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너도 참. 곧 결혼할 애가 왜 이렇게 덤벙대니? 너희 엄마 이번 주에 돌아온다더라. 그때 다인이랑 같이 집에서 식사하자.”“네. 그런데 형 보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 얼른 가요.”배윤제는 짜증 난 얼굴로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그는 할머니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배윤제의 할머니는 단순히 배윤제가 어서 빨리 배윤호가 다친 걸 확인하고 싶어 하는 줄로 여겼다.“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 이 정보는 아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알려준 거라서 배윤호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배윤제는 고개를 끄덕인 뒤 할머니를 부축하며 배윤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그런데 왠지 모르게 점점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둘의 집이 굉장히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불안함이 점점 더 강해졌다. 심지어 강하율이 지금 배윤호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맞았다.강하율은 실제로 배윤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강하율이 기사에게서 식자재를 받아 든 뒤 곧장 주방으로 향했는데 식자재에 아침 이슬과 흙이 묻어 있어 씻을 때 주방 바닥이 더러워졌다.강하율은 손을 깨끗이 씻은 상태라 바로 치우지는 않고 서둘러 야채죽을 끓이기 시작했다.그 과정이 꽤 번거로웠는데 그사이 단단히 말라 있던 흙이 물과 섞여서 질척해지고 말았다.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죽을 팔팔 끓이고 있을 때 바닥에 흙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깜빡한 강하율은 실수로 흙을 밟아서 미끄러지고 말았다.머리가 수납장에 부딪히기 직전, 갑자기 뻗어진 손이 그녀를 구했고 강하율은 그대로 배윤호의 따뜻한 품에 안겼다. 그의 몸에서는 옅은 소독약 냄새와 특유의 차분한 향이 함께 느껴졌다.“부딪혔어?”배윤호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다급함이 느껴졌다.강하율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그녀가 말을 마치자 집 안이 조용해졌다. 들리는 건 죽이 끓는 소리뿐이었다.보글보글...강하율은 끓어오르는 죽처럼 자신의 심장도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배윤호가 냄비 안을 힐끗 보았
배윤제는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렸다.어젯밤 먹은 게 별로 없는 탓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는데 장천우조차 옆에서 듣기 민망할 정도였다.“도련님, 뭐라도 좀 드시는 건 어떨까요?”배윤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필요 없어. 밖에 나가서 강하율이 겁을 먹고 못 들어오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 봐.”장천우는 잠시 멈칫했지만 그의 지시대로 집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밖에는 강하율은커녕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몇 분 더 기다렸다가 돌아온 장천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도련님, 아무도 없습니다. 강하율 씨는 여기 오지 않았습니다.”배윤제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두 주먹을 꽉 쥐어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배윤제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에요?”“아침부터 왜 화가 잔뜩 나 있어?”전화 너머로 할머니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할머니.”배윤제는 즉시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무슨 일이세요?”배윤제의 할머니는 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고 평온하게 물었다.“지금 혼자 있니?”그 말에 배윤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이제 아무도 없어요.”“배윤호가 다쳤대. 꽤 심하게 다친 것 같던데.”배윤제의 할머니는 그제야 차가운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손주가 다쳤다는데 걱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배윤제는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확실한 거예요?”“그래. 배윤호의 측근이 전한 소식이야. 곧 네 별장으로 갈 테니까 잠시 뒤에 나랑 같이 문병 좀 가자.”“할머니, 저한테 어딘지만 알려주세요. 굳이 할머니께서 오실 필요는 없잖아요.”배윤제가 말했다.“너 모르니? 배윤호도 지금 네가 사는 그 단지로 이사 갔어.”그 말을 듣는 순간 배윤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그의 머릿속에 몇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지금 어디에 있는데요?”“서두르지 마. 직접 확인한 뒤에 공개하는 게 나으니까. 그러면 내가 걔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네가 대신 회사
