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지하실이라는 공간은 소리가 없다기보단 억눌린 공간 같았다.
벽과 바닥에 스며든 습기, 낮은 천장,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가슴이 먼저 답답해지는 공기.
먼지 쌓인 테이블 위, 아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자 담요 사이로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작았다. 모든 게 너무 작고 여려서 이런 공간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
다시 한번 자신의 결정을 되짚었다. 6개월,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정리하기에 가장 안전한 기간.
그때, 아이의 눈꺼풀이 열렸다. 형광등 불빛에 잠깐 눈을 찡그렸지만 울지 않았다.
대신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태호를 향했다.
그 시선은 어수선하게 흔들리지도, 허공을 더듬지도 않고 오직 신태호를 정확히 잡아냈다.
태호는 순간 이유 모를 불쾌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조그만 아이가, 마치 어른보다 더 적응이 빠른 것처럼, 혹은 상황을 파악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시선을 피하듯, 몸을 뒤로 빼며 고개를 돌렸다.
군복 차림의 거대한 몸과,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생명 사이 묘한 간극이 생겼다.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 네?”
“갔다 올게. 중요한 회의 있어.” “여, 여보...!”남겨진 숙경은 차마 아이를 안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남편과는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 하나의 이유를 빌미로, 결코 남편의 아이일 리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를 믿는다. 믿고 싶었다.
그냥 지금은 뭐 하나든 조심스러운 시기니까, 하나라도 흠 잡히기 싫으니까. 그래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거겠지. 그 판단이 맞겠지.
“믿자... 믿어야 하는 거잖아.”
손부터 빠르게 움직였다. 대충 먼지를 치워 침대를 대신할 공간을 만들어주고, 쿠션과 베개로 사방을 막았다.
마트에 전화를 걸어 분유와 기저귀도 주문했다. 찬장 구석에 보관하던 젖병까지 오랜만에 꺼내들었다.
움직이는 내내 이게 맞는 건가, 이게 정말 현실인가. 아무것도 답이 서지 않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만약 이게 현실이라면, 지독히고 도망치고 싶은 현실이란 것.
그렇게 품 안에 안지도 않은 채 분유를 먹이고, 잠이 들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이는 눈만 말똥말똥하게 뜰 뿐, 울지도, 자지도 않았고 그게 더 화가 났다. 그 모습이 더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사랑하는 아이들이 돌아왔다.
“엄마 울어요?”
“뿌아아앙... 엄마 왜우러어엉!”숙경이 눈물을 슥 닦아내고 작게 웃었다.
“아니야, 엄마 안 울어. 얼른 손부터 씻자.”
아이들을 데리고 욕실로 향하는 길, 시선은 자꾸만 지하실 문을 향했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모르는 아이, 알고 싶지도 않은 아이, 6개월만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
“참아야 해. 견뎌야 해. 진급까지만. 딱 진급까지만.”
그날 이후, 숙경의 하루는 늘 비슷했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면 터벅터벅 지하실로 내려갔다.
남편의 말대로 딱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유만 먹이기로 한 것이다. 가끔은 트림 몇 번을 시킨 후 황급히 문을 닫아버렸다.
밤이 되면 아이들을 재워놓고 한 번 더 들여다보는 정도. 목욕은 때가 되면 대충대충. 딱 거기까지가 돌봄의 끝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온순했고, 건강했고, 울음도 길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을 한 태호가 숙경을 향해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오늘 막 전달받은 유전자 검사 결과표가 들어 있었다.
“여보, 이게... 이게 뭐예요?”
“당신, 마음 좀 놓으라고.”이제야 제대로 살펴본 결과지엔 몇 줄의 숫자와 표, 그리고 ‘불일치’라는 단어가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지하실에 있는 아이가 정말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는, 가장 확실한 과학적인 증거였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 안 했어요.”
“그래도 마음은 편해야지.”하지만 숙경과 달리 태호의 마음은 조금도 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불편했다.
서류는 조작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였으니까.
