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러나 주지언은 미친 사람 같았다.주지언은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내가 어디를 가든 멀지 않은 곳에서 따라오는 남자가 보였다.그때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여행도 편히 못 하겠다는 걸 알았다.그래서 나는 여행을 앞당겨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돌아오는 내내 조심스럽게 주지언의 눈길을 피했고, 마침내 무사히 스위스의 새집에 도착했다.주소도 전화번호도 진작 새로 바꿨는데 주지언은 기어이 나를 찾아냈다.내가 사는 집 문 앞에 선 주지언의 얼굴은 초췌했다.그러나 나를 보자 남자의 눈에는 옅은 기쁨이 스쳤다.“서연아, 드디어 나를 만나 주네? 계속 너를 찾아다녔어.”나는 싸늘한 눈으로 주지언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연아,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주지언이 간청했다.“아이한테 아빠가 없으면 안 되잖아. 태어나자마자 아빠가 없는 아이로 만들고 싶어?”그러나 나는 불러온 배를 쓰다듬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네가 없어도 나는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어. 그리고 이 아이들도 나중에 크면 바람피운 아빠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그 말을 들은 주지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곧 주지언은 상실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서연아, 내가 정말 그렇게까지 미워?”주지언의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그 뒤로 주지언은 날마다 꽃과 선물을 보내왔다.그러나 나는 단 하나도 받지 않고 전부 쓰레기통에 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신경도 쓰이지 않으니까 말이다.그러던 어느 날 주지언이 또 선물을 들고 우리 집 문 앞에 찾아왔다.그런데 문을 두드리자 나온 사람은 낯선 이였다.주지언이 끝까지 매달릴 걸 예상하한 나는 미리 새집을 구해 서둘러 이사한 뒤였다.그저 편지 한 통을 남겨 새 집주인에게 주지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그 편지에 나는 주지언을 떠난 진짜 이유를 적었다.[주지언, 내가 널 미워하는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지?][말해 줄게. 소예
스위스에 온 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주지언도, 지난날도 더 이상 떠올리지 않았다.나는 몸을 회복하는 데 전념하면서 겸사겸사 여행도 다녔다.이곳의 풍경은 무척 아름다웠고 공기도 맑아서 마음이 절로 가벼워졌다.나는 알프스산맥을 둘러보며 설산의 웅장함을 느꼈고, 루체른 호숫가를 거닐며 호수의 고요함을 감상했다.그리고 취리히에도 가서 도시의 화려함을 만끽했다.그렇게 다니는 동안, 나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삶의 의미도 알게 되었다.알고 보니 삶에는 주지언만 있는 게 아니라 훨씬 더 넓은 세계가 있었다.예전의 내 삶은 정말이지 너무나 재미가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작은 마을에 들르게 되었다.마침 그곳에서는 크리스마스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었다.거리에는 등불과 장식이 화려하게 걸려 있었고 분위기는 무척 떠들썩했다.축제 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춤을 추었다.그 즐거운 분위기에 물든 나도 그 행렬에 끼어들었다.행렬 속에는 노부부 한 쌍이 있었다.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있었고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넘쳤다.서로 아끼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 만감이 교차했다.‘나와 주지언 사이에 그런 거짓말과 배신이 없었더라면, 우리도 저렇게 함께 늙어 갔을 텐데.’안타깝게도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건 없었다.노부부는 내가 혼자인 걸 보고 말을 걸어왔다.내가 혼자서 아이를 키울 생각이라는 걸 알게 되자 두 사람은 몹시 안타까워했다.“아가씨, 참 힘들었겠어요.”노부인이 말했다.“그래도 아주 용감하고 아주 강한 사람이네요.”“감사해요.”나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아이는 제가 잘 키울 거예요.”“자, 우리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가서 소원을 하나 빌어요.”노신사가 말했다.“저 나무 아래에서 진심으로 빌면 이루어진다고들 하거든요.”나는 두 사람을 따라 마을 중앙 광장으로 갔다.광장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우뚝 서 있었다. 나무에는 색색의 전구와 선물이 가득 걸린 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곧 나
