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영은 속으로 결혼에 관해 생각하다 갑자기 난데없는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녀는 자기가 떠올리고도 깜짝 놀라며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그렇게 잊겠다고 해놓고 또다시 백연신을 떠올리다니, 정말 구제 불능이 아닐 수 없었다.케이크를 고르고 다시 임유진과 강지혁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을 때 한지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며 발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그도 그럴 것이 절친한 친구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강지혁에게 케이크를 받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얼씨구, 아주 깨가 쏟아지네.’한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친구가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우여곡절 끝에 이어진 두 사람이기에 잘 됐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5년이나 지났음에도 다시 무사히 재회할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의 마음이 여전히 서로를 향해 있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한지영은 대화를 나누다 임유진이 법률 사무소를 차릴 예정이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그럼 너 개업하는 날에 내가 축하 화환이랑 엄청 큰 선물을 줄게!”“약속한 거야?”“그럼!”“우진 씨도 시간 나면 지영이랑 함께 놀러 오세요.”“꼭 그럴게요.”연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임유진은 대화를 통해 연우진이 대기업에서 팀장직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기업이라 경쟁이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그런 쟁쟁한 사람들을 제치고 팀장 자리까지 차지한 것을 보면 확실히 그는 능력이 있는 사람 같았다.강지혁은 대화에 거의 끼지 않았고 임유진을 먹이는 데만 집중했다.임유진은 케이크를 다 먹은 후 아이들에게 줄 케이크도 주문했다. 현이는 달콤한 걸 좋아하는 아이라 분명히 엄청 좋아할 게 분명했다.케이크 포장을 받은 후 가게에서 나온 네 명은 짧게 인사를 나누고 바로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이제 막 발걸음을 떼려고 하는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여러분, 그 망할 변호사 여기 있어요!”그리고 곧이어 한 무리 사람들이 씩씩거리며 다가오더니 곧장 임유진 쪽으로 무언
강지혁은 고개를 돌려 경호원에게 말했다.“책임은 돌아가서 물을 테니까 지금은 저 사람들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아 와.”“네, 대표님.”경호원의 말이 끝난 순간, 제압당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버둥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임유진을 향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여기로 오면 우리가 못 찾을 것 같았어? 당신과 당신 스승이라는 그 양반이 수작을 부리는 바람에 난 2년 반이나 형을 살아야 했어! 결국에는 아내랑도 헤어지고 자식도 못 보게 됐다고! 너 내가 가만 안 둬! 각오해!”임유진은 그 말에 그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해당 중년 남성은 임유진이 원고의 변호사를 담당했던 사건의 피고인이었다.“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은 그저 법에 따라 마땅한 벌을 받았을 뿐이에요.”“개소리하지 마. 네가 내 사건을 발판삼아 변호사 업계에서 이름 좀 날려보려 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런 파렴치한...!”남성은 말을 채 잇지 못한 채 경호원에 의해 입이 막혀버리고 말았다.그리고 그때 차 한 대가 다가오고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일단 타.”“지영이랑 연우진 씨는...”“경호원들이 이미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으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은 그 말에 주위를 삥 둘러보았다. 확실히 한지영과 연우진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신호음만 갈 뿐 아무리 기다려도 한지영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아무래도 지영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가봐야겠어.”임유진의 다급한 말에 강지혁은 침착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조금만 더 기다려봐. 금방 연락이 올 거야.”아니나 다를까 강지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화가 걸려왔다.경호원의 말에 의하면 연우진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갔고 한지영은 백연신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고 한다.“백연신이... 지영이를 데려갔다고?”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백연신은 대체 언제 나
“지영이한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그래. 그리고 그 사람들이 소란을 피운 건 다 나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임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렇게도 걱정이 되면 백연신과 한지영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할게.”그때 차 안에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발신자가 한지영인 것을 본 임유진은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지영아!”“유진아, 너 괜찮아?”한지영도 많이 걱정했는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임유진의 안부부터 물었다.“난 괜찮아. 너는? 너는 괜찮아? 백연신 씨랑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함께 있는 거야? 내가 데리러 갈까?”임유진이 물었다.“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 그리고...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거야.”한지영은 말을 하며 저도 모르게 앞에 서 있는 백연신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다 두 눈이 정확히 마주치고는 금방 다시 시선을 내리며 임유진과 통화를 이어갔다.임유진은 다행히 강지혁과 함께 차 안에 있다고 하며 연우진 쪽도 강지혁의 경호원이 무사히 데려다줬다고 한다.