴 국제공항까지, 편도 11시간 여의 비행을 마치고 오수아는 M 클리닉이 있다는 미네소타주에 도착했다. 이동 중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던 오수아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휴대폰 화면을 수없이 확인했다. 출국 전 공항에서 찍은 사진. 협찬받은 명품을 온몸에 휘감고 남긴 한 장의 셀카는 벌써 수 천개의 ‘좋아요’를 끌어모았다. 댓글들의 반응은 여전히 뜨거웠다. 「역시 수아 언니! 돌아와줘서 고마워요!」 그 문장들을 눈으로 훑어내리던 순간,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올라갔다. 이전의 인기를 회복하는 듯 나날이 늘어만 가는 팔로워수와 자신의 게시물 아래 달린 응원의 댓글들에 가슴이 붕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이다. 아직은 더. 더 가야했다. 그 불안한 동행에 감시자 역할을 맡은 소속사의 대표도 함께했다. 유학파, 영어영문학과, 국제운전면허 등 자신이 가진 이력들을 늘어놓으며 말로는 통역으로 활용하라는 대표의 제의를 오수아는 선뜻 수락했다. 던지는 말마다 묘하게 계산이 묻어 있는 사람이지만 어디서나 자신의 손과 발이 되어줄 누군가는 필요한 법이니까. 사실 그날의 사고 이후, 혈중 알코올 농도 0.08% 이상으로 면허가 취소되었던 오수아는 현재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트라우마라면 트라우마라고 해야 할까. 운전대를 보면 자꾸 그날의 사고가 떠오르기도 했고. 지금도 도로에 블랙 아이스가 깔리는 겨울철이 오면 가속 페달을 힘주어 밟던 발끝의 느낌이 생생했다. 눈앞에서 미끄러져 도로 끝까지 밀려나던 그의 차량, 그렇게 부딪치며 뒷좌석이 거의 구겨지다시피 반파되어버렸던 모습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혹시나. 혹시나 많이 다쳤으면 어떡하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지옥 불에 수십 번이라도 발이 담가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적처럼 무사했고, 심지어 그 자리에서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해주기까지 했다. 운이 좋았다. 언제나 그랬듯, 그녀는 참 운이 좋았다. 대표가 넌지시 물었다. “참, 수
‘어느 분이 그러더라고요. 세상에는 평생 가는 사랑도, 평생 가는 설렘도 없다. 다만, 사랑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이해하고 보듬어주며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제가 평생…… 알아가고 싶은 사람입니다. 지금 들려드릴 노래는 저 때문에 오랜 시간 마음 고생을 참 많이 한 이 친구를 위해…… 부르겠습니다.’ 화면은 핀 조명이 내리는 팬미팅 콘서트 장에서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하는 우석의 모습에서 디졸브 되어, 한참 정점을 찍고 활동하던 당시 오수아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아이돌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그녀의 오랜 팬이었던 친구가 보내준 팬아트 영상이었다. ‘어떡하죠? 정말 생각지도 못한 너무 큰 상을 주셔서 지금 아무 생각도 안 나요. 음, 너무 큰 상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상은…… 제가 너무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연을 맡았던 일일극의 성공으로 연기대상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하던 순간, 마이크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수상소감을 얘기하던 그녀의 모습 끝엔 객석에서 열렬하게 박수를 보내고 환호하는 우석이 클로즈업 되어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그가 있었던 것처럼 감쪽같은 편집 기술에 감탄하며 오수아는 몇 번이고 돌려보고, 또 돌려보았다. ‘오수아 씨가 음주 측정을 거부하지도 않았고, 경미한 접촉 사고였습니다. 합의 의사 있고요, 현장 구속보다는 불구속 입건으로 가시죠.’ 매 순간이 생생하다. 시상식 뒤풀이를 마치고 홀로 집으로 돌아온 오수아는 와인 쇼케이스에서 좋은 날 마시려고 아껴둔 와인을 꺼내 홀짝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힘겨루기가 판을 치고, 인기 가도에 따라 철저한 차별과 배제가 이루어지는 연예계에서 이렇게까지 제 손해를 감수하면서 자신의 편이 되어 준 사람이 있었을까. 아니, 없다. 맹세컨대, 그런 사람은 없었다. ‘나 가정 있다 말했습니다.’ ‘당연히 있겠죠. 요즘 대한민국에 연우석 와이프가 어디 한둘이야? 내 팬카페 닉네임도 우석 와이픈데?’ ‘못 믿나 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