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버지 빚 때문에 월급 두 배를 주는 북부로 온 가정교사 아델. 「악당 공작가」라 소문난 성의 다섯 살 쌍둥이는 선생님을 벌써 일곱 명 내쫓았고, 공작은 조카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서툰 사람이다. 첫날 밤 서랍에서 쪽지가 나온다. 「셋째 밤을 넘기지 마세요.」 해 질 때 종도 없이 한꺼번에 켜지는 등불, 밤마다 다섯 번 두드리는 소리. 이 집이 악당이라는 소문은 정말일까.
View More“선생님, 왜 왔어요?”
그 질문을 받기 조금 전, 아델은 흰까마귀 문 앞에서 가죽 책가방을 고쳐 들고 있었다.
마차 바퀴에 눌린 눈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홉 날을 흔들리며 왔는데, 마지막 길은 걸어야 했다.
“문 안까지는 못 갑니다.”
마부가 짐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델은 돌벽 위를 올려다봤다. 검은 문 한가운데 흰 새가 새겨져 있었다.
“길이 얼었나요?”
“길은 멀쩡하지요.”
“그럼 말이 지쳤나요?”
마부는 말의 고삐를 당겨 제 쪽으로 돌렸다.
“저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지칩니다. 선생님도 들으셨을 텐데요.”
악당 공작가.
남부에서 북부까지 오는 동안, 그 말은 마차 삯보다 더 자주 들었다.
아델은 내려놓은 상자의 손잡이를 잡았다. 손끝에 남은 분필 가루가 검은 손잡이에 묻었다.
“짐 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돌아갈 마차를 잡으시려면 해 지기 전에 나오셔야 합니다.”
“오늘은 안 돌아갑니다.”
마부가 뭔가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마차는 아델이 문에 닿기도 전에 돌아섰다.
문 옆의 작은 출입문이 열려 있었다. 아델은 상자를 한 번 내려놓고, 책가방 끈이 흘러내리지 않게 어깨에 바짝 걸었다.
‘월급이 두 배인 데는 이유가 있겠지.’
은화 25.
아버지의 빚 금화 60에 견주면 작았다. 그래도 남부에서 받을 수 있는 돈보다는 많았다. 아델은 빨개진 코끝을 손등으로 문지르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뜰의 눈은 가장자리로 밀려 있었다. 아델이 밟을 길만큼은 말끔했다.
“카스펠 선생님이십니까?”
흰 수건을 팔에 걸친 노인이 돌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등이 곧아서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네. 아델 카스펠입니다.”
“집사 알빈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알빈이 짐 상자를 받으려 했다. 아델은 손잡이를 놓기 전에 물었다.
“무거운데 괜찮으시겠어요?”
“무거운 짐은 양손으로 듭니다.”
알빈은 팔의 수건을 접어 어깨에 얹고, 정말로 양손으로 상자를 들었다.
아델은 빈손을 내려다보다가 뒤따라갔다.
안쪽 문이 열리자 따뜻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돌바닥 위에 젖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아델이 머뭇거리자, 알빈이 문 옆의 두꺼운 천을 가리켰다.
“신발은 거기서 닦으시면 됩니다.”
“죄송합니다. 눈이 많이 묻었네요.”
“눈은 밖에 있습니다.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상자를 든 채 하는 말이라 더 진지했다.
아델은 신발 바닥을 꼼꼼히 문질렀다.
그때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복도에서 급히 걸어왔다. 통통한 볼이 붉었고, 손에는 작은 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오셨어요? 저는 하녀장 아그네스예요. 길에서 식사는 하셨고요?”
“아침에 먹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안 드신 거네요.”
아그네스가 빵을 내밀었다. 아델은 상자에서 놓인 손 대신 책가방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받았다.
아직 따뜻했다.
“감사합니다.”
“짐부터 풀게 해 드려야 하는데, 애들이 기다려서요. 아니, 기다린다고 하면 좀 다르긴 한데…….”
아그네스는 계단 쪽을 살폈다.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일곱 명이 갔어요, 선생님.”
아델이 빵을 쥔 손을 멈췄다.
“가정교사요?”
“네.”
“제가 여덟째고요?”
아그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시기 전에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편지에 적혀 있었습니다.”
세 번이나 읽은 편지였다. 보수와 방, 맡을 아이들의 나이. 그리고 이전 가정교사들이 오래 머물지 못했다는 짧은 문장.
오래 머물지 못했다는 말이 일곱 명을 뜻할 줄은 몰랐다.
