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성녀 살해와 반역 누명을 쓰고 남편인 황제 카시안의 명령으로 처형당한 황후 엘로이즈. 약혼 발표 일주일 전으로 회귀한 그녀는 이번 생에는 황후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그녀를 죽인 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카시안도 같은 날로 돌아왔다. 서로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엘로이즈는 그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되찾으려 하고 카시안은 이번에는 반드시 그녀를 살리려 한다.
View More흰 처형복의 옷깃이 목에 닿자 엘로이즈는 숨을 멈췄다.
“반지도 내놓으십시오.”
간수가 손을 내밀었다.
엘로이즈는 왼손을 감쌌다. 여덟 해를 끼고 살았던 결혼반지였다. 안쪽에는 작은 밀봉지가 숨겨져 있었다.
“폐하께 전해 주세요.”
“죄인의 물건은 모두 압수됩니다.”
“살려 달라는 내용이 아니에요. 폐하께서 반드시 보셔야 합니다.”
그녀는 반지를 그의 손바닥에 올렸다.
간수의 눈에는 탐욕도 망설임도 없었다. 정해진 명령을 수행할 뿐인 사람처럼 싸늘했다.
그가 반지를 안주머니에 넣는 순간, 옷깃 안으로 은실로 수놓은 태양 문양이 스쳤다.
신전의 성표였다.
엘로이즈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누군가 처음부터 이 반지가 카시안에게 닿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철문이 열렸다.
광장을 메운 군중이 고함쳤다.
“성녀를 죽인 마녀다!”
“배신자 황후를 처형하라!”
날아든 돌이 이마를 스쳤다. 피가 눈썹을 타고 흘렀다.
엘로이즈는 처형대 맞은편 단상을 바라보았다.
검은 예복과 황금 왕관. 얼음처럼 굳은 얼굴.
카시안이었다.
한때는 저 눈이 자신을 향해 따뜻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오늘 그 눈에는 유죄를 확신한 황제의 냉정함뿐이었다.
재판관이 죄목을 낭독했다.
성녀 세라피나 독살.
신전 성물 탈취. 황실 전복 모의.이어 카시안의 친필 서명이 박힌 사형 명령서가 펼쳐졌다.
엘로이즈는 종이가 아니라 그의 오른손을 보았다.
자신의 죽음을 허락한 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재판 내내 자신의 말은 듣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 마지막이라니.
엘로이즈는 결백을 주장하지도,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한 번이라도 제 말보다 폐하의 두려움을 먼저 의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카시안의 손가락이 옥좌 끝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그 침묵이면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번이 제가 폐하를 사랑한 마지막 순간입니다.”
카시안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처형을 멈추지는 않았다.
카시안이 오른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북소리가 세 번 울렸다.
차가운 나무 홈이 목을 짓눌렀다. 칼날이 머리 위에서 번뜩였다.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는 저 남자를 사랑하지 않게 해 주세요.
서걱—!
차가운 것이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시야가 기울더니 세상이 검붉게 뒤집혔다.
“허억!”
엘로이즈는 숨을 들이켜며 몸을 일으켰다.
두 손이 목으로 향했다. 잘려 나간 자리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존재하지 않는 칼날이 목 안쪽을 헤집는 듯 숨을 쉴 때마다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피부는 매끄러웠다.
피도, 상처도 없었다.
단두대 대신 부드러운 이불이 손끝에 구겨졌다. 창문으로 아침 햇빛이 쏟아졌다.
엘로이즈는 비틀거리며 거울 앞으로 갔다.
상처 하나 없는 목.
거울 속에는 스물한 살의 자신이 서 있었다.
그때 침실 문이 열렸다.
“아가씨, 황실에서 약혼 예물과 최종 예복 견본을 보내왔—”
상아색 보석함과 은빛 드레스를 안고 들어오던 루체가 말을 멈췄다.
“아가씨? 안색이 왜 이러세요? 식은땀까지……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살아 있는 루체였다.
왈칵 치솟은 눈물에 엘로이즈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러나 보석함 위 황실 의전서가 눈에 들어왔다.
약혼 발표일.
오늘로부터 일주일 뒤.
자신을 죽인 남자와 약혼하기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엘로이즈는 목에서 손을 내리고 황실 문장이 새겨진 보석함을 닫았다.
이번 생에는, 황후가 되지 않는다.
