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한지영은 오히려 손을 더 굳게 쥐었다.“연신 씨... 나... 나 할 말이 너무 많아요. 제발, 잠깐만 시간을 줘요. 잠깐이면 돼요.”“나는 이제 할 말이 없는데.”백연신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붙잡은 손을 단번에 떼어냈다.그리고 이미 대기하고 있던 차량을 향해 무심히 걸어갔다.그가 차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한지영은 마지막 힘을 다해 외쳤다.“연신 씨! 사랑해요!”그 한마디가 울려 퍼지자, 주변의 수행원들뿐 아니라 길을 지나가던 신입 직원들까지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쪽을 바라봤다.하지만 한지영의 기대와 달리, 백연신은 아무 말 없이 차 안으로 들어갔다.차 문을 닫고,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그 순간, 동정 어린 시선들이 한지영에게 쏠렸다.물론, 비웃는 눈빛도 있었고, 어떤 고위 임원은 조금 떨어진 곳의 경호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이게 뭐 하는 거야? 아무나 회장님 가까이에 접근하게 두는 거야?”경호원들은 얼른 대답하며 한지영을 떼어놓았다.그녀의 몸이 비틀거리며 옆으로 끌려갔지만, 시선은 한순간도 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백연신이 탄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오직 한 곳만 바라봤다.옆에서 경호원이 뭐라고 말을 건넸지만, 그녀는 들을 마음조차 없었다.머릿속을 계속 맴도는 건, 바로 조금 전 백연신의 시선과 그가 내뱉은 말이었다.사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수백 번, 수천 번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하지만 정작 마주하니,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괜찮아...”한지영은 속으로 자신을 위로했다.과거 백연신이 겪은 고통은 자신이 겪은 것보다 훨씬 컸다.자신은 그저 그가 겪은 고통 일부만 겪는 셈이니, 지금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이미 재원시에 도착했고, 같은 도시에서 그와 마주했다.그러니 그녀는 반드시 이 사랑을 다시 쟁취할 거라고 다짐했다.그러나... 백연신의 마음속에 사랑이 한 점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한편, 차 안
한종훈은 딸을 향해 단호하지만,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네 엄마랑 나는 언제나 네 뒤에 서 있을 거다. 아빠랑 엄마가 받는 이 퇴직 연금, 외손주 하나쯤은 충분히 키울 수 있어!”그 말에 한지영은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가 젖어 들었다.그녀는 철없이 혼전 임신을 했고, 또 고집스럽게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도 부모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이런 부모님의 딸로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부모님께 간단히 작별 인사를 한 뒤, 한지영은 백선그룹 본사 빌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오늘... 과연 그를 만날 수 있을까?아니, 정확히 말하면... 백연신이 자신을 만나주기나 할까?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예전에 그녀는 행복에서 불과 한 발짝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그때, 만약 그녀가 백연신의 별장에서 고은채가 나오는 장면을 보지 않았더라면...만약 그 순간 오해하지 않고,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믿고 곧장 그에게 달려가 따져 물었다면...그렇다면, 그들과의 관계는... 정말 이렇게 끝나지 않았을까?백선그룹 빌딩 입구에 다다른 순간, 한지영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정작 그 순간이 눈앞에 다가오니, 온몸이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그곳에서 몇몇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그 중심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깔끔한 맞춤 정장 차림.예전보다 조금 더 야윈 듯 보였지만, 검게 빗어 넘긴 올백 머리, 훤히 드러난 이마, 날렵하고도 완벽한 이목구비... 모든 것이 한층 더 도드라져 보였다.그의 주변은 그 자체로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을 풍겼고, 단 한 순간에 한지영의 시야를 완전히 집어삼켰다.마치 그녀의 시선을 감지한 듯, 백연신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그리고 시선이 그녀에게 닿는 순간... 그의 동공이 미묘하게 수축했고,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연...”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그는 이미 시선을 돌려버렸다.그러고는 아