아델은 빵을 한 입 먹었다. 속이 비어 있었던 탓에 따뜻한 부스러기까지 맛있었다.
“아이들은 어디 있나요?”
“그게, 계단에…….”
빠앙.
짧은 나팔 소리가 대답을 가렸다.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곱슬머리의 남자아이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한 손에 양철 나팔을 쥐고, 다른 손으로 난간을 붙들었다.
왼쪽 볼에 작은 점이 보였다.
“왔다!”
아이의 외침에 아그네스가 빵을 놓칠 뻔했다.
“루디, 내려올 때는 천천히.”
루디는 마지막 계단에서 뛰어내렸다. 아델의 치마 앞까지 달려와 멈추더니, 숨도 고르지 않고 물었다.
“몇 밤 있을 거예요?”
“안녕. 나는 아델이야.”
“알아요. 몇 밤이요?”
“왜 그게 궁금해?”
“먼저 알아야 하니까요. 한 밤? 두 밤? 세 밤?”
루디가 손가락을 폈다. 나팔을 쥔 손까지 펴려다 물건을 떨어뜨릴 뻔해 얼른 다시 움켜쥐었다.
그 뒤에서 여자아이가 내려왔다.
짙은 금발은 곧았고, 앞머리 끝은 한쪽만 짧았다. 루디와 달리 계단을 하나씩 밟았다. 마지막 계단에서도 뛰지 않았다.
아델은 남은 빵을 손수건에 싸고 무릎을 굽혔다. 두 아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너는 로테구나.”
로테는 대답 대신 아델을 바라봤다. 책가방, 신발, 빵을 싼 손수건을 차례로 보고는 눈을 맞췄다.
“선생님, 왜 왔어요?”
문 앞에서부터 준비한 인사말은 그 질문에 맞지 않았다.
아델은 손수건 가장자리를 접었다.
“왜냐하면—돈이 필요해서. 그리고 너희가 궁금해서.”
루디가 입을 벌렸다.
“돈이요?”
“응.”
“얼마나요?”
“우리 아버지께 빚이 있어. 내가 일해서 갚으려고 왔어.”
로테가 아델의 얼굴을 조금 더 오래 봤다.
“우리는요?”
“이름과 나이만 알고 왔거든. 루디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로테는 어떤 말을 하는지 궁금했어.”
“나는 이거!”
루디가 나팔을 아델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아델은 몸을 뒤로 빼는 대신 나팔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아래로 눌렀다.
“보고 있어. 그런데 내 코에 너무 가까워.”
“안 불었어요.”
“그래서 고마워.”
루디는 나팔을 내려다봤다. 불지 않은 일로 고맙다는 말을 들은 건 뜻밖인 모양이었다.
로테가 물었다.
“돈 받으면 가요?”
아델은 곧바로 고개를 젓지 않았다.
“월급은 일한 뒤에 받는 거야. 한 번 받고 가려고 온 건 아니야.”
“그럼 몇 밤이에요?”
루디가 아까 펼쳤던 손가락을 다시 내밀었다.
“아직은 모르겠어.”
“백 밤?”
“그보다 오래 있을 수도 있지.”
“백 하나!”
루디가 손가락 하나를 더 펴려다 제 손에 남은 손가락이 없는 걸 확인했다. 로테가 옆에서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루디는 잠깐 만족한 얼굴이 됐다.
아델은 두 아이의 손을 보고 웃음을 삼켰다.
“그런데 나만 대답했네. 너희는 인사 안 해 줄 거야?”
“이름 알잖아요.”
루디가 말했다.
“이름을 알아도 인사는 할 수 있어.”
“뭐라고요?”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루디는 아델을 올려다보다가 로테 쪽으로 돌아섰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로테의 눈썹이 좁아졌다.
“나는 아침에 봤어.”
“알아요. 해 본 거야.”
루디가 다시 아델을 봤다.
“됐죠?”
“말은 잘했어. 이번엔 나한테 해 줄래?”
루디는 입술을 달싹이다 나팔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조금 전보다 작은 목소리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안녕, 루디.”
로테는 손가락을 내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델은 로테의 답을 재촉하지 않고 일어났다.
그러자 로테가 치마 자락을 아주 조금 잡았다.
“안녕.”
아델이 다시 내려다봤다.
“안녕, 로테.”
로테는 곧 손을 놓았다.
◇◆◇
아델의 방은 공부방 바로 옆이었다.
