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왔어?”강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임유진을 맞으며 물었다.“병원 들렀다가, 애들 근처 학원에 데려다주고... 마침 지나가는 길이라 잠깐 들렀지.”임유진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참, 사모님 수술은 아주 잘 끝났어. 의사 말로는 일주일 정도면 퇴원 가능하대.”“그래?”강지혁은 무심하게 반응했다.“혹시 시간 괜찮으면, 나랑 같이 병원에 들르지 않을래? 사모님께 인사도 드릴 겸.”임유진이 말을 이었다.“그러고 보니까, 첫날 이후로는 얼굴도 안 비췄잖아.”“왜, 내가 그분들이랑 좀 더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거야?”강지혁이 가볍게 되물었다.“응. 나한테는 두 분이 진짜 가족 같거든. 나랑 현이, 라온시에 있을 때 정말 많이 챙겨주셨어. 그러니까 너도 그분들이랑 잘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지. 자주 보고, 대화도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도 쌓이고 그러는 거잖아.”“만약 내가... 영영 그분들이랑 사이좋게 지낼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면?”강지혁의 뜬금없는 반응에 임유진은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왜 그래? 혹시... 두 분이 마음에 안 들어?”“그런 건 아니야. 그냥... 네가 만약 나랑 그분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넌 누구 편에 설 거야?”강지혁의 눈빛에는 미묘한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임유진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만약 정말 사이좋게 못 지낸다면... 각자 거리 두고 지내면 되는 거지 뭐. 두 분은 라온시에 계시고, 내가 보고 싶으면 내가 따로 가면 되니까. 혁아, 나는 네가 억지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맞춰주길 바라지 않아.”그녀에게 사부님과 사모님은 분명 은인이지만, 강지혁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강지혁이 마음을 열면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억지로 강요할 이유는 없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녀의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만약 자신의 예상이 모두 사실이라면...그녀가 그렇게 존경하는 스승님과 사모님은 아마 무사히
아들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사모님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강지혁의 그 날카롭고 조용한 눈매.마치 그녀의 모든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하면서도, 말없이 그녀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마치 25년 전 그녀가 저지른 죄를 매 순간 되새기게 하려는 듯이...“의사 말로는 앞으로 일주일 정도 입원해야 한대. 일주일 뒤에는 바로 라온시로 돌아가자. 이 일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거야.”권건우 변호사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사모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에 라온시로 돌아가면... 아마도 다시는 이곳, S시에 발을 들일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여보... 나...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들르고 싶은 곳이 있어요. 강선우...그 사람 묘 앞에 가보고 싶어요. 내가 평생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이니까. 한 번쯤은... 내 입으로 직접 사과하고 싶어요.”“그래. 그럼 그때 유진이한테 한마디 말해두자. 아마 도와줄 거야.”권건우 변호사가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다만, 당신... 그때는 감정을 꼭 잘 다스려야 해. 혹시라도 아이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말이야.”...한편, 같은 시각.병원 내 혈액검사실.하얀 연구복을 입은 직원이 조심스럽게 작은 샘플 튜브를 고이준에게 건넸다.“요청하신 샘플입니다.”고이준은 그것을 받아 들며 냉정한 눈빛으로 말했다.“잘했어. 이 일은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네, 물론입니다. 입 밖에도 안 낼 겁니다.”직원은 깊숙이 고개를 숙인 뒤 자리를 떴다.고이준은 곧장 병원을 나와 차에 올라탔다.샘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수신자는... 강지혁.“회장님, 혈액 샘플 확보했습니다.”“좋아. 계획대로 진행해.”강지혁의 목소리는 차가웠다.통화를 끝낸 그는 천천히 시선을 책상 위로 내리깔았다.눈앞에 펼쳐진 조사 자료들... 모두 사모님, 아니, 도아현과 관련된 자료들이었다.도아현...그 이름은 강지혁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이름과는 달
