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증거들과 증인들의 진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도대체 그 사람들은 왜 널 괴롭히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비판만 하잖아.”한지영은 분노했다.하지만 임유진은 평온한 거 같았다.“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한지영은 친구의 몸에 생긴 상처를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출소한 그녀를 데리러 갔을 때 그녀의 상처를 본 적이 있었다. 새로 생긴 상처도 있고 오래된 상처도 있었다.감옥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아마 유진이는 감옥에서 엄청나게 고생했을 것이다.“혁이가 진짜 강지혁이야?”한지영은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왜 강지혁이 노숙자 행세까지 하면서 너랑 같이 임대주택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낸 거야?”한지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설마 강지혁에게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일까?“그에게는 게임일 뿐이야.”임유진이 씁쓸하게 말했다. 임유진이 직접 그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에는 정말 숨이 콱 막혔었다.그녀에게 그렇게 잘해주던 혁이,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해주고, 그녀를 기다리고, 조용하게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던 혁이가 단지 게임을 위해 만든 캐릭터라는 걸 듣게 된 순간 그녀의 가슴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게임?”한지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맞아. 부자들은 일상이 지루해 시간을 보내려고 게임을 하는 거야.”임유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한지영은 순간 어떻게 친구를 위로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는 임유진이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그녀를 속이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강지혁은 유진에게 정말 큰 충격을 가했다.임유진은 머리를 들어 싱긋 웃었다.“난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그리고 지금은 그와 아무 사이도 아니야. 게임은 이미 끝났어. 어차피 내가 손해 본 것도 없고 그냥 원래 내 혼자의 삶으로 돌아갔을 뿐이야.”하지만 그녀의 미소에 한지영은 눈물이 났다.“그럼 내가 여기로 이사 올게. 나랑 같이 살자.”“
“걱정하지 마, 괜찮아.”임유진이 대답했다. 사실 환경위생과도 그녀가 교통사고로 진애령을 죽여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일을 알고 있었다.…….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남자는 한 손은 턱을 받치고 다른 한 손은 술잔을 든 채 와인을 홀짝이고 있다. 남자는 아름답고 순수해 보였다. 가볍게 힐끗 보기만 해도 수많은 여자들을 유혹할 수 있을 거 같았다.그가 나른하게 술에 취해버린 모습은 섹시해 보였다.그렇다. S시에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반한 건 다 이유가 있다! 이한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강지혁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그에게 반하더라도 행동으로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나섰던 사람들은 결국 그를 화나게 만들어 엄청나게 비참한 결말들을 맞이했고 S시의 우스갯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왜 여기까지 와서 혼자 술 마셔? 친구를 만날거면 여자를 데리고 와야지. 소개 좀 해줘. 구정 전날 할아버지를 버리고 찾아간 여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이한이 말했다.이한은 그 여자가 너무 궁금하다. 비록 강지혁이 그냥 게임일 뿐 볼 가치는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강지혁이 다른 여자와 그런 게임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그래서 이한은 강지혁이 한 말을 믿지 않았다.강지혁은 술을 마시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리고 그 복숭아꽃을 닮은 눈동자로 웃는 듯 마는 듯 이한을 바라보았다.“그래? 그렇게 보고 싶어?”이한은 그 말을 듣고 몸에 소름이 돋았고 위기감 같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지금 그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그가 방금 한 말이 상대방의 금기의 선을 넘은 거 같았다.여자가 지혁의…… 금기? 그 여자가 강지혁에게 아주 중요한 것일까, 아님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이한은 자신이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활짝 웃었다.“아니, 아니야. 보고 싶지 않아. 됐지.”두 사람이 말을 하던 도중 이한은 입구에서 다른 두 사람이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며 화제를 바꿨다.“현수 왔네. 또 새 여자친구를 데려