주지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방문을 밀어젖혔다. 싸늘한 눈빛으로 소예린을 보면서 따져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소예린은 주지언을 보자마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지언아, 잘못 들은 거야.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그러나 주지언은 그 얄팍한 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방 안을 훑어보던 주지언은 탁자 위 휴대폰 화면이 아직 켜져 있는 걸 발견했다.가까이 가서 보니 화면에 떠 있는 건 놀랍게도 아내와 소예린이 주고받은 대화 기록이었다.[강서연 씨, 당신 같은 개썅년은 밖에서 그냥 죽어버려야 해요. 절대로 돌아오지 마요!][봤어요? 이거 지언이 직접 끓여 준 국이에요. 평생 맛도 못 봤겠죠?][강서연 씨, 강서연 씨는 평생 혼자 사는 게 딱 어울려요!]그 모질고 악랄한 말들이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남자의 가슴을 찔렀다.주지언은 소예린이 이런 사람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분노가 치밀어 오른 주지언은 소예린의 뺨을 후려쳤다.“미친년! 감히 우리 서연이한테 이딴 짓을 해?”소예린은 그 한 대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뺨을 감싸 쥔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주지언을 쳐다보았다.“지언아, 지금... 그 사람 때문에 나를 때린 거야? 잊지 마. 나는 당신 아이의 엄마야!”그러나 주지언은 코웃음을 쳤고 눈빛에는 냉기가 서렸다.“아이 엄마? 너한테 그럴 자격이 있어? 내 아이는 서연만 낳을 수 있어! 넌 그냥 도구일 뿐이라고!”그 말을 들은 소예린은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넌 분명히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나랑 미래를 그리겠다고 했잖아!”그러나 주지언은 역겹다는 듯 소예린을 한 번 보더니 발로 걷어차 버렸다.“널 사랑한다고? 너랑 미래를 그리겠다고?”“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너 따위가 감히 서연이와 견줄 자격이나 있어?”“서연이는 착하고 다정하고 마음이 넓어. 근데 너는? 악랄하고 모질고 계산기만 두드리는 속물이잖아! 넌 서연이 발톱의 때만도 못해!”발에 차여 넘어진 소예린은 주
나는 떠났다.그런데 주지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병원에서 소예린을 돌보는 동안 주지언은 내내 어딘가 정신이 나가 있었다.주지언의 머릿속에는 어젯밤 아내의 그 절망적인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그런 눈빛은 주지언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가슴속에 갑자기 불안이 밀려들면서, 주지언은 홀린 듯이 휴대폰을 꺼내 내게 연락하려고 했다.“지언아, 나 사과 먹고 싶어. 하나만 깎아 주면 안 돼?”그때 소예린의 목소리가 주지언의 생각을 끊었다.그러자 휴대폰을 보던 주지언은 소예린을 한 번 보더니, 결국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었다.“그래, 깎아 줄게.”그날 밤 주지언은 병원에서 소예린 곁을 지키며 하룻밤을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그런데 현관문을 열자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강서연의 물건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없었다.주지언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다급하게 사방을 뒤졌다.“서연아! 서연아!”주지언은 아내의 이름을 크게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든 방을 다 뒤졌지만 아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주지언은 초조해진 나머지 휴대폰을 꺼내서 미친 듯이 연락을 시도했다.그러나 아내의 전화는 이미 꺼져 있었고 메시지에도 답이 없었다.아내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연락했지만 아무도 아내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곧 애간장이 탄 주지언은 헬기까지 띄워서 도시 전체를 뒤지며 아내의 자취를 찾았다.그러나 강서연은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지언아, 너무 걱정하지 마. 서연 씨는 그냥 삐쳐서 일부러 숨은 걸 거야. 널 애태우려고. 진짜로 떠나지는 않을 테니까 마음 놓아.”소예린은 초조해하는 주지언을 보며 짐짓 위로하는 척했다.그러나 주지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마음속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침실로 돌아온 주지언은 벽에 걸려 있던 웨딩 사진마저 사라진 걸 발견했다.그제야 주지언은 이번에 아내가 정말로 자신을 떠날 작정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주지언은 미친 사람처럼 사방으로 아내의
