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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내 차례가 왔다
끝내 내 차례가 왔다
Penulis: 마음봄

제1화

Penulis: 마음봄
삼하유는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몸속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듯했다.

눈이 시릴 만큼 밝은 수술등 탓에 제대로 뜨기도 힘들었지만, 하유는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출입문만 바라봤다.

30분 전, 하유는 유치원에서 딸 우지연을 데리고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가 그대로 돌진해 왔을 때 하유는 본능적으로 딸을 밀쳐 냈다.

지연은 살았지만 대신 하유가 차에 치여서 날아갔다. 핏속에 쓰러진 뒤,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지금 하유는 병원 응급처치실에 실려 와 있었다.

침상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연도 보이지 않았다.

‘지연이는 괜찮을까? 어디 다친 데는 없겠지...’

딸을 확인하러 가려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온몸이 침대에 못 박힌 듯 움직일 때마다 살이 찢기는 고통이 밀려왔다.

“엄마...”

어디선가 지연이 우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유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막 대답하려는데, 커튼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이쪽입니다. 빨리 와주세요.”

남편 우승호의 목소리였다.

늘 그렇듯 차갑고 낮았지만 평소와 달리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곧이어 지연의 어린 목소리도 들렸다.

“선생님, 거기 아니에요. 이쪽이에요...”

하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은 힘을 짜내서 커튼을 걷었다.

승호와 지연은 의사를 붙잡고 옆 병상 쪽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1번 병상의 환자 상태가 더 위급합니다. 먼저 저쪽 환자부터...”

“안 돼요!”

지연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우리 엄마는 괜찮아요. 피도 조금밖에 안 났고 엄마는 엄청 튼튼해서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이모가 저 차에 태워 주다가 손가락을 다쳤단 말이에요. 엄청 아플 거예요. 이모부터 봐 주세요...”

‘이모?’

하유는 기억을 더듬었다. 사고 직후 딸을 밀쳐 냈을 때, 한 여자가 달려와 지연을 일으켜 세웠다. 아마도 그때 다친 모양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흐릿한 시야 너머로 사람들이 문 앞을 지나갔다.

키 큰 승호의 실루엣,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지연의 작은 머리가 보였다.

두 사람은 의사를 재촉하며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결국 끝까지 누구도 하유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하유는 입을 벌리고 부르고 싶었다.

자신은 아직 여기 누워 있다고, 의사가 필요하다고. 정말 죽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이 꽉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비릿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치솟더니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 뒤로 의식이 끊어졌다.

...

다시 눈을 뜬 건 이틀 뒤였다.

하유는 천천히 눈을 떴다. 병실은 텅 비어 있었다. 여전히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도 온몸이 산산이 부서졌다가 다시 붙인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몸 곳곳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팔과 다리에는 깁스까지 되어 있었다.

목이 말랐다. 침대 옆 탁자에 물컵이 놓여 있었다.

손을 뻗어서 손끝으로 컵을 건드렸지만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다 극심한 통증에 식은땀이 쏟아졌다.

결국 하유는 다시 침대 위로 무너졌다.

문밖으로 누군가 지나갔다. 사람을 부르려던 하유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먼저 듣게 됐다.

“VIP 병실 임혜원 씨는 정말 복도 많지. 손가락만 살짝 까진 정도라던데 우승호 대표가 최고 의료진을 다 붙여 줬대. 해외에서 전문의까지 불렀다더라.”

“그러게. 그 어린애도 이제 5살쯤 됐나? 직접 임혜원 씨한테 죽을 먹여 주는데 뜨거울까 봐 한 숟갈씩 후후 불어서 주더라고. 나까지 괜히 뭉클했다니까.”

“임혜원 씨가 우 대표 아내 아니야? 부녀가 그렇게 챙기는 거 보면 완전 한 가족이던데.”

“그런가 봐. 수간호사한테 들었는데, 며칠 뒤 임혜원 씨 퇴원하면 셋이 유럽으로 여행 간대. 가족여행처럼 쉬고 온다던데.”

“...”

발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하유는 사람을 불러야 한다는 것도 잊었다.

