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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면 새로운 계절이 온다
꽃이 지면 새로운 계절이 온다
Author: 봉소안

제1화

Author: 봉소안
서유리가 임신 4개월에 접어들었을 무렵, 남편 주영훈은 갑자기 임신한 여비서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여보, 지윤이 남편이 사고로 떠났대. 혼자 두기가 걱정돼서 며칠만 우리 집에서 지내라고 했어.”

“당신은 임신 4개월이고 지윤이는 7개월이니까, 같이 있으면 서로 의지할 수도 있고 좋잖아.”

서유리는 남편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서유리는 소지윤을 친동생처럼 살뜰히 챙겼다.

임산부용 튼살 크림부터 최고급 영양제까지 아낌없이 챙겨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서유리는 남편을 마중하러 주차장에 내려갔다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구석에 세워진 익숙한 차.

반쯤 열린 차창 너머로 웬 여자가 주영훈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채 흐트러진 차림으로 있었다.

쾌락에 흠뻑 취한 주영훈의 표정은 서유리가 임신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낯선 얼굴이었다.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서유리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았다.

‘주영훈이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고?’

굳어버린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서 한 걸음씩 다가갔다. 도대체 저 여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확인해야만 했다.

그때, 차 안의 여자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너무나도 익숙한 옆얼굴을 드러냈다.

소지윤이었다.

주영훈이 새로 고용한 지 1년도 채 안 된 비서였다.

두 달 동안 한집에서 지내며 살갑게 ‘유리 언니’라고 부르던 바로 그 소지윤이었다.

서유리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고, 그 통증은 이내 아랫배까지 번져갔다.

그때, 소지윤의 콧소리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훈 씨, 내 배 속에 있는 아기가 당신 아이라는 거, 와이프한테 언제 말할 거야?”

소지윤은 주영훈의 넥타이를 손가락으로 빙빙 꼬면서 속삭였다.

“나 이제 임신 9개월이야. 곧 애도 태어날 텐데 계속 숨길 순 없잖아.”

주영훈은 손을 뻗어 소지윤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목소리도 한없이 부드러웠다.

“곧 말할게. 지금 유리는 임신 중이라 충격을 주면 안 돼. 너도 유리도 둘 다 애를 낳고 나면 그때 말하자. 그때가 되면 유리도 별수 없을 거야.”

“하긴.”

소지윤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유리 언니는 영훈 씨를 워낙 사랑하니까, 내 배 속의 아이가 영훈 씨 핏줄이라는 걸 알아도 어쩔 수 없겠지.”

그러더니 소지윤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영훈 씨, 나랑 유리 언니 중에 누가 더 좋아? 언니가 그러던데, 임신하고 나서는 언니한테 손끝 하나 안 댔다며?”

“그런데 나한테는 왜 이래? 나 이제 곧 출산인데… 이렇게 무리해도 되는 거 아니야?”

“당연히 네가 낫지.”

주영훈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이렇게 몸매가 끝내주는데 어떻게 참아. 서유리는 이제 임신 6개월인데 벌써 퉁퉁 부어서 볼품도 없잖아.”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어쩐지 임신한 뒤로 자신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더라니.

결국 서유리의 몸이 흉측해져서 보기 싫었던 거였다.

그런데 소지윤은 이미 임신 9개월이었다.

곧 출산을 앞둔 여자와 차 안에서 이따위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서유리의 억장이 무너져 내리면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서유리는 곁에 있던 기둥에 기대면서 간신히 버텨냈다.

하지만 그 순간, 울컥하며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적막한 주차장에 울려 퍼진 구역질 소리에 주영훈과 소지윤도 서유리를 발견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주영훈이 허둥지둥 바지춤을 추스르며 차에서 뛰쳐나왔다.

“여보! 괘, 괜찮아?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밖은 춥다니까.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소지윤도 뒤따라 차에서 내리며 뻔뻔하게 말을 보탰다.

“맞아요, 언니. 제가 오늘 대표님 일이 늦어질 거라고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두 사람이 다가왔을 때 주영훈의 바지 지퍼는 채 올려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반면 느긋하게 다가온 소지윤은 볼록한 배를 당당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마치 승리자라도 된 듯한 기고만장한 표정이었다.

서유리가 멈추지 않고 구역질을 하자, 주영훈이 다가와 부축하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서유리는 혐오감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다른 여자와 뒹굴던 그 손이 끔찍하도록 역겨웠다.

“여보, 오해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

주영훈이 다급히 변명했다.

“이건 그냥 사고였어. 지윤이가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 모른 척할 순 없잖아.”

“당신도 임신했고, 지윤이도 임신했으니까 셋이 같이 지내면 서로 의지도 되고 좋잖아. 요즘 둘이 사이도 꽤 좋아 보이던데, 안 그래?”

“의지?”

서유리는 경악한 눈으로 주영훈을 쳐다보았다.