책상과 침대, 작은 옷장이 있었다. 창 아래에는 등불을 놓는 받침이 붙어 있었다. 아델은 짐 상자를 열고 옷보다 먼저 석판과 분필통을 꺼냈다.
알빈이 책상 위에 물잔을 놓았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분필을 보관할 곳이 있나요?”
“그 책상 서랍을 쓰시면 됩니다.”
“아이들 공부방은 언제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보셔도 됩니다. 다만 두 분이 문 앞에 계십니다.”
아델이 돌아봤다.
문밖으로 검은 곱슬머리가 반쯤 나와 있었다. 그 아래에 금발 머리도 조금 보였다.
“들어와도 돼.”
루디가 먼저 들어왔다. 로테는 문턱 밖에 그대로 있었다.
루디는 방을 한 바퀴 돌다가 열린 짐 상자 앞에서 멈췄다.
“옷이 이것뿐이에요?”
“응.”
“책은요?”
“가방에 있어.”
“꺼내 봐요.”
“네가 들어 주려고?”
루디는 곧장 뒷짐을 졌다.
“얼마나 무거운지 보려고요.”
아델이 책가방을 바닥에 놓았다. 루디가 손잡이를 잡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아델은 웃지 않고 가방 끈을 짧게 접었다.
“이렇게 잡으면 바닥에 끌리지 않아.”
루디는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가방 밑이 바닥에서 조금 떨어졌다.
“봤죠?”
“봤어. 고마워. 책상 옆에 놓아 줄래?”
루디가 가방을 옮기는 동안, 아델은 문밖의 로테에게 물었다.
“너도 들어올래?”
로테는 방 안의 침대를 봤다.
“여기서 자요?”
“응.”
“문 닫아요?”
“잘 때는 닫아. 너희가 찾아오면 두드려 줘.”
로테는 문에 손바닥을 대고 가볍게 한 번 두드렸다.
아델이 말했다.
“들어와.”
로테가 문턱을 넘었다. 방 안에 두 발을 들여놓고는 다시 나갔다.
루디가 책가방 손잡이를 놓으며 물었다.
“왜 나가?”
“해 봤어.”
아델은 입술을 꾹 눌렀다. 이번에는 루디도 할 말이 없는지 나팔만 고쳐 잡았다.
아그네스가 아이들을 부르러 왔을 때, 루디는 가방을 자신이 옮겼다고 두 번 말했다. 로테는 문을 나서기 전에 방 안을 한 번 더 봤다.
아델은 문을 열어 둔 채 옷을 정리했다.
복도에서 멀어지는 발소리가 달랐다. 하나는 빠르고, 하나는 느렸다.
◇◆◇
저녁 식사 전에 알빈이 아델을 찾아왔다.
“각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인사를 나누시겠습니까?”
아델은 소매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털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알빈은 서재가 3층에 있다고 알려 줬다. 아델은 책가방을 들지 않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래 앉아 온 다리가 계단에서야 뻐근했다.
서재 문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금발에 녹색 눈. 검은 외투 깃에는 성문에서 봤던 흰까마귀가 수놓여 있었다. 한 손은 문손잡이에, 다른 손은 등 뒤에 있었다.
“아델 카스펠입니다, 공작님.”
“세드릭 아른바흐입니다.”
낮은 목소리였다. 아델이 고개를 숙였다 들자 세드릭의 시선이 손끝에서 멈췄다.
아델은 손가락에 묻은 분필 가루를 뒤늦게 봤다.
“아이들은 만났습니까?”
“네. 방도 구경하고 갔습니다.”
“루디 군이 짐을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책가방을 옮겨 줬어요.”
세드릭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말이 없어 아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공부방에서 수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필요한 것은 알빈에게 말하십시오.”
“아이들이 지금 읽는 책도 볼 수 있을까요?”
“서재 안에 있습니다.”
세드릭이 문을 조금 더 열었다. 책상 한쪽에 두꺼운 책이 놓여 있었다. 펼쳐진 쪽에는 전쟁의 진군 순서가 빼곡했다.
아델은 책과 공작을 번갈아 봤다.
“그 책을 아이들에게 읽어 주시나요?”
“그렇습니다.”
“끝까지 듣나요?”
“루디 군은 먼저 잠듭니다.”
알빈이 옆에서 덧붙였다.
“로테 양은 눈을 뜨고 계십니다.”
아델은 잠깐 말을 고른 뒤 대답했다.
“제가 읽어 줄 책은 조금 얇은 것으로 찾아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세드릭은 문을 더 열지 않았다. 아델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잠시 뒤 짧은 말이 이어졌다.