심지어 임유라가 강현수에게 키스하려 할 때도 현수는 거절했다.이것 때문에 유라는 불안했다. 유라는 현수의 여자친구를 바꾸는 속도를 알고 있으며 사람들이 현수가 여자를 짧게 만나고 몇 개월 사이에 질려한다고 했다.유라는 어떻게든 현수의 마음을 잡아야 하고 자신을 질리게 해서는 안 된다. 유라는 고작 몇 개월 동안만 여자친구가 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런 남자 곁에 있을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었다.이렇게 좋은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누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을까?하물며…… 유라는 자신의 옆에 있는 현수의 준수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아주 쉽게 여자를 홀릴 수 있으며 유라도 쉽게 다른 남자를 홀릴 수 있다.유라가 현수와 친해지고 싶은 건 현수가 유라에게 준 부귀영화뿐만 아니라 진정 현수를 원하기 때문이다.현수의 날카로운 눈빛이 유라를 바라볼 때 유라는 주체할 수 없이 설렜다.하여 유라는 어떻게든 현수를 잡아야 한다.“오늘 친구를 소개해 줄게.”유라의 귓가에 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유라는 점잖게 대답했다.현수의 친구는 당연히 부자다!다만 유라가 현수가 말한 친구를 보았을 때 순간 멍을 때렸다.이 남자가 현수의 친구란 말인가? 하지만 왜 임유진의 월세방에서 본 그 남자랑 닮은 것일까?비록 옷차림도 다르고 월세방 남자는 두꺼운 앞머리가 있지만, 눈앞에 있는 강지혁은 앞머리를 반듯하게 빗고 반들반들한 이마를 드러냈다.설마 같은 사람이 아닐까?유라가 생각에 잠겼을 때 현수가 말했다.“유라야, 강지혁이야. S시에서 누구든 건드려도 되는데 강지혁은 건드리지 마. 강지혁을 건드렸다가는 나도 널 못 지켜줘.”현수는 아주 평범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덤덤한 어투였지만 유라는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그동안 두 사람이 지내면서 현수는 항상 유라를 지켜줄 수 있다고 했지만, 처음으로 지켜주지 못한다고 했다.그리고 눈앞에 있는 남자가 강지혁이란 말인가? S시 사람들은 모두 알지만 인터넷에서는 정면 사진도 찾을 수 없는 강지
임유라의 등골이 싸늘했다. 이 사람은…… 설마 진짜……. “왜, 지혁아, 아는 사이야?”옆에 있던 이한은 이상했다. 유라는 삼류스타일 뿐이니 두 사람은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다.“응, 전에 한 번 봤어.”강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유라는 눈을 부릅뜨고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정말 강지혁이었다…… 임유진과 동거하는 그 남자? 당시 유라의 가족들은 유진이 감옥에서 알게 된 남자라고 생각했다.누가 알았을까, 그 사람이 한 손으로 S시를 가릴 수 있는 강지혁이라는 걸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유라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왜 지혁이 유진과 함께 그 초라한 월세방에서 동거한 것일까?강현수는 기이한 눈빛으로 지혁과 유라를 바라보더니 물었다.“유라야, 지혁이와 아는 사이라고 왜 얘기 안 했어?”유라는 흠칫하더니 머쓱하게 웃었다.“난 그때 강지혁 씨가 누구인지도 몰랐어.”유라는 말을 하더니 지혁에게 사과했다.“강지혁 씨, 그때는 조금의 오해가 있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하지만 지혁은 유라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현수에게 말했다.“앞으로 네 여자친구 내 눈앞에 끌어들이지 마. 저 여자 보기 싫어.”유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현수는 순간 생각에 잠긴 듯한 눈빛을 하였다.현수와 유라가 떠난 후 이한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지혁에게 다가가 물었다.“왜, 현수 여자친구가 네 심기를 건드린 적이 있어?”지혁은 손에 든 채 마시지 않은 남은 술을 단숨에 다 마셨다.유라를 보자 오히려 그 여자가 떠올랐다. 분명 자신의 곁에 있기만 하면 더 좋은 생활을 할 수 있고 더럽고 힘든 일도 할 필요가 없고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왜 굳이 거절하는 것일까?심지어…… 자신의 스킨십이 역겨운 것 같았다.‘단지 여자 하나일 뿐이니 신경 쓸 필요도 없어!’지혁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자기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의 그 답답함은 오히려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다.한편 유라는 불안한
