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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مؤلف: 김빠진 콜라
“2층 옆에 있는 창고 방에서 자. 서아 몸이 안 좋아서 의사 선생님이 채광 좋은 방을 쓰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 안방을 쓰라고 했어.”

뒤에서 고상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오르던 심해린이 발걸음을 멈췄다. 명서아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또 잘 챙겨주면서 심해린에게는 한 번도 이렇게 대한 적이 없었다. 그것도 3년 내내 말이다.

따지고 싶지도 않았던 심해린은 그저 알겠다고 짧게 대답한 뒤 창고 방으로 향했다.

먼지투성이인 방을 대충 정리하고 나니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 장롱 속에서 낡은 이불을 꺼내 자리에 누웠다.

창밖으로 비쳐드는 희미한 달빛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온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결혼 후 고상윤을 위해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디자인 일을 그만두고 기꺼이 앞치마를 두른 채 고씨 가문의 며느리가 해야 하는 일을 배웠다.

이혼이라는 단어가 한번 자리 잡자 덩굴처럼 빠르게 자라나 심장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

이제 고상윤이 심해린과 결혼한 이유가 그저 명서아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걸, 그녀는 그저 대체품에 불과하다는 걸 모두가 알아버렸다.

하지만 이혼할 방법이 있을까?

고씨 가문이 용군시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고상윤은 통제 욕구가 무척이나 강한 남자였다.

그는 심해린을 사랑하지 않아도 되지만 ‘고씨 가문 안주인’이 먼저 이혼하겠다고 하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변호사를 찾아가 봐도 로펌 사무실 문턱을 넘자마자 고상윤에게서 바로 연락이 올 게 뻔했다.

심해린은 몸을 뒤척이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러다 기억 저편에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고혜연이었다.

고씨 가문 방계의 혼외자이자 심해린의 절친이었다. 고혜연이 대학교에서 법을 전공했고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졸업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심씨 가문이 몰락했을 때 고혜연은 해외 유학 중이었다. 귀국 후 몇 번이나 연락을 취해왔지만 그땐 이미 고상윤과 결혼한 뒤였다.

고혜연이 고씨 가문에서 편히 지내지 못한다는 걸 심해린은 알고 있었기에 유일한 친구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힘들게 지내는데 그녀 때문에 더 힘들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하여 계속 고혜연의 연락을 피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우스웠다.

심해린은 고혜연의 성격을 잘 알았다. 비록 성은 고 씨지만 이 가문의 위선을 뼛속까지 혐오했다. 그녀라면 어쩌면 유일한 돌파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연락처 목록의 맨 밑에서 오랫동안 누르지 않았던 번호를 찾아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뚜.

휴대폰 너머로 연결음이 들려올 때마다 온 신경이 곤두섰다.

한참 만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자다가 깨서 짜증이 가득 섞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이 야밤에.”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심해린은 목이 꽉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달싹이다 한참 뒤에야 쉰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고혜연.”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5초쯤 지났을까, 다시 들려온 고혜연의 목소리에 잠기운은 온데간데없었고 대신 흥분이 가득했다.

“심해린? 전화할 줄 알긴 아네? 3년 동안 어디서 뭐 하고 살았어? 내가 귀국한 후에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카톡으로는 맨날 잘 지낸다는 소리밖에 없고. 잘 지내긴 개뿔!”

원망이 쉴 틈 없이 쏟아졌지만 심해린은 마음 한구석이 오랜만에 따뜻해졌다. 고혜연이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했으니까.

“미안해.”

심해린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피로가 담겨 있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고혜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목소리가 이상한데? 무슨 일 있는 거지?”

“나...”

심해린이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지난 3년의 설움과 고통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엉망이 돼버렸으니까.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나 결혼했어.”

“뭐?”

고혜연이 목청을 높였다.

“결혼했다고? 누구랑? 언제? 난 왜 전혀 몰랐지?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하는 거야?”

친구의 추궁에 심해린은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해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혜연의 말투가 장난스럽게 바뀌었다.

“됐고 따지는 건 나중에 따질게. 그래서 상대가 누구야? 너한테 잘해줘? 아주 꽁꽁 숨겨뒀네.”

고혜연의 순수한 호기심과 기쁨에 심해린은 심장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고혜연의 기대를 깨뜨렸다.

“나 이혼하려고.”

전화기 너머의 고혜연이 다시 조용해지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심해린, 솔직하게 말해. 그 남자가 널 괴롭혔지?”

