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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مؤلف: 김빠진 콜라
전화기 너머의 고혜연이 단호하고 깔끔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작성해 둘게. 내일 점심 12시에 고신 그룹 옆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 서류 전해줄게.”

“다른 데서 만나면 안 될까?”

심해린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회사 근처라 고상윤의 눈에 띌 수 있었다.

“그럼 어디서 만날까?”

고혜연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만남 카페 어때?”

심해린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고혜연은 할 말이 더 있는 듯한 눈치였다. 그녀가 심해린이 걱정돼서 그러는 걸 알았지만 이미 친구를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심해린은 너무나 미안했다. 나중에 그녀가 떠난 뒤 고혜연이 곤란해질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잘 준비를 하겠다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창고 방의 침대가 딱딱해서 등이 배겼다. 이리저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고 등뼈가 닿는 곳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문득 신혼 때가 떠올랐다. 고상윤이 집의 인테리어를 심해린에게 맡겼다. 그가 퇴근 후 편히 쉴 수 있도록 애교까지 부려 직접 외국으로 가서 척추 구조에 맞게 고가의 매트리스를 주문 제작했었다.

이젠 명서아가 돌아왔기에 안방조차 양보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심해린은 자신을 비웃으면서 씁쓸함을 삼켰다. 사실 결혼 후 고상윤은 그 침대에서 잔 적이 몇 번 없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동틀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다.

요란한 알람 소리에 심해린이 눈을 번쩍 떴다. 순간 여기가 어딘지 멍해졌다가 벽 구석에 쌓인 잡동사니들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오늘은 고신 그룹으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어제 고상윤과 약속한 일이었고 지금 이 상황에서 그를 자극해선 안 되었다.

심해린은 서둘러 일어났다. 씻다가 거울 속에 비친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간단히 화장을 하고 립스틱을 바르니 그나마 생기가 좀 도는 듯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갓 구운 빵과 커피 향이 감돌았다.

고상윤과 명서아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맞춤 셔츠 소매를 걷어붙여 튼튼한 팔뚝을 드러낸 채 공용 젓가락으로 계란 후라이를 집어 명서아의 접시에 놓아줬다.

“많이 먹어. 너무 말랐어.”

지난 3년간 심해린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핑크색 홈웨어를 입은 명서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역시 오빠밖에 없어.”

두 사람은 남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다정하게 행동했다. 그들이야말로 오랜 부부이고 계단 앞에 서 있는 심해린이 제3자 같았다.

심장이 텅 빈 것처럼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덤덤하게 웃기만 했다.

심해린의 발소리에 명서아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빛났다.

고상윤이 고개를 들었다. 매일 민낯으로 지내던 심해린이 웬일로 화장하고 나타나자 오늘 회사에 데려가기로 한 사실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 않아서 화장했겠다는 생각에 눈가에 서렸던 차가운 기운이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명서아가 승리한 자의 여유를 담아 입꼬리를 올렸다.

“언니 일어났어요? 얼른 와서 아침 먹어요.”

명서아가 다정하게 부르더니 고상윤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커피 식었는데 한 잔만 다시 만들어줄래?”

고상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에 두 여자만 남았다.

명서아는 냅킨으로 입가를 우아하게 닦고는 심해린의 화장한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출근한다면서요? 오빠도 참. 언니한테 어떻게 그렇게 고된 일을 시킬 수 있어요?”

그녀는 하던 말을 잠시 멈췄다가 대놓고 우쭐거렸다.

“아, 언니한테 아직 얘기 안 했네요. 오빠가 내 일을 응원해주겠다고 시내 중심가의 가장 좋은 위치에 법률 사무소를 차려줬어요. 나중에 변호사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나한테로 와요. 알았죠?”

이건 명백한 경고였다. 명서아가 돌아왔으니 고상윤이 그녀의 뜻대로만 움직일 것이고 심해린은 곧 쫓겨날 패배자일 뿐이라는 뜻이었다.

어제였다면 심해린은 그 말에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덤덤하게 의자를 빼고 앉아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래요? 축하해요.”

심지어 명서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출근은 상윤 씨가 직접 허락한 거예요.”

심해린은 고개를 들어 명서아의 살짝 굳어버린 얼굴을 쳐다봤다.

“오늘부터 고 대표님의 전담 비서로서 출퇴근을 함께하기로 했어요.”

그녀만 당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명서아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그녀가 포크를 움켜쥐면서 뭐라 말하려던 그때 고상윤이 커피를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그는 커피를 조심스럽게 명서아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명서아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는 심해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눈에 불쾌함이 가득했다.

