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오늘도 정원엔 그릴과 테이블이 세팅되었고, 소미는 영이와 준호의 품을 옮겨가며 시도 때도 없이 꺄르르 거렸다. 고기 집게와 가위는 당연히 강석현의 몫.“이 집은 어떻게 된 게, 올 때마다 손님만 바빠.” “여보, 나는 비계 잘라줘.” “네. 삐약 마님.”테이블 아래에 얌전히 앉아 눈을 감은 레오도 편안해 보였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이토록 큰 대형견이 준호와 영이의 가족이 된 것도, 석현과 세화가 먼저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 역시도.“나중에 아이 태어나면, 레오는 어떡해?” “강석현, 말 조심해라. 레오는 천사야. 육아도 우리랑 같이 할 거야.” “어.. 응.. 으응..”영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물론 쉽지 않겠지. 그래도 레오는 이미 가족인걸.” “애가 겁나게 큰데, 참 순해.” “꼭 우리 오빠 같지?” “아니? 솔직히 신준호가 순한 편은 아니지. 외모도 레오가 훨씬 더 우월하지.”두 사람의 우정도, 장난끼도 여전했고 말이다.“너 진짜 말조심해라.” “개처럼 영이 뒤만 따라다니더니, 진짜 개를 키우네.” “야!”준호를 제외한 모두가 웃었다.영락없는 대형견이 진짜 개를 키우고 있으니, 웃음이 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석현 오빠, 레오도 고기 한 덩이 던져 줘.” “오케이. 훈련사 모드 돌입!” “굿.” “레오!”레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를 살랑거리더니, 집게에 든 고기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자, 오늘은 오른쪽이다! 가자!”허공으로 던진 고기를 잽싸게 물어도 누구 하나 놀라지 않았다. 이들에겐 그조차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다. “장난 없네.” “5초 컷.”석현이 세화를 보며 키득거렸다.양볼이 터지게 고기를 먹는 모습이 어찌나 웃긴지.“삐약아, 생존 서바이벌 뭐 그런 거야?” “지금이 기회야.”영이는 그런 세화의 말에 웃음이 나면서도 눈길은 자꾸만 소미를 향해있었다.“언니, 많이 먹어. 소미 곧 잠들 것 같아.” “이왕 시작한 거, 그럼 끝까지 부탁해.”눈치를 슬슬 보던 준
3년 뒤,“레오야~ 엄마한테 와!”“아니야. 아빠한테 와!”푸르른 잔디가 펼쳐진 마당, 영이와 준호가 팔을 벌리며 ‘레오’라는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그 순간, 입에 공을 문 커다란 대형견 한 마리가 영이를 향해 달려왔다. “이거 봐, 레오는 나를 더 좋아해.”“아씨, 아빠 겁나 서운해.”검은색, 흰색, 갈색이 조화를 이룬 털과 50kg에 육박하는 커다란 체구. 버니즈 마운틴 독 한 마리가 핑크색 혀를 내밀며 웃고 있었다. 노력과 달리 아이는 들어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실망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준호는 이제 삼십대 초반, 영이는 20대 후반이었고 여전히 하루하루가 행복하기 그지 없었으니까. 1년 전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했고, 준호는 무료할 영이를 위해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했다. 영이는 레오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져버렸다. 새끼 버니즈 마운틴 독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지금은 물론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커버렸지만, 늘 자기가 아기인 줄 알고 엉겨 붙는다. 하루 세 번 산책에 겨울엔 보일러를 포기하고 살아야 하지만 레오가 주는 행복은 상상 이상이었다.하나, 준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밤마다 영이와 준호의 사이에 파고들어 잔다는 것. 그 등치에 코는 또 얼마나 고는지, 사랑스럽긴 하나, 확실히 레오가 온 뒤부터 횟수가 줄었다.“영아, 오늘은 밖에서 재우자.”“밤새 울잖아. 더 못 자.”“그럼 우린 언제 사랑해!”“어제도 했잖아! 낮에도 했잖아!”레오는 준호보다 영이를 더 따랐고, 모든 시선이 영이를 향해 있었다. 게다가 분리불안은커녕 꽤나 영리했지만, 이상하게 밤만 되면 달라졌다.사랑을 나누는 순간마다 목청을 높여 짖으며 방문을 긁었다. 아마도 영이가 내는 신음소리가 불안하게 들렸나 보다. 지키고 싶었나 보다. 웃기는 노릇이었다. 아파서 내는 소리가 결코 아닌데, 그것까지 이해하기에 레오는 순수하고 무해한 동물이었다. “애견 훈련소라도 알아볼까?”“왜...? 나는 레오가 있어야 잠이
세화의 집 앞.차를 세워둔 석현은 한참동안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통화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는 건데, 그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지금 자신의 감정을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건 바로 '서운함'이었다.제 마음을 의심한 것도, 믿어주지 않았다는 것도 그냥 모든 게 다 서운함 투성이었다.하지만 생각해보니, 세화에게 그런 의심을 심어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미치겠네, 아..."손바닥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고민만 하던 중, 똑똑.누군가 차창을 살짝 두드렸다.창문을 내린 석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아, 아, 아, 아버님!"눈앞에는 비닐봉투를 든 세화의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가끔 식당에 들러 궂은 일을 도와주던 딸의 남자친구가 늦은 밤, 왜 집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건가 싶어서."세화 만나러 왔나?""아, 그, 그, 그게.. 아... 네.""혹시 싸웠나?""예?"아버지가 손에 들린 비닐봉투를 흔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저녁도 안 먹고 뭔가 뾰로통해서는, 그래서 족발이나 사서 오는 길이네."죄송하고, 민망하고.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머리만 긁적이던 중,"한 잔 하려면 내리던가. 이 집 족발이 아주 맛있어."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 실례가 안 된다면..""내리게."집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 있던 세화의 어머니가 놀란 눈을 뜨며 부리나케 현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석현아! 여보!""어머님, 아버님이랑 족발 먹으러 왔습니다.""어머, 어머... 잠깐만, 세, 세화야! 홍세화!"끼이익─방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세화는 거실에 펼쳐진 풍경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오빠가 우리 집엔 왜? 그것도 이 시간에?굳어버린 건 세화 뿐만이 아니었다. 석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냐고? 정수리 높이까지 똥머리를 한 모습도, 몸에 걸친 노란색 잠옷 원피스도 삐약이 그 자체였으니까."삐약아...""아, 아니, 오, 오빠...""족발 좀 먹고 갈게...""뭐라고요...
