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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황제의 반지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1 23:11:07

희뿌연 새벽빛이 침전의 높은 아치형 창문을 타고 흘러들었다.

레일라는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다. 조금만 몸을 뒤척여도 자신을 끌어안은 남자의 팔에 소름 끼칠 정도의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칼릭스는 레일라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잠들어 있었다. 얼굴을 돌릴 때마다 그녀의 옷깃에 마른 피가 묻었다.

상처투성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묵직한 체중이 갈비뼈를 짓눌렀다.

‘도망쳐야 해. 아니, 지금 움직였다간 뼈도 못 추려.’

레일라는 메마른 침을 삼켰다.

눌린 팔을 조금 빼내려 해도 손끝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밤새 같은 자세로 붙들려 있던 탓에 어깨부터 저렸다. 레일라는 창문 쪽으로 눈만 움직였다. 새벽빛이 들어온다는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두려웠다. 날이 밝으면 누군가는 반드시 이 방으로 들어올 터였다.

문밖 사람들은 자신을 황제의 품에서 끌어낼 것이다. 그때 황제가 순순히 놓아줄까. 레일라는 멀리 떨어진 하녀 두건을 바라보다가 눈길을 거두었다. 이제 와 머리칼을 숨길 수도 없었다. 누가 들어오든 황제보다 먼저 입을 열지 말아야 했다. 그녀가 정인이라는 말은, 황제의 입에서 나와야 믿을 테니까.

그때, 침전 밖 복도에서 규칙적이고 무거운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폐하, 침전 수석 어의 헬무트입니다. 아침 탕약과 붕대 교체를 위해 입시를 청합니다.”

정적을 깨는 노인의 목소리 뒤로, 갑옷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짤랑거렸다. 황실 근위대였다.

황제가 3주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위급 상황이었기에, 호위 기사들을 대동하고 억지로 문을 열려는 심산이었다.

끼이익-

묵직한 황동문이 열리며 헬무트 어의와 시종들, 그리고 은빛 갑주를 두른 근위대장 발렌이 들이닥쳤다.

“폐하의 안색이 어떠하신…… 헉!”

말을 맺으려던 노어의의 턱이 덜컥 떨어졌다.

은쟁반에 받쳐 들고 있던 약사발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요란한 파열음을 냈다.

챙그랑!

“폐, 폐하……?”

근위대장 발렌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허리춤의 검자루를 쥐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렸다.

침대 위, 3주 동안 시체처럼 누워 있던 제국의 지배자가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었다.

그것도, 피와 흙먼지로 얼룩진 낡은 리넨 옷을 입은 최하급 침소 시녀를 품에 안은 채로.

“네놈들이 정녕 목이 달아나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칼릭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문지방을 넘던 시종이 발을 멈췄다. 어의는 대답을 찾지 못했고, 발렌의 손은 검자루 위에서 굳었다.

스릉-!

칼릭스가 머리맡에 걸려 있던 황실의 보검을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검날이 어의 헬무트의 미간을 겨누었다.

“짐의 윤허도 없이 감히 침전을 침탈하고, 짐의 정인을 놀라게 해?”

“폐, 폐하! 살려주십시오! 신들은 폐하의 환후가 위중하시어……!”

어의와 시종들이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찧었다.

발렌의 시선이 황제의 품에 안긴 레일라에게 꽂혔다. 잿빛 머리칼과 낡은 시녀복은 익숙했다. 그가 못 알아본 사람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정인’이라는 말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저 계집은 침소 시녀에 불과합니다! 혹여 적국이 보낸 암살자나 주술사일지도 모릅니다. 속히 저 계집을 떼어내고 옥에 가두어……!”

발렌이 레일라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한 순간이었다.

칼릭스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번뜩였다.

“감히.”

칼릭스가 검을 들어 올리자 레일라는 숨을 멈췄다. 저 손목을 붙잡아야 했다.

여기서 근위대장의 목이 잘려 나간다면 황궁은 피바다가 될 것이고, 자신의 정체 또한 철저한 조사를 받게 될 터였다.

검을 든 팔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손목을 붙잡는다면 황제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아까까지는 그것만으로도 두려웠으나, 지금은 검이 향한 곳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발렌이 쓰러진 뒤 누가 이 침전의 책임을 물을지, 레일라는 끝까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가 자신을 부르던 음성을 떠올렸다. 이름을 불렀을 때와 다른 이들을 노려보았을 때의 얼굴이 달랐다. 그 차이를 이용해야 했다. 그녀는 날이 선 검을 보지 않고 손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떨리는 손이 어디를 잡아야 하는지부터 골랐다.

레일라는 재빨리 칼릭스의 손목을 감쌌다.

“폐하.”

검이 멈췄다. 하지만 손목에는 힘이 남아 있었다. 레일라는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칼릭스…… 제발요. 피를 보지 마세요. 머리가 아프시잖아요.”

레일라는 그가 혼수 상태일 때 어의들이 나누던 대화를 기억해 냈다. 주술 독이 뇌를 갉아먹어 극심한 편두통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그녀의 손가락이 황제의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짚어 내렸다.

“제가 곁에 있으니, 부디 검을 거두어 주세요.”

칼릭스가 잠시 그녀를 보더니 검을 침대맡에 내려놓았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칼릭스가 레일라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하지. 네 뜻대로 하겠다.”

레일라는 검이 손에서 완전히 떨어진 뒤에야 손목을 놓았다. 자신의 말이 통했다는 사실을,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어의는 황제와 레일라를 번갈아 보았다. 조금 전까지 검을 겨누던 황제가 시녀의 말에는 물러섰다. 헬무트는 무언가 묻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고개를 숙였다.

“……수석 어의.”