물컵을 향해 뻗었던 손은 허공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반쯤 열린 병실 문을 바라보던 하유는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손가락만 살짝 다친 여자는 VIP 병실에 누워서 최고 의료진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아내 하유는 일반 병실에 버려진 채 물 한 모금조차 혼자 마실 수가 없었다.

하유가 손수 키운 딸은 엄마에게는 죽 한 숟갈 불어 준 적도 없으면서, 다른 여자에게는 직접 죽을 먹여주고 있었다.

분명 승호와 정식으로 결혼한 아내는 하유였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눈에는 혜원이야말로 승호가 손안에 품고 아끼는 여자처럼 보였다.

비슷한 일은 이미 수도 없이 많았다.

하유는 진작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이 결혼은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

승호는 하유를 사랑하지 않았다.

결혼한 날부터 승호가 하유에게 보인 건 무관심과 냉담함, 귀찮다는 태도뿐이었다.

하유는 한때 승호가 원래 웃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혜원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얼음장 같던 남편이 혜원 앞에서는 웃는 모습을 직접 봤다.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다정했다.

심지어 승호가 쪼그려 앉아 혜원에게 직접 구두를 신겨 주는 모습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하유는 승호와 6년을 살면서 물 한 잔 받아 본 적도 없었다.

하유도 몇 번이나 이 결혼을 끝내려고 했다.

승호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집안의 압박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날의 사고 같은 하룻밤으로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겼고, 승호는 지금까지도 하유가 약을 써서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믿었다. 하유를 그저 계략만 꾸미는 여자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하유 역시 피해자였다.

설명도 수없이 했지만 승호는 한 번도 믿지 않았다.

하유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진실을 증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았다.

사랑하지 않는 건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오해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변호사를 찾아가 이혼합의서까지 작성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끝내 지연을 놓을 수 없었다. 딸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하유가 예상하지 못한 건, 딸마저 점점 엄마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유가 열 달 동안 품었고 직접 키운 아이였다.

열이 40도까지 오른 밤에는 하유가 혼자 지연을 안고 응급실로 뛰어갔다.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상대 부모와 따졌다.

편식이 심한 지연을 위해서 매일 메뉴를 바꿔 연구했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죽을 끓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딸의 마음은 점점 멀어졌다.

하유가 사탕을 제한하면 지연은 엄마가 나쁘다며 울었다. 이모는 사탕을 잔뜩 사 준다고 했다.

애니메이션 보는 시간을 정해 두면 엄마가 싫다면서, 이모는 밤새 같이 봐 준다고 했다.

심지어 이모가 자기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하유는 자신을 달랬다.

‘아직 어리니까 그래. 차근차근 가르치면 돼.’

하지만 오늘 하유는 병상에서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런데도 딸은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하유가 목숨 걸고 구해 낸 딸은 겨우 손가락만 조금 다친 여자를 위해 의사를 데리고 가 버렸다.

하유는 거의 다 떨어져 가는 수액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웃고 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으로 얼굴을 훔친 하유는 숨을 길게 고른 뒤 침대 옆 호출 버튼을 눌렀다.

간호사가 들어와서 수액을 갈아주며 상태를 물었다.

하유는 괜찮다고 담담하게 답했다.

간호사가 나간 뒤 하유는 핸드폰을 들고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호사님, 이혼합의서 하나 준비해 주세요. 저 이혼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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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30화