다음 날, 퇴근 후 병원을 찾은 석현은 영이의 상태부터 이곳저곳 살폈다.표정은 굳어있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보였고 이제는 상실에 대한 회복이 필요하겠지."영아, 걱정했어. 몸은 좀 어때?"영이는 애써 웃어보이며 그런 석현을 바라보았다."괜찮아요. 와 주셔서 감사해요. 근데 세화 언니는요?"준호에게 석현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당연히 같이 올 줄 알았는데, 혼자 왔다는 사실이 영이의 눈에도 조금은 이상해보였던 모양이었다. 석현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잡으며 포장해 온 음식을 하나 둘 꺼냈다."도가니탕, 괜찮지?""석현 오빠...."준호 역시 석현을 보며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싸우기라도 한 건가?그는 영이 앞에 놓인 포장 용기 뚜껑을 열고, 수저까지 세팅하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영아, 따뜻할 때 먹고 있어. 강석현, 너는 잠깐 나좀 보자.""아 왜.""나와. 할 말이 있어서 그래."병실 앞, 기다란 소파에 자리를 잡은 두 남자는 지금 누구보다 마음이 복잡한 이들이었다.준호는 영이를 되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아이를 잃었다는 소식에 내내 자책중이었고 석현은 세화에 대한 실망감과 서운함에 지옥같은 하루를 보냈다."야, 세화 씨랑 뭔 일 있었어?""그런 거 아니야. 그나저나 영이도 너도.... 많이 놀랐겠다."놀란 건지, 아직은 실감이 안 나는 건지. 존재조차 몰랐던 아이였는데 먹먹하고 울적하고 우울감마저 몰려들었다."다 내 탓이지. 아직은 아빠가 될 자격이 없나 보지 뭐.""무슨 말을 그렇게 해? 왜 네 탓이야? 이게 다 홍인석 그 좆같은 새끼 때문이잖아.""임신 사실만 알았어도 집에서 쉬게 했을 텐데... 그럼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테고... 하, 어떻게 그걸 모르냐... 그걸...""초기였다며. 본인도 몰랐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대화 내내 두 사람의 입에서는 깊은 한숨이 차례대로 새어나왔다. "너는? 진짜 아무 일도 없는 거야?""몰라. 나중이 이야기 하자.
한일병원 산부인과 병동.헐레벌떡 도착한 준호는 의사의 말을 듣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아버렸다.영이의 뱃속에 있던 작디 작은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6주 정도로 예상되는데, 임신 사실을 모르셨나요?""네... 네....."정말 몰랐다. 이건, 준호 뿐만이 아니라 영이도 몰랐던 사실이었다.6주라면, 대충 계산을 해봐도 신혼여행과 맞아 떨어지는 기간이었다."하, 젠장.."그토록 원했던 허니문 베이비는 지키지 못했지만, 그는 영이를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곁에 앉아서는, 헝크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깼어? 어디 불편한 데 없고?"영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눈동자를 마주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소중한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미안해서."병원까진 어떻게 온 거야? 얼마나 찾았는데, 얼마나 걱정했는데.""홍인석 친구... 오세민... 그 사람이 데려다줬어."준호 역시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수락산의 그 지옥같은 집, 그 집을 들락날락한 더러운 이름들은 단 한 번도 잊었던 적이 없었으니까.근데 왜? 그 자식이 영이를 왜 데려다줬지?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수상한 사람은 커녕 오세민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오늘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쉬어야 돼.""오빠... 나 있잖아... 이번에는.. 그 말이 꼭 듣고싶어...""응..?""괜찮다는 말... 그 말을 들어야만 살 것 같아."영이의 손을 꼭 붙잡은 준호가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괜찮아, 우리 영이 다 괜찮아."영이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곁을 지키던 준호는 잠시 병실을 나와 석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떻게 됐어?"준호의 질문에 석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태어나 그딴 한심한 새끼는 진짜로 처음 본다.""왜.""별장에서 체포됐는데, 미친... 뽕을 얼마나 맞았는지 제 발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끌려갔다더라.""어울리는 결말이네.""영이는? 영이는 좀 어때?"
