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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hor: 희나리K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3 09:43:23

몇 시간 전, 하늘이 유독 흐렸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쏟아질 것처럼 공기가 낮게 가라앉은 아침이었다.

번듯한 제복을 차려입은 ‘신태호’의 어깨엔 오늘도 반짝이는 은색 별 하나가 박혀 있었다. 1성 장군(將軍), 준장을 의미하는 별.

그의 아내 ‘이숙경’이 견장 위를 다정스레 어루만졌다. 손길엔 오래된 습관 같은 온도가 섞여 있었다.

“여보, 오늘은 퇴근하고 바로 오실 거죠?”

“응.”

숙경은 더 묻지 않겠다는 듯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배웅했다. 그건, 하루도 빼놓지 않는 익숙한 루틴이었다. 

태호가 익숙한 듯 현관문을 열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잔디는 밤새 내린 이슬로 젖어 있었고, 군화가 지날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났다.

그렇게 대문을 나설 무렵, 군화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

아래에는 담요 하나가 마치 뭉텅이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힐 만큼 낡아빠진 담요였다. 

순간, 담요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숨, 분명히 살아있다는 확실한 증거. 

그는 즉시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고 운전병도 오늘따라 늦는 모양새였다.

군에서 수도 없이 위기 상황을 겪었지만, 이상하게 이 순간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떨리는 손으로 담요를 걷어냈다.

아래에는 아이가 있었다. 태어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 

상황과 다르게 아이의 얼굴은 고요하기만 했다. 울지도, 몸을 뒤척이지도 않았다. 마치 이곳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라는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대, 대체 누가...”

말이 끝나기도 전, 머릿속이 빠르게 과거를 훑었다.

지워버렸다고 믿었던 수많은 얼굴들. 이름도, 관계도 흐릿한 하룻밤의 파트너로 치부했던 여자들. 

그때마다 책임을 남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웬만하면 콘돔을 착용했고, 질내 사정은 피임 시술을 받은 계집들한테만 가끔씩 해왔었는데.

문제가 될 일은 없다고 믿어 왔었다. 설마 내 판단이 틀렸던 건가? 정말, 그들 중 하나가 이딴 짓을 벌인 건가? 

경찰, 병원, 행정 절차. 필요한 단어들이 줄줄이 떠올랐지만, 동시에 은색 별 하나가 잔상처럼 반짝였다.

절대로 더럽힐 수 없는 표식. 한 번 금이 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자리.

“하....”

짧은 숨을 토해내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담요째 안았음에도 팔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사람의 무게라기보다는 아직 이름도 붙지 않은 물건 같았다. 

다시 걸어온 길을 되돌아 현관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잠시 멈칫했다.

이 문을 여는 순간, 모든 게 달라진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내 숙경이었다.

“응? 여보, 뭐 놓고 가셨어요?”

“....”

“그건 뭐예요? 웬 담요에요?”

숙경의 눈이 담요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찰나, 그 안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얼굴에선 곧장 핏기가 빠져나갔다. 

“여, 여보...?”

“누가 집 앞에 아이를 두고 갔어.”

“잠깐만요, 아이라뇨...? 당신 설마....”

태호는 담요를 더 끌어안았다.

아이가 안쓰러워서가 아니었다. 지금의 순간이 두려워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 위기 또한 헤쳐나가면 그뿐이다. 어차피 유전자 검사는 손을 쓰면 그만이니까.

진급을 코앞에 둔 시기. 지금은 그 어떤 약점도, 어떤 소문도 허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짓을 고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그럴만한 행동. 기필코 한 적 없어.”

“그럼 당장 신고해요. 당장 신고부터...”

“신고든 뭐든 6개월만. 딱 6개월만 지나고 하자고.”

숙경이 남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제복 아래, 분명 계산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라, 상황을 정리하는 눈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아이를 어떻게 집에 둬요.”

“6개월이면 충분하다니까.”

주먹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뜯어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도 결국 은색 별에 닿았다.

그 별이 의미하는 것. 권력, 침묵, 선택의 무게를 알고 있었기에.

“준호랑 보람이도 아직 어린데...”

