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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세 번째 이혼 요구

서른세 번째 이혼 요구

Von:  고요가을Abgeschlossen
Sprach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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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가족물

결혼

편애/이기적인

불륜

나쁜 남자

“주원영 씨, 이혼합의서에는 서명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대표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부경민의 법률대리인 진천준은 새로 출력한 이혼 서류를 두 손으로 들고 주원영 앞에 섰다. 목소리 끝마다 초조함이 묻어났다. 부경민이 주원영에게 이혼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벌써 서른세 번째였다. 부경민이 처음으로 이혼을 요구했을 때 주원영은 옥상 난간 위에 올라섰다가 추락해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 두 번째 이혼을 요구했을 때에는 손목을 그어 욕실 바닥을 피로 물들였다. 세 번째에는 수면제 한 병을 삼킨 채 사흘 동안 응급실 신세를 졌다. ... 그때마다 주원영은 목숨을 내걸고 부경민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주원영은 문득... 이 모든 것이 버겁고 지겨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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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itel 1

제1화

주원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자, 진천준은 놀란 얼굴로 뒤따랐다.

“주원영 씨, 제발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부 대표님이 주원영 씨 안전만큼은 반드시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원영의 시선은 유리창 너머 건너편 건물 외벽에 걸린 대형 광고판으로 향했다.

맞춤 정장을 입은 부경민은 반듯하고 오만할 만큼 빛났고, 곁에는 성호그룹 외동딸 성청아가 서 있었다.

세상은 두 사람을 두고 재벌가에 어울리는 완벽한 한 쌍이라고 떠들었다.

하지만 부경민의 숨겨진 아내인 주원영의 존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진천준은 창밖에 보이는 광고판을 힐끗 보고는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주원영 씨, 부 대표님과의 이혼은 형식적인 겁니다. 서류만 정리하는 거라서, 이혼 뒤에도 주원영 씨에 대한 대우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성청아 씨와의 일은 전부 회사 상장을 위한 절차입니다. 부 대표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서명만 해 주시면 보유 지분의 50%를 주원영 씨께 이전하겠다고요.”

주원영은 그 설명을 너무 많이 들었다. 이제는 한 단어도 더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명할게요.”

주원영이 진천준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물러설 틈이 없었다.

진천준은 이번에는 또 무슨 소동이 벌어질지 각오하고 온 듯했다. 뜻밖의 대답에 눈이 커졌고, 곧 안도의 기색이 얼굴에 번졌다.

“주원영 씨, 드디어 마음을 정하셨네요.”

주원영은 펜을 들었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펜 하나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이름 세 글자를 쓰는 동안, 가슴 위를 무딘 칼로 천천히 베어내는 느낌이 이어졌다. 짧은 서명 하나 하는 데 걸린 시간이 한평생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지막 획이 끝나자 진천준은 기다렸다는 듯 서류를 가져갔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문이 묵직하게 닫혔다. 주원영은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소파에 주저앉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실시간 경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강시 대표 기업인 부경민 대표가 설립한 지한그룹이 상장 예비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외부 회계감사가 끝나는 대로 한 달 뒤 정식 상장이 예정돼 있으며, 상장 후 기업가치는 약 1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됩니다.”

“지한그룹의 부경민 대표는 서강시 최고 자산가 반열에 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화면이 부경민을 비췄다. 선이 뚜렷한 얼굴, 카메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여유, 누가 봐도 정상에 선 남자다운 태도였다.

진행자가 물었다.

“부 대표님, 이번 상장을 앞두고 가장 감사한 분이 있다면 누구입니까?”

부경민의 눈가에 따뜻한 감정이 번졌다. 부경민은 몸을 살짝 돌려 성청아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저의 가장 든든한 파트너, 성청아 씨에게 감사해야죠. 청아 씨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습니다.”

성청아는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세간에서는 두 분을 두고 운명적인 커플이라고 합니다. 혹시 성청아 씨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계신가요?”

부경민은 입가에 웃음을 걸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았다.