심지어 임유라의 입술을 만진 후에도 강현수는 마치 유라에게 더러운 것이 있는 것처럼 깨끗한 수건으로 자신의 손을 닦았다.유라는 이 모순된 행동을 아주 이상해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사과할 필요 없어. 넌 내 여자친구야. 넌 나만 신경 쓰면 돼.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어.”현수가 말했다.현수의 동작은 가볍고 부드러워 마치 보물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지만, 현수의 목소리는 또 이렇게 차갑고 낯설었다.가끔 유라는 정말 현수를 이해할 수 없다. 현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그, 그래…… 알았어.”유라는 더듬거리며 말했다.강현수는 손을 내리고 평소와 같이 손수건으로 자신의 손을 닦았다.유라는 입술을 깨물고 언젠가 현수를 완전히 가질 것이라고 다짐했다. 유라는 현수의 마지막 여자친구가 될 것이고 강씨 가문에 시집갈 것이다!그 시각 유라는 마음속으로 맹세했다!…….구정은 빠르게 지나갔다. 휴가 기간이 지나자 임유진은 환경위생과에 출근했다. 적지 않은 동료들이 병원 앞에서 유진에게 계란을 던진 기사를 보고는 말했다.“임유진, 진세령 팬들이 환경위생과까지 와서 계란을 던지지는 않겠지? 환경위생과 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마.”“맞아, 우리 부모님이 내가 감옥살이 한 사람과 동료라는 걸 알고 날 얼마나 걱정하는지 몰라!”“진세령의 팬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임유진이 그때 진세령의 언니를 죽였잖아. 진세령은 언니랑 아주 사이가 좋아서 팬들도 마음 아파했다니까. 앞으로 어떤 과격한 행위가 있을지 몰라. 만약 우리가 다친다면 정말 재수 없는 일이야.”환경위생과에는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유진은 묵묵히 참고 웃어넘겼다. 이 일은 유진에게 매우 중요하다. 유진은 이 일에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만약 정말 해고된다면 아마도 얼마 동안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그때 서미옥이 유진에게 말했다.“신경 쓰지 마. 저 사람들은 네가 퇴사하기를 기다리는 거야. 지금 당장 일자리 찾기도 힘드니 직장을 바꾸더라도 저런
임유진은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많은 사람이 환경미화원을 무시하고 심지어 본인의 부주의로 환경미화원과 부딪쳤으면서 책임을 환경미화원에게 씌우기도 했다.“괜찮아요. 미옥 언니, 그냥 사소한 일이에요.”유진은 말하더니 다시 서미옥과 도로를 쓸었다. 일을 마치고 유진이 작업복을 갈아입을 때 우연히 작업복 주머니에 작은 은팔찌가 있는 걸 발견했다.이 팔찌는 언제 유진의 주머니에 들어간 것일까? 유진은 의심스럽게 생각했지만 야간근무인 관계로 환경위생과에 아무런 사람이 없어 일단 팔찌를 잘 보관하여 내일 다시 분실물등록을 하려고 했다.월세방으로 돌아오니 월세방은 아주 어두컴컴하고 고요했다.예전에 유진이 야간근무를 하고 돌아왔을 때는 밝은 방에 혁이가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유진은 불을 켜고 썰렁한 방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저녁에 침대에 누워있을 때 유진은 팔찌를 만져보았다. 아이의 은팔찌 같았고 디자인이 아주 흔했다. 유진은 어릴 때 자신도 비슷한 팔찌가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이 팔찌는 도대체 어떻게 유진의 작업복 주머니로 들어간 것일까? 순간 유진의 머릿속에 오늘 부딪친 남자가 떠올랐다. 설마 그 남자가 실수로 떨어뜨린 건가?그러나 이 팔찌는 딱히 비싸지 않아 보여 그 남자가 다시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 순간 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내일 일단 환경위생과에 가서 분실물 등록부터 하고 보면 된다.그리고 한편, 유진과 부딪친 그 남자는 호텔 룸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고문을 당하고 있다.남자는 지금 아주 후회하고 있다. 진작 알았더라면 그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옷차림으로 보아 부자 같아 보여 운이 좋아 대어를 낚았다고 생각했지만 아주 잔인한 사람을 건드린 것이다.“형님, 진짜 팔찌 어딨는지 몰라요! 저는…… 그 팔찌를 제 주머니에 넣었지만 저도 방금 형님이 제 주머니를 뒤졌을 때 왜 팔찌가 없는지 몰라요! 맹세해요!”남자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강현수에게 무릎을 꿇고 소리