고혜연은 심해린을 너무나 잘 알았다. 겉으론 여려 보여도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여 한번 마음먹은 일, 한번 믿은 사람은 절대 후회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단 그 사람이나 그 관계에서 한 줄기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응.”

심해린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심장이 짓눌리는 고통을 느끼며 옷자락을 꽉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 글자였지만 그 안에 수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

고혜연이 이를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그럴 줄 알았어. 막다른 길까지 가지 않았으면 손 놓을 애가 아니지. 그놈이 누구야? 말해. 내가 가서 죽여버릴 테니까.”

“괜찮아.”

심해린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싸워봤자 아무 의미 없어. 그냥 빨리 떠나고 싶어.”

“떠난다고?”

고혜연이 침착하게 물었다.

“상대가 누군데? 그렇게 골치 아픈 놈이야?”

심해린이 잠시 침묵하다가 이름을 내뱉었다.

“고상윤.”

“누구라고?”

고혜연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

“고상윤.”

전화기 너머의 정적 속에 황당함과 분노가 섞였다. 고혜연은 절친을 3년 동안 지옥으로 밀어 넣은 남자가 먼 친척 오빠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젠장!”

고혜연이 참지 못하고 결국 욕을 내뱉었다.

“심해린,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대체 왜 그 인간이랑 결혼한 건데?”

“얘기하자면 길어.”

심해린은 끔찍한 과거를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혜연아, 나 지금... 네 도움이 필요해.”

고혜연이 충격받은 마음을 진정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조건 도와줄게.”

심해린이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휴대폰을 꽉 쥔 채 또박또박 말했다.

“너 변호사지? 이혼 합의서 좀 작성해줘.”

그러고는 하던 말을 잠시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

“최대한 빨리. 누구도 알면 안 돼. 특히 고상윤이 알면 절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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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30화

    명서아의 말에 심해린이 경악하며 바로 반박했다.“팔았다간 절대 가만 안 둬요.”“그러니까 더 팔기 싶은데요? 이건 오빠가 이미 나한테 준 거예요. 음... 색깔도 좋고 품질도 좋네요.”명서아의 목소리에 과시가 은근히 섞여 있었다.심해린이 흠칫하더니 더는 참지 않고 협박했다.“팔아버렸다간 두 사람이 나한테 해명 영상을 강요했던 일을 전부 다 폭로해버릴 거예요.”이 펜던트는 그녀가 기억을 하는 순간부터 항상 몸에 지녔던 물건이었다. 심씨 가문에 온 뒤 할머니도 비취의 상태가 좋다는 걸 알아보고 잘 간직하라고 당부했었다.심해린은 한때 진짜 사랑을 찾았다고 믿었다. 하여 더는 가족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펜던트를 고상윤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고상윤이 그녀가 선물한 걸 명서아에게 줘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돌려줘요.”심해린이 명서아를 빤히 쳐다봤다.명서아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펜던트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예요? 심해린 씨?”‘드디어 심해린한테서 무표정 말고 다른 표정을 봤어.’이 상황이 재미있었던 명서아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쁜 장난기가 발동했다. 심해린이 어떻게 할지 너무나 궁금했다.“내 거라고 했어요.”심해린이 한 걸음씩 다가갔다. 시선이 펜던트에서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돌려줘요.”“해린 씨 거라고요?”명서아가 피식 웃더니 펜던트를 손바닥 안에 숨겼다.“지금은 내 손에 있잖아요. 그럼 내 거죠.”그녀의 눈에 노골적인 도발과 경멸이 담겨 있었다. 명서아는 심해린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심해린은 감옥에 있는 동생을 위해, 거의 죽어가는 할머니를 위해 뭐든 참고 견디는 사람이었으니까.“돌려달라고 분명히 말했어요.”심해린이 이를 악물고 글자마다 분노를 눌러 담아 내뱉었다.“싫어요.”명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일부러 심해린의 앞까지 걸어가 펜던트를 들어 올렸다.“어쩔 건데요? 상윤 오빠한테 가서 고자질할 거예요?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9화