“그 질문에는 아직 확답드릴 수 없습니다. 청아 씨가 저에게 기회를 줄지, 제가 아직 확신하지 못하니까요.”

방청석에서 뜨거운 환호가 터졌다.

“역시 재벌 대표는 다르네. 고백도 저렇게 당당하잖아.”

“드라마 아니야? 자수성가한 남자와 재벌가 딸이라니, 이 커플 너무 잘 어울려.”

“소문만 무성했는데 진짜였구나. 오늘 제대로 설렜다.”

“...”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음에 담근 칼처럼 주원영의 가슴을 정확히 찔렀다.

통증은 손끝과 발끝까지 퍼졌다.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10년 전, 부경민과 주원영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았다.

가장 가난하던 때에는 김치볶음밥 한 그릇을 사서 둘이 네 끼로 나누어 먹었다.

부경민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주원영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했다.

학비를 하루라도 빨리 마련하려고 병원에서 헌혈 아르바이트까지 했다.

몸이 원래 약했던 주원영은 피를 뽑고 나오자마자 길바닥에 쓰러졌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경민은 주원영을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주원영은 부경민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손에 든 돈을 들어 보였다.

“이제 너도 등록금 낼 수 있어.”

풋풋했던 청년은 성공하면 온갖 희생으로 자신을 뒷바라지한 주원영을 반드시 세상 모든 여자가 부러워할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맹세했다.

부경민이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구한 날, 두 사람은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자기야, 이제 우리 고생 끝이야. 앞으로는 네가 이렇게 힘들게 살 필요 없어. 내가 돈 많이 벌면, 네가 꿈꾸던 가장 큰 결혼식부터 올려 줄게.”

그날 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감정처럼 서로에게 기대었다.

놓치면 무너질 사람처럼, 서로를 오래도록 끌어안았다.

훗날 부경민의 사업은 거침없이 커졌다.

주원영은 더 이상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큰 집에서 살았고, 차가 준비됐고, 집안일을 맡는 사람도 생겼다.

단 하나의 결핍이 있었다. 부경민은 끝내 주원영의 존재를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주원영은 기다렸다. 언젠가 부경민이 약속을 지킬 날을...

하지만 꿈꾸던 결혼식 대신 부경민이 직접 준비한 이혼합의서만 반복해서 받았다.

죽음을 앞세워 버텨도 부경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보, 형식적인 이혼일 뿐이야. 걱정하지 마. 내가 너를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야. 회사 상장에는 성호그룹의 도움이 꼭 필요해.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성청아가 알면 안 돼. 네 존재도 알려지면 안 되고.”

부경민은 매번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주원영의 몸부림, 반항, 절망은 부경민에게 더 큰 성공을 막는 철없는 고집일 뿐이었다.

화면 속 카메라가 성청아를 비췄다.

성청아는 애정 어린 눈으로 부경민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고, 그 순간에 성청아의 약지에 걸린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드러났다.

“저와 경민 씨의 일에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소식이 생기면 꼭 전할게요.”

다시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주원영은 손에 낀 얇은 실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쓰디쓴 감정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원했던 모든 것을, 부경민은 이미 다른 여자에게 주고 있었다.

부경민이 원하는 것은 주원영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다른 길 위에 서 있었다.

가짜 이혼 같은 것은 없었다.

이혼했다면, 깨끗하고 완전하게 물러나면 된다.

주원영은 핸드폰을 들고 해외로 전화를 걸었다.

“고모, 저 생각 끝났어요. 해외로 가서 고모랑 살래요.”

수화기 너머 주희애는 놀란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원영아, 정말 마음 정한 거야? 전에는 성공한 남편 옆에 남겠다고 했잖아.]

주원영은 오래 침묵한 뒤 말했다.

“저... 이혼했어요.”

[사실 그런 남편은 없는 편이 낫지. 몇 년씩 너를 숨겨 두고 공식적으로 아내 자리 하나 못 주는 남자라면 마음이 진즉 딴 데 있었겠지. 헤어진 건 잘한 일이야.]