그 순간, 강지혁은 알았다.자신은 결코 임유진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다는걸.입버릇처럼 내뱉던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말은, 결국 공허한 외침일 뿐, 실제로는 단 한 순간도 그녀를 버릴 수 없었다.임유진은 잠시 멋쩍은 듯 웃었다. 강지혁의 눈빛이 이미 지난날의 그들 사이를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혁아, 우리 앞으로는 절대 오해 같은 거 하지 말자!”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한지영과 백연신이었다.만약 고은채가 기고만장해져 입을 놀리지 않았다면, 한지영은 평생 백연신의 진심을 모른 채 엇갈려 버렸을지도 모른다.사랑이 아무리 뜨거워도, 단 하나의 오해가 모든 것을 가로막을 수 있으니까.그런데, 그런 일이 자신과 강지혁 사이에서 벌어진다면?사소한 오해로 서로를 놓쳐버린다면?그건 너무 어리석고,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응. 우리 사이에는 절대로 오해 같은 건 없을 거야.”강지혁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그 무렵, 재원시로 향하는 고속열차 안.한종훈과 이해영 부부는 딸 한지영과 함께 앉아 있었다.며칠을 잠 못 이루던 한지영은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눈을 감을 때마다 떠오르는 건 백연신과의 기억이었다. 환희와 설렘, 고통과 슬픔... 모든 순간이 파편처럼 흩날렸다.그러나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마지막 순간이었다.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미 어떤 빛도 남아 있지 않은, 완전히 꺼져버린 듯한 눈.그건 마치... 그녀를 향한 마음이 죽어버렸음을 말하는 듯했다.“지영아, 이제 그만 생각해. 세 시간만 지나면 곧 재원시에 도착해.”이해영이 딸을 달래며 도시락을 열었고, 따뜻한 향이 퍼져 나왔다.“자, 뭔가라도 먹어. 배도 채우고 아이도 챙겨야지.”한지영은 억지로 밥을 한입 떠먹었다.혀끝에선 밥알 대신 모래를 씹는 듯 밍밍하고 거친 느낌이 돌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삼켰다.이제는 그녀 혼자의 몸이 아니었으니까.먹고 싶지 않아도, 아이를 위해서라도 먹어야 했다. 아이가 잘 자라려면.
심지어 그녀는 강지혁을 위해 두 번이나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려 했다.그 모든 선택은 오직 하나, 사랑 때문이었다.임유진은 목숨을 대가로 강지혁을 사랑해 온 것이다!그리고 강지혁은 지금이라도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무엇보다 다행이었다.늘 마음을 짓누르던 의심과 불안이 서서히 가라앉고, 그 대신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평온이 찾아왔다.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바로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한편, 한지영이 퇴원할 때도 임유진과 강지혁은 여전히 병원에 머물러 있었다.임유진은 이미 퇴원이 가능했지만, 강지혁의 상태가 아직 완전치 않았기에 함께 남아 그를 돌봤다.고이준이 전문 간병인을 불러두었지만, 임유진은 직접 챙기고 싶었다.간병인과 역할을 나누면서도, 손길이 닿는 부분은 끝까지 자신이 하려 했다.얼마 뒤, 한지영이 찾아와 입을 열었다. 재원시로 가 백연신을 만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임유진은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며칠 전 고은채가 쏟아낸 말들, 그 속에서 백연신이 한지영을 얼마나 깊게 사랑했는지를 들었으니까.그런 사람을 놓친다면, 그건 평생의 후회가 될 터였다.게다가 지금 한지영의 뱃속엔 백연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언제 출발해?”임유진이 물었다.“내일 떠날 거야. 임신한 내가 혼자 가는 게 불안하다고, 부모님이 같이 가시겠대.” 한지영이 씁쓸히 웃었다.“천 리 길을 쫓아가면서 부모님까지 대동하는 건... 진짜 극성 사랑 추격전이네.” 한지영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야. 연신 씨가 나를 용서해 주는 것. 내가 너무 많은 오해를 했어.”“용서받을 거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결국은 받아들이게 돼.”임유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하지만 한지영의 눈빛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진짜 사랑이었기에 상처는 더 깊었고, 이미 식어버린 마음을 다시 덥히는 일은 무엇보다 두려웠다.그럼에도 그녀는 가야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고, 이번에는 직접
