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제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경후를 배신할 수는 없으니까.십여 분이 지나자, 가면남이 안방에서 나왔다.“이번엔 제법 쓸 만한 자료를 가져왔군.”감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제나의 온몸이 순간 긴장하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가면남은 서두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제나에게 다가왔다.남자의 움직임을 따라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며 제나를 삼켰다. 압박감이 파도처럼 덮쳐오자, 공기마저 옅어지는 듯했다.“꽤 영리하네. 이번엔 계약서 금액 부분만 손을 댔더군.”얼굴을 가린 채 드러나는 차가운 눈빛이 제나를 꿰뚫었
의사가 검진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나는 정말 아무 이상이 없었다.하지만 하성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었다.“선생님, 손등이 아직도 붉은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의사는 난감한 듯 미소를 지었다.“아내분은 아무 문제 없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붉은 기도 사라질 거예요.”‘아내...’그 두 글자가 귀에 꽂히는 순간, 제나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본능적으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을 열려다 괜히 더 수상해질 것 같아 말을 삼켰다.의사가 몇 번이고 괜찮다고 하자, 하성은 마지못해 진료실을 나왔다.
제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기는 S시예요. 그 신비한 사람이 아무리 대단해도, 차경후를 억지로 움직일 수는 없잖아요. 더군다나... 결혼까지 시킨다고요?”하성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만약, 그 사람 손에 차경후의 약점이 있었다면?”제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낮게 대답했다.“내가 기억을 잃은 이후로, 전하성 씨가 말한 그 신비한 사람과는 단 한 번도 연락한 적 없어요. 그 사람도 나한테 연락해 온 적이 없었고요. 그리고...”제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덧붙였다.“당신 말대로라면, 그 사람이 차경후의 약점
제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하성의 말을 듣는 순간, 제나의 가슴속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방금 그 말은... 당신이 나를 남에게 보냈다는 거죠? 그리고 그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게 했다고요?”하성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그때 일은 제나 씨가 생각하는 만큼 단순하지 않아요. 제나 씨는 지금 모든 걸 잊어버렸고, 내가 무슨 설명을 해도 결국 제나 씨에게 변명으로 들리겠죠.”하성의 시선이 제나를 향했다. 그 눈빛은 어둡고도 복잡했다.“혹시... 아직도 그 사람과 연락하고 있어요?”
병원을 나온 제나는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그저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한때는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던 집조차, 이제는 숨 막히는 감옥처럼 느껴졌다.빵!귀를 찢는 경적이 퍼졌다.제나는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달려오는 승용차 한 대가 눈앞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정신이 온통 흩어져 있던 제나는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너무 늦었다.끼... 익!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와 동시에, 주변 사람들의 비명이 터졌다.그러나 속도가 워낙 빨라, 차는 쉽게 멈추지 못했다.그 순간, 누군가
“아니야.”제나는 가늘게 숨을 들이켰다.“아마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몸 잘 챙겨.]경후의 다정한 말이 들리는 순간, 제나는 또다시 눈물이 터질 뻔했다.“응, 당신도.”더 말하다간 들킬 것 같아, 제나는 서둘러 덧붙였다.“나 이제 내려가서 밥 좀 먹으려고. 이만 끊을게...”끊으려는 순간, 경후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왔다.[여보.]“응, 왜?”[정말 괜찮은 거 맞아?]“그럼. 아무 일 없어.”제나는 최대한 가볍게 대답했다.“요즘 계속 악몽을 꿔서 잠을 잘못 잤을 뿐이야. 며칠만 조절하면 괜찮아질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