“카스펠 선생. 아이들이 싫다면 보내겠습니다.”
아델은 접어 모았던 손을 풀었다.
“제가 아이들을 싫어하면요?”
“그렇습니다. 억지로 맡길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싫어할 만큼 아는 것도 없어요.”
세드릭이 아델을 봤다.
아델은 말을 이었다.
“나팔은 제 코에서 조금 멀어야겠고, 질문에는 대답을 해 줘야겠더군요. 그 정도는 알았습니다.”
“불편을 겪으면 말씀하십시오.”
“네. 아이들 앞에서도 말할 겁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아델의 대답을 막거나 고치는 말은 없었다.
계단으로 돌아서기 전에 아델이 물었다.
“공작님도 저녁 식사에 오시나요?”
“오늘은 늦습니다.”
“아이들에게 전할까요?”
세드릭은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오른손 손등의 흰 흉이 잠깐 보였다.
“부탁합니다.”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말이 짧은 건 소문대로네.’
그래도 들을 말은 끝까지 듣는 사람이었다.
◇◆◇
방에 돌아왔을 때 창밖의 눈이 푸르게 보였다.
아델은 저녁에 아이들에게 할 말을 생각하며 분필통을 집었다. 서랍에 넣으려다가 창밖에서 켜진 불빛에 손을 멈췄다.
맞은편 창에 불이 들어왔다.
옆 창도, 아래 창도 같은 순간이었다. 안뜰 건너 긴 건물의 창들까지 줄지어 밝아졌다.
아델은 창 가까이 다가갔다.
누군가 지나가며 하나씩 켠 게 아니었다. 방 안의 등불도 함께 밝아져, 창 유리에 아델의 얼굴이 비쳤다.
복도는 조용했다. 신호를 외치는 사람도 없었다.
아델은 등불 받침 아래를 살폈다. 손댄 곳은 없었다.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어느 창이 먼저 켜졌는지 가릴 수 없었다.
‘이걸 어떻게 맞췄지?’
찬 유리에 손가락을 댔다가 떼고 책상으로 돌아왔다.
서랍을 열자 종이 한 장이 앞쪽에 놓여 있었다. 모서리가 조금 접혀 있었다. 아델은 분필통을 내려놓고 종이를 폈다.
「셋째 밤을 넘기지 마세요」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델은 뒷면까지 확인했다. 이름도, 이유도 적혀 있지 않았다.
문밖을 살피니 아그네스가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아델이 불러 종이를 보여 줬다.
“이 서랍을 전에 쓰던 선생님이 계셨나요?”
“바로 전에 계신 분이 쓰셨어요.”
“일곱째 선생님이요?”
“네. 무슨 일인가요?”
아그네스가 글을 읽고 입술을 다물었다.
“이런 게 있었네요. 제가 방을 정리할 때 못 봤어요.”
아델은 종이를 접었다.
“그분은 셋째 밤에 가셨나요?”
“그 전에 가셨어요.”
“그렇군요.”
아그네스가 앞치마를 쥐었다.
“선생님, 혹시…….”
“저녁 먹으러 내려갈게요. 아이들이 먼저 갔나요?”
“네. 루디가 선생님 자리까지 정하고 있어요.”
아델은 쪽지를 서랍 안쪽에 넣었다. 닫기 전에 한 번 더 내려다봤다.
손끝은 빵을 받았을 때보다 차가웠다.
◇◆◇
밤이 되자 성 안은 조용해졌다.
저녁 식탁에서 루디는 아델이 몇 밤 있을 것인지 다시 물었다. 아델이 낮과 같은 대답을 하자, 이번에는 손가락을 펴지 않았다.
로테는 빵을 작게 떼어 먹다가 공작이 늦는다는 말을 듣고 빈 의자를 봤다.
아델은 그 두 가지를 작은 종이에 적으려다가 분필통만 닫았다. 오늘 만난 아이들을 몇 줄로 정하기에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다.
공부방에 가져갈 석판을 책상 한쪽에 놓았다. 짧아진 분필도 나란히 골랐다.
복도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났다.
하나가 급히 멎었다. 뒤따른 발소리도 멈췄다.
아델은 문을 바라봤다.
얇은 종이가 문 밑으로 들어왔다. 중간에서 걸렸다가, 바깥에서 한 번 더 밀자 방 안으로 미끄러졌다.
아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누구니?”