[고모가 너 하나는 충분히 책임져. 마침 다음 달에 국내 상장 예정 기업 감사를 하러 들어가. 일이 끝나면 같이 떠나자.]

“네, 고모.”

주원영의 고모인 주희애는 글로벌 회계법인의 책임 파트너였다. 세계 여러 기업의 상장 감사를 맡는 사람이라 늘 바빴다.

몇 년 전 잃어버린 조카 주원영을 찾았지만, 주희애는 바쁜 일정 탓에 조카사위인 부경민을 만나지 못했다.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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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주원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자, 진천준은 놀란 얼굴로 뒤따랐다.“주원영 씨, 제발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부 대표님이 주원영 씨 안전만큼은 반드시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주원영의 시선은 유리창 너머 건너편 건물 외벽에 걸린 대형 광고판으로 향했다.맞춤 정장을 입은 부경민은 반듯하고 오만할 만큼 빛났고, 곁에는 성호그룹 외동딸 성청아가 서 있었다.세상은 두 사람을 두고 재벌가에 어울리는 완벽한 한 쌍이라고 떠들었다.하지만 부경민의 숨겨진 아내인 주원영의 존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진천준은 창밖에 보이는 광고판을 힐끗 보고는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주원영 씨, 부 대표님과의 이혼은 형식적인 겁니다. 서류만 정리하는 거라서, 이혼 뒤에도 주원영 씨에 대한 대우는 달라지지 않습니다.”“성청아 씨와의 일은 전부 회사 상장을 위한 절차입니다. 부 대표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서명만 해 주시면 보유 지분의 50%를 주원영 씨께 이전하겠다고요.”주원영은 그 설명을 너무 많이 들었다. 이제는 한 단어도 더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서명할게요.”주원영이 진천준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물러설 틈이 없었다.진천준은 이번에는 또 무슨 소동이 벌어질지 각오하고 온 듯했다. 뜻밖의 대답에 눈이 커졌고, 곧 안도의 기색이 얼굴에 번졌다.“주원영 씨, 드디어 마음을 정하셨네요.”주원영은 펜을 들었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펜 하나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이름 세 글자를 쓰는 동안, 가슴 위를 무딘 칼로 천천히 베어내는 느낌이 이어졌다. 짧은 서명 하나 하는 데 걸린 시간이 한평생처럼 길게 느껴졌다.마지막 획이 끝나자 진천준은 기다렸다는 듯 서류를 가져갔다.“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문이 묵직하게 닫혔다. 주원영은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소파에 주저앉았다.텔레비전에서는 실시간 경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서강시 대표 기업인 부경민 대표가 설립한 지한그룹이 상장 예비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외부 회계감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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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경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역시 여보야, 네가 날 이해해 줄 줄 알았어. 회사 상장 준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 걱정하지 마.][아무도 우리 관계를 바꾸지는 못해. 조금 있다가 비서에게 데리러 가라고 할게. 오늘 저녁에 우리끼리 축하하자.]주원영의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부경민에게 이혼은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주원영은 거절하지 않았다. 사랑했던 10년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의식을 위한 식사쯤은 필요했다....고급 레스토랑 안에서 부경민과 주원영은 마주 앉았다.부경민이 돈을 많이 벌수록 바빠졌고, 주원영은 둘이 함께 식사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희미했다.“여보, 예전에 너에게 약속했던 것들, 이제 거의 다 이뤘어. 회사만 상장되면 나는 정말 자유로워져.”부경민은 잔을 들어 단숨에 술을 비웠다.눈앞의 남자는 더 이상 그때의 가난한 청년이 아니었다. 야망에 찬 눈동자에는 명예와 돈을 향한 갈증만 선명했다.주원영은 쓰라린 마음을 삼키며 잔을 들었다.“꿈을 이룬 것 축하해. 자유로워지길 바라.”독한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 마음 깊은 곳까지 번졌다.주원영은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나도 자유로워지길.’