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그녀가 소리치며 힘겹게 발버둥 쳤지만,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의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환자복이 벗겨진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었고 갑자기 불어온 찬 바람에 몸에는 소름이 돋았다.“이거 놔! 이거 놔!”그녀는 조급하고 화가 났다.그는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혔다는 듯 덤덤하게 그녀의 손목을 누르고 웃으며 말했다.“누나, 좀 더 크게 외쳐도 돼. 밖에는 경호원이 있고, 간호사가 있고, 당직 의사도 있어. 모두 누나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내가 장담할게. 누나를 구하러 들어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임유진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도 그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설령 오늘 밤 목이 찢어져라 외친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이 병실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이 남자는…… 강지혁이다!그녀는 침묵하고 있었지만 그는 몸을 낮추어 그녀의 입술과 턱…… 그리고 목……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쇄골에 키스를 했다.“내 곁에 있어줘, 이 세상에서 누나는 날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나는 누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기로 약속했잖아? 그래서 내가 지금 그 기회를 주는데 누나는 도대체 왜 싫다는 거야?”그가 중얼중얼 말했다.하지만 임유진은 심장이 찔린 느낌만 들었다.그렇다. 그녀가 했던 말이지만 지금 들어보니 마치 조롱하려 한 말 같았다.“넌 혁이가 아니니까.”그는 그녀가 생각하는 자신과 동병상련인 노숙자가 아니라 S시를 뒤흔드는 강지혁이기 때문이다.그는 순간 멈칫하더니 천천히 일어나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난 여전히 혁이야. 누나가 원한다면 난 예전처럼 누나가 좋아하는 그 모습으로 연기할 수 있어.”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네가 다시 그 모습으로 연기해도 넌 이제는 혁이가 아니야.”그녀의 혁이는 이미 사라졌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환상일 뿐이었다.그는 얇은 입술을 오므렸고 아름다운 복숭아꽃 눈동자 역시 차갑게 물들었다. 그는
소민준은 그와 유진이 만나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소민영 때문에 그의 신분이 최악의 시기에 폭로되었다.소씨 가문은 정말…….“소민영을 병원으로 데려와.”“네.”고이준은 대답을 하고는 곧바로 다른 일을 보고했다.“지난번 몰래 병원에 들어온 기자의 일도 밝혀졌어요. 강 대표님이 임유진 씨를 데리고 입원한 소식을 이곳 간호사가 처음 SNS에 올렸고 다른 사람이 그걸 인터넷에 올렸대요. 지금은 관련된 내용이 전부 삭제되었지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봤는지는 확인이 안 돼요.”“간호사에게 법적 책임을 묻고, 그리고 병원 주변의 경비를 강화해. 또 다른 누군가가 병실에 침입하는 건 원하지 않아.”강지혁이 차갑게 말했다.“알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고이준이 보증했다.그 시각 소씨 저택.한지영 앞에서 말실수를 한 이후 소민영은 극도로 불안한 상태였다. 만약 미리 알았더라면 한지영을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더 놀라고 두려워하는 처지가 버린 상황이다.만약 한지영이 알아차리고 임유진에게 이 일을 알려준다면…….지난번에 자신이 얻은 교훈을 떠올렸다. 그 일로 자신의 부러졌던 다리가 아직도 낫지 않았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교훈을 줄 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민영아, 왜 안절부절못하는 거야? 설마 또 사고를 친 거야?”소민준은 붕대를 감고 있는 여동생이 지팡이를 짚고 거실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자 물었다.오늘은 설날이라 부모님은 친척들에게 설 문안 갔다. 소민준도 같이 가려다 동생이 같이 있어 달라고 해서 집에 남은 것이다.“오빠.”소민영은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나 좀 살려줘. 그날 나도 모르게 강지혁과 임유진의 일을 말했어.”“뭐라고?”소민준은 깜짝 놀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누구한테 말했어?”“임유진의 친구 한지영에게 말했어. 하지만 임유진에게 얘기했는지 모르겠어. 만약 임유진이 강지혁에게 말했으면 강지혁이 날 가만두지 않겠지?”소민영은 불안해하며 말했다.소