이토록 뻔뻔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는 인간이 남편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당신 진짜 미쳤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야? 밖에서 바람피워서 딴 여자 배를 불려놓고, 뭐? 뻔뻔하게 서로 의지하라고?”

“나도 당신 아이를 품고 있어, 주영훈! 벌써 6개월인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머, 언니. 어떻게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요? 전 언니 자리 뺏을 생각 추호도 없어요.”

“전 그저 영훈 씨 곁에서 묵묵히 이 아이만 잘 키우면 더 바랄 게 없다고요. 그러니까 너무 화내지 마세요, 네?”

서유리에게 다가온 소지윤이 뻔뻔하게 팔을 붙잡았다.

“이거 놔!”

서유리는 소지윤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소지윤, 난 널 친동생처럼 아꼈는데 어떻게 이따위로 뒤통수를 쳐? 나 혼자 바보같이 속아 넘어가는 꼴을 보면서 아주 재밌었니?”

가볍게 뿌리쳤을 뿐인데도 소지윤은 과장된 몸짓으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악!”

소지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영훈 씨, 나 배가 너무 아파... 우리 아기 잘못되는 거 아니야? 흐흑, 너무 무서워...”

“걱정하지 마. 당장 병원으로 가자. 우리 아이는 무사할 거야.”

주영훈은 헐레벌떡 소지윤을 안아 들고 조수석에 태웠다. 그리고는 차에 오르기 전, 차가운 눈빛으로 서유리를 노려보았다.

“서유리, 언제까지 억지를 부릴 작정이야? 경고하는데, 지윤이랑 아이가 무사하길 비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럼 당장 이혼이야!”

“이혼?”

서유리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차를 응시하던 서유리는 문득 주영훈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오빠 서지호를 따라 비즈니스 연회에 참석했던 날이었다.

하얀 셔츠 차림의 주영훈은 회사 기획서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투자를 구걸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자산가들 중 어느 누구도 이름 모를 회사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주영훈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서유리가 그날 저녁에 주영훈이 거절당한 횟수를 직접 세어 본 것만 서른다섯 번이었다.

주영훈에게 제대로 대답이라도 해준 사람은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지호가 곁으로 다가와서 짓궂게 물었다.

“왜? 저 녀석 마음에 들어?”

“재미있는 사람 같아서. 오빠 어차피 새 사업 파트너 찾으려고 귀국한 거잖아. 저 사람한테 기회를 한 번 주면 안 돼?”

서유리의 부탁에 서지호는 못 이기는 척 다가가 주영훈에게 명함을 건넸다.

몇 달 뒤, 서지호는 주영훈이 제법 쓸 만한 인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미 주영훈에게 푹 빠져 있었던 서유리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그의 회사에 입사했다.

회사가 가장 힘들었던 고비마다 서유리는 묵묵히 주영훈의 곁을 지키며 함께 버텨냈다.

마침내 JS그룹이 상장하던 날.

주영훈은 수많은 직원들 앞에서 서유리에게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했다.

“유리야, 나랑 결혼해 줄래? 내 아내가 되어 줘.”

“하늘에 맹세할게! 평생 당신 눈에 눈물 흘리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만약 내가 당신을 배신한다면, 천벌을 받고 이 회사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어도 좋아!”

결혼 생활은 그야말로 꿈처럼 행복했다.

서유리의 위장병이 다시 도지기 전까지는.

주영훈은 서유리를 집에서 푹 쉬라고 하면서 회사에 출근하지 못하게 했고, 새로운 비서까지 따로 채용했다.

처음에는 주영훈이 워낙 다정하게 챙겨주었기에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주영훈의 귀가는 늦어졌고, 셔츠에 밴 낯선 향수 냄새는 짙어만 갔다.

그럼에도 서유리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잦은 비즈니스와 접대 탓이려니 여겼다.

소지윤을 집으로 데려왔을 때조차 남편을 향한 굳건한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지난 두 달 동안, 한밤중에 주영훈이 침대에서 빠져나갔을 때조차 그저 서재에서 잔업을 처리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야 모든 진실이 명백해졌다.

한밤중에 방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던 그 끈적한 신음소리는, 주영훈과 소지윤이 집 안 곳곳에서 뒹굴며 내던 소리였던 것이다.

바보같이 사람을 믿은 죄였다.

계산적인 놈과 얽히면 끝이 안 좋을 거라던 서지호의 뼈 있는 충고를 무시한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고 있었다.

주영훈이 먼저 이혼을 입에 올렸으니, 까짓것 원대로 해주면 그만이었다.

배 속의 아이조차 더는 품고 싶지 않았다.

가슴을 옥죄어 오는 고통을 억지로 삼킨 서유리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고 두 통의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는 해외에서 사업을 확장 중인 친오빠 서지호였다.

“오빠, 주영훈이 바람을 피웠어. 나 이혼하고 오빠한테 갈래.”

두 번째는 다니던 산부인과였다.

“중절 수술 예약할게요. 가장 빠른 날짜로 잡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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