    ‘차라리 잘됐어. 지금 가장 보기 싫은 사람이 고상윤인데.’심해린은 지친 몸을 이끌고 습관처럼 창고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이 지금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이었다.두 걸음쯤 걸었을 때 2층 계단 쪽에서 부드럽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왔어요? 할머니는 좀 어떠세요?”심해린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명서아가 맨발로 계단 위에 느긋하게 서 있었다. 이 집의 여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얼굴에 걱정이 적당하게 걸려 있었다.그녀와 연기할 생각이 없었던 심해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그런데 스쳐 지나가던 순간 심해린이 갑자기 굳어버렸다.명서아가 목에 붉은 실을 하고 있었는데 붉은 실 끝에 맑고 투명한 비취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이건 심해린이 예전에 고상윤에게 선물한 펜던트였다.심해린은 순간 머리가 윙 했다. 몸이 통제되지 않을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고 발바닥에서 올라온 차가운 기운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명서아는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가슴 앞의 펜던트를 무심한 척 손으로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었다.“언니, 뭘 그렇게 봐요? 이 펜던트 예쁘죠?”심해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명서아의 얼굴을 쳐다봤다.“그걸 왜 서아 씨가 하고 있어요?”심해린의 목소리가 아주 낮았다. 한 글자 한 글자 이를 악물고 내뱉어서 무서운 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그 눈빛에 명서아는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곧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히려 더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녀는 펜던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랑하듯 심해린에게 보여주었다.“상윤 오빠가 준 거예요.”명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천진난만하면서도 잔인한 말투로 말했다.“이 색이 내 피부랑 잘 어울린대요. 오빠가 본 것 중에서 제일 예쁘다고 하던데. 어때요? 예쁘죠?”고상윤이 줬다고 했다. 게다가 예쁘다고까지...그 몇 글자가 녹슨 둔탁한 칼처럼 이미 너덜너덜해진 심해린의 심장을 한 번 또 한 번 베어버렸다.심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8화

    심해린이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안에 들어서자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뜩이나 좋지 않던 속이 그 냄새 때문에 더 울렁거렸다.복도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얬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솜 위를 밟는 것처럼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병실로 들어와 보니 할머니가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었다. 간병인이 심해린에게 말했다.“아까 의사 선생님이 보호자를 찾으시더라고요.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았어요.”간병인 장인숙은 예전에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던 아주머니였다. 심해린은 장인숙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곧바로 의사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안녕하세요, 선생님. 전 39번 베드 환자의 손녀인데요. 할머니 상태가 어떤지 여쭤보려고요.”“할머니가 입원하신 뒤로 보호자를 몇 번이나 찾았는데 계속 안 계시더군요. 지금은 일단 상태가 안정됐습니다. 외상도 괜찮아졌고 각종 수치도 안정적이에요.”의사가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심해린이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제가 일이 좀 있어서 못 왔어요. 그럼 할머니는 언제쯤 깨어나실 수 있을까요?”의사는 들고 있던 필름을 빛에 비춰 보았다가 내려놓았다.“뇌에 혈종이 있어서 신경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언제 깨어나실지는 단정하기 어려워요. 현재 상황으로 보면 깨어날 확률은 대략 50% 정도입니다.”‘50%라...’심해린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의사의 입에서 직접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무거워졌다.그녀는 더 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그러고는 의사 사무실을 나왔다.병실 안이 아주 조용했다. 모니터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소리만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할머니가 산소마스크를 쓴 채 침대에 누워있었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누렇게 뜬 이마에 달라붙었다.언제나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 눈은 지금 굳게 감겨 있었다. 그리고 눈가에 깊은 피로와 쇠약함이 내려앉았다.심해린은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은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7화

