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네.”제나의 숨이 가볍게 멎었다.이어 고개를 들어 경후를 바라보았다.“진심이야?”경후의 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설마 당신은 그냥 해 본 말이었어?”“아니.”제나는 경후를 올려다보며 망설이다가 물었다.“정말 이제 신경 쓰이지 않아?”“뭐가?”제나는 입술을 열었지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경후는 제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듯, 제나를 품에 끌어안고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그냥 묻어두자.”경후의 목소리는 물처럼 맑고 서늘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경후는 제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얼마 전까지는 기억을 되찾는 일에 꽤 신경 썼잖아. 그런데 요즘은 병원에 가겠다는 말도 안 하더라... 이제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은 거야?”제나의 기색이 미세하게 변했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경후가 무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런데 당신이 이미 혼자 몇 가지는 떠올린 것 같아.”제나의 마음이 서늘해졌다.경후는 제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허리를 숙여 제나와 눈을 맞춘 경후의 검은 눈동자는 먹물처럼 짙었고, 속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었다.“방금 당신이 말했지. 그 독은 당신이 먹인 게
지금 와서 떠올려 보니, 제나는 모든 일이 조금 허무했고 우습기까지 했다.“괜찮아?”경후의 목소리가 제나의 생각을 다시 끌어올렸다.“괜찮아.”제나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웠다.“그냥 갑자기 몇 가지 일이 떠올랐어.”“그래?”경후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뭐가 떠올랐는데?”제나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예전 일들이야.”그녀가 며칠 동안 의식을 잃은 뒤 과거의 기억 몇 가지를 떠올렸다는 사실은... 경후도 알고 있었다.경후가 제나를 바라보았다.“예전의 어떤 일?”제나의 속눈썹이 조용히 내
병실 안, 제나는 눈을 감은 채 침대 위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마치 깊이 잠든 사람 같았다.의사가 제나를 살펴보았지만, 몸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 의식을 잃은 원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강한 자극을 받은 탓이라고 했다.경후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음을 바라보았다.“제 아내한테 무슨 말을 했습니까?”하음은 고개를 숙였다.“제가 아는 일은 많지 않아요. 그저 차 대표가 하제나 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포기했는지 말했을 뿐이에요. 하제나 씨는 기억을 잃어서 아무것도 모르잖아요.”“지난 몇 년 동안 하제나 씨만 억울했다
“왜죠?”하음이 말했다.“차 대표가 처음 차씨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 차씨 가문 사람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차 대표를 반기지 않았어요.”“차 대표는 모두에게 밀려났죠. 차씨 가문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다른 사람들과 재산을 두고 다투게 된 사람인데 누가 환영하겠어요?”제나는 경후의 친부모가 경후에게 다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그럼 경후의 친부모님은요? 경후는 그분들의 친아들이잖아요. 그런데도 반기지 않았다는 건가요?”하음이 비웃듯 웃었다.“그것도 전부
둘의 사이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적당해 보였다.그날 하음이 일부러 제나의 발을 밟지 않았다면, 제나는 하음에게 악의가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식사 주문을 마친 뒤, 하음과 경후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지난 일을 꺼내지 않았다. 대화 주제 역시 전부 업무와 관련된 것들이었다.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제나는 알게 되었다. 하음이 이번에 S시에 온 것은 HB그룹과 협업을 논의하기 위해서인 듯했다.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한별은 슬쩍 구윤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구윤은 그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리곤,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제나 옆으로 다가갔다.“아, 아이고!”구윤은 무언가에 걸린 듯 몸을 기울이며 제나의 목에 걸린 스카프를 확 잡아당겼다.“정말 죄송... 어머!”구윤은 형식적인 사과를 내뱉은 뒤, 마치 큰일이라도 본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틀어막았다.“세상에, 이게 뭐예요?! 혹시... 혹시 누가 때린 건 아니겠죠?”그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높아져, 주변의 시선을 단숨에 끌어모았다.“어쩐지, 하 선생님이 오전 내내 전화를 안 받더라
유안은 세린을 ‘윤세린 씨’, 제나를 ‘제나 씨’라 불렀다.그 짧은 호칭 하나만으로도 친소가 분명히 드러났다.제나는 잔잔한 목소리로 답했다.“좋은 아침이에요.”유안이 바로 물었다.“아침 드셨어요?”“아직이요.”“저도 못 먹었는데... 이따 식당에서 같이 먹을래요?”호텔 1층에는 뷔페 레스토랑이 있었다.촬영팀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매일 아침 그곳에서 식사했고, 제나도 예외는 아니었다.게다가 최근 며칠 동안은 아침마다 내려오면 늘 유안을 마주쳤다.호텔 전체를 촬영팀이 통째로 빌려 쓰고 있으니, 얼굴을 부딪치는 게 오히
“맞아.”제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경후는 막아서지 않았다.그저 무심하게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주유안 건, 공개 재판으로 전환해. 매일 언론에 진행 상황을 공지하고...”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나가 손을 뻗어 경후의 핸드폰을 낚아챘다.뚝-통화가 끊기고, 제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경후를 노려봤다.“차경후... 당신은 사람을 완전히 짓밟아야 속이 시원한 거야?!”경후는 와인잔을 들어 올려 천천히 한 모금 삼켰다.“맞아.”“미친 인간...”경후의 시선이 제나에게 향했다. 입꼬리가 묘하게 휘
경후의 검은 눈동자가 점점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는 제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담담하지만 묵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이게 당신이 말한 ‘사고’라는 거야?”그제야 제나는 떠올렸다.아까 경후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위급하다며 도움을 청했던 일을.그런데, 경후가... 정말로 직접 온 것이다.“아까 사실은...”제나가 변명이라도 하려는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언제부터 당신이 이렇게까지 천박해진 거지?”경후의 말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제나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천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