부경민은 서류 한 부를 내밀었다.“이건 지분 양도 계약서야. 내 지분 50%를 너에게 넘길게. 네가 앞으로도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주원영은 서류를 받아 들고 씁쓸하게 웃었다.주원영이 원했던 것은 지분이 아니었다.그때 레스토랑 문이 열리고 비서가 급히 들어왔다.“대표님, 성청아 씨께서 급히 찾으십니다.”부경민은 주원영을 한 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집 음식 괜찮아. 천천히 먹고 가.”아무리 훌륭한 음식도 혼자 먹으면 맛이 없었다.주원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옆 룸을 지나치던 때, 문틈 너머로 부경민의 목소리가 들렸다.“청아 씨, 미안해요. 조금 전에 일이 있어서 늦었어요. 음식은 미리 주문해 뒀어요. 청아 씨가 좋아하는 것들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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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병원에서 간호사는 주원영의 화상 부위를 씻고 소독했다.“상처가 꽤 깊어요. 관리 잘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흉터가 남을 수 있어요.”주원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몸을 감싼 하얀 붕대가 눈에 아플 만큼 선명했다.주원영은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식당에서 설거지하다 손가락을 베였던 날, 부경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원영의 손가락을 가슴에 대고 몇 번이고 문질렀다.지금 주원영은 부경민과 아무 상관없는 모르는 사람이었다.그렇다. 이혼합의서에 이름을 쓴 뒤부터 두 사람은 이미 남이 되었다.핸드폰이 울렸다. 부경민이 보낸 메시지였다.[상처는 괜찮아? 난 지금 여기서 빠질 수가 없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비서에게 연락해.]주원영은 짧게 답했다.[괜찮아.]메시지를 보낸 뒤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안방에 누운 주원영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졌다.몽롱한 잠결에 옆자리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곧 따뜻한 몸이 위로 내려앉았다.남자의 움직임은 거칠고 급했다. 상처가 눌리자 뼛속까지 아픈 감각이 번졌다.“아파.”주원영은 몸 위를 헤집던 손을 밀어냈다.부경민이었다.주원영은 부경민이 마지막으로 집에 들어온 게 언제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아마 부경민이 처음 이혼을 요구하고, 주원영이 옥상에서 뛰어내렸던 그 밤 이후였을 것이다.그날 부경민은 눈이 충혈된 채 주원영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 뒤로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부경민은 결심한 듯 굴었다. 주원영이 이혼에 동의하지 않으니 집으로 귀가하지 않았다.주원영은 집에 앉아 부경민을 기다렸다. 하루 또 하루.회사 앞에서 붙잡기도 했고, 사설 탐정을 써서 부경민의 행방을 알아내기도 했다.하지만 이제는 필요 없었다.부경민의 손이 멈췄고, 주원영의 반응이 낯선 듯했다.이어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급했어. 네가 다친 걸 잊고 있었어. 단지 네가 알아줬으면 했어. 내가 성청아와 어떻게 보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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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부경민의 얼굴에는 다정한 웃음이 떠 있었다.“청아 씨, 필요한 건 전부 골라요. 내가 사 줄게요.”성청아는 수줍게 웃었다.“경민 씨 안목을 믿어요. 경민 씨가 골라 줘요.”“그래요.”부경민은 진열장을 훑다가 한정판 가방 하나를 짚었다.“저기요, 이 가방 보여 주세요.”“청아 씨, 이 드레스는 올해 신상인데 실루엣이 깔끔하고 라인이 우아해요. 청아 씨 분위기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다음은 옷이었다.“청아 씨, 이 네이비 드레스는 차분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가 있어요. 피부 톤도 훨씬 맑고 화사해 보일 거예요.”그다음은 구두였다.“이 구두는 라인이 섬세하고 굽이 높지 않아요. 편하면서도 고급스러워요.”곁에 서 있던 직원 몇 명이 작게 속삭였다.“남자가 이렇게 여성 패션을 잘 아는 거 처음 봐.”“그러니까 완벽한 남자라는 거지. 돈도 잘 벌고 안목도 높고. 방금 고른 것들 전부 매장 인기 제품이야.”“나도 저런 사람 한 번 만나 봤으면 좋겠다. 진짜 부러워.”“...”구석에 숨은 주원영은 갑자기 숨이 찼다.부경민은 모르는 게 아니었다. 