    임정한은 입을 열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문혜령도 침묵했다. 입술만 가볍게 떨렸다.혜원도 무슨 문서인지 궁금해서 가까이 오려고 했다. 하지만 임정한이 바로 서류를 접어 치우면서 내용을 보여주지 않았다.혜원은 물어보려다가 분노한 임정한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하유가 임정한을 제대로 화나게 만들었다.‘진짜 미쳤나 봐. 어떻게 부모한테 저럴 수 있어.’하지만 혜원의 속마음은 달랐다.‘그래. 더 미쳐 봐. 그래야 좋지.’임정한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래서 대체 뭘 원하는 거야?”하유가 임정한을 바라봤다.“원하는 거 없어요. 제 양아버지한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이 자료도 밖으로 나가지 않을 거예요.”“너...”임정한은 손가락으로 하유를 가리켰다. 손이 심하게 떨리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지만, 한참 동안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문혜령도 화가 나 온몸을 떨었다. 입술을 떨며 날카롭게 말했다.“하유야, 너... 너 정말 부모도 모르는 애구나!”하유는 입술을 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 곧바로 돌아서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뒤에서는 임정한이 찻잔을 내던지는 소리와 문혜령의 울음 섞인 날카로운 욕설 소리가 들렸다. 하유는 옷깃을 여미고 계속 걸었다.임정한이 양아버지 문제로 하유를 협박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친가에 처음 돌아온 뒤부터, 임씨 가족은 갖가지 말로 하유를 가스라이팅하면서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려고 했다. 하유가 말을 듣지 않으면 늘 양부모를 건드렸다. 하유도 결국 언젠가는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임정한의 노트북 시스템에 몰래 접속해 계정 기록과 내부 자료를 확인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불법·규정 위반 증거를 찾아 따로 보관해 뒀다.예전에는 그래도 친부모라는 생각 때문에 그 증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이제는 너무 지쳤다.툭하면 임씨 가족의 협박을 받고, 아무 조건 없이 혜원에게 모든 걸 양보하라는 요구도 더는 견디고 싶지 않았다.하유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9화

    문혜령이 말을 이어 갔다.“혜원이 드레스를 네가 가져갔다며? 혜원이 공모전에서 입으려고 한 옷인데 왜 굳이 동생이랑 싸워? 네 옷장에 옷도 많잖아.”하유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 드레스는 제 거예요. 혜원이가 제 걸 가져가려고 한 거고요.”혜원의 눈가가 바로 붉어졌다.“언니 말이 맞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오랫동안 언니 자리에서 살았으니까 언니가 날 싫어하는 것도 당연해...”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문혜령은 마음이 아픈 듯 혜원을 품에 안고 하유를 노려봤다.“혜원이 뭘 잘못했는데? 그동안 이 아이가 우리 곁에 있어 줬으니까 우리가 버틴 거야!”하유는 가만히 선 채 손가락을 하나씩 움켜쥐었다.수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들을 때마다 가슴은 여전히 아팠다.하유가 문혜령을 바라봤다.“그래서 저는 언제나 다 양보해야 해요? 예전에는 아버지랑 엄마를 양보했고, 지금은 제 딸까지 그랬어요.” “맛있는 것, 좋은 물건, 집에서 저한테 준 차도 혜원이 한마디 하면 다 가져갔잖아요. 아직도 부족해요?”“그게 무슨 말버릇이야?”임정한이 식탁을 세게 쳤다.“네가 언니니까 동생한테 양보하는 게 당연하지. 드레스 한 벌 가지고 왜 이렇게 속이 좁아?”하유는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남자를 바라봤다. 마음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식어 갔다.“그 드레스는 저한테도 중요해요.”하유는 한마디씩 분명하게 말했다.“저도 참가할 공모전이 있어요. 그 옷은 양보하지 않을 거예요.”“너...”임정한이 화가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유야, 이제 정말 제멋대로 하겠다는 거냐?”문혜령도 표정을 굳혔다.“너 예전에는 안 이랬잖아. 왜 이렇게 철이 없어졌니?”하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이 집에서는 하유가 틀린 사람이 될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임정한은 하유가 말없이 서 있는 모습에 더 화가 났다.“이렇게 말도 안 들을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널 찾지 말 걸 그랬다! 네 양아버지가 대체 너를 어떻게 키운 거야?”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8화