심해린은 설명하기조차 귀찮았다. 이제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는 그저 오늘 하루를 버틸 힘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식사를 마친 명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고상윤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

“오빠, 나 법률 사무소까지 데려다줘. 오늘 첫날이라 내가 대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오빠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어.”

“그래.”

고상윤이 흔쾌히 허락했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던 명서아가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뒤를 돌아보며 식탁 앞에 있는 심해린에게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

가기 전 심해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 이따가 혼자 알아서 회사로 가야겠어요.”

심해린이 우유를 한 모금 들이켰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런 하찮은 일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고상윤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다면 명서아의 유치한 장난질에도 마음이 아팠겠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혼 후 할머니를 돌보려면 돈을 모아야 했기에 참고 있는 것이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심해린이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별장 단지를 벗어나서야 택시를 잡은 바람에 결국 첫날부터 지각하고 말았다.

고신 그룹 건물이 구름을 뚫을 정도로 높았다. 심해린이 로비에 들어서자 안내 데스크 직원이 그녀를 보고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금테 안경을 쓴 오만한 인상의 남자가 다가왔다. 바로 고상윤의 수석 비서인 임서준이었다.

“심해린 씨, 따라오시죠.”

심해린이 지각한 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지 말투가 사무적이었다. 입사 절차를 밟기 위해 심해린을 인사팀으로 데려간 다음 서류를 건넸다.

“작성하시면 됩니다.”

직원들이 힐끗거리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저 여자 누구예요? 임 비서님 태도가 엄청 안 좋은데요?”

“새로 온 대표 비서라던데 대표님의... 친척이랬나?”

“친척은 무슨. 낙하산이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바로 대표님의 비서가 될 리가 있겠어요?”

“꼭 그렇지도 않아요. 임 비서님이 대놓고 불친절하잖아요. 진짜 뒷배가 있으면 저렇게 함부로 대하겠어요?”

수군거림이 심해린의 귓가에 그대로 전해졌다.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펜을 들어 정성스레 이름을 써 내려갔다.

[심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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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30화

    명서아의 말에 심해린이 경악하며 바로 반박했다.“팔았다간 절대 가만 안 둬요.”“그러니까 더 팔기 싶은데요? 이건 오빠가 이미 나한테 준 거예요. 음... 색깔도 좋고 품질도 좋네요.”명서아의 목소리에 과시가 은근히 섞여 있었다.심해린이 흠칫하더니 더는 참지 않고 협박했다.“팔아버렸다간 두 사람이 나한테 해명 영상을 강요했던 일을 전부 다 폭로해버릴 거예요.”이 펜던트는 그녀가 기억을 하는 순간부터 항상 몸에 지녔던 물건이었다. 심씨 가문에 온 뒤 할머니도 비취의 상태가 좋다는 걸 알아보고 잘 간직하라고 당부했었다.심해린은 한때 진짜 사랑을 찾았다고 믿었다. 하여 더는 가족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펜던트를 고상윤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고상윤이 그녀가 선물한 걸 명서아에게 줘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돌려줘요.”심해린이 명서아를 빤히 쳐다봤다.명서아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펜던트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예요? 심해린 씨?”‘드디어 심해린한테서 무표정 말고 다른 표정을 봤어.’이 상황이 재미있었던 명서아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쁜 장난기가 발동했다. 심해린이 어떻게 할지 너무나 궁금했다.“내 거라고 했어요.”심해린이 한 걸음씩 다가갔다. 시선이 펜던트에서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돌려줘요.”“해린 씨 거라고요?”명서아가 피식 웃더니 펜던트를 손바닥 안에 숨겼다.“지금은 내 손에 있잖아요. 그럼 내 거죠.”그녀의 눈에 노골적인 도발과 경멸이 담겨 있었다. 명서아는 심해린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심해린은 감옥에 있는 동생을 위해, 거의 죽어가는 할머니를 위해 뭐든 참고 견디는 사람이었으니까.“돌려달라고 분명히 말했어요.”심해린이 이를 악물고 글자마다 분노를 눌러 담아 내뱉었다.“싫어요.”명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일부러 심해린의 앞까지 걸어가 펜던트를 들어 올렸다.“어쩔 건데요? 상윤 오빠한테 가서 고자질할 거예요?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9화