배윤제가 미간만 조금 찌푸려도 강하율은 밤을 새워가며 그의 머리를 계속 마사지해 주곤 했다.그러나 지금은...배윤제는 텅 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정다인은 정말로 가버렸다.배윤제는 베개 밑에서 휴대폰을 꺼내 강하율의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던 배윤제는 문득 주먹을 이마에 가져다 대면서 웃음을 터뜨렸다.그가 이렇게 적극적인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강하율도 이 사실을 알면 틀림없이 환하게 웃으며 즐겁게 그와 대화를 나눌 것이다.대화창을 눌러 문자를 보내려는 순간, 장천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도련님, 제가 도련님이 지시하신 대로 서류를 가지러 호텔에 갔다가 안혜슬 씨의 룸메이트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강하율 씨가 안혜슬 씨에게 내일 장 좀 봐달라고 했답니다.”“장을 봐달라고 했다고?”배윤제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알겠어. 내일 잘 지켜봐. 강하율이 내 별장에 들어오지 못하는 일이 없게 말이야.”시간을 계산해 보니 마침 그가 아프다는 이유로 내일 회의를 취소한다고 공지한 직후였다.강하율은 그에게 자신의 삶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그를 위해 조용히 애쓰고 있었다.굳이 메시지를 보낼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강하율이 알아서 핑계를 대며 찾아올 테니 말이다.그런 생각을 하자 배윤제의 두통도 조금 나아졌다. 그는 전화를 끊고 그대로 잠들었다....다음 날, 강하율은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확인해 보니 안혜슬이 보내준 채소가 도착했다는 연락이었다.강하율이 기지개를 켜며 맞은편을 바라보자 깊이 잠든 배윤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배윤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했지만 얼굴이 너무 창백해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경계심이 강한 탓일까? 강하율이 잠시 바라보고 있자 배윤호는 무언가 느낀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하율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일어나려던 그녀는 자신의 몸 위에 담요가 하나 덮여 있는 걸 발견했다.그리고 그녀가 어젯밤 만들어서 식탁
야채죽.그 세 글자에 정다인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컵을 들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분명히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또 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배윤제는 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무심하게 강하율을 언급했다. 마치 그의 삶 곳곳에 강하율이 녹아든 것처럼 말이다.그러나 정다인은 차마 뭐라 하지 못했다.“윤제 씨, 좀 쉬어요. 제가 아줌마랑 같이 준비해 볼게요.”“응.”배윤제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방을 나서자마자 정다인은 아줌마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들어갔다.“강하율이 자주 와서 요리했다면서요? 조금은 보셨을 거 아니에요. 빨리 죽을 끓이세요.”가사도우미는 난감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처음에 옆에서 보긴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손이 너무 많이 가는 데다가 인내심도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뒤로는 보지 않았어요. 그 야채죽은 진짜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게다가 도련님 입맛에 맞춘 거다 보니 저는 못해요.”그렇게 간단한 것이었다면 배윤제도 굳이 찾지 않았을 것이다.정다인은 입술을 깨물었다.“파는 데가 있겠죠. 지금 나가서 사 오세요. 제가 지켜보고 있을게요. 윤제 씨가 정말 언짢아한다면 아줌마도 곤란해질 거예요.”가사도우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서둘러 나갔다.한 시간 뒤, 가사도우미는 기억을 더듬어 그나마 가장 비슷해 보이는 야채죽을 사 왔다.정다인은 그것을 그릇에 담고 예쁘게 꾸민 뒤 일부러 머리카락에 물까지 살짝 묻히고 위층으로 향했다.“윤제 씨, 야채죽 가져왔어요.”배윤제는 약을 먹은 뒤에도 머리가 아파서 아주 작은 소리조차 귀에 거슬렸다. 하지만 야채죽이라는 말에 그는 짜증을 꾹 참고 몸을 일으켰다.“네가 한 거야?”“아줌마랑 같이 했어요. 어서 먹어봐요.”정다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숟가락을 건넸다.배윤제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강하율이 없어도 그를 돌봐줄 사람이 있었고 먹고 싶은 것도 여전히 먹을 수 있었기