그 말은 즉슨, 누군가 집 앞에 버리고 간 아이가 자신의 핏줄이 아니라는 뜻.
그렇다면 대체 누가, 저렇게 어린아이를 보란 듯이 집 앞에 두고 갔단 말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한심하고 가난한 집구석에서 버리고 간 아이겠지.
동네에서 꽤 유명한 1성 장군의 집. 대궐처럼 크고, 담장마저 높은 이곳이라면 아이만은 굶기지 않을 거라 굳게 믿은 거겠지.
그러든지 말든지, 자신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굳이 6개월이나 버틸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루빨리 보육원에 보내야겠어.”
“괜찮겠어요? 진급 전에 흉흉한 소문이라도 나면...” “당신이 고생하잖아. 당신이. 그래도 입단속은 확실히 시켜야지. 괜한 소문은 딱 질색이니까.”어차피 후원금이 절실한 보육원.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후원을 해주면 오히려 여러모로 좋지 않은가?
모든 결정이 끝나고, 부부의 표정이 유난히 밝았다.
오늘도 정원엔 그릴과 테이블이 세팅되었고, 소미는 영이와 준호의 품을 옮겨가며 시도 때도 없이 꺄르르 거렸다. 고기 집게와 가위는 당연히 강석현의 몫.“이 집은 어떻게 된 게, 올 때마다 손님만 바빠.” “여보, 나는 비계 잘라줘.” “네. 삐약 마님.”테이블 아래에 얌전히 앉아 눈을 감은 레오도 편안해 보였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이토록 큰 대형견이 준호와 영이의 가족이 된 것도, 석현과 세화가 먼저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 역시도.“나중에 아이 태어나면, 레오는 어떡해?” “강석현, 말 조심해라. 레오는 천사야. 육아도 우리랑 같이 할 거야.” “어.. 응.. 으응..”영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물론 쉽지 않겠지. 그래도 레오는 이미 가족인걸.” “애가 겁나게 큰데, 참 순해.” “꼭 우리 오빠 같지?” “아니? 솔직히 신준호가 순한 편은 아니지. 외모도 레오가 훨씬 더 우월하지.”두 사람의 우정도, 장난끼도 여전했고 말이다.“너 진짜 말조심해라.” “개처럼 영이 뒤만 따라다니더니, 진짜 개를 키우네.” “야!”준호를 제외한 모두가 웃었다.영락없는 대형견이 진짜 개를 키우고 있으니, 웃음이 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석현 오빠, 레오도 고기 한 덩이 던져 줘.” “오케이. 훈련사 모드 돌입!” “굿.” “레오!”레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를 살랑거리더니, 집게에 든 고기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자, 오늘은 오른쪽이다! 가자!”허공으로 던진 고기를 잽싸게 물어도 누구 하나 놀라지 않았다. 이들에겐 그조차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다. “장난 없네.” “5초 컷.”석현이 세화를 보며 키득거렸다.양볼이 터지게 고기를 먹는 모습이 어찌나 웃긴지.“삐약아, 생존 서바이벌 뭐 그런 거야?” “지금이 기회야.”영이는 그런 세화의 말에 웃음이 나면서도 눈길은 자꾸만 소미를 향해있었다.“언니, 많이 먹어. 소미 곧 잠들 것 같아.” “이왕 시작한 거, 그럼 끝까지 부탁해.”눈치를 슬슬 보던 준
3년 뒤,“레오야~ 엄마한테 와!”“아니야. 아빠한테 와!”푸르른 잔디가 펼쳐진 마당, 영이와 준호가 팔을 벌리며 ‘레오’라는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그 순간, 입에 공을 문 커다란 대형견 한 마리가 영이를 향해 달려왔다. “이거 봐, 레오는 나를 더 좋아해.”“아씨, 아빠 겁나 서운해.”검은색, 흰색, 갈색이 조화를 이룬 털과 50kg에 육박하는 커다란 체구. 버니즈 마운틴 독 한 마리가 핑크색 혀를 내밀며 웃고 있었다. 노력과 달리 아이는 들어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실망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준호는 이제 삼십대 초반, 영이는 20대 후반이었고 여전히 하루하루가 행복하기 그지 없었으니까. 1년 전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했고, 준호는 무료할 영이를 위해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했다. 