만약 예전이라면 강지혁을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어 소민영은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고통스럽기만 했다.“왔네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소민영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강지혁 씨, 왜 저를 부르신 건지 모르겠네요…… 무슨 일인가요?”임유진도 왜 강지혁이 소민영을 여기로 불렀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강지혁은 싱긋 웃으며 임유진의 의혹을 풀어주었다.“누나, 아직 모르지. 며칠 전 누나 친구 한지영이 소민영 씨를 만났는데 소민영 씨가 누나의 친구를 아주 심하게 괴롭혔어.”임유진은 잠시 멍을 때렸지만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날 두 사람이 백화점에서 다툴 때 한지영이 줄곧 그녀를 도와줬다. 소민영은 한지영이 그녀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한지영과 마주쳤을 때 자신의 화풀이를 그녀에게 한 것이었다.한편 소민영은 강지혁이 임유진을 누나라고 부르는 모습에 깜짝 놀라 금방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잘못 들었을 거야! S시에서 강지혁이 이런 호칭으로 부를만한 여자가 있을까?’그런데 하필이면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길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이었다.“누나, 그날 소민영 씨가 누나의 친구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알고 싶어?”강지혁이 물었다.“어떻게…… 괴롭혔는데?”한지영이 자신 때문에 무고하게 괴롭힘을 당한 것을 생각하자 임유진은 가슴이 답답했다.“소민영 씨에게 재연 해보라고 할까?”강지혁은 마치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한 뒤 일어나 병상 옆으로 가서 허리를 굽혀 임유진에게 신발 한 켤레를 신겼다.그의 동작은 가벼우면서도 조심스러웠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무릎을 꿇고 쪼그려 앉아 그녀의 발 전체를 손바닥으로 만졌다.소민영은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받았다. 강지혁이 임유진을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신발까지 신겨준다니.도대체 임유진이 어떤 매력이 있기에 강지혁이 이토록 과잉 보호를 하는 것일까.그리고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강지혁이 자신에게 재연해 보라 했다는 거. 그 모습을 어떻게 재연하라는
소민영은 눈치 없이 임유진을 비난했다.하지만 강지혁은 오히려 능청스럽게 임유진의 손가락을 만지며 담담하게 말했다.“환경미화원의 신발을 닦아주는 게 어때서요? 시장의 딸이 신발을 닦아준다 해도 그녀는 그런 대우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요!”소민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시장의 딸과 비교를 할 수가 있는 건지.“소민영 씨, 빨리 시작하세요. 강 대표님은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에요.”옆에 있던 고이준이 재촉했다.“강 대표님의 인내심이 바닥난다면 그때는 신발을 닦는 거에 그치지 않을 거예요.”소민영은 내키지 않아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임유진을 향해 걸어가더니 허리를 숙여 티슈로 임유진의 깨끗한 신발을 닦아주었다.임유진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소민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광경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무튼 지금 소민영이 겪은 일을 지영이도 겪었다는 건가?그때 지영이의 기분은 어땠을까?오히려 임유진은 친구 때문에 마음이 아다. 그와 동시에 강지혁이 왜 소민영을 데려와 이런 재연을 하게 했는지 알거 같았다.자신이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것이다. 그녀 앞에서 그토록 잘난척하며 무시하던 사람도 그의 한마디면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 신발을 닦을 수 있다고.소민영은 한참 동안 닦은 후에 말했다.“강지혁 씨, 이 정도면 됐죠.”“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게 다 된 거예요?”그 시각 옆에 있던 고이준이 소민영에게 말했다.“소민영 씨, 미안합니다.”그는 말을 하며 소민영의 손등을 직접 밟았다.소민영은 순간 비명을 질렀다.“강…… 강지혁 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당신이 그날 한지영에게 한 일을 하는 거예요. 혹시 그런 적 없나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반문했다.소민영은 자신이 한 짓이 떠올라 지금 하는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한편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부드럽게 말했다.“누나한테 한지영은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했잖아? 내가 지금 누나를 위해 화풀이