주원영 앞에서 알고 싶어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부경민이 돈을 벌기 시작한 뒤, 주원영은 이 남자 옆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옷과 가방을 샀다.들뜬 마음으로 새 물건을 보여 줄 때마다, 부경민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업무 서류만 들여다보았다.항상 같은 대답이었다.“여자들 물건은 내가 잘 몰라. 네가 좋으면 됐지.”지금 성청아를 위해 패션 전문가처럼 하나씩 골라 주는 부경민의 모습은 주원영의 가슴을 또다시 찔렀다.성청아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부경민이 고른 차림은 정말 잘 어울렸다. 맞춤옷처럼 성청아의 분위기를 더 화려하게 살렸다.부경민은 애정이 고인 눈으로 성청아를 바라보았다.“청아 씨, 회사 상장식 날 이 옷을 입으면 모두가 청아 씨만 볼 것 같아요. 그날 내가 청아 씨에게 선물을 하나 더 줄게요.”주원영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조여 왔다. 위청이는 몸이 앞에 있던 진열대를 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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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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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날 밤, 주원영은 부경민에게 묶인 채 지하실에 던져졌다.철문 밖에서 부경민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갑게 울렸다.“내가 성청아에게 네 존재를 알리지 말라고 했지. 왜 매번 말을 듣지 않는 거야?”주원영의 몸이 급격히 떨리기 시작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주원영은 있는 힘을 다해 철문을 두드렸다.“내가 아니야. 나는 성청아를 부르지 않았어. 문 열어 줘. 나 여기 있으면 죽어. 제발...”힘은 점점 빠졌다. 문밖의 부경민은 흔들리지 않았다.“잘못했으면 벌받아야 해. 오늘 밤은 그 안에서 반성해.”마지막 빛까지 꺼지자 지하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잠겼다.부경민은 주원영에게 심한 폐소공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장 두려운 방식으로 벌을 주었다.주원영은 구석에 웅크려 앉아 두 팔로 다리를 끌어안았다. 숨이 막혀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의식을 잃기 전, 흐릿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그해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하던 주원영은 주방장이 퇴근하며 문을 잠그는 바람에 혼자 갇혔다.절망 속에서 부경민에게 전화했다.1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였지만 부경민은 10분 만에 달려와 문을 열었다.나중에야 주원영은 알았다. 부경민이 자신을 구하려고 신호를 몇 번이나 무시하며 달렸다는 걸.주원영은 울면서 바보라고 욕했다.“사고 나면 어쩌려고 그랬어?”부경민은 주원영을 꼭 끌어안았다.“네 목숨이 내 목숨보다 중요해. 네가 없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해.”분명 그토록 뜨겁고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이제 부경민은 성청아를 위해 주원영의 목숨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짠 눈물 한 방울이 눈가를 타고 흘렀고, 주원영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주원영은 지하실 밖으로 끌려 나왔다.햇빛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눈이 아플 만큼 하얬다.부경민은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마당에 앉아 있었다. 초라하게 쓰러진 주원영을 여유롭게 바라보았다.“갇혀 본 기분이 어때? 앞으로 또 성청아를 괴롭히면, 하룻밤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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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부경민의 시선은 성청아와 주원영 사이에서 흔들렸다. 짧은 침묵 뒤, 시선은 결국 성청아의 얼굴에 고정됐다.부경민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성청아를... 선택하겠다.”말이 떨어지자 주원영의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박건우가 크게 웃었다.“부경민,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앞길을 위해서라면 아내의 목숨도 버리는 놈.”박건우는 성청아를 묶은 줄을 끊고 부경민 쪽으로 밀어냈다.부경민은 몸을 낮춰 성청아를 안았다. 깨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청아 씨, 겁내지 마요. 