    ‘차라리 잘됐어. 지금 가장 보기 싫은 사람이 고상윤인데.’심해린은 지친 몸을 이끌고 습관처럼 창고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이 지금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이었다.두 걸음쯤 걸었을 때 2층 계단 쪽에서 부드럽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왔어요? 할머니는 좀 어떠세요?”심해린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명서아가 맨발로 계단 위에 느긋하게 서 있었다. 이 집의 여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얼굴에 걱정이 적당하게 걸려 있었다.그녀와 연기할 생각이 없었던 심해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그런데 스쳐 지나가던 순간 심해린이 갑자기 굳어버렸다.명서아가 목에 붉은 실을 하고 있었는데 붉은 실 끝에 맑고 투명한 비취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이건 심해린이 예전에 고상윤에게 선물한 펜던트였다.심해린은 순간 머리가 윙 했다. 몸이 통제되지 않을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고 발바닥에서 올라온 차가운 기운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명서아는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가슴 앞의 펜던트를 무심한 척 손으로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었다.“언니, 뭘 그렇게 봐요? 이 펜던트 예쁘죠?”심해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명서아의 얼굴을 쳐다봤다.“그걸 왜 서아 씨가 하고 있어요?”심해린의 목소리가 아주 낮았다. 한 글자 한 글자 이를 악물고 내뱉어서 무서운 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그 눈빛에 명서아는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곧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히려 더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녀는 펜던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랑하듯 심해린에게 보여주었다.“상윤 오빠가 준 거예요.”명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천진난만하면서도 잔인한 말투로 말했다.“이 색이 내 피부랑 잘 어울린대요. 오빠가 본 것 중에서 제일 예쁘다고 하던데. 어때요? 예쁘죠?”고상윤이 줬다고 했다. 게다가 예쁘다고까지...그 몇 글자가 녹슨 둔탁한 칼처럼 이미 너덜너덜해진 심해린의 심장을 한 번 또 한 번 베어버렸다.심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8화

    심해린이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안에 들어서자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뜩이나 좋지 않던 속이 그 냄새 때문에 더 울렁거렸다.복도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얬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솜 위를 밟는 것처럼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병실로 들어와 보니 할머니가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었다. 간병인이 심해린에게 말했다.“아까 의사 선생님이 보호자를 찾으시더라고요.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았어요.”간병인 장인숙은 예전에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던 아주머니였다. 심해린은 장인숙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곧바로 의사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안녕하세요, 선생님. 전 39번 베드 환자의 손녀인데요. 할머니 상태가 어떤지 여쭤보려고요.”“할머니가 입원하신 뒤로 보호자를 몇 번이나 찾았는데 계속 안 계시더군요. 지금은 일단 상태가 안정됐습니다. 외상도 괜찮아졌고 각종 수치도 안정적이에요.”의사가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심해린이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제가 일이 좀 있어서 못 왔어요. 그럼 할머니는 언제쯤 깨어나실 수 있을까요?”의사는 들고 있던 필름을 빛에 비춰 보았다가 내려놓았다.“뇌에 혈종이 있어서 신경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언제 깨어나실지는 단정하기 어려워요. 현재 상황으로 보면 깨어날 확률은 대략 50% 정도입니다.”‘50%라...’심해린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의사의 입에서 직접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무거워졌다.그녀는 더 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그러고는 의사 사무실을 나왔다.병실 안이 아주 조용했다. 모니터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소리만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할머니가 산소마스크를 쓴 채 침대에 누워있었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누렇게 뜬 이마에 달라붙었다.언제나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 눈은 지금 굳게 감겨 있었다. 그리고 눈가에 깊은 피로와 쇠약함이 내려앉았다.심해린은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은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7화