그러나 배윤호는 조용히 모든 일을 해결했다.강하율의 말을 들은 배윤호는 검은 눈동자로 강하율을 지긋이 바라봤다.“후회 안 해?”“네. 후회 안 해요.”강하율은 고개를 저었다.배윤호는 강하율을 놓아주었다.“나 잠깐 잘 거니까 편히 있어.”말을 마친 뒤 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강하율은 조금 놀랐지만 그의 손바닥에 선명하게 남은 손톱자국을 보고 조금 전 그가 억지로 태연한 척했음을 알 수 있었다.강하율은 시선을 들어 배윤호의 잘생긴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한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배윤호를 무려 십여 분이나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강하율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소파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배윤호에게 덮어주고,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아일랜드 식탁 위에는 아까 꺼내놓았던 채소가 그대로 있었다. 강하율은 토마토 두 개를 집어 뜨겁게 달아오른 자신의 볼에 갖다 댔다.“원래 잘생긴 남자를 보면 다들 넋을 놓는 법이야.”곧이어 그녀는 정신을 다잡고 소화가 잘되는 음식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야채를 씻을 때 보니 꽤 오래 보관한 채소들인지 물에 닿자마자 채소가 금세 시들어버렸다.결국 강하율은 어쩔 수 없이 그냥 흰죽을 끓이기 시작한 뒤 기숙사에 있는 안혜슬에게 전화를 걸었다.“혜슬아, 내일 아침 수업 들으러 가기 전에 채소 좀 사다 줄 수 있어?”안혜슬은 잠결에 그 말을 듣자 무슨 스위치라도 눌린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채소를 사다 달라고? 너 설마 또 사랑에 눈이 먼 거야? 미쳤어? 또 배윤제를 돌봐주러 간 거야?”“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강하율은 어리둥절했다.안혜슬이 설명했다.“방금 우리 객실팀 단톡방에 공지가 올라왔어. 내일 아침 회의를 취소한다고. 내 동료 말로는 배윤제가 몸이 안 좋아서 그렇다던데.”그제야 강하율은 현재 호텔에 부대표가 두 명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한 명은 배진 그룹에서 특별히 모신 호텔 경영 전문가였고 다른 한 명이 바로 배윤제였다.업무 분담 때문에 배윤제는 주
강하율은 비록 재벌가의 권력 다툼을 직접 겪어본 적은 없지만 예전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은 있었다.가문을 장악한 사람은 집안을 떠받치는 기둥과도 같아서 조금이라도 다치면 다음 날 주가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심할 때는 그 사람의 지위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양승아는 배윤호가 다치자 만사에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졌다. 심지어 의사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은근한 압박이 담겨 있을 정도였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멀리 있던 강하율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양승아는 강하율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강하율 씨, 대표님께서 강하율 씨를 구하기로 했다는 건 강하율 씨를 믿는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저는 대표님을 믿어요.”“...”강하율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문득 자신을 대하던 장천우의 태도를 떠올렸다. 장천우는 대놓고 그녀를 무시하고 경멸했다.장천우는 배윤제의 비서였기에 강하율은 장천우의 태도를 통해 배윤제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알 수 있었다.그건 양승아도 마찬가지였다.그렇다는 건 배윤호가 그녀를 정말 신뢰한다는 걸까?강하율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양승아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강하율 씨, 저는 지금 당장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대표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식사도 못 하셨어요. 주방에 제가 조금 전에 주문해 둔 음식이 있으니 그걸 드리면 돼요.”“네.”강하율은 양승아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배달된 음식을 열어보니 이미 식어 있었고, 소화가 잘되지 않을 법한 음식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은 열이 날 때면 간이 약한 음식을 먹어야 소화가 잘 되었다.강하율은 뚜껑을 덮고 소매를 걷은 뒤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마자 냉장고 안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와 눈이 마주쳤다.그녀는 잠시 굳어버렸다.누가 냉장고 안에 카메라를 달아놓는단 말인가?게다가 식재료는 카메라가 설치된 구역에만 모여 있고 다른 곳에는 카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