지금 병원으로 갈게요.”부경민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뛰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성청아의 상처가 깊어질까 두려운 사람처럼.주원영에게는 더 이상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박건우는 채찍을 꺼내 주원영의 몸에 내리쳤다.“날 원망하지 마. 원망하려면 사람 잘못 만난 운명을 원망해야지. 부경민이 진 빚을 네가 갚는 거야.”채찍이 거듭 몸을 갈랐다. 등은 금세 피로 젖었다.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숨을 막았다. 주원영은 구조 요청조차 하지 못했다.의식이 흐려질 무렵, 주원영은 그해 부경민이 실반지 하나를 들고 한쪽 무릎을 꿇었던 장면을 떠올렸다.부경민의 눈은 뜨거웠고 목소리는 진심으로 가득했다.“원영아, 나와 결혼해 줘. 평생 널 지킬게.”‘부경민, 네가 말한 평생은 고작 몇 년짜리였구나.’...다시 눈을 떴을 때, 주원영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부경민은 침대 곁에 기대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흐트러졌고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오래 지킨 사람처럼 보였다.“깼어?”주원영은 고개를 돌려 부경민이 뻗는 손을 피했다.부경민은 멋쩍게 손을 거두었다.“그때 상황이 너무 급했어. 먼저 성청아를 데리고 나간 뒤 다시 사람을 보내 널 구하려고 했어. 박건우는 제정신이 아니야.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어.”부경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고생했어.”주원영이 입을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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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부경민은 두 귀를 의심했다.이번 재무 감사를 통과하기 위해 부경민은 1년 전부터 준비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재무총괄 임원을 선임했고, 감사 자료도 며칠 밤을 새워 정리했다.모든 준비가 완벽하다고 믿었기에 성청아를 데리고 섬에 간 것이었다.그런데 감사가 통과되지 않았다니.전화를 끊자마자 부경민은 가장 빠른 항공편을 예약했다.성청아는 이해하지 못했다.“경민 씨, 내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서둘러요?”“청아 씨, 돌아가야 해요. 회사 감사에 문제가 생겼어요.”비행기가 착륙하자 부경민은 곧장 회사로 달려갔다. 사무실 안 직원들은 모두 얼어붙은 가지처럼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부경민이 날카롭게 물었다.“무슨 일이야? 재무 감사가 왜 통과되지 않았지? 필요한 자료는 전부 준비했잖아. 내가 며칠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왜 이런 문제가 생긴 거야?”재무총괄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대표님, 이번 감사 책임자가 너무 꼼꼼했습니다. 회사의 모든 지출을 전부 확인했습니다. 직원 복리후생으로 산 생리대 비용까지 따졌습니다. 그런 감사는 저도 처음 봤습니다.”부경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가 준비한 자료는 일반 상장사 감사에 맞춘 것이었다.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들여다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재무총괄은 말을 이어 갔다.“그뿐만이 아닙니다. 직원들의 학력과 4대 보험 가입 현황까지 모두 확인했습니다. 학력 허위 기재 직원이 네다섯 명 나왔고, 청소 직원 보험 미가입 문제도 지적됐습니다.”‘이게 감사 맞나? 꼬투리를 잡겠다는 뜻이지.’하지만 부경민은 항의할 수 없었다. 전부 감사 범위 안의 사항이었다. 단지 지한그룹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뿐이었다.부경민은 속이 탔다. 상장 날짜는 이미 정해졌다. 감사가 통과되지 않으면, 눈앞까지 온 상장이 무너진다.옆에 있던 성청아가 부경민을 달랬다.“너무 걱정하지 마요. 아빠에게 물어볼게요. 그 회계법인이 성호그룹도 감사한 적이 있으니까, 아빠가 잘 알 거예요.”성호그룹은 오래된 상장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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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집으로 돌아온 부경민은 급히 주원영을 찾았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오갔지만 주원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집 안은 무서울 정도로 깨끗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병원에도 없고, 집에도 없다. 