한지영은 한결 안심한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곧바로 연우진에게도 전화를 걸었다.“우진 씨, 미안해요. 내가 괜히 오늘 함께 쇼핑하자고 연락해서... 아까 많이 맞았어요?”백연신은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한지영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언제부터 함께 쇼핑까지 하는 사이가 됐지? 설마 그 남자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미친놈, 정신 차려. 설령 정말 좋아한다고 해도 네가 뭐라고 할 입장은 못 돼. 헤어지자고 한 건 너잖아.’백연신은 한지영의 마음이 변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이제는 자신을 완전히 지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쾌하고 질투가 치밀어 올랐다.대체 왜 이런 걸까?왜 이렇게도 마음이 혼란스럽고 또 아픈 걸까?한때 평생을 함께하자고 약속했던 여자라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그럼 다행이고요. 나는 괜찮아요. 그럼 다시 연락할게요.”한지영은 전화를 끊은 후 다시 고개를 들었고 다시 한번
그때 백연신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빈정거렸다.“왜? 이제는 네 곁에 연우진이라는 남자가 있으니까?”연우진이라고 성까지 붙여 정확하게 내뱉은 그의 말에 한지영은 바로 표정을 바꿨다.‘나는 우진 씨라고만 했지 성이 뭔지는 얘기해준 적이 없는데? 설마...’“우진 씨 뒷조사했어요?”“그게 뭐가 중요하지?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그 남자가 좋아? 사랑해? 날 사랑했던 것처럼?”백연신의 말에는 질투와 분노가 한가득 서려 있었다.“백연신 씨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일 텐데요?”한지영의 단호한 말에 백연신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그래도 한때는 내 전 여자친구였던 사람인데 이 정도도 못 물어봐?”“그렇죠. 전 여자친구죠. 연신 씨도 잘 아네요. 나한테 이런 질문할 시간이 있으면 지금 여자친구한테나 더 챙겨요.”백연신은 잠깐 침묵하더니 갑자기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나 안 미워?”한지영은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백연신이 왜 갑자기 이런 걸 묻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네가 힘들어할 때 너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 옆에 있었잖아.”백연신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그녀를 압박했고 한지영은 이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금방 벽에 내몰렸고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백연신은 두 손을 벽에 올리며 한지영을 팔 안쪽에 가두어버렸다. 두 사람의 거리는 숨결이 닿을 정도로 무척이나 가까웠지만 마치 둘 사이에 투명의 벽이라도 있는 듯 진정으로 닿고 있지는 않았다.“대답해.”백연신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네가 제일 고통스러웠을 때 다른 여자 손을 잡고 가버리고 네가 힘들어할 때 곁에 있어 주지도 못했고 너와 약속한 약속들도 결국에는 하나도 지키지 못했잖아. 나 안 미워?”그는 마치 어떻게 해서든지 그 답을 듣겠다는 듯 그녀를 추궁하고 또 추궁했다.한지영은 바로 앞에 있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백연신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달걀 물이 진득하게 붙어있다
“연신 씨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거예요.”한지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나는 괜찮아요. 내 곁에는 날 사랑해주는 가족도 있고 날 끔찍하게 챙겨주는 친구도 있어요. 내가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건 다 그사람들 덕이에요. 부귀영화까지는 누리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평범하고 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연신 씨를 원망하거나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아주 나중에 우연히 거리에서 만났을 때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어요.”한치의 원망도 없고 비아냥도 없는 아주 차분한 목소리였다.하지만 왜인지 그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백연신은 가슴이 아파 왔다. 미워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이 그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되어 다가왔다.백연신은 한지영과 만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일이 인생 최대의 행운이고 또 행복이라고 여겨왔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헤어짐조차도 너무나도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고 아주 조금의 원망도 늘어놓지 않았다.만약 5년 전 그날, 찾아오려는 그녀를 제지했더라면, 백씨 가문을 완전히 손에 넣는 데 있어 조금 더 충분히 준비한 뒤에 움직였다면 그랬다면 둘 사이의 결말이 지금과는 달랐을까?“지영아...”백연신은 한지영과 닿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아래로 기울였다.하지만 막 닿으려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아까 있었던 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터라 백연신은 한지영을 데리고 근처 호텔로 들어왔고 그렇게 두 사람은 지금 호텔 방 안에 있다.귀를 뚫고 들어오는 노크 소리에 백연신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다시 몸을 바로 세우고 발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노크한 사람은 백연신의 부하직원으로 그의 손에는 옷가지들이 들려있었다.“지시하신 옷입니다.”“수고했어.”백연신은 문을 닫은 후 다시 한지영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여성 사이즈의 옷을 그녀에게 건넸다.“갈아입고 와.”“괜찮아요. 어차피...”“지금 그 꼴로 돌아가면 부모님
