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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안나 스미스
나는 보낸 메일함을 들여다봤다. 스위스 연구소에 임신 사실을 고백한 메일이었다. 이제 조용히 답장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도 모르게 배에 손을 얹었다. 우리 둘 다 괜찮다고 확인시켜 주듯이.

몇 시간 만에 소장의 답장이 왔다.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여신 것 축하드립니다! 연구실에서 걸어서 몇 분 거리에 가족용 숙소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로랑 박사의 부인이 저희 산부인과 과장인데, 산전 진료 예약을 직접 다 잡아두었습니다.]

[특히 공항 도착부터 새 집 현관까지 팀원 한 명이 동행할 예정입니다. 짐 드실 일도, 줄 서실 일도, 신경 쓰실 일도 전혀 없습니다!]

나는 화면을 오래 들여다봤다.

연구소의 동료 연구원은 망설임도, 편견도 없었고 한없는 배려와 지지뿐이었다.

가슴 한쪽이 뻐근해졌다.

내용을 확인한 뒤 나도 처음으로 느끼는 진짜 희망 같은 것이었다.

[제 지금 상황 너머의 저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답장을 썼다.

...

출국하는 날.

나는 입국장 게이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서 연구소 담당자를 찾았다.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소피아?”

돌아보니 호리호리한 남자가 인파를 헤치고 오고 있었다. 눈매가 순했다.

명찰에는 에릭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도 상대방의 따뜻한 인사 덕분에 긴장이 금세 풀렸다.

내 캐리어 하나를 마치 희귀 유물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들었다.

“우선 탑승 준비 다 해뒀습니다.”

웃으며 말했다.

“소장님이 저희 간판 연구자한테는 VIP 대접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셔서요.”

에릭이 내 쪽으로 몸을 트는 바람에 그의 어깨가 VIP 라운지 근처에서 일어난 소란을 잠깐 가렸다.

거기에 제임스가 있었다. 비키가 팔에 매달린 채, 두 사람 다 등을 돌리고 중동에서 온 사업가 무리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제임스의 몸이 굳었다.

“방금 누가 소피아라고 부르지 않았나?”

비키의 유리알 같은 웃음소리가 튀어 올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제임스. 소피아는 지금 실험실에 파묻혀 있겠지.”

비키가 제임스를 샴페인 리셉션 쪽으로 끌고 갔다.

제임스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오기 전에 우리는 움직이는 대기 줄 속으로 사라졌다.

게이트로 걸어가는 동안 에릭은 연구실에 새로 들인 이광자 현미경 이야기를 신이 나서 늘어놓았다.

“로랑 박사님이 선생님의 단백질 연구를 위해 특별히 들여오신 장비예요.”

순간, 내 눈이 반짝였다.

내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던 종류의 학문적 열정이 샘솟았다.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아, 참. 팀에서 만장일치로 소피아 선생님이 원하는 일정에 맞추기로 했습니다. 아침 9시 전에는 회의 없고, 저녁 근무는 아예 없는 걸로요.”

가슴 한복판을 손으로 눌렀다. 나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4년을 함께 산 제임스보다 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더 열심히 헤아리고 있었다.

보안 검색대에서 에릭이 엽서 한 묶음을 건넸다. 싸구려 코팅 위에서 알프스가 반짝였다.

“집에 편지 쓰시라고요.”

에릭이 격려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엽서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넣었다.

에릭이 눈을 깜빡였다.

“쓸 사람이 없으세요?”

터미널 창문 쪽을 한 번 돌아봤다.

새벽빛 속에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저 어딘가에서 제임스는 아침을 먹으며 비키의 최신 초음파 사진을 넘겨보고 있겠지.’

‘여자의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손을 팔 위에 얹은 채로...’

“이제는요...”

나는 대답하고 탑승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비행기 아래에서 엔진의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에릭은 취리히의 농산물 시장 이야기를 떠들었다.

“8월에 나는 복숭아는 꼭 드셔 봐야 해요! 햇빛을 씹는 맛이 뭔지 알게 될 겁니다.”

나는 창에 손을 댔다.

나만 웃고 있던 사진들에 작별을 고했다.

한 번도 ‘집’처럼 느껴진 적 없던 그곳에도 작별을 고했다.