저녁이 되자 주지언은 소예린을 집으로 데려왔고 직접 요리까지 했다.저녁 식사 내내 주지언은 쉬지 않고 소예린에게 반찬을 덜어주고 국을 떠 주었다.소예린의 입맛을 훤히 꿰고 있었다.“예린아, 이 국 담백해. 딱 네 입맛일 거야.”“자, 네가 좋아하는 생선이야. 많이 먹어. 몸에 좋으니까.”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나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밥을 먹었다.너무 격한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됐다. 주지언이 내가 예전과 다르다는 걸 눈치채게 해선 안 되니까.떠날 계획을 들키면, 주지언은 분명 나를 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게다가 지금 나는 주지언의 아이를 가진 몸이었다. 이것만은 절대 알려서는 안 됐다.“지언아, 이렇게 챙겨 주면 서연 씨가 화내지 않을까?”소예린이 나를 힐끗 보며 일부러 말했다.그러자 주지언은 잠깐 멈칫하더니 급히 해명했다.“화 안 내. 예린아, 넌 지금 임산부잖아. 영양가 있는 걸 많이 먹어야 해. 서연이도 여자니까 네 사정을 이해할 거야.”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저녁 식사 뒤 나는 혼자 정원을 걸었다.정자에 막 다다랐을 때 소예린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서연 씨, 혼자 산책이라니. 기분 안 좋으세요?”소예린은 내 맞은편에 앉았고 얼굴에는 도발이 어려 있었다.“진짜 잘도 참으시네요. 남의 애까지 키워 주겠다면서 나갈 생각은 없나 보네요?”나는 소예린을 한 번 흘겨보고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려고 했다.“거기 서요!”소예린이 갑자기 손을 뻗어 나를 가로막았다.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내 침묵이 소예린을 더 화나게 만든 게 분명했다.소예린이 나에게서 보고 싶었던 건 발작과 분노와 히스테리였을 텐데, 나는 그중 어느 것도 보여 주지 않았다.뱃속의 아이를 무기 삼아 나를 자극할 수 있으리라 여겼겠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강서연 씨, 다 연기죠? 아무렇지 않은 척, 상관없는 척하는 거. 세상에 어떤 여자
다행히 소예린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의사가 기본 검사를 마친 뒤 주지언이 병실로 데려다주었다.나는 문가에 서서 주지언이 분주하게 소예린을 돌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내가 남의 사이에 끼어든 제3자 같았다.“지언아, 서연 씨 들어오라고 해.”소예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없이 가라앉은 소리였다.주지언이 나를 한 번 보더니 시선을 피했다. 감히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듯싶었다.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서연 씨, 지언이를 탓하지 마세요.”소예린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제가 지언이한테 불러 달라고 한 거예요. 그래도 우리가 제대로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나는 입술을 깨물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지언은 내 곁에 앉으면서 내 손을 잡았다.주지언의 얼굴에는 옅은 죄책감이 어려 있었다.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말을 꺼내지 못하고 삼켰다.“서연아, 몇 가지는 확실히 말해 두고 싶어.”주지언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나랑 예린이는 접대 술자리에서 다시 만났어. 그때 거래처 사람이 일부러 예린이한테 술을 먹이길래 보다 못한 내가 대신 마셨고.”“그러다 둘 다 취해 버려서 그런 일이 생긴 거야. 이 아이는 그때 생겼어.”거기까지 말한 주지언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눈빛에는 후회와 뉘우침이 가득했고, 내 손을 잡은 힘도 한층 강해졌다.“맹세할게. 내 마음속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 하나뿐이었어.”“이 일이 너한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그래도 아이는 죄가 없잖아.”“내 핏줄인데 모른 척할 수는 없어. 걱정 마.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둘의 아이로 올려서 네가 아이 엄마가 되게 할게.”“그러니까 네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말을 끝낸 서연은 나를 깊이 바라보았고 눈빛에는 기대가 가득했다.그러자 나는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차오르기 시작했다.‘그러니까 이게 주지언의 선택이구나.’주지언은 소예린과 두 사람의 아이를 택한 것이다.내가 슬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