그러나 강지혁은 소민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임유진에게 물었다.“누나 생각에는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아?”일이 지금에 이르자 소민영은 임유진이 아무리 원망스러워도 용서를 빌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임유진 씨, 잘…… 잘못했어요. 당신의 친구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됐어요. 제가…… 당신의 친구에게 사과할게요. 제발요. 용서해 줘요.”임유진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소민영을 바라보면서 소민영이 용서를 구하는 것은 강지혁 때문이지 자신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이런 소민영의 모습에도 그녀의 마음에는 조의 동정심조차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한지영이 소민영에게 이렇게까지 괴롭힘 당했다는 생각을 하자 임유진은 소민영에 대한 증오가 더 깊어졌고 더 나아가 자책감까지 들었다.그녀는 차라리 이런 모욕을 당한 게 지영이가 아니라 자신이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지영이는 자신 때문에 정말 많은 희생을 했다. 하지만 출소하고 나서 지영에게 제대로 된 보답 한번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지영이 자신 때문에 또 이런 고생을 하게 되다니.“좋아요. 그럼 그날 이 장면을 본 모든 사람 앞에서 지영이에게 사과하고 지영이에게 의료비와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줘요.”임유진이 말했다.소민영은 당연히 재빨리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단지 사과와 보상이라면 손가락뼈가 부러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고이준은 그제야 발을 놓았다. 소민영은 밟힌 손을 다른 한 손으로 붙잡았다. 너무 아파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 수가 없었다.그때 강지혁이 고이준에게 분부했다.“소민준한테 들어와서 동생을 데려가라고 해.”“네.”고이준이 대답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민준이 고이준을 따라 병실로 들어왔다.자신의 여동생이 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자 소민준은 서둘러 여동생을 부축한 뒤 소파에 앉아 있는 강지혁과 임유진을 복잡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그는 이미 강지혁과 임유진이 만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서로 눈을 마주하며 바라보는 두 사람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약 강지혁이 진짜 임유진을 도와 소씨 가문에 복수한다면 소씨 가문은 틀림없이 망하게 될 것이고 S시의 명문 가문에서 소씨 가문은 제명될 것이 분명했다.“강…… 강 대표님, 난…….”소민준은 다급히 변명하려 했다.하지만 임유진이 그의 말을 끊고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이미 헤어졌으니 나에게는 모르는 사람이야. 난 교통사고로 저 사람과의 감정을 잘 정리 할 수 있었다는 걸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소민준의 얼굴 표정은 아주 비참했다. 한편 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민준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그럼 됐어.”강지혁은 일어나 소민준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유진이 복수하길 원하지 않으니 그녀에게 고마워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년 이맘때면 S시에서 SY그룹을 볼 수 없을 거예요.”소민준은 흠칫 놀라며 임유진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재빨리 소민영을 부축하여 병실을 나섰다.병원을 나오자 남매는 마치 다시 살아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오빠, 강지혁이 임유진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만나는 거 같아?”소민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임유진을 건드리지 말라고.”소민준은 화가 치밀어올랐다.“임유진은 강지혁을 내세우면서 위세를 부리는 거야! 만약 강지혁이 옆에 없으면 임유진이 뭐라도 되긴 해?”소민영은 방금 당한 치욕에 임유진이 죽일 듯이 미웠다.“만약 그녀가 복수하겠다고 했으면 우리 가문이 아주 힘들어졌을 거라는건 알아?”적어도 그 점은 임유진에게 정말 고마웠다. 적어도 임유진이 그를 지옥으로 밀지는 않았으니까.“설마 강지혁이 고작 환경미화원 하나 때문에 소씨 가문을 건드릴까?”“네 생각에는?”소민준은 자신의 동생을 노려보았다.“아무튼 넌 우리 가문을 위해서라도 임유진을 건드리지 마. 그렇지 않으면 우리 가족도 널 구하지 못할 거야. 넌 지금 우리 가문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어!”소민영은 몇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방금 병실에서 있던 일을 생각하니 몸이 움츠러들어 더