‘안녕, 제임스. 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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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바라봤다. 연구자인 소피아. 눈사태 속의 생존자. 열정적이고 유능하며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설 수 있는 독립적인 여자. 제임스가 폭력적이고 복잡한 자신의 세계 뒤편에 밀어 넣었던 조용하고 순응적인 아내가 아니었다.눈앞의 여자는 제임스가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제임스가 가볍게 보아 넘긴 꿈과 야망을 품은 여자였고, 제임스가 존재 자체를 외면한 사람이었다. 제임스는 소피아를 한 번도 진실되게 이해한 적이 없었다.그 깨달음은 제임스를 여기까지 몰고 온 눈사태처럼 거세게 덮쳤다. 제임스가 결혼한 건 편리한 계약이자 아름다운 그림자라고 생각했던 존재였다. 소피아가 이제 자신과 자신의 세계에서 확실히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자, 제임스는 자기 손가락 사이로 놓쳐 버린 사람이 얼마나 눈부시고 강한 여자인지 처음으로 제대로 알게 됐다. 그 사실이 남긴 통증은 몸에 난 어떤 상처보다 깊었다.소피아는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큰 장비 텐트 안으로 사라졌다. 제임스가 오랫동안 두르고 살았던 갑옷의 마지막 조각도 함께 박살났다. 권력과 통제, 감정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세운 방어벽은 먼지가 되어 알프스 바람에 흩어졌다.제임스는 스스로 삶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어 놓았는지 마침내 이해했다. 오랫동안 벽 안에 가둬 둔 마음은 이제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밖에 드러나 있었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소피아에게 간절히 향해 있었다. 제임스는 주머니에서 위성 전화를 꺼냈다. 신호는 약했지만 통화는 가능했다. 마이클에게 전화를 걸었다.“마이클... 자, 나야, 제임스.” 쉰 목소리였지만 결심은 분명했다. “나는 계속 여기에 남을 거고, 기한도 따로 정하지 않았어. 다른 일은 전부 네가 알아서 처리해. 정말 긴급한 일이 아니면 연락하지 마. 보고는 매일 올리되 내가 바로 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고.]잠시 침묵한 뒤 깨지지 않을 맹세처럼 낮고 단단한 말이 이어졌다. “난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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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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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8화

    여학생의 말에 제임스의 온몸이 굳어버렸다.“아기를... 잃을 뻔했다고?” 제임스의 입안에서 깨진 유리를 씹는 것 같은 맛이 났다.파란 머리의 여학생이 교재를 더 세게 끌어안고 제임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떤 나쁜 놈이 언니를 임신시켜 놓고 사라졌어요. 언니가 쓰러졌는데도 코빼기도 안 비쳤다고요.” 조용한 캠퍼스에 울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총알처럼 제임스의 가슴을 때렸다.소피아가 자기 아이를 품고 있었다.머릿속이 병원으로 튀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창백하던 소피아의 얼굴, 주먹 안에 구겨져 있던 종이. 그때 제임스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빌어먹을 신사라도 된 것처럼 비키의 산전 진료를 챙기고 있었다.“소피아는 지금 어디 있지?” 목소리가 목구멍을 긁고 나왔다.여학생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갔어요. 지난주에 스위스로 떠났어요.”‘스위스...’제임스도 갑자기 뭔가가 생각이 났다.자신이 비웃었던 지원 서류. 소피아가 싫어할 거라고 멋대로 단정했던 눈.무심하게 던졌던 말 하나하나가 이제 배 속에서 칼을 돌리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다가왔다.자정이 되었을 때 제임스는 펜트하우스의 사무실에서 전화로 모든 절차와 규정을 짓밟고 있었다. 새벽 3시가 되기 전, 연구소장은 전용기에 태워져 제임스의 본부로 향하고 있었다.“연구 프로그램에 100만 유로.” 제임스가 수표를 책상에 내리꽂으며 으르렁거렸다. “소피아가 어디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깡마른 체구에 안경을 쓴 소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피아 씨는 발레주에 계십니다. 하지만 회장님...”“200만.” 수표 위에서 펜이 멈췄다. “소장님은 직접 나를 소피아에게로 데려다주고.”소장이 안경을 고쳐 썼다. 그 차분함이 제임스의 분노를 더 긁었다. “이 계절에 산길은 아주 위험합니다. 조금 기다리시는 편이...”“300만. 제네바에 헬기 대기시켜 놓죠.”헬기 창밖으로 스위스 알프스가 거대한 벽처럼 솟아 있었다. 새벽하늘 아래의 봉우리는 들쭉날쭉한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7화

