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지금 와서 떠올려 보니, 제나는 모든 일이 조금 허무했고 우습기까지 했다.“괜찮아?”경후의 목소리가 제나의 생각을 다시 끌어올렸다.“괜찮아.”제나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웠다.“그냥 갑자기 몇 가지 일이 떠올랐어.”“그래?”경후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뭐가 떠올랐는데?”제나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예전 일들이야.”그녀가 며칠 동안 의식을 잃은 뒤 과거의 기억 몇 가지를 떠올렸다는 사실은... 경후도 알고 있었다.경후가 제나를 바라보았다.“예전의 어떤 일?”제나의 속눈썹이 조용히 내
병실 안, 제나는 눈을 감은 채 침대 위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마치 깊이 잠든 사람 같았다.의사가 제나를 살펴보았지만, 몸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 의식을 잃은 원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강한 자극을 받은 탓이라고 했다.경후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음을 바라보았다.“제 아내한테 무슨 말을 했습니까?”하음은 고개를 숙였다.“제가 아는 일은 많지 않아요. 그저 차 대표가 하제나 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포기했는지 말했을 뿐이에요. 하제나 씨는 기억을 잃어서 아무것도 모르잖아요.”“지난 몇 년 동안 하제나 씨만 억울했다
“왜죠?”하음이 말했다.“차 대표가 처음 차씨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 차씨 가문 사람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차 대표를 반기지 않았어요.”“차 대표는 모두에게 밀려났죠. 차씨 가문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다른 사람들과 재산을 두고 다투게 된 사람인데 누가 환영하겠어요?”제나는 경후의 친부모가 경후에게 다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그럼 경후의 친부모님은요? 경후는 그분들의 친아들이잖아요. 그런데도 반기지 않았다는 건가요?”하음이 비웃듯 웃었다.“그것도 전부
둘의 사이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적당해 보였다.그날 하음이 일부러 제나의 발을 밟지 않았다면, 제나는 하음에게 악의가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식사 주문을 마친 뒤, 하음과 경후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지난 일을 꺼내지 않았다. 대화 주제 역시 전부 업무와 관련된 것들이었다.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제나는 알게 되었다. 하음이 이번에 S시에 온 것은 HB그룹과 협업을 논의하기 위해서인 듯했다.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제나는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거두어들인 뒤,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말끔한 정장 차림의 경후가 서류 한 부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사무실에 앉아 있는 제나를 본 경후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여긴 어떻게 왔어?”제나는 웃어 보였다.“당신한테 점심 가져다주려고 왔어.”경후의 시선이 가볍게 움직여, 책상 위에 놓인 보온 도시락통으로 향했다. 하지만 곧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제나는 예민하게 무언가를 알아차렸다.“왜? 오늘 점심 약속 있어?”“응.”경후는 사무실 문을 닫았다.“오기 전에 전화하지 그랬어
제나는 원래 기억이 모두 돌아온 뒤에, 경후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하지만 가장 중요한 기억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제나는 고용인의 입을 통해, 경후가 제나의 냉정함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여러 감정이 뒤섞인 끝에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충동이 생긴 것이었다.하지만 제나는 잊고 있었다. 모든 관계의 시작에는 그 관계를 책임지는 마음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너무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됐다. 제나는 그렇게 자신을 달랬지만, 마음 한구석에 내려앉은 허전함은 쉽게 감춰지지 않았다.
여자들이란, 경후가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줄 가치가 없었다.다시 말해, 경후가 모든 걸 버리고 이혼까지 감행할 만큼의 여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만약 그런 여자가 나타난다면...’‘차경후라는 사람의 성격상, 난 미련도 없이 버리겠지.’손끝에서 담배가 거의 다 타들어 갈 즈음, 경후의 목소리가 냉정하게 흘러나왔다.“한 가지만 더. 내가 미리 경고 안 했다고 하지 마.”남자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당신이 다른 남자랑 조금이라도 수상한 관계를 가진다면... 그 결과, 감당할 수 없을 거야.”다음 날 아침
경후는 제나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나오자, 낮게 비웃듯 웃음을 흘렸다.“허...”제나는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경후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택시에서 내려 집에 도착했을 때, 경후는 이미 와 있었다.욕실 안에서는 ‘촤르르’ 물 흐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제나는 잠시 현관에 서 있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겨 옷장을 열었다. 새로운 이불과 베개를 꺼내 챙겼다.모두 한데 모아서 들고 있을 즈음, 욕실 문이 열리며 경후가 나왔다.남자의 시선이, 새 이불을 품에 안은 채 방을 나서려는 제나에게 닿았다.
제나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숨결마저 흐트러져 버렸다.경후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자, 차갑고 깊은 흑빛 눈동자가 제나의 얼굴에 내려앉았다.“아까 내가 당신을 돕지 않은 게, 서운했어?”질문처럼 들렸지만, 남자의 말투는 거의 단정에 가까웠다.제나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는데, 경후의 싸늘한 목소리가 다시 파고들었다.“잘 봐둬. 당신이 내 아내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겪은 문제는 다 스스로 감당해야 했어. 혼자 버텨내야 했다고.”옅은 달빛이 남자의 날카로운 얼굴선을 비추고 있었다.
크랭크인 행사를 마친 뒤, 영화 촬영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제나는 늘 촬영팀 곁을 지키며, 감독이나 의상팀에서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세세한 수정과 보완을 했다.제작비가 넉넉한 덕에, 스태프들이 머무는 호텔도 현지 준 5성급이었다.촬영 현장에서 세린은 ‘배경’과 ‘후광’을 등에 업은 인물이었다.그렇다고 뻣뻣하게 굴거나 권력을 내세우는 모습은 없었다. 오히려 싹싹하고 겸손했다.덕분에 불과 며칠 만에 촬영팀 전체와 어울리며 중심에 서게 되었다.세린이 있는 자리라면 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모두가 세린과 잘 지내는 듯 보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