영이는 레오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져버렸다. 새끼 버니즈 마운틴 독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지금은 물론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커버렸지만, 늘 자기가 아기인 줄 알고 엉겨 붙는다. 하루 세 번 산책에 겨울엔 보일러를 포기하고 살아야 하지만 레오가 주는 행복은 상상 이상이었다.하나, 준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밤마다 영이와 준호의 사이에 파고들어 잔다는 것. 그 등치에 코는 또 얼마나 고는지, 사랑스럽긴 하나, 확실히 레오가 온 뒤부터 횟수가 줄었다.“영아, 오늘은 밖에서 재우자.”“밤새 울잖아. 더 못 자.”“그럼 우린 언제 사랑해!”“어제도 했잖아! 낮에도 했잖아!”레오는 준호보다 영이를 더 따랐고, 모든 시선이 영이를 향해 있었다. 게다가 분리불안은커녕 꽤나 영리했지만, 이상하게 밤만 되면 달라졌다.사랑을 나누는 순간마다 목청을 높여 짖으며 방문을 긁었다. 아마도 영이가 내는 신음소리가 불안하게 들렸나 보다. 지키고 싶었나 보다. 웃기는 노릇이었다. 아파서 내는 소리가 결코 아닌데, 그것까지 이해하기에 레오는 순수하고 무해한 동물이었다. “애견 훈련소라도 알아볼까?”“왜...? 나는 레오가 있어야 잠이
세화의 집 앞.차를 세워둔 석현은 한참동안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통화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는 건데, 그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지금 자신의 감정을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건 바로 '서운함'이었다.제 마음을 의심한 것도, 믿어주지 않았다는 것도 그냥 모든 게 다 서운함 투성이었다.하지만 생각해보니, 세화에게 그런 의심을 심어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미치겠네, 아..."손바닥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고민만 하던 중, 똑똑.누군가 차창을 살짝 두드렸다.창문을 내린 석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아, 아, 아, 아버님!"눈앞에는 비닐봉투를 든 세화의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가끔 식당에 들러 궂은 일을 도와주던 딸의 남자친구가 늦은 밤, 왜 집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건가 싶어서."세화 만나러 왔나?""아, 그, 그, 그게.. 아... 네.""혹시 싸웠나?""예?"아버지가 손에 들린 비닐봉투를 흔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저녁도 안 먹고 뭔가 뾰로통해서는, 그래서 족발이나 사서 오는 길이네."죄송하고, 민망하고.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머리만 긁적이던 중,"한 잔 하려면 내리던가. 이 집 족발이 아주 맛있어."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 실례가 안 된다면..""내리게."집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 있던 세화의 어머니가 놀란 눈을 뜨며 부리나케 현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석현아! 여보!""어머님, 아버님이랑 족발 먹으러 왔습니다.""어머, 어머... 잠깐만, 세, 세화야! 홍세화!"끼이익─방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세화는 거실에 펼쳐진 풍경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오빠가 우리 집엔 왜? 그것도 이 시간에?굳어버린 건 세화 뿐만이 아니었다. 석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냐고? 정수리 높이까지 똥머리를 한 모습도, 몸에 걸친 노란색 잠옷 원피스도 삐약이 그 자체였으니까."삐약아...""아, 아니, 오, 오빠...""족발 좀 먹고 갈게...""뭐라고요...