    고상윤은 순간 가슴이 막힌 듯 답답해졌고 이유 모를 분노가 거세게 타올랐다.밖에서 더 이상 고상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심해린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바닥에 누웠다.정말 너무 피곤했다.배터리가 꺼져 있던 휴대폰이 조금 충전된 후 전원을 켰다.바로 그때 수많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 알림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휴대폰이 끊임없이 윙윙거리며 진동했다.화면에 고상윤의 이름이 도배되어 있었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심해린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문자가 열몇 통 와있었다.심해린은 화면을 보면서도 마음에 조금의 파문도 일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초조해 보이는 문자들이 단지 통제하던 물건이 사라졌을 때 주인이 찾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그 안에는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과 소유욕이 섞여 있을 뿐이었다.그녀는 문자를 넘기다가 한 낯익은 프로필 사진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고혜연이었다.대화창을 열자 링크 하나와 밑에 짧은 글이 덧붙여 있었다.[해린아, 진일 그룹의 스타라이트컵 디자이너 대회가 시작됐어. 여기 응모 사이트야. 확인해봤는데 주제 제한은 없고 요구가 딱 하나야. 작품 안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대. 지금 많이 힘든 거 알지만 그래도 이건 기회야. 포기하지 마.]‘진일 그룹, 사랑...’심해린은 그 두 단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 증오만 가득한데 사랑이 남아 있을까?하지만 이건 고혜연의 마음이자 심해린이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잠시 스스로를 다잡은 뒤 고혜연에게 알았다는 의미로 뽀뽀 이모티콘을 보냈다.휴대폰 배터리가 20%까지 충전됐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충전기를 뽑고 외투를 집어 들었다. 이곳에 단 한 순간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할머니가 걱정되어 병원에 가볼 생각이었다.그런데 별장 문을 나서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고상윤이라는 세 글자가 떴다.심해린이 전화를 받자마자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심해린, 지금 몇 시인지 알아? 왜 아직도 출근 안 해? 이번 달 개근 수당은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6화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상윤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조금 부드러워졌다.“어제 회사에 일이 너무 많았어. 계속 처리하느라 끝이 안 났거든. 나중에 나도 본가로 갔었어.”심해린이 코웃음을 쳤다.“회사 일이었어요, 아니면 서아 씨 일이었어요?”고상윤의 목소리가 몇 톤이나 높아졌다.“넌 왜 항상 서아한테 이렇게 적대적이야? 여기에 가족도 없는 애를 우리가 조금 더 챙겨주는 게 뭐가 문제인데?”심해린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늘 이렇게 명서아의 편을 들었다.그녀는 등을 곧게 세우고 소파에 앉아 있는 고상윤을 쳐다봤다. 밤새 잠을 못 잔 탓에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압박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어디 갔었어?”고상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밤을 새워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심해린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창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았다.고상윤이 뒤따라 들어왔다.“묻잖아. 어젯밤에 어디 갔었냐고.”심해린이 계속 무시하자 그녀를 잡으려 했다. 그녀는 지금 무릎을 다친 상태였다. 고상윤이 잡아당긴 바람에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고상윤이 재빨리 그녀의 바지를 걷어 올렸다. 멍으로 가득한 무릎을 본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시뻘게진 두 눈으로 쳐다봤다.“내가 본가에 가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당신도 알잖아요. 전화로 뭐라고 했었죠? 일 끝나면 본가로 오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해명 영상도 당신들이 찍으라고 해서 찍었고 난 협조 다 했어요. 그런데 왜 당신 할머니는 아직도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건데요?”목소리가 높지 않았지만 정확하게 고상윤의 마음속 가장 약한 부분을 찔렀다. 고상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준비해두었던 비난의 말들이 목구멍에 막혀버렸다.창고 방에 정적이 내려앉았고 고상윤도 입을 굳게 다물렸다.바로 그때 명서아가 다가와 고상윤의 옆에 서더니 힘없이 그에게 기댔다.“언니, 어떻게 오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명서아의 목소리

  • 그림자 아내, 떠나는 방식   제25화

    진성혁이 고개를 저었다.“별거 아니니까 괜찮아요.”당장이라도 도망칠 것 같은 심해린의 모습에 진성혁이 물었다.“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니면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까요?”“아니요. 저를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사해요.”심해린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부모님은요?”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저 고아예요.”진성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때 심해린이 벽을 짚으며 문 쪽으로 절뚝절뚝 걸어갔다.“하룻밤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가볼게요.”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릎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해졌다.심해린이 이를 악물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낯선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등을 곧게 세우고 걸어갔다.진성혁은 자리에 서서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뿐 붙잡지는 않았다. 그녀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한마디 덧붙였다.“휴대폰 배터리가 다 된 것 같던데 거실에 충전기가 있어요.”심해린이 발걸음은 멈췄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괜찮아요.”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아파트에서 나온 뒤에야 심해린은 이곳이 가장 유명한 부유층 주거 지역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길가에 서서 택시를 잡았다.“누리안으로 가주세요.”택시 운전사가 백미러로 심해린을 힐끗 쳐다봤는데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심해린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잘 알고 있었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옷은 절인 배추처럼 구겨져 있었으며 얼굴빛도 아마 핏기없이 창백할 것이다.그녀는 유리창에 기대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바라보았다. 무릎의 통증이 계속 올라왔다. 이 통증은 어제 고씨 가문 본가에서 겪었던 모든 일을 떠올리게 했다.모욕과 고통들... 하지만 지금 떠올려도 마음에는 거의 아무런 파문이 일지 않았다.이젠 아마 무뎌졌을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 마음이 식어버리면 더 이상 아프지도 않을 테니까.택시가 누리안 별장 단지 입구에 멈췄다. 심해린이 요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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