임유진은 침대 옆 테이블에 있는 핸드폰을 보고 새벽 3시라 몇 시간 더 잘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눈을 감으려 할 때 갑자기 흠칫 놀라 벌떡 일어나더니 믿기 힘들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한 남자가 유진의 월세방의 작은 밥상 옆에 앉아 유진이 오늘 발견한 은팔찌를 손에 쥐고 있었다.어두컴컴한 불빛 아래 남자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마치 제일 좋은 붓으로 그린 듯한 짙은 눈썹, 오뚝한 코, 차갑지만 얇은 입술,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남자의 눈동자였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사람을 바라볼 때 아주 차가운 것 같았다.비록 지금 이 남자가 유진을 쳐다보고 있지만 남자는 가짜인 것 같았다.이 남자, 정말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 유진이 꿈을 꾸고 있는 걸까?“깼어요?”남자의 목소리가 방 안의 조용함을 깨뜨렸다.유진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꿈이 아니라 진짜다.“당, 당신은 누구예요? 왜 이 밤에 내 집에 있는 거예요?”유진은 억지로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몰래 핸드폰을 쥐려고 했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이 주의하지 않은 틈을 타서 경찰에 신고할 수 있을 것이다.다만 유진이 핸드폰을 만지기도 전에 상대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만약 당신이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하려 한다면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 생각이라면 당신이 잠들 때 했어요.”유진은 몸이 굳었다. 이 남자는 유진의 의도를 완전히 알아차렸다.“당신은 도대체…….”“팔찌, 내 거예요.”강현수는 말을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유진이 앉아있는 침대로 향했다.“하지만 오늘 도둑맞았어요.”“제가 훔친 게 아니에요. 그 팔찌는 내 작업복 주머니에서 발견한 거예요.”유진이 다급히 변명했다.“당신이 아닌 걸 알아요.”현수가 말했다.“당신이라면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을 거예요.”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긴장한 채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꽉 잡고 있다.눈앞의 남자는 온몸으로 차갑고 위험한 기운을 뿜고 있다. 특히 이 남자는 도대체 언제 월세방으
잠깐…… 임유진은 흠칫 놀라더니 의아하게 강현수를 바라보았다. 현수는…… 팔찌가 이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유진마저 모두 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할 때 작업복 주머니에서 발견했다.하지만 이 남자는 팔찌가 유진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유진이 어디에 사는지조차 알며 소리소문없이 들어왔다……. 이런 걸 할 수 있는 남자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당신이 팔찌를 주웠으니 어떤 보상을 원해요? 과분하지 않으면 뭐든 들어줄 수 있어요.”강현수가 머리를 숙인 채 유진을 내려보았다.애초에 팔찌만 갖고 가려고 했지만, 유진의 자는 모습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이곳에 남았다.아마도 유진이 눈을 떴을 때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유진이 눈을 떴다. 예쁜 살구 모양의 눈동자에 촘촘한 속눈썹이 아주 매혹적이다.하지만 그런 두 눈이 눈을 뜨자 나이에 맞지 않는 무기력한 기운이 있었다.마치 너무 많은 고생을 하여 이미 생기를 잃은 듯 운명을 받아들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유진은 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남자에게 강지혁과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금의 유진은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다.“그 팔찌는 우연히 제 작업복에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 제가 주운 것도 아니죠. 보상할 필요 없어요.”유진이 말했다.현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치 이렇게 좁은 방에 살면서 환경미화원 일을 하는 여자가 자신이 주려는 보상을 곧바로 거절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 같다.“내가 주는 보상이 당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해도 싫어요?”현수가 말했다.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지혁이 유진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두 사람은 너무 닮았다. 모두 다른 사람의 인생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 같다.그러나 유진은 다른 사람으로 인해 자기의 인생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유진은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바꾸고 싶다.“필요 없어요. 원래 주인에게 팔찌를 찾아준 거에 저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어요.”유진이 말했다.현수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몸을 살짝 기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