다음 날, 퇴근 후 병원을 찾은 석현은 영이의 상태부터 이곳저곳 살폈다.표정은 굳어있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보였고 이제는 상실에 대한 회복이 필요하겠지."영아, 걱정했어. 몸은 좀 어때?"영이는 애써 웃어보이며 그런 석현을 바라보았다."괜찮아요. 와 주셔서 감사해요. 근데 세화 언니는요?"준호에게 석현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당연히 같이 올 줄 알았는데, 혼자 왔다는 사실이 영이의 눈에도 조금은 이상해보였던 모양이었다. 석현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잡으며 포장해 온 음식을 하나 둘 꺼냈다."도가니탕, 괜찮지?""석현 오빠...."준호 역시 석현을 보며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싸우기라도 한 건가?그는 영이 앞에 놓인 포장 용기 뚜껑을 열고, 수저까지 세팅하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영아, 따뜻할 때 먹고 있어. 강석현, 너는 잠깐 나좀 보자.""아 왜.""나와. 할 말이 있어서 그래."병실 앞, 기다란 소파에 자리를 잡은 두 남자는 지금 누구보다 마음이 복잡한 이들이었다.준호는 영이를 되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아이를 잃었다는 소식에 내내 자책중이었고 석현은 세화에 대한 실망감과 서운함에 지옥같은 하루를 보냈다."야, 세화 씨랑 뭔 일 있었어?""그런 거 아니야. 그나저나 영이도 너도.... 많이 놀랐겠다."놀란 건지, 아직은 실감이 안 나는 건지. 존재조차 몰랐던 아이였는데 먹먹하고 울적하고 우울감마저 몰려들었다."다 내 탓이지. 아직은 아빠가 될 자격이 없나 보지 뭐.""무슨 말을 그렇게 해? 왜 네 탓이야? 이게 다 홍인석 그 좆같은 새끼 때문이잖아.""임신 사실만 알았어도 집에서 쉬게 했을 텐데... 그럼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테고... 하, 어떻게 그걸 모르냐... 그걸...""초기였다며. 본인도 몰랐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대화 내내 두 사람의 입에서는 깊은 한숨이 차례대로 새어나왔다. "너는? 진짜 아무 일도 없는 거야?""몰라. 나중이 이야기 하자.
한일병원 산부인과 병동.헐레벌떡 도착한 준호는 의사의 말을 듣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아버렸다.영이의 뱃속에 있던 작디 작은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6주 정도로 예상되는데, 임신 사실을 모르셨나요?""네... 네....."정말 몰랐다. 이건, 준호 뿐만이 아니라 영이도 몰랐던 사실이었다.6주라면, 대충 계산을 해봐도 신혼여행과 맞아 떨어지는 기간이었다."하, 젠장.."그토록 원했던 허니문 베이비는 지키지 못했지만, 그는 영이를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곁에 앉아서는, 헝크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깼어? 어디 불편한 데 없고?"영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눈동자를 마주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소중한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미안해서."병원까진 어떻게 온 거야? 얼마나 찾았는데, 얼마나 걱정했는데.""홍인석 친구... 오세민... 그 사람이 데려다줬어."준호 역시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수락산의 그 지옥같은 집, 그 집을 들락날락한 더러운 이름들은 단 한 번도 잊었던 적이 없었으니까.근데 왜? 그 자식이 영이를 왜 데려다줬지?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수상한 사람은 커녕 오세민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오늘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쉬어야 돼.""오빠... 나 있잖아... 이번에는.. 그 말이 꼭 듣고싶어...""응..?""괜찮다는 말... 그 말을 들어야만 살 것 같아."영이의 손을 꼭 붙잡은 준호가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괜찮아, 우리 영이 다 괜찮아."영이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곁을 지키던 준호는 잠시 병실을 나와 석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떻게 됐어?"준호의 질문에 석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태어나 그딴 한심한 새끼는 진짜로 처음 본다.""왜.""별장에서 체포됐는데, 미친... 뽕을 얼마나 맞았는지 제 발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끌려갔다더라.""어울리는 결말이네.""영이는? 영이는 좀 어때?"