고은채의 눈빛에 잠시 깊은 생각이 스쳤다.그 ‘명문가 자제들이 주최하는 파티’란 사실상 상류사회에서 벌어지는 맞선 파티와 다름없었다.예전 같았으면 백연신은 그런 자리에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을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정말로 한지영을 완전히 놓아버렸다는 뜻일까?혈충을 제거한 뒤 백연신은 약속대로 고씨 가문의 사업체를 인수하면서 꽤 괜찮은 금액을 지불했다.하지만 그 돈으로 고은채 마음속의 쓰라림과 분노를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녀가 누렸던 모든 영광은 산산이 무너졌고 그 모든 시작은 백연신이 한지영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끝을 돌렸기 때문이었다.지금 그녀가 이토록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결국 한지영 때문이다.그동안 백연신이 한지영의 방패가 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감히 손도 못 댔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백연신이 등을 돌린 이상 한지영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은채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번졌다.그날 아침, 차를 몰고 백연신의 별장 밖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분명... 한지영의 눈빛에는 오해가 서려 있었다.백연신이 그토록 깊이 사랑하고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지켜온 사랑이... 결국은 한순간의 오해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그게 사랑의 끝이라니,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권건우 변호사와 사모님은 결국 S시에 머물러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임유진은 자신이 예전에 수술을 받았던 병원에 연락했고, 다행히도 소영훈과 몇몇 전문의들이 여전히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덕분에 수술 준비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게다가 사모님의 수술은 임유진의 당시 상황보다 훨씬 간단한 편이라 3시간 정도 만에 수술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마취에서 막 깨어난 사모님은 침대에 누운 채로 율이와 현이, 그리고 임유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지혁이는... 어디에...”한참을 머뭇거리다 끝내 말을 잇지 못한 그녀에게, 임유진은 미소 띤 목소리로 답했다.“지혁이는 회사에 급한 일이
“감사합니다!”한지영은 짧게 대답하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책상에 앉자마자 그녀는 손에 쥔 업무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인수인계가 필요한 자료는 후임에게 넘기고, 급한 일은 미처 마감하지 못한 채 동료에게 부탁했다.그런데 시간이 오후로 넘어가자, 조용했던 사무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한지영이 임신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진 것이다.입소문이란 참 빠르기도 했다.한 사람, 두 사람... 어느새 사무실 전체가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동료들의 시선은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았다.마치 그녀의 배를 꿰뚫어 보려는 듯,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배에 꽂혔다.“지영 씨, 혹시... 그 아이... 백연신 대표 아이야?”동료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직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헐, 진짜? 지영 씨, 그럼 이제 재벌가로 시집가는 거야?”“우와, 진짜 부럽다. 앞으로는 백씨 가문 사모님이 되는 거네!”“완전 드라마네, 로맨스 실사판이야!”하지만 한지영이 대답할 틈도 없이, 분위기를 단칼에 자르는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에이, 요즘 누가 애 있다고 무조건 재벌가 며느리 되는 줄 알아? 그게 그렇게 쉬우면 세상 여자 절반은 이미 시집갔지.”“맞아, 듣자 하니 백연신 대표, 며칠 전에 아예 S 시를 떠났다며? 진심이었으면 지영 씨도 데리고 갔겠지.”“조심해, 지영 씨. 괜히 믿고 있다가 나중에 애만 남을 수도 있어. 재벌가에 제일 흔한 게 자식들이라잖아. 돈만 주면 애 낳겠다는 여자들이 줄을 선다던데?”“그리고 말이야, 재벌가 사람들은 결혼 상대 볼 때 가문, 배경 따지잖아. 설마 백 연신 대표가 고씨 가문 아가씨랑 헤어졌다고 지영 씨랑 이어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차가운 말들, 비웃음 섞인 시선, 지나치게 솔직한 속내들...질투와 경계심이 뒤엉킨 대화 속에서, 한지영은 조용히 주변을 바라봤다.한지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이들을 한 번 훑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이미 예상했던 반응