“거절하면 안 되지?”그녀가 물었다.그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얼굴의 웃음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몸을 곧게 펴고 위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거절해도 돼. 나는 누나에게 거절할 권리를 줄 거야. 단지…….”그는 머뭇거리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누나, 정말 거절할 거야?”임유진은 순간 시간이 멈춘 느낌이 들었다. 만약 승낙한다면 그녀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운명까지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만약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그녀는 아마 바로 승낙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혁…… 그녀는 강지혁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가 그녀를 괴롭힌 적은 없지만 그의 말 한마디에 그녀는 감옥에 가 온갖 고생을 했다.3년 동안의 지옥 같던 생활, 심지어 법정에서조차 변호사들은 교통사고에서 죽은 사람이 강지혁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알고 모두 그녀의 변호를 거절했다.게다가 그 사실관계가 증명되지 않은 증거들과 증인들이 모두 그녀가 술을 마셨다고 주장했고 그때 그 모든 것이 그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그는 마치 악몽처럼 그녀를 억누르면서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고 그의 정체를 알고 난 뒤로 그녀는 그가 다가오기만 하면 몸이 자신도 모르게 굳었다.그가 그녀와 약간의 신체 접촉이라도 하면 그녀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어떻게 이런 남자의 곁에 있을 수 있을까?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떨리는 몸을 억지로 버티며 말했다.“응, 거절하고 싶어.”그의 낯이 어두워지고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물들었다.“정말 거절할 거야?” “응.”그녀가 대답했다.그러자 그가 차갑게 웃었다.“좋아. 내가 여자에게 거절당할 줄 몰랐네. 임유진, 잘 생각해. 내 보호가 없으면 S시에서 네가 어떻게 될 거 같아? 소씨 가문, 진씨 가문이 널 괴롭히지 않는다고 쳐. 너 정말 한평생을 길거리 청소하며 살 거야?”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건 내 일이야.”
“강 대표님만 동의한다면 임유진 씨는 언제든지 퇴원할 수 있어요.”의사가 말했다.임유진은 갑자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퇴원조차도 강지혁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네, 알겠습니다.”그녀가 대답했다.의사와 간호사가 떠난 후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청아한 얼굴, 수려한 눈썹, 살구 같은 눈동자, 오뚝한 코와 분홍색 입술이 불빛 아래에서 한 줄기 빛을 띠고 있었다.일반인들과 비교하면 꽤 괜찮은 얼굴이지만 강지혁의 곁에는 화려한 미인이 많아 그 사람들 비교하면 그렇게 뛰어난 외모도 아니다.강지혁은 도대체 그녀의 무엇이 마음에 들었을까? 임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처음에 그를 노숙자로 오해한 일을 그는 재미있다고 느꼈다. 아무튼 강지혁은 이 남매 게임을 계속하고 싶은 걸까?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어루만졌고, 머릿속에는 그가 그녀에게 키스하던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지영이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유진아, 네 입술이 예쁜 거 알아?”“입술이 예쁘다고?”그녀는 지금까지 입술에 신경 쓴 적이 없다. 단지 입술이 못생기지 않았을 뿐 그다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맞아. 아주 예뻐. 네 입술을 보면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들어. 음…… 남자들이 원하는 그런 입술 모양이야.”그때 그녀는 웃기만 했다. 정말 이상한 표현이다!그리고 지금, 강지혁과 키스했다는 걸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입술이 뜨거워졌다.‘더 이상 생각하지 마, 더 이상 생각하지 마!’임유진은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날 강지혁이 그녀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그와 같은 남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그냥 모든 것을 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단지 꿈일 뿐이다. 꿈속에서 그녀는 혁이라는 남자를 알게 되었고 그들은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행복하게 지냈었다. 하지만 지금은 꿈에서 깨어났으니 그녀는 혼자일 수밖에.임유진은 화장실을 나와 병원으로 온 날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