    고상윤은 순간 가슴이 막힌 듯 답답해졌고 이유 모를 분노가 거세게 타올랐다.밖에서 더 이상 고상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심해린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바닥에 누웠다.정말 너무 피곤했다.배터리가 꺼져 있던 휴대폰이 조금 충전된 후 전원을 켰다.바로 그때 수많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 알림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휴대폰이 끊임없이 윙윙거리며 진동했다.화면에 고상윤의 이름이 도배되어 있었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심해린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문자가 열몇 통 와있었다.심해린은 화면을 보면서도 마음에 조금의 파문도 일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초조해 보이는 문자들이 단지 통제하던 물건이 사라졌을 때 주인이 찾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그 안에는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과 소유욕이 섞여 있을 뿐이었다.그녀는 문자를 넘기다가 한 낯익은 프로필 사진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고혜연이었다.대화창을 열자 링크 하나와 밑에 짧은 글이 덧붙여 있었다.[해린아, 진일 그룹의 스타라이트컵 디자이너 대회가 시작됐어. 여기 응모 사이트야. 확인해봤는데 주제 제한은 없고 요구가 딱 하나야. 작품 안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대. 지금 많이 힘든 거 알지만 그래도 이건 기회야. 포기하지 마.]‘진일 그룹, 사랑...’심해린은 그 두 단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 증오만 가득한데 사랑이 남아 있을까?하지만 이건 고혜연의 마음이자 심해린이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잠시 스스로를 다잡은 뒤 고혜연에게 알았다는 의미로 뽀뽀 이모티콘을 보냈다.휴대폰 배터리가 20%까지 충전됐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충전기를 뽑고 외투를 집어 들었다. 이곳에 단 한 순간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할머니가 걱정되어 병원에 가볼 생각이었다.그런데 별장 문을 나서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고상윤이라는 세 글자가 떴다.심해린이 전화를 받자마자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심해린, 지금 몇 시인지 알아? 왜 아직도 출근 안 해? 이번 달 개근 수당은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6화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상윤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조금 부드러워졌다.“어제 회사에 일이 너무 많았어. 계속 처리하느라 끝이 안 났거든. 나중에 나도 본가로 갔었어.”심해린이 코웃음을 쳤다.“회사 일이었어요, 아니면 서아 씨 일이었어요?”고상윤의 목소리가 몇 톤이나 높아졌다.“넌 왜 항상 서아한테 이렇게 적대적이야? 여기에 가족도 없는 애를 우리가 조금 더 챙겨주는 게 뭐가 문제인데?”심해린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늘 이렇게 명서아의 편을 들었다.그녀는 등을 곧게 세우고 소파에 앉아 있는 고상윤을 쳐다봤다. 밤새 잠을 못 잔 탓에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압박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어디 갔었어?”고상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밤을 새워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심해린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창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았다.고상윤이 뒤따라 들어왔다.“묻잖아. 어젯밤에 어디 갔었냐고.”심해린이 계속 무시하자 그녀를 잡으려 했다. 그녀는 지금 무릎을 다친 상태였다. 고상윤이 잡아당긴 바람에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고상윤이 재빨리 그녀의 바지를 걷어 올렸다. 멍으로 가득한 무릎을 본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시뻘게진 두 눈으로 쳐다봤다.“내가 본가에 가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당신도 알잖아요. 전화로 뭐라고 했었죠? 일 끝나면 본가로 오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해명 영상도 당신들이 찍으라고 해서 찍었고 난 협조 다 했어요. 그런데 왜 당신 할머니는 아직도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건데요?”목소리가 높지 않았지만 정확하게 고상윤의 마음속 가장 약한 부분을 찔렀다. 고상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준비해두었던 비난의 말들이 목구멍에 막혀버렸다.창고 방에 정적이 내려앉았고 고상윤도 입을 굳게 다물렸다.바로 그때 명서아가 다가와 고상윤의 옆에 서더니 힘없이 그에게 기댔다.“언니, 어떻게 오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명서아의 목소리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5화

    진성혁이 고개를 저었다.“별거 아니니까 괜찮아요.”당장이라도 도망칠 것 같은 심해린의 모습에 진성혁이 물었다.“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니면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까요?”“아니요. 저를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사해요.”심해린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부모님은요?”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저 고아예요.”진성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때 심해린이 벽을 짚으며 문 쪽으로 절뚝절뚝 걸어갔다.“하룻밤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가볼게요.”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릎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해졌다.심해린이 이를 악물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낯선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등을 곧게 세우고 걸어갔다.진성혁은 자리에 서서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뿐 붙잡지는 않았다. 그녀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한마디 덧붙였다.“휴대폰 배터리가 다 된 것 같던데 거실에 충전기가 있어요.”심해린이 발걸음은 멈췄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괜찮아요.”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아파트에서 나온 뒤에야 심해린은 이곳이 가장 유명한 부유층 주거 지역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길가에 서서 택시를 잡았다.“누리안으로 가주세요.”택시 운전사가 백미러로 심해린을 힐끗 쳐다봤는데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심해린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잘 알고 있었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옷은 절인 배추처럼 구겨져 있었으며 얼굴빛도 아마 핏기없이 창백할 것이다.그녀는 유리창에 기대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바라보았다. 무릎의 통증이 계속 올라왔다. 이 통증은 어제 고씨 가문 본가에서 겪었던 모든 일을 떠올리게 했다.모욕과 고통들... 하지만 지금 떠올려도 마음에는 거의 아무런 파문이 일지 않았다.이젠 아마 무뎌졌을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 마음이 식어버리면 더 이상 아프지도 않을 테니까.택시가 누리안 별장 단지 입구에 멈췄다. 심해린이 요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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