발소리가 멀어졌다. 빠른 발에 느린 발이 곧 따라붙었다.
아델은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종이를 집었다.
글씨가 큼직했다. 몇 글자는 힘을 너무 줘 종이 뒷면까지 자국이 났다.
「선생님 나가요」
아델은 문 아래의 틈을 봤다가 다시 종이로 눈을 내렸다.
그 밑에 다른 글씨가 있었다. 자리가 모자랐는지 끝으로 갈수록 글자가 작아졌다.
「(안 나가도 돼요)」
(1화 끝)
“선생님, 공작님은 왜 전쟁 책만 읽어요?”로테가 서재 문 옆에 서서 물었다. 아델은 두드리려던 손을 내렸다. 문틈으로 세드릭의 검은 외투와 책상 위에 펼쳐진 두꺼운 책이 보였다.며칠 전 그 창 앞에서 봤던 공책은 보이지 않았다. 아델은 문 안쪽을 더 들여다보지 않고 로테에게 몸을 낮췄다.“왜냐하면—공작님께 필요한 책인가 봐. 다른 책도 읽으시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여쭤볼까?”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책은 안 읽어요.”“읽어 달라고 해 봤어?”“전에.”로테가 양손을 벌렸다. 꽤 두꺼운 책을 나타내는 듯했다.“큰 거 가져왔어요.”안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들어오십시오.”아델이 문을 열자 루디도 뒤에서 뛰어왔다. 계단을 올라오느라 볼이 빨갰다. 손에는 양철 나팔 대신 작은 석판이 들려 있었다.“나도 숙제 다 했어요!”“뛰지 않기로 했지.”루디가 문턱에서 걸음을 줄였다. 남은 두 걸음은 발뒤꿈치부터 천천히 내려놓았다.“이제 안 뛰어요.”“돌아갈 때도 그렇게 하자.”세드릭은 책을 덮고 아이들을 봤다. 로테가 곧장 책상 가까이 갔다. 책등의 글자를 짚던 손가락이 중간에서 멈췄다.“전투.”“그렇다.”“또요.”세드릭이 책을 내려다봤다. 루디는 옆에서 까치발을 들었다.“싸우는 거예요? 몇 명이요?”
“선생님, 왜 책장 뒤에 책이 있어요?”루디가 책장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바닥에 댄 볼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을 틈으로 밀어 넣었다.아델은 젖은 천을 바구니에 내려놓았다.“왜냐하면—떨어졌을 수도 있고, 누가 넣어 두었을 수도 있어. 꺼내 봐야 알겠네. 먼저 손은 빼자.”“거의 닿아요.”“손이 들어간다고 팔도 들어가는 건 아니야.”루디가 팔꿈치를 한 번 더 밀었다. 책장 모서리에 소매가 걸렸다.“팔은 안 들어가요.”“직접 확인했구나. 이제 나와.”아델이 소매를 빼 주자 루디는 바닥에 앉은 채 손을 폈다. 손끝에 회색 먼지가 붙어 있었다.“책도 잡았어요. 조금.”“어디 다친 데는 없어?”루디가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였다. 아델은 손바닥까지 살핀 뒤 천으로 닦아 줬다.깊은눈달 3일의 공부방에는 의자가 모두 가운데로 모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짧은 분필과 종이, 천 조각이 따로 놓였다. 겨울 동안 수업할 방을 정리하자고 했더니 루디가 의자 밑에 먼저 들어갔다.로테는 그 옆에서 종이 모서리를 맞추고 있었다. 아델이 준 작은 수건도 반듯하게 접어 놓았다.“로테, 그 천은 닦으라고 준 건데.”로테가 접힌 천을 내려다봤다.“깨끗해요.”“맞아. 그런데 먼지를 닦으면 더러워질 거야.”“다시 빨아요?”“응. 빨아서 말리면 또 쓸 수 있어.”로테는 잠깐 생각하더니 가장 가까운 의자 다리를 닦았