애석하게도 영이의 말은 유부녀의 일탈이 아니라, 명백한 도발이었다.'나, 오늘만큼은 바보처럼 당하지 않을 거야.'인석의 그림자가 스르륵 드리워질때 즈음, 영이는 재빨리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 커터칼을 꺼내들었다.사무실에서 나오며 떨리는 손으로 챙겼던 물건. 그 물건을 써야 하는 순간이 드디어 온 것이다.드르르륵.커터칼 날을 밀어 올리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이 인석의 턱선을 그대로 그어버렸다."악, 씨발..! 뭐야...!"손으로 감싸쥔 턱에서는 타는듯한 작열감이 느껴졌고, 손바닥 아래로는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영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길길이 날뛰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현관문 쪽으로 미친듯이 내달렸다."야 이 씨발년아...!"신발도 신지 못한 채 그저 앞만 보고 달리던 그때, 좁은 골목길 사이로 자동차 한 대가 막 진입하고 있었다.차를 본 순간 영이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동시에 한 손이 아랫배를 움켜쥐었다.미친듯이 뛰던 중, 이상하게도 배쪽에서 묵직한 복통이 느껴졌기 때문."도.. 도와주세요...."차가 멈춰서고,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오세민이었다. 하필이면 홍인석 그 개 자식의 친구를 마주한 것이다. 영이는 그제야 모든 걸 포기한듯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결국 도망칠 수 없는 것인가.등 뒤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인석의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눈 앞에는 오세민이 자신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그 사실이 얼마나 처참하고 무력하던지, 고개를 떨구는 순간 허벅지 사이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나한테... 나한테 대체 왜.. 왜이러는 거야...."영이의 코앞에서 멈춰선 세민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배를 움켜쥔 쪽으로 자연스레 내려간 시선, 그의 눈동자에도 붉은 피가 보였기 때문이었다."너... 너 괜찮아?""....아파..... 그러니까 제발.....""일단 타. 빨리."그는 제쪽으로 달려오는 인석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영이를 부축해 조수석에
“뭐지?”“8... 88% 입니다!”놀라움이 담긴 말과 함께, 스크린 화면에는 단 하나의 사진이 떠올랐다.좌측 상단을 보아하니, 회사 소유의 드론이 어젯밤 11시경. 찰나에 찍은 사진 같았다. 가로등 하나에 의존한 여자는 무언가를 품 안에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표정은 없었고 품 안에 끌어안은 건 얇은 책인지 종이인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준호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88%.그 수치는 우연으로 넘길 수 있는 영역도 아니었지만, 화면 속의 여자는 분명
“누군지 물어봐도 되냐.” 넥사이드(Nexide)를 설립하고 딱 1년째 되던 날, 유일하게 믿는 친구이자 전무인 '강석현'이 처음으로 물었다. 솔직히 그동안 묻지 않았던 게 이상할 정도였다.전국 단위로 안면인식 프로그램을 돌리며, 오직 한 사람만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왜 이제서야 묻냐.”“중요한 사람인 건 충분히 알았고. 도대체 뭔데 이래.”잠시 숨을 고르던 준호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죽겠는 사람.” “뭐...?”“넥사이드를 세운 유일한 이유.”그 말은 결코 농담이 아
- 똑, 똑. 현실로 정신을 되돌려 놓듯, 단정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준호는 손바닥으로 두 눈을 지그시 누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네.”집무실 문이 열리고, 아버지 신태호가 들어섰다.오늘따라 시선이 어깨로 갔다. 견장 위에 반짝이는 별 세 개. 괜히 눈살이 찌푸려졌다.“자꾸 말없이 오시면, 직원들이 불편해한다니까요.”“군에서나 그렇지 뭐. 여기 커피가 꽤 맛있어.”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테이블 위엔 헤이즐넛 향이 가득한 커피 두 잔이 놓였고, 태호가 커피향을 음미하
“유영! 영아...!” 정신없이 집안을 헤집었다. 열려 있던 방문을 하나씩 확인하고, 지하실을 들락거린지 삼십여 분. 아무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름을 부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더 이상 그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영아..!”얼마나 애타게 불렀는지, 목이 잔뜩 쉬어가고 있었다. 교복 넥타이는 헐겁게 풀렸고, 거실 슬리퍼는 한쪽만이 위태롭게 발을 감쌌다. 그때였다.“신준호!”어머니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집안을 갈랐다.숙경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아들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