    제임스의 손가락이 떨렸다. 손끝은 이혼 서류에 찍힌 양각 도장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비키의 손이 제임스의 어깨에 올라왔다. “제임스, 그냥 나이가 어린 여자애가 떼쓰는 거야. 조금 지나면 알아서 기어 돌아올...”“나한테는 아내가 있어.” 총성이 터지듯 제임스의 말이 목구멍을 찢고 나왔다. 그리고 비키를 거칠게 밀어냈다. 비키가 부딪쳐 떨어진 크리스털 화병이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유리 파편이 대리석 위를 미끄러졌다. 깨져 버린 결혼처럼.제임스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후려쳤다. 메르세데스의 엔진이 거칠게 울었고, 하얗게 질린 손으로 붙잡은 운전대가 미세하게 떨렸다.대학의 정문이 앞을 막아섰다. 제임스는 웃으며 지나가는 학생 무리 사이를 헤치고 걸었다. 두툼한 수업 교재와 미래로 채운 묵직한 가방들이 어깨에 걸려 있었다. 그제야 속이 뒤집히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임스는 소피아의 실험실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지도교수의 이름도 몰랐다. 소피아가 무엇을 연구하는지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생물학 실험실이요?” 경비원은 흐트러진 제임스의 정장을 못마땅하게 훑었다. “대학원생들은 지난주에 다 나갔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경비원이 덧붙였다. “가족이라면 아셨을 텐데요.”그 말이 갈비뼈 사이에 칼처럼 박혔다해가 기울며 캠퍼스가 멍든 듯 어두운 빛으로 물들 때, 파란색으로 머리 일부를 염색한 자그마한 여학생이 필사적으로 사람을 붙잡는 제임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소피아 언니의 오빠예요?” 여학생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2주 전에 언니가 쓰러졌을 때는 왜 안 왔어요?”제임스의 세상이 다시 흔들렸다. 병원에서 마주쳤던 일, 메스꺼워하던 소피아, 배를 감싸듯 손을 얹던 모습이 잔인할 만큼 선명하게 하나로 길게 이어졌다.뒤이은 말이 제임스의 가슴안에서 폭발하듯 울렸다.“지난주에는 아기까지 잃을 뻔했어요. 언니가 입원했을 때 대체 어디 있었는데요?”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6화

    메르세데스가 크게 휘청이며 오토바이와 부딪히기 직전에 순식간에 비켜 나갔다. 닫힌 창을 뚫고 라이더의 욕설이 들어왔지만 제임스는 눈썹 하나 끄떡하지 않았다. 핸들을 쥔 손등의 뼈가 하얗게 도드라지고 가죽이 삐걱거렸다.“제임스!” 비키가 잘 관리된 손을 가슴에 얹었다. 다이아몬드 팔찌가 대시보드에 부딪혀 짤랑거렸다. “요즘 왜 이래? 영화 보기로 한 것도 까먹더니, 이제는 우리 둘 다 죽일 셈이야?”비키의 항의에도 제임스의 시선은 그대로였다. “피곤해서 그래. 친구들이랑 봐.”말투는 감정도 없고 기계적이었다. 머릿속 생각은 다른 데로 가 있었다. 약 한 달 전에 소피아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 [실험실 일이 늦어져. 기다리지 말고.]그 뒤로 아무 소식도 없었다. 전화도, 메시지도.비키가 콧방귀를 뀌며 손거울을 열고 입술을 보며 립스틱을 덧발랐다. “소피아가 그 잘난 연구소로 가버린 뒤로 계속 이렇잖아. 솔직히 나랑 시간 보낸다고 삐친 거겠지.”제임스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말이 안 됐다. 소피아는 떠날 때 상당히 멀쩡해 보였다.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언제나 그랬듯 철문으로 둘러싸인 모레티 저택의 입구의 위압적인 모습이 가까워졌다. 그런데 제임스가 안으로 들어서자 뭔가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공기는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었고, 집 안은 완벽할 정도로 조용했다.그때 제임스의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가죽 표지 앨범 하나가 대리석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모서리가 약간 우그러져 있었다. 가정부가 손을 비비며 옆에 서 있었다.“쓰레기통에서 나온 겁니다. 안에 든 게 그래서... 혹시나 필요하실까 싶어서 꺼내뒀습니다.”제임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표지가 차가웠다. 첫 장을 넘겼다. 결혼사진이었다.곧이어 숨이 턱 막혔다.그날의 소피아는 눈부셨다. 그 눈부신 웃음이 목에 걸린 투명한 다이아몬드를 이길 만큼 환하게 빛났다. 그 옆의 자신은? 무표정한 석상처럼 서 있었다. 신부가 기쁨으로 빛나는데도 표정을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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