“선생님, 왜 공작님이 선생님을 불러요?”로테가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보고 있었다. 아델은 세수하고 온 아이의 옷깃을 바로 펴 주다가 손을 멈췄다.「내일 성벽에 오십시오. 해 지기 전에.」밤에 문 밑으로 들어왔던 종이는 어머니께 쓴 편지 옆에 놓여 있었다.“왜냐하면—내가 물어본 것에 답해 주시려는 것 같아.”“편지요?”“응. 직접 들어 봐야 알겠지만.”로테가 종이 끝을 눌렀다.“안 된다고 또 하면요?”“왜 안 되는지 다시 물을 거야.”루디는 의자를 당겨 놓고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종이를 거꾸로 들여다보다가 고개도 함께 기울였다.“성벽에서요?”“그렇게 적혀 있네.”“높은 데서 말하면 더 잘 들려요?”“왜냐하면—높아서 잘 들리는 건 아니야. 가까이 서서 말해야 잘 들리지.”루디가 의자에서 내려와 아델 바로 앞에 섰다.“편지 보내 주세요.”“나는 아주 잘 들었어.”“공작님한테도 이렇게 해요.”로테가 아델의 소매를 잡았다.“선생님은 커.”루디는 아델의 머리까지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그럼 안 올라가도 되잖아요.”아델은 웃음을 삼키며 종이를 접었다.“성벽에서 보여 주실 게 있는 모양이야. 너희도 아래까지 같이 가자. 나는 올라가고, 너희는 아그네스와 기다리는 거야.”로테가 곧장 물었다.“다녀와요?”“응. 아래로 돌아올게.”“해 지면.”“해가 진 뒤에도 돌아와.”로테는 그제야 소매를 놓았다.아델은 종이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어머니께 쓴 편지는 보내지 못한 채였지만, 오늘은 적어도 그 옆에 답을 둘 수 있을 것 같았다.◇◆◇문닫는달 26일의 해는 안뜰 돌바닥을 길게 비췄다.아델은 아이들과 성벽 아래까지 걸었다. 루디는 눈을 치운 길 가장자리만 골라 밟았다. 발자국 하나가 어긋나자 뒤로 돌아가 다시 디뎠다.“이건 안 센 거예요.”“걸은 건 걸은 거지.”“그럼 두 번이에요?”“뒤로 갔다가 앞으로 왔으니 두 걸음 더 걸었네.”루디는 제 발을 내려다봤다.“돌아가면 많아져요.”“그
“선생님, 편지는 겨울에 못 가요?”루디가 아델 앞에 놓인 종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종이 귀퉁이가 책상 밖으로 밀려 나와 있었다.아델은 잉크병을 안쪽으로 옮긴 뒤 종이를 바로 놓았다.“왜냐하면—사람이 가져가야 하는데, 성문이 닫혀 있으니까. 보내는 방법이 있는지는 물어봐야겠어.”“종이는 작잖아요.”루디가 엄지와 검지 사이를 좁혔다.“이만큼 접으면 문 밑으로 가요.”“문 밑으로 나가도 우리 어머니 집까지 혼자 걸어가지는 못하지.”“내가 던지면요?”“네가 던질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멀어.”루디는 창으로 다가가 아래를 봤다. 눈이 치워진 안뜰 너머로 흰까마귀 문이 보였다.“아주 세게.”“그럼 편지를 주우러 안뜰에 내려가야 할걸.”루디가 제 팔을 한번 흔들어 보다가 돌아왔다.문닫는달 25일이었다. 창가에 놓아둔 물그릇이 차가워서 아델은 책상 가운데로 옮겼다. 로테는 맞은편에 앉아 깃펜 끝을 살피고 있었다.“이걸로 써요?”“응. 처음에는 내가 손을 잡아 줄게. 너무 힘주면 끝이 벌어지거든.”루디가 의자를 당겼다.“분필은요?”“분필은 종이에 쓰고 접으면 다른 쪽에 묻어. 편지 받은 사람이 읽기 어려워져.”“안 접으면 돼요.”“그럼 가져가는 사람이 다 읽을 수도 있지.”루디가 종이를 양손으로 가렸다.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였다.“읽으면 안 돼요.”“그럼 다 쓴 뒤에는 접자.”아델은 작은 종이 두 장을 아이들 앞에 놓았다. 제 앞의 종이는 조금 더 컸다. 남부에 있는 어머니께 쓸 편지였다.로테가 아델의 종이를 보고 물었다.“누구한테요?”“우리 어머니.”“선생님 엄마.”“맞아.”루디가 고개를 기울였다.“선생님도 엄마한테 수업해요?”“어릴 때는 어머니가 나한테 가르쳐 주셨지.”“편지도요?”“응. 글씨를 너무 작게 쓰면 읽기 힘들다고 하셨어.”루디가 제 종이를 당겼다.“나는 크게 써요.”“그러다 한 글자로 종이를 다 쓰면?”루디가 잠깐 생각하더니 손을 내밀었다.“큰 종이 주세요.”◇◆◇아델은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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