그렇다면 어디로 간 거야?’지난 몇 년간 주원영은 집에만 있었다. 일도 하지 않았고, 친구도 거의 없었다. 주원영의 모든 생활은 부경민 하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부경민은 주원영이 평생 자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 믿었다.물고기가 물 없이 살 수 없듯, 주원영은 자신 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부경민은 주원영의 의지할 곳이자 삶의 중심이었다.그래서 부경민의 의식 속에서는, 설령 이혼한다고 해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도, 평생 주원영을 책임지면 된다고 믿었다.그것이 주원영에게 한 약속이며,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이라고 여겼다.‘혹시 여행갔을까?’하지만 주원영은 원래 멀리 나가지 않았다. 더구나 몸에 상처까지 있었다. 부경민은 곧 그 생각을 지웠다.‘도대체 어디 갔지?’부경민은 점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그날 병원에서 떠나기 전, 주원영이 던진 질문과 삶을 포기한 듯하던 표정이 떠올랐다.무서운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혹시, 또 죽으려고?’그 생각이 떠오르자 부경민은 그 생각을 더는 떨쳐낼 수 없었다.주원영은 예전에 이혼을 막으려고 서른두 번이나 자해를 시도했다.그 끔찍한 기억들이 하나씩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부경민은 더 생각할 수 없어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경찰서에서 부경민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신고하겠습니다. 제 아내가... 아니, 전처가 실종됐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꼭 찾아 주십시오.”경찰은 긴급 실종으로 접수하고 CCTV를 확인하기 시작했다.모든 영상을 확인한 뒤 경찰은 결론을 내렸다. 주원영은 죽지 않았다.그 말을 듣자 부경민의 긴장한 마음이 조금 풀렸다.부경민은 바로 물었다.“그럼 어디로 갔습니까?”“영상에서 보면 마지막으로 확인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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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비행기 안에서 주원영은 손에 든 책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주희애는 계속 업무를 처리했다.주원영은 고모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고강도 업무가 오래 몸에 배어, 주희애에게는 전문직 특유의 단단하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있었다.주희애는 고모지만 주원영과 나이 차이가 아주 크지는 않았다. 지금 커리어의 절정에 선 사람이었다.일에 집중한 주희애를 보자 주원영은 강한 열등감을 느꼈다.같은 주씨 집안의 여자인데, 고모는 유능했고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심지어 사랑에 눈이 멀어 대학 진학마저 포기하고 부경민을 뒷바라지했다.생각할수록 주원영은 자기 자신이 한없이 초라했다.남자의 진심과 양심을 믿으면 평생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하다니, 참 주제도 몰랐다.여자로서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자신을 몰아넣은 건 주원영 자신이었다.주희애는 주원영의 시선을 느꼈는지 일을 멈추고 부드럽게 웃었다.“무슨 생각해?”주원영은 시선을 거두고 눈을 내렸다.“별거 아니에요. 고모가 일하는 모습이 참 예쁘고 멋있다고 생각했어요.”주희애는 웃었다. 주원영의 속마음을 알아챈 듯했다.“A국에 도착해서 자리 잡으면, 고모가 네게 맞는 일도 알아봐 줄게.”주원영은 기뻤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고모, 제가 A국에서 일을 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잘 구사하는 외국어도 없어요.”주희애는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원영아, 어떤 처지에 놓여도 자신을 믿어야 해. 내가 처음 A국에 갔을 때 가진 돈은 몇십만 원이 전부였어.”“그래도 버텼다. 반드시 이 나라에서 살아남겠다고. 설거지도 했고, 청소도 했고, 배달도 했어. 힘든 일은 다 해 봤다.”“낮에는 일해서 학비를 벌고 밤에는 공부했어. 졸업했고, 취업했고, 지금의 내가 됐다.”고모의 말을 듣던 주원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주희애와 주원영의 삶은 닮아 있었다. 둘 다 지독한 가난을 겪었다.다만 고모는 번 돈을 자신에게 투자했고, 주원영은 부경민에게 쏟았다.고모는 자신의 삶을 세웠고, 주원영은 남자의 발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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