임유진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깨달았다.강지혁이 말한 ‘그 여자’는 바로 사모님이었다.게다가 아직 얼굴이 상하기 전의, 젊은 시절 모습 그대로의 사모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그녀는 예전에 강지혁의 어머니 젊은 시절 사진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겸이가 닮은 건 사실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닮음은 점점 더 뚜렷해질지도 몰랐다.“혁아... 아무리 사모님을 원망한다고 해도, 겸이는 우리 아이야. 제발... 그 아이에게까지 화를 내지는 마...”임유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듯 망설이면서.그러자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나는 아이에게까지 화를 전가할 생각은 없어. 겸이는 네가 목숨 걸고 낳은 아이고, 우리 세 아이는 내게 그 무엇보다 소중하단 걸 알아둬.”임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스승님과 사모님도 뉴스를 보고 걱정돼 전화를 주셨어. 사모님은 심지어 다시 S 시에 와서 널 보고 싶어 했어. 결과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으신다면서. 혁아, 사모님은 지난 세월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을 거야. 아마 그때의 잘못을 자신의 목숨으로라도 되돌리고 싶어 했을지도 몰라.”강지혁의 목소리는 갑자기 차갑게 굳었다.“그건 그 여자가 죽는다고 해도 보상할 수 없어.”임유진은 그제야 알았다.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사모님이 아무리 괴로워해도, 이미 그때의 잘못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그는 사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는 반드시 정리가 필요했다.“혁아, 그럼 사모님에게 어떻게 할 생각이야?”임유진은 조심스레 물었다.그러면서도 두 손은 무심코 환자복을 꼭 쥐었다.만약 그가 정말 사모님을 철저히 벌할 생각이라면...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강지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번 생에 다시는 S 시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할 거야.”임유진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임유진은 알고 있었다.겸이가 이렇게까지 찾아와 준다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겸이의 지난 시간은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김재호의 교육 방식은 아이의 동심을 철저히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다행히 겸이는 하유은을 만났고, 하유은을 통해 따스함을 알게 되었다.그 덕분에 비로소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하지만 하유은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겸이 마음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겸이가 단순히 뉴스를 보고 자신과 강지혁을 걱정해 찾아왔다는 건...혹시 자신들과의 거리를 아주 조금이라도 좁히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언젠가는 겸이가 진심으로 부모를 받아들여 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었다.임유진은 조심스럽게 겸이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고, 시선을 낮춰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엄마는 네가 아빠, 엄마 보러 와 줘서 정말 기뻐.”겸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왜... 기쁜 거지? 다친 건데, 아픈 게 맞는데... 왜 웃고 있지?’아이의 마음속에는 의문이 일렁였다.겸이는 고사리 같은 손을 들어 임유진의 목덜미로 뻗었다.하유은이 깜짝 놀라 막으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작은 손이 임유진의 목을 움켜쥐었고, 그곳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 손길이 상처를 건드리자, 임유진은 본능적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겸아, 손 놔!”강지혁은 그녀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겸이를 제지했다.분명 아들이 그녀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강한 호통에 겸이는 화들짝 놀라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임유진은 재빨리 겸이를 달랬다.“혁아, 겸이는 그냥 내 상처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그녀는 부드럽게 겸이의 손을 감싸 쥐고, 붕대를 잡아당기지 못하게 살며시 방향을 바꿔주었다.“이렇게 손바닥을 살짝 대는 거야. 그러면 엄마가 안 아프지.”임유진은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괜찮아. 곧 다 나을 거야. 상처만 건드리지 않으면 사실 하나도 안 아파.”겸이는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