“알잖아. 지금은 개 한마리도 함부로 들이면 안 돼.”

곧장 방향을 튼 태호는 가족사진이 걸린 거실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는 문 앞에 섰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담요 안의 아이가 아주 작게 숨을 골랐고, 숙경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당신 설마... 지금 여기서....”

“잠깐이야. 당신은 분유랑 기저귀만. 딱 그거만 신경 써.”

문이 열리자, 계단 아래 잠겨있던 눅눅한 공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던 공간의 숨결이었다.

빛은 몇 계단 아래에서 뚝 끊겼지만, 이내 지하의 전등이 켜졌다.

불빛 아래, 아이의 세계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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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공범이었다   제173화

    “흠.. 영이 배가 안 고프면... 오빠도 그냥 라면으로 때우지 뭐.”영이는 더는 참지 못했다. 이럴때 자존심을 부려봤자 잃을게 더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고파.”“갑자기?”“아까부터 고팠어.”“근데 왜 안 고프다고 했어?”“삐쳐서.”준호의 입술이 미친듯이 씰룩거렸다.으악! 이 꼬박꼬박 튀어나오는 대답은 또 뭐냐고. 귀여움 덩어리 같으니라고. “옷 갈아입고 나와.”“응.”쪼옥! 뺨에 뽀뽀를 갈겨주고는 방을 나왔다. 의미 없이 흘려보낸 반나절이 얼마나 아깝던지. 잠시 후, 준호는 후드집업을 입고 나온 영이에게 모자를 씌워주더니, 끈을 바짝 조여 턱밑에 리본을 묶었다.“하지 마. 답답해.”“귀여워.”쪽쪽쪽쪽. 얼마 드러나지도 않은 새하얀 얼굴에 구석구석 뽀뽀 비가 내렸다.삼겹살집으로 향하는 내내,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았다. 준호는 후드 모자를 쓴 영이가 귀여워 죽겠는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웃음을 흘렸다. 나는 오늘 무슨 짓을 한 건가. 이 쪼꼬만 영이를 이겨 뭘 얻겠다고. 대체 무슨 한심한 짓거리를 해댄 거냐고. “아장아장. 왜 이렇게 애기 같아?”“애기 아니야.”“지금은 완전 애기야!”영이의 머릿속에는 아까부터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근데 오빠.”“응.”“오빠는 물냉면이 좋아, 비빔냉면이 좋아?”풉.. 끅.. 읍... 아까 냉면 얘기를 듣고서는, 그 고민을 하고 있었네? 미치겠네 진짜?“비빔.”“흠.. 난 물냉면이 더 좋은데.”그걸 왜 고민하냐고. 냉면 따위는 솔직히 세 그릇도 호로록인데.“물냉면 시켜 줄게.”“정말?”“응. 오빠는 비빔.”행복한 저녁이었다. 지글지글 삼겹살이 익어가는 소리마저 사랑스러운, 냉면 위에 놓인 삶은 계란까지 귀여워 보이는. “한 젓갈만. 맛만 보게.”“어어. 얼른 먹어. 우리 영이 살쪄야 돼.”그리고 그들은 유치했던 싸움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며칠 뒤, 숙경에게 전화가 걸려왔다."예."준호는 아무렇지 않게