결혼식은 라비엔에서 열렸다.황궁 대예배당도,대신전의 중앙 성소도 아니었다.에버하르트 성의 작은 예식실이었다.엘로이즈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곳을 골랐다.카시안도 동의했다.그날 아침,집무실 책상 위에는 두 가지가 놓여 있었다.혼인 헌장 최종본.그리고 작은 반지함.엘로이즈는 반지함부터 열었다.비어 있었다.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한때는 아무것도 넣지 않기 위해 남겨 둔 상자.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간직했던 것.오늘도 아직 비어 있었다.엘로이즈는 그대로 뚜껑을 닫았다.예식실에 들어가자 카시안이 기다리고 있었다.제복은 입지 않았다.황실을 상징하는 망토도 없었다.그에게 왕관은 없었다.필요하지도 않았다.카시안이 그녀를 보고 웃었다.“왔어.”엘로이즈도 그의 앞에 섰다.“네.”하객석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에버하르트 전 공작.세라피나.북부에서 다시 수도와 라비엔을 오가게 된 로웬.새 아스트라 운영위원들.베아트리체도 가장 뒤쪽에 앉아 있었다.초대장은 카시안이 직접 보냈다.국정에 의결권은 없었고,카시안의 삶에도 더 이상 답을 정할 권리는 없었다.대사제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그에 대한 교리 심판과 법적 책임 심사는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모르텐의 재판도 마찬가지였다.모든 일이 오늘을 위해 완벽하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그래도 오늘 결혼할 수는 있었다
겨울이 끝날 무렵,아스트라 장기운영 보고서가 라비엔에 도착했다.엘로이즈는 첫 장만 오래 읽었다.넉 달.지역별 철수는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했다.안전 상한을 넘긴 사람은 없었다.북부는 자체 유지량을 먼저 확보한 뒤 남은 출력만 보냈고,두 차례의 지역 이탈에도 다른 지점으로 부담이 자동 전가되지 않았다.문제도 있었다.폭설 때 연락이 늦어진 지역이 있었고,교대 인력이 부족한 지점도 있었다.완성된 체계는 아니었다.그래도 사람 하나를 의자에 묶지 않고 겨울을 넘겼다.엘로이즈는 마지막 장에 적었다.〈차기 운영안에 교대 인력 확충 및 지역 감사 보완 필요.〉그리고 보고서를 덮었다.오늘 그녀가 처리할 문서는 따로 있었다.정오가 되자 에버하르트 성의 대회의실 문이 열렸다.라비엔의 관리들.가신들.각 마을의 대표들이 자리를 채웠다.카시안도 뒤쪽에 앉아 있었다.중앙 비상조정관도,전 황태자도 아니었다.초청 명단에는 단순히 적혀 있었다.〈카시안 발렌티스 — 승계자의 개인 초청객.〉에버하르트 공작이 중앙으로 나왔다.그의 앞에는 세 가지가 놓여 있었다.가문의 인장.영지 장부.공작위 승계문.“엘로이즈 에버하르트.”“네.”그녀가 앞으로 걸어갔다.아버지가 물었다.“이 땅과 이 이름에 따르는 권리와 책임을 받겠느냐.”전생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황후가 되기 전이었다.그때 그
혼인 헌장 초안은 사흘 동안 네 번 바뀌었다.카시안이 먼저 추가한 조항이 있었다.〈배우자의 공적 지위는 혼인을 이유로 승계·확대되지 않는다.〉엘로이즈가 읽고 물었다.“전하를 위한 조항입니까?”“둘 다를 위한 거야.”카시안이 말했다.“네가 공작이 된다고 내가 라비엔에서 권리를 얻는 것도 아니고.”그는 다음 줄을 짚었다.“내가 공직을 맡는다고 네가 그 책임까지 같이 져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엘로이즈는 그대로 두었다.그녀가 추가한 것은 다른 조항이었다.〈공적 이해관계가 충돌할 경우 각자는 독립된 당사자로 판단하며, 혼인 관계를 협상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다.〉카시안이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것도 좋아.”“반대할 줄 알았습니다.”“왜?”“부부가 공개적으로 다른 편에 설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요.”카시안은 잠시 생각했다.“그럴 수도 있지.”“전하와 제가 서로 반대되는 정책을 지지해도요?”“응.”“제가 전하의 안건을 막아도?”“그럼 설득해야겠지.”그가 말했다.“남편이라서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잖아.”엘로이즈는 마지막 수정 표시를 지웠다.그날 오후,법무관이 형식 검토를 마친 초안을 돌려줬다.황실 혼인법과 충돌하는 조항 없음.에버하르트의
책임 심의가 끝난 다음 날,엘로이즈는 라비엔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수도에서 더 처리해야 할 일은 많지 않았다.아스트라 장기운영 규정은 시행 단계에 들어갔고,카시안의 중앙 비상조정관 임기도 시작됐다.세라피나의 교리 심의는 대신전 내부 절차로 넘어갔다.남은 것은 각자가 맡을 일이었다.엘로이즈에게도 있었다.에버하르트 공작이 보내온 문서였다.〈라비엔 공작위 승계 절차 개시 요청.〉엘로이즈는 마지막 장에 서명했다.이제 공식적인 후계 절차를 시작할 수 있었다.그날 오후,카시안이 찾아왔다.“바빠?”“지금은 아닙니다.”그는 맞은편에 앉았지만,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엘로이즈가 먼저 물었다.“무슨 일입니까?”“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그 말에 엘로이즈는 펜을 내려놓았다.“물어보세요.”카시안은 천천히 말했다.“언젠가 나랑 결혼하고 싶어?”엘로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놀라서가 아니었다.언젠가는 나올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다만 그 질문을 들은 순간,전생의 결혼이 먼저 떠올랐다.황후가 되기 위한 교육.황실로 옮겨진 재산 관리권.공식 행사에서 먼저 불리던 남편의 이름.에버하르트보다 발렌티스가 앞섰던 모든 순간.카시안이 덧붙였다.“지금 하자는 뜻은 아니야.”엘로이즈가 그를 봤다.“알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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