얼마나 지났을까, 욕실 문이 열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한지영이 걸어왔다. 그녀는 나오자마자 백연신을 향해 말했다.“계좌번호 불러요. 돈 보내줄게요.”“안 줘도 된다고 했어.”“나도 이런 건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어요.”두 사람은 서로 조금도 양보 못 한다는 듯 팽팽하게 대치했다.분위기는 갑자기 다시 얼어붙었고 한지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나는 헤어진 연인한테 무언가를 빚지고 싶은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요. 네?”백연신은 그녀의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고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에는 계좌번호를 얘기해주었다.한지영은 휴대폰을 집어 들고 손을 움직였다. 옷 가격은 방금 갈아입을 때 힐끔 봤기에 굳이 그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다만 생각보다 더 비싼 옷이라 그녀는 숫자를 입력하면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정확히 그녀의 두 달 치 월급이었으니까.하지만 아무리 비싸도 돈은 줘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테니까.옷값을 송금한 후 한지영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백연신에게 손을 뻗었다.“곧 고은채 씨와 결혼한다고 들었어요. 축하해요. 두 사람 백년해로하길 바랄게요.”“축하... 한다고?”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백연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네, 축하해요.”헤어진 전 연인이지만 한지영은 그럼에도 진심으로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다.백연신은 복잡한 얼굴로 그녀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손을 뻗었다.그녀의 손을 한번 잡고 나니 우습게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심장이 찢어발겨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백연신은 한지영의 손을 꼭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지영은 점점 창백해져 가는 그의 얼굴에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어디 아파요? 안색이...”백연신은 갑자기 손을 확 놓더니 뒷걸음질을 치며 숨을 크게 내뱉었다.“난 괜찮아.”한지영은 백연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얼
백연신이 다시금 욕실에서 나왔을 때는 고은채가 그를 반기고 있었다.고은채는 소파에 걸터앉은 채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주 영웅이 다 됐던데요? 누가 보면 종일 한지영 그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닌 줄 알겠어요. 안 그래요?”“우연히 지나가다가 도와준 것뿐이야. 너랑 결혼하기로 한 거 빈말 아니니까 안심해.”백연신은 가운을 정리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다행이지만요.”고은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연신의 앞으로 걸어갔다.“내가 연신 씨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잘 알고 있죠? 백씨 가문을 온전히 손에 쥐여줘, 부모님 설득해줘, 정략결혼을 하고 나면 회장직을 당신한테 넘겨주기로 약속해줘, 나 같은 여자가 또 있을 것 같아요? 한지영 씨는 당신이 원하는 거 아무것도 못 해줘요. 오직 나만 할 수 있다고요. 알겠어요?”고은채는 말을 하며 손을 뻗어 백연신의 목에 둘렀다.이에 백연신은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그녀의 손길을 피하려다가 생각을 바꾼 건지 밀어내려는 움직임 하나 없이 가만히 있었다.고은채는 그런 그를 보며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지었다.‘조만간 너도 완전한 내 것이 될 거야.’“연신 씨, 인생은 길어요. 그 긴 인생을 함께할 파트너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연신 씨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연신 씨가 원하는 건 나밖에 못 줘요.”백연신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지영아, 조금만 더 기다려줘. 이제는 정말 조금이면 돼. 다 왔어...’...임유진과 강지혁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욕실로 향했다.임유진은 다 씻은 후 강지혁의 몸을 한 번 더 자세히 체크한 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실히 확인하고서야 완전히 안심했다.“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지 말라고. 날아온 게 달걀이랑 썩은 배춧잎이라 망정이지 염산이나 위험한 거였으면 나 진짜 기절했을 거야.”임유진은 아까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권건우 변호사?”“어떻게 알았어?”임유진은 깜짝 놀라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강지혁이라면 이미 진작에 라온시에 있었을 당시의 일들을 조사했을 것이라며 납득했다.“맞아. 스승님과 처음 만나게 된 것도 그 사건 덕이었지. 그날 재판에서 이긴 사람은 나였어. 까마득한 후배한테 진 거라서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스승님은 화 한번 내지 않았고 오히려 날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했어.”권건우에게 있어 그날 재판은 아주 보기 드문 진 재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재판이 끝난 후 임유진의 조심스러운 인사에 호탕하게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재판에서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진상이고 진실을 향한 규명이네. 변호사가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눈과 귀를 가리고 진실까지 가려버리면 안 되지. 안 그렇나?”전부터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날 이후 임유진은 다시 한번 권건우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를 자신의 우상으로 삼았다.“김승수 씨는 공무원이었어. 재판에서 2년 반의 형을 받은 뒤에는 당연하게도 직장에서 잘렸지만.”임유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듣기로 김승수 씨의 취업을 위해 가족들이 꽤 애를 많이 썼나 보더라고. 그 과정에서 빚도 진 모양이고.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잃게 됐으니 어디라도 화풀이할 데가 필요했겠지.”사실 김승수가 원한을 품을 거라는 건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스승인 권건우까지 들먹였다는 것이다.임유진은 시선을 내린 채 고민하다 뭔가 떠오른 듯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오늘 일 기사화 되는 거 아니야? 만약 스승님 이름까지 거론되면...”“걱정하지 마. 화제 안 되게 알아서 잘 처리하라고 지시했으니까.”강지혁이 이렇게 단언한 이상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고 해도 화제가 될 정도로 퍼지지는 않을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말에 한시름 놓았지만 혹시 몰라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일이 예기치도 못한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