  • 나는 공범이었다   제172화

    준호는 어이가 없었다. 괜히 그랬겠어? 내가 괜히 그랬겠냐고!“야! 네가 먼저 괴롭혔잖아! 머리카락도 싹둑 자르고! 손가락에 이상한 매니큐어나 덕지덕지 처발라 놓고!”“나는 그냥 공주 놀이 한건데! 오빠가 바락바락 날뛰니까 더 그런 거지! 더 열받게 하려고 그런 거라고!”“그러니까 그 심보가 더럽게 못돼 처먹었다고!”숙경도, 영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이게 무슨 개싸움인가, 왜 이리도 서로가 서로에게 창피한 걸까. “그리고, 너 때문에 부모님은 맨날 싸우기만 하는데 어떻게 잘 지내? 어떻게 좋아해? 우리 가족이 얼마나 화목했는데.. 엄마는 맨날 한숨만 쉬고. 아빠는 화만 내고. 어쨌든. 그래서 싫었다고.. 그래서 미웠다고....”영이는 보람이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어느 날 갑자기 집안에 생긴 크나큰 변화들. 그 변화를 어른답지 못한 설명으로 일관한 부모님까지.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힘들었겠지. 오빠를 빼앗긴 질투심. 그것도... 사랑을 깨달은 지금은 안다. “그래도요 언니,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선 안 되는 거잖아요. 아! 어제 일은 말고요.”“회사에 찾아가서 그랬던 건... 그건...”“....”“잘못했어.”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준호는 가슴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무슨 사과랑 용서가 이렇게 쉬워? 세상에 이렇게 멍청한 바보 천치가 어디 있냐고.“영아, 저 기지배 지금 쇼하는 거라니까?”“아니라고! 차 키도, 카드도 다 안 받기로 했다고!”어젯밤, 보람은 숙경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사실은 친구 하나 없는 인생이 늘 외로웠다고. 왜 자신만 늘 혼자인지 억울했다고.그래서 유부남인 걸 알면서도 위로받고 싶었고, 그 한심한 선택을 들켜버렸고, 유영은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차도로 뛰어들었다고.밤새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왜 친구 하나 없는 인생인 건지, 왜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건지.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참 멀리도 돌아왔다는 생각이

  • 나는 공범이었다   제5화

    여전히 가슴팍에도 닿지도 않는 키, 연갈색의 눈동자와 길게 내려온 속눈썹, 밤인데도 도드라지는 새하얀 피부와 오똑한 콧날까지.AI도, 수치도 필요 없는 날것 그대로의 확신이었다.“영아.”“누구... 세요?”숨이 목구멍에서 걸려버렸다. 역시나 알아보지 못하는구나.십 년이란 세월은 준호의 체격을, 인상을, 표정을 참 많이도 바꿔놓았다. “나야. 신준호. 준호 오빠.”그 이름을 듣자마자 영이의 얼굴이 굳더니, 곧바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마치 보면 안 될 사람을 마주한 것처럼, 눈동자가 보란 듯이 흔들렸다.“유영!

  • 나는 공범이었다   제4화

    “뭐지?”“8... 88% 입니다!”놀라움이 담긴 말과 함께, 스크린 화면에는 단 하나의 사진이 떠올랐다.좌측 상단을 보아하니, 회사 소유의 드론이 어젯밤 11시경. 찰나에 찍은 사진 같았다. 가로등 하나에 의존한 여자는 무언가를 품 안에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표정은 없었고 품 안에 끌어안은 건 얇은 책인지 종이인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준호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88%.그 수치는 우연으로 넘길 수 있는 영역도 아니었지만, 화면 속의 여자는 분명

  • 나는 공범이었다   제3화

    “누군지 물어봐도 되냐.” 넥사이드(Nexide)를 설립하고 딱 1년째 되던 날, 유일하게 믿는 친구이자 전무인 '강석현'이 처음으로 물었다. 솔직히 그동안 묻지 않았던 게 이상할 정도였다.전국 단위로 안면인식 프로그램을 돌리며, 오직 한 사람만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왜 이제서야 묻냐.”“중요한 사람인 건 충분히 알았고. 도대체 뭔데 이래.”잠시 숨을 고르던 준호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죽겠는 사람.” “뭐...?”“넥사이드를 세운 유일한 이유.”그 말은 결코 농담이 아

  • 나는 공범이었다   제2화

    - 똑, 똑. 현실로 정신을 되돌려 놓듯, 단정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준호는 손바닥으로 두 눈을 지그시 누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네.”집무실 문이 열리고, 아버지 신태호가 들어섰다.오늘따라 시선이 어깨로 갔다. 견장 위에 반짝이는 별 세 개. 괜히 눈살이 찌푸려졌다.“자꾸 말없이 오시면, 직원들이 불편해한다니까요.”“군에서나 그렇지 뭐. 여기 커피가 꽤 맛있어.”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테이블 위엔 헤이즐넛 향이 가득한 커피 두 잔이 놓였고, 태호가 커피향을 음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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