애석하게도 영이의 말은 유부녀의 일탈이 아니라, 명백한 도발이었다.'나, 오늘만큼은 바보처럼 당하지 않을 거야.'인석의 그림자가 스르륵 드리워질때 즈음, 영이는 재빨리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 커터칼을 꺼내들었다.사무실에서 나오며 떨리는 손으로 챙겼던 물건. 그 물건을 써야 하는 순간이 드디어 온 것이다.드르르륵.커터칼 날을 밀어 올리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이 인석의 턱선을 그대로 그어버렸다."악, 씨발..! 뭐야...!"손으로 감싸쥔 턱에서는 타는듯한 작열감이 느껴졌고, 손바닥 아래로는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영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길길이 날뛰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현관문 쪽으로 미친듯이 내달렸다."야 이 씨발년아...!"신발도 신지 못한 채 그저 앞만 보고 달리던 그때, 좁은 골목길 사이로 자동차 한 대가 막 진입하고 있었다.차를 본 순간 영이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동시에 한 손이 아랫배를 움켜쥐었다.미친듯이 뛰던 중, 이상하게도 배쪽에서 묵직한 복통이 느껴졌기 때문."도.. 도와주세요...."차가 멈춰서고,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오세민이었다. 하필이면 홍인석 그 개 자식의 친구를 마주한 것이다. 영이는 그제야 모든 걸 포기한듯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결국 도망칠 수 없는 것인가.등 뒤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인석의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눈 앞에는 오세민이 자신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그 사실이 얼마나 처참하고 무력하던지, 고개를 떨구는 순간 허벅지 사이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나한테... 나한테 대체 왜.. 왜이러는 거야...."영이의 코앞에서 멈춰선 세민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배를 움켜쥔 쪽으로 자연스레 내려간 시선, 그의 눈동자에도 붉은 피가 보였기 때문이었다."너... 너 괜찮아?""....아파..... 그러니까 제발.....""일단 타. 빨리."그는 제쪽으로 달려오는 인석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영이를 부축해 조수석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중, 어둑한 숲길을 따라 석현이 다가왔다. 발걸음은 빨랐고, 목소리엔 걱정이 한가득 배어 있었다.“벌써 만났어? 영이 씨는?”“석현아.”“뭔데 또!”준호가 고개를 들어 집 쪽을 바라봤다. “여기 있는 카메라, 전부 해킹 좀 해야겠다.”“지금?”“어. 일단 이 집이 먼저 눈을 잃어야 해. 그게 순서야.”석현은 목 끝까지 올라오는 욕설을 삼켰다.당연히 그건 준호를 향한 게 아니었다. 사람 하나를 산속에 가둬 둔, 이름 모를 누군가를 향한 것이었다.“딱 봐도 여섯 대는 될 것 같은데.”“사각지
몇 시간 전, 하늘이 유독 흐렸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쏟아질 것처럼 공기가 낮게 가라앉은 아침이었다.번듯한 제복을 차려입은 ‘신태호’의 어깨엔 오늘도 반짝이는 은색 별 하나가 박혀 있었다. 1성 장군(將軍), 준장을 의미하는 별.그의 아내 ‘이숙경’이 견장 위를 다정스레 어루만졌다. 손길엔 오래된 습관 같은 온도가 섞여 있었다.“여보, 오늘은 퇴근하고 바로 오실 거죠?”“응.”숙경은 더 묻지 않겠다는 듯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배웅했다. 그건, 하루도 빼놓지 않는 익숙한 루틴이었다. 태호가 익숙한 듯 현관문을 열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중, 침대 옆에 높인 협탁. 그 서랍을 무심코 열어보았다. 안에는 투명한 아크릴 케이스에 담긴 핸드폰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충전기는 연결되어 있었고, 화면은 어두웠다. 문제는 상자에 보란 듯이 채워진 자물쇠였다. 외부와의 소통을 아예 선택지에서 지워버린 방식임이 분명했다.“아....”그래서 스마트워치를 채운 거였구나. 그저 수신되는 전화만 받게 하려고.전화가 오면 지시를 듣고, 그 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 하나를 세상에서 완벽하게 고립시킨 거였다.준호는 다시 한번 영이의
묶는 걸 좋아한다니? 말 같지도 않은 말에 준호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는 이성을 잃어버린듯 방 안을 헤집기 시작했고, 붙박이장 문을 여는 순간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안에는 수많은 성인 용품들이 즐비했고, 종류와 수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영이는 입양된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이 곳에 가둬지고, 끔찍한 시간을 견뎌가며 죽지 못해 살아온 것이다.그리고, 준호는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오빠, 준호 오빠....!”욕설이 목구멍을 막아버렸다. 차마 내뱉지 못한 채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