“응. 소영훈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처음에 다쳤을 때 치료가 제대로 안 돼서 나이 들면서 점점 걷기가 힘들어졌다고 하셨어.”임유진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그런데 말을 하던 중, 강지혁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입술은 굳게 다물렸고 눈동자엔 묘한 긴장감이 떠올랐다.“왜 그래? 어디 아파?”임유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아니...”강지혁은 깊게 숨을 들이쉰 뒤 천천히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너 먼저 자. 갑자기 생각난 일이 좀 있어서... 서재 가서 잠깐만 처리하고 올게.”그는 말을 마치고 급히 방을 나섰다.서재에 들어서자, 강지혁은 문을 꽝 닫은 뒤, 무겁게 등을 기대어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조금 전, 그의 머릿속을 불현듯 스쳐 지나간 건, 과거 구치소에서 김재호 비서와 나눈 대화였다.“아, 그리고요. 계속 어머님 찾고 계시잖아요? 제가 그 일과 관련해서 단서 하나 더 드릴게요. 예전에 아버님 돌아가신 직후에, 강문철 회장님이 어머님을 찾아냈대요. 그러고는 사람 시켜서... 어머님 발목 인대를 끊으라고 했어요. 원래는 완전히 폐인 만들 생각이었는데, 어머님이 운 좋게 도망치셨대요...”“한쪽 발목의 인대가 부러졌다고... 그게 우연일 리는 없잖아...’게다가 사모님은 강지혁 자신이 기억하는 어머니와 전혀 닮지 않았다. 외모는 물론이고, 풍기는 분위기까지 단 한 가지도 겹치는 게 없었다.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는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테니까.책상 앞으로 다가간 강지혁은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고 비서. 사람 하나 좀 알아봐 줘야겠어. 그 사람과 관련된 이력 전부.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통화가 끝난 후, 강지혁은 천천히 손끝으로 조심스레 가슴을 눌렀다.셔츠 안쪽, 피부 위엔 아직도 흐릿한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건... 아주 오래전, 그의 어머니가 남겨놓은 상처였다.강지혁은 사모님이 제발 자기 어머니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어머니라면... 그때
그녀는 아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두 명의 손주 역시... 단 한 번이라도 눈으로 보고, 품에 안아보고 싶었다.오늘 강씨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 사모님의 가슴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한때, 누구보다 간절히 이 집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하지만 그토록 원하던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날들은, 언제나 강문철 회장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들어야 했던 순간들이었다.그토록 간절히, 단 한 번이라도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가기 위해... 그녀는 심지어 강선우의 마음마저 거래의 대상으로 삼았다.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강문철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냉철하고 잔혹한 인물인지결국 그 선택은 강선우를 무너뜨렸고, 자신 또한 함께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그 사람은 당신을 용서할 거야.”권건우는 조용히 아내를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신을 정말로 사랑했다면, 이렇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모른 척하진 못할 거야.”권건우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오른쪽 다리 인대가 끊긴 상태였고얼굴도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그럼에도 그는... 이상하게도 아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결혼한 지 20년.그녀는 결혼 전, 자신의 과거를 처음부터 끝까지 권건우에게 털어놓았다. 누군가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진실들... 하지만 권건우는 한 번도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그리고 권건우는 알고 있었다. 아내의 마음 한구석에 평생 동안 자리 잡고 있는 두 사람...한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 강선우.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단 한 번도 품에 안아보지 못했던 아들, 강지혁이었다.아내는 한 번도 권건우의 앞에서 강선우와 아들의 이름조차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번 S 시에 오기 직전, 마침내 진실을 그에게 고백했다.“강지혁은... 내 아들이에요. 그리고 그 아이의 아버지는... 강선우고요.”“이번에 다리 수술만 잘 끝나면 바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