칼릭스가 레일라를 품에 안은 채 차갑게 명령했다.

“다가와 맥을 짚어라. 단, 짐의 정인에게는 손대지 마라. 불경한 눈길을 주는 순간 네놈의 눈알을 뽑아 침전 까마귀에게 먹이겠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헬무트는 기어가듯 다가와 떨리는 손으로 황제의 맥을 짚었다.

맥박은 거칠고 불규칙했으나 생명력은 기형적일 만큼 왕성했다. 헬무트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의 환후는 기적적으로 호전되셨으나…… 주술의 여독이 뇌에 깊이 남아 있어 절대적인 안정과 간호가 필요하옵니다.”

“듣지 않았느냐. 짐의 곁에는 레일라가 있다.”

칼릭스는 레일라의 턱을 들어 올렸다. 서늘한 손가락이 그녀의 창백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발렌 근위대장이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으로 레일라를 주시하자, 칼릭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발렌.”

“예, 폐하.”

“전 영지에 칙령을 내려라. 앞으로 이 여인의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는 자, 혹은 불경한 주둥이를 놀리는 자는 누구든 삼족을 멸하고 혀를 뽑아 침전 문 앞에 효수할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폭군의 선언에 발렌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신하들이 물러가고, 다시 둘만의 정적이 찾아왔다.

칼릭스는 자신의 검지에서 묵직한 순금 인장 반지를 빼냈다.

제국 황실의 상징이자 황제의 전권을 대리할 수 있는 금룡 인장 반지였다.

반지에 새겨진 문양을 레일라도 알아보았다. 황궁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이유가 될 물건이었다. 하지만 곧 그 반지를 제 손에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 손은 남의 피를 닦는 데 쓰였고, 누구도 그녀의 눈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다.

누가 이 반지를 보게 되면 그녀의 얼굴도 함께 기억할 것이다. 숨어 살기 위해 들어온 침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레일라는 약지를 구부리지 못한 채 황제의 손길을 기다렸다. 반지가 갖는 권한을 떠올릴수록, 그 권한을 다시 거두어갈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무거워졌다.

그가 떨리는 레일라의 약지를 잡고 반지를 끼웠다. 그의 검지에 맞던 금테는 그녀에게 너무 컸다. 손을 펴자 반지가 살갗 위에서 헐겁게 기울었다.

“이것은 네 것이다.”

칼릭스가 레일라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보석을 쥐여줄 때보다 입술이 닿은 자리가 더 낯설었다. 레일라는 손을 물릴 생각도 잊은 채 그를 보았다. 고개를 든 황제의 붉은 눈에는, 이 반지를 받은 여자가 기뻐하리라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기뻐하는 얼굴까지 만들어야 할까. 레일라는 웃는 대신 헐거운 금테를 엄지로 눌렀다.

“다시는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라, 레일라. 네가 없는 세상은 짐에게 지옥일 뿐이니.”

레일라는 손바닥을 펴보았다. 반지가 손가락 마디를 지나 앞으로 미끄러졌다.

“너무 큽니다. 잃어버리면 어쩌지요?”

“그럼 빼놓지 말고 잘 쥐고 있어라.”

그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레일라는 반지가 빠지지 않도록 손을 오므렸다. 이 손으로 물잔을 들고 옷을 갈아입을 때도 신경을 써야 했다. 황제가 제 손을 놓은 뒤에도 주먹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황제의 허락이 새겨진 반지였다. 레일라는 닫힌 침전 문을 보았다. 저 문에서도 이 반지가 통할지, 확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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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첫사랑의 이름은…… 그것이 아니었는데.”창틀에 올린 레일라의 발이 멎었다. 칼릭스의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없었다. 그녀는 소매 밖으로 나오려던 전송석을 다시 손안에 감췄다.칼릭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레일라는 창틀에서 발을 빼지 못한 채 그의 걸음을 세었다. 첫사랑의 다른 이름을 들었다는 말보다 지금 입고 있는 외투를 먼저 설명해야 했다. 이 방에서 밤바람을 쐰다고 둘러대기에는 신발까지 갖춰 신은 모습이었다.“……폐하.”레일라는 전송석을 숨기며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짰다.“이 야밤에 창틀을 넘어가며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칼릭스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폐하.”“바람이라?”칼릭스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비틀렸다.“외투에 신발까지 갖춰 신었더구나. 창밖에서 누구를 만나려 했지?”“혼자 있었습니다.”“그걸 묻지 않았다. 내 눈을 보아라.”레일라는 전송석을 쥔 손을 창틀 아래로 내렸다. 그가 이름을 의심하는 동안 물건까지 보게 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칼릭스의 시선은 이미 외투 앞섶을 훑고 있었다.칼릭스가 손을 뻗어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레일라의 등이 창틀에 부딪혔다. 발끝이 바닥을 더듬는 동안, 전송석을 감춘 소매가 두 사람 사이에서 눌렸다.“대답해라. 너는 누구지?”“……폐, 하…… 쿨럭!”“너는 대체 누구냐고 물었다!”“폐하의…… 정인입니다……!”“정인? 뻔뻔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마라!”칼릭스의 붉은 눈동자가 살기등등하게 희번덕거렸다.“네 잿빛 머리칼, 서늘한 녹안……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모습과 닮았기에 눈이 멀었다.”“폐하, 제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입 닥쳐라! 방금 내 머릿속을 스친 기억 속에서, 내 첫사랑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그 아이의 이름은 레일라가 아니었다! 결코 레일라 에스테르 따위가 아니었단 말이다!”칼릭스의 포효가 침전을 뒤흔들었다.목뼈를 으스러뜨릴 듯 조여오는 손아귀.“말해라! 짐의 눈을 멀게 하고 내 침소로 기어든 네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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