    하지만 하유는 정말 예전 같은 삶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승호도, 지연도 더는 붙잡지 않기로 했다.승호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다.“네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알아. 아이는 당신이 맡아. 잘 키워.”하유는 망설이지 않았다.승호의 목소리가 더 차가워졌다.“심하유, 나한테는 밀당 안 통해.”하유는 작게 웃었다.‘이 사람은 정말 자기 중심적이네.’하유가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 재산 조건 다시 정리하고 아이 양육권은 당신이 갖는 걸로 작성해. 다 만들면 나한테 보내.”말을 마친 하유는 택시 문을 열고 올라탔다.승호는 멀어지는 차를 계속 바라봤다. 눈빛이 싸늘하게 굳었지만 표정은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하유는 뒷좌석에 앉은 채 반쯤 열린 창문 밖을 바라봤다. 가로등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차례로 되풀이됐다.숨을 깊게 쉬었지만 가슴은 답답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하유가 화면을 내려다봤다.임정한.이름 세 글자를 잠시 바라보다 받지 않았다.친가에 돌아간 뒤부터 그 집에 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갈 때마다 누군가의 편을 가르는 싸움이 벌어졌다.혜원은 언제나 모든 사람이 하유를 나쁜 사람으로 보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고, 친부모는 늘 혜원 편이었다.전화가 끊겼다가 다시 울렸다.하유는 숨을 고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하유야, 어디니? 오늘 저녁 집에 와서 밥 먹자.]친모 문혜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투는 다소 무심했다.“엄마, 요 며칠 일이 좀 있어요. 다음에 갈게요.”하유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 너머로 친부 임정한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집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어?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없다는 거야?]하유는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정말 시간이 없어서...”[네 양아버지 직장 말이야. 내가 거기 윗사람하고 좀 친하거든.]임정한이 하유의 말을 끊었다. 느긋한 말투였다.[요즘 내부 승진 심사를 한다던데. 네 양아버지도 이제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7화

    지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참 생각하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엄마 둘 다 있으면 안 돼? 혜원 엄마는 나랑 놀아 주고, 엄마는 맛있는 거 해주면 되잖아. 그게 왜 안 돼?”하유의 가슴이 깊게 베이는 듯 아팠다.아이답고 솔직한 말이었지만 그 말은 오히려 하유의 마음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열 달 동안 품어 낳은 딸을 바라보며 하유는 살짝 웃었다.“사람이 원하는 걸 전부 가질 수는 없어. 엄마도 하나뿐이야. 너도 하나만 골라야 해.”지연은 멍하니 서 있었다. 눈가가 천천히 붉어졌다.하유의 눈을 바라봤지만 무서울 만큼 차분했다. 예전처럼 자신만 바라보는 온기가 보이지 않자 지연은 겁이 났다.입을 열고 ‘엄마를 고를래’라고 하려 했다.하지만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혜원은 사탕을 사 줬다. 밤늦게까지 애니메이션도 같이 봐 줬고 맛있는 곳에도 데려갔다. 그리고 지연에게 잔소리하지도 않았다.반면 하유는... 사탕도 못 먹게 하고, 애니메이션 보는 시간도 정해 놓고, 이것저것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았다.‘엄마는 너무 귀찮게 해.’지연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하유는 잠시 기다리다가 몸을 돌렸다.“알았어.”더는 딸을 보지 않고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갔다.지연은 제자리에 서서 점점 멀어지는 엄마의 등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졌다. 엄마를 부르고 싶었지만 목이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엄마는 다시 오겠지?’예전에는 지연이 아무리 떼를 써도 엄마가 늘 돌아왔다.‘이번에도 분명 돌아올 거야.’지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코를 훌쩍였다. 몸을 돌려 할머니 방으로 뛰어갔다....하유가 막 택시를 잡았을 때 뒤에서 승호가 따라왔다.“심하유, 아직 서명 안 했어.”평소와 다름없이 차가운 목소리였다.하유의 마음도 차갑게 굳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두 사람 중 딸은 다른 여자를 엄마로 삼고 싶어 했고, 남편은 첫사랑을 위해 자신과 이혼하려고 했다.‘됐어. 나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6화

    하유는 잠깐 망설였지만 곧 다가가서 침대 옆에 앉았다.채화경은 안쓰러운 눈으로 하유를 바라봤다.“많이 힘들었지?”하유가 고개를 저었다.“할머니, 저 괜찮아요.”“뭐가 괜찮아.”채화경은 손을 뻗어 하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네가 우리 집에 들어온 지 6년이야. 이 늙은이가 다 봤어. 넌 좋은 아이야. 잘못한 건 우리 우씨 집안이야.”하유의 눈가가 따끔해졌다. 눈을 내리깔고 감정을 눌렀다.“그 못난 녀석.”채화경은 승호 이야기를 꺼내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내 손자니까 성격을 내가 잘 알지. 본성은 나쁜 놈이 아닌데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누가 진심으로 잘해 주는지는 못 보고, 문제 일으키는 사람을 또 그렇게 감싸.”하유는 입술을 다물었다.채화경은 한숨을 쉬고 하유의 손을 잡아 토닥였다.“네가 이혼하고 싶다면 할머니는 네 편이야.”하유가 고개를 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채화경은 진지한 눈으로 하유를 바라봤다.“승호는 네 인생을 다 걸 만큼 좋은 남자가 아니야. 우씨 집안을 떠난 뒤에는 네 삶을 살아. 할머니는 네가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하유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6년 동안 시어머니에게 모욕을 당하고, 시누이에게 무시당했다. 남편에게 외면받고, 딸에게까지 싫다는 말을 들어도 절대 울지 않았다.그런데 채화경의 몇 마디에 6년 동안 마음 안에 쌓아 둔 벽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할머니, 감사합니다.”채화경이 하유의 손등을 두드렸다.“고맙기는. 내가 너한테 고마워해야지. 내 목숨을 네가 살렸잖니.”하유가 고개를 저었다.“당연히 할 일이었어요.”“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채화경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넌 내 목숨을 살려줬는데 나는 널 제대로 지켜 주지 못했어. 할머니가 미안하다.”하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손으로 얼굴을 닦고 숨을 고른 뒤 일어났다.“할머니, 푹 쉬세요. 저는 먼저 갈게요.”채화경은 고개를

  • 끝내 내 차례가 왔다   제25화

    하유는 입술을 다물었다.“할머니, 이 일은...”“알아.”채화경이 하유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을 끊었다.“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채화경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몸을 바로 세웠다.“김 집사.”오래 일한 김숙이 밖에서 들어왔다.“장미란 급여 정산해 주고 오늘 안으로 내보내.”무릎 꿇고 있던 장미란이 급히 머리를 숙였다.“회장님,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발 내쫓지 말아 주세요.”채화경은 손을 들고 그만하라는 뜻을 보였다.김숙은 장미란을 일으켜 거의 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울음소리는 점점 멀어졌다.채화경의 시선이 다시 엄정숙에게 향했다.“승호 에미야.”엄정숙의 얼굴이 하얘졌다. 억지로 웃었다.“어머님, 지금은 쉬세요. 말씀하지 마시고...”“내일부터.”채화경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말 하나하나에 힘이 있었다.“회사에 이름만 걸어 두고 있는 자리, 전부 정리해.”엄정숙의 웃음이 굳었다.“어머님! 저도 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했어요. 공이 없더라도 고생한 건 있잖아요.”“무슨 고생을 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내가 자료까지 꺼내 보여줘야 하니?”채화경이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자 엄정숙은 더 말하지 못했다.“세진아.”세진이 몸을 움찔했다.“할머니...”“지금부터 내년 오늘까지 용돈은 전부 끊는다.”세진의 눈이 커졌다. 입을 벌리고 항의하려다가 채화경의 표정을 보고 억지로 삼켰다.“하나 더.”채화경은 더 엄한 눈으로 세진을 봤다.“네 새언니한테 사과해.”세진의 표정이 굳어졌다.“지금. 바로.”거절할 수 없는 어조였다.세진의 얼굴은 붉어졌다가 하얘졌다. 억울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그래도 채화경의 차가운 시선 앞에서는 더 버티지 못했다.한참 뒤에야 하유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미... 안... 해.”목소리는 작고 딱딱했다.사과라기보다는 억지로 굴욕을 참는 태도에 가까웠다.말을 마치자 하유를 매섭게 노려